[올가바네올가] 오답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감정을 구분하는 선을 그었다. 바이올린은 그만두기로 했다. 올가와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했다. 모든 게 정해진 대로 따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해지겠지.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해둔 대로 따라가는 일은 없었다. 마음은 그어둔 선을 넘지 않았다. 대신 기억이 선 근처를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불을 끄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머릿속에서 자그마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스크린 너머로 빛이 쏘아졌다. 바네사만 볼 수 있는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상영회라지만. 나열에 불과했다. 아침에 인사를 건네던 다정한 앞모습. 수업을 들을 때 봤던 뒷모습. 주변에 꽃이 피었다고 착각할 정도로 눈부신 옆모습. 눈에 담아놨던 모습을 복습하는 거뿐이었다.
영화를 볼 때 입체 안경을 쓰는 거처럼. 바네사는 셀로판지로 만든 안경을 끼고 봐야만 했다. 감정이 투과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기억은 바네사 마음도 몰라주고 매일 상영회를 열었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면서. 바네사와 타협하듯이 속삭이는 건 덤이었다.
덕분에 잠을 설치게 되었다.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행복은 느끼기 어려울 만큼 소소하게 찾아오면서. 부정적인 감정은 해일처럼 몰아쳤다. 게시판에 새로 걸린 게시물을 봤다. 관현악단 신입 단원 모집. 고개를 돌렸다. 지나치고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갈 때마다 속이 넘실대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럽게 넘실대는 감정이 어지러웠다. 교실 문을 열었다. 넘실거리던 감정은 또 다른 감정으로 짓눌러졌다.
올가와 인사했다. 바네사와 마주한 올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었다.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를 바라볼 때마다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가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꽉 닫혀있던 지퍼를 잡았다. 닫을 때와 똑같은 소리를 내며 가방이 열렸다. 무엇 하나 바네사를 가만두지 않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로 결정한 게 맞냐고 물어보는 거 같았다. 한 두 번은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끊임없이 물어오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자꾸 의식해서 그런 거야. 올가도. 바이올린도. 다른 데에 집중해서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나마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게 공부였기에. 책을, 공책을, 문제지를 펼쳤다. 마음에 남아있는 거에 비해. 문제는 너무 쉬웠다. 함정을 파둬서 헷갈리는 게 있어도. 답이 없는 문제는 없었다.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이게 맞냐고 다시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반 애들도 바네사에게 종종 문제를 물어봤다. 답을 알려줄 수 있었다. 문제를 푸는 거로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해소했다.
선생님이 무언가를 나눠줬다. 야간 자율학습 신청서였다. 보충수업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강요하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신청하라고 했다. 제출하는 신청서를 모으는 거도. 어김없이 바네사의 몫이었다. 바네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신청서를 받자마자 희망란에 동그라미를 쳤다. 보충 수업 때와 달랐다. 오히려 바네사가 먼저 부모님에게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동그라미가 쳐진 신청서를 보여줬다.
미리 결정하고 통보하듯이 말하는 건. 바이올린을 배우겠다고 말했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부모님은 바네사의 모습에 놀라는 눈치였다. 그래도 별말 없이 서명란에 서명해줬다. 바이올린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바네사를 보고 알아차린 거 같았다. 문제를 푸는 거와 같이 명확해졌다. 여름에 배웠던 교훈을 떠올렸다. 그래. 하나씩 풀어 가면 어려운 거도 없었다.
애들이 제출한 신청서가 차곡차곡 쌓였다. 생각보다 많이 신청했다. 다들 학업에 신경 쓸 시기이긴 했다. 만약에. 올가도 신청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문득 들어버린 의미 없는 생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만약. 올가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너무 세세하게 파고들어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이 있었다.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바네사가 놓친 점이 있었다. 오늘 아침에 얘기를 나눌 때 흘리듯이 물어봤다면. 앞에 앉아 있는 올가를 불러서 물어봤다면. 지금처럼 생각에 빠질 일도 없었다. 바네사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각에 빠진 바네사는 그림자를 신경 쓰지 못했다.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가가 어느새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신청서를 건네줬다. 불참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올가에게는 동그라미지만. 바네사에겐 엑스 표가 적힌 거나 다름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종이를 본 모양이었다. 바네사에게 한 마디를 얹었다.
"너는 신청하는구나."
"응.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떨어진 말꼬리를 줍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겠네. 혼잣말은 네 글자가 전부였다. 올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려보면. 끝맺음이 확실한 대화는 별로 없었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궁금한 걸 바로바로 물어봤다. 그 이상은 물어보지 않았다. 바네사가 대답해주면 그대로 납득해줬다. 지금이 여름이었다면. 올가에게 더 말해줘도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만. 지금은 가을이었다. 가을은 달랐다. 거칠게 그어둔 선이 신발 끝에 닿았다. 닿았을 뿐인데도 거칠거칠한 촉감이 느껴졌다. 바네사는 선을 넘지 못했다.
선뜻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 시간도 엇갈릴 테니 아침 빼고는 볼 일이 별로 없겠지. 올가는 쉬는 시간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다. 도서부다 보니 도서관에 가야 했다. 점심시간에도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바네사와 겹치는 시간은 아침과 수업뿐이었다.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다 끝나는 사이. 같은 반 친구.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정해둔 거리와 다를 바 없었다. 만족해야 하는데.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여름과 달라진 게 많아져서 그런 걸까. 마음이 반동 때문에 휘청거렸다. 휘청이다가 넘어져 버린 걸까. 모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거 같이. 가슴팍이 쿡쿡 아파져 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믿었다. 믿고 싶었다. 자습을 시작하는 날이 다가왔다. 수업이 끝나자 애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아 있을 애들은 남아있고, 돌아가는 애들은 떠나갔다. 올가는 가방을 챙겼다. 뒤에 있는 바네사와 눈이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외면할 수 없어서. 손을 흔들고 말았다. 올가도 바네사를 외면하지 않았다.
내일 보자. 바네사에게 건네는 인사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교실을 나가는 뒷모습에. 아주 조금. 조금은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후회를 잡고 있는 샤프에 담았지만. 남겨진 건 부러진 샤프심과 문제지에 남은 점이었다.
바네사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애들이 다가와서 문제를 물어봤다. 지우개로 부러진 샤프심이 남긴 점을 지웠다. 깔끔하게 지워지지 않아 흔적이 남았다. 새로운 샤프심으로 다른 문제지에 있는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부지런히 학교에 모이고, 흩어지는 걸 반복했다. 도서부도 새 학기를 맞아서 일이 바빠진 모양이었다. 올가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봐도 올가가 보이지 않았다. 올가에게 바쁘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도서관에 가보지도 못했다. 수업 시간이나 헤어질 때 보여주는 뒷모습만 바라보게 되었다.
야간 자습을 끝내고 학교를 나와보면 남색 빛이 가라앉았다. 어두워진 길을 가로등이 밝히고 있었다. 밤이라서 그런 걸까. 혼자 걷는 길이 낯설어졌다. 텅 빈 길을 혼자 걸었다. 서늘한 공기를 들이 마셔봤지만. 시원하지 않았다. 은은한 밤의 풍경은 바네사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다시 익숙해지겠지. 애써 위로하며 혼자 밤을 헤쳐 나갔다.
낯선 느낌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면 강등당하는 게 아닐까. 저도 모르게 공책에 관계를 수식하는 단어를 적었다. 같은 반 친구. 그냥 같은 반 애. 이름만 아는 동네 사람. 단계적으로 내려갈 판이었다. 친구. 사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단어가 없었다. 차라리 문제로 내줬으면 좋겠다. 꿈에서 봤던 시험지처럼. 보기라도 줬으면 좋겠다. 또다시 단어 주변에 원을 그었다. 그날은 자습 시간에 문제집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교문 쪽으로 갔다. 노을 끝자락이 발에 걸렸다. 가을이 되니까 여름보다 해가 짧아진 게 느껴졌다. 밤이 또 저 멀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퍼져나가고 있는 구름 사이로 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몸이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익숙한 걸음걸이가 나타났다. 잘못 본 거 같아서 손으로 눈을 비벼봤다. 더 또렷해진 시야에서 익숙한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올가였다. 교복을 입지 않았지만, 분명히 올가였다.
쐐기를 박듯이 올가가 바네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을 흔들었으니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이대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제자리에 서서 올가에게 손을 흔들었다. 더 빠른 발걸음으로 바네사에게 다가왔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힘이 들었을까. 이마 끝을 훔치는 손등에 땀이 살짝 묻었다. 가까이 오니 올가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올가는 운동복을 입고 있었다. 연두색 선이 섞인 검은색 운동복이 올가에게 잘 어울렸다.
올가에게 무언가 두고 왔냐고 물어봤다. 고개를 저었다. 매일 운동 삼아 마을을 한 바퀴를 돈다고 했다. 지나가던 도중에 바네사가 보여서 말을 걸었다고 했다. 매일 나오는데 왜 마주치지 못했을까. 물어봐도 괜찮은 질문이었는데. 친구 사이에서 물어볼 수 있는 질문마저 삼켜냈다. 올가가 먼저 바네사에게 물어봤다. 자습이 끝났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헤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운동하던 도중에 마주친 거니까. 바네사도 올가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올가의 발이 바네사에게 향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으로 올가의 말이 튀어나왔다. 여름에 바네사가 올가에게 했던 거처럼. 올가가 바네사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같이 돌아갈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절하면 이상해 보일 게 분명해서. 어쩔 수 없이 올가와 돌아가게 되었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었다. 그림자가 가장 짧은 시간에만 같이 걸었는데. 오늘은 길어진 그림자를 이끌고 같이 걸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일부러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생각하지 않으면 될 것을. 괜히 더 신경 쓰는 바람에 의식하고 말았다. 의식해버리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집중을 흐트러뜨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초점이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돌아온 초점은 저절로 올가에게 맞춰졌다. 풍경이 흐려졌다. 올가가 선명해졌다. 하나도 바뀐 게 없는데. 올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밤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무 데나 좋으니. 지금을 어디에 담아두고 싶었다. 어디에 담아둬야 할까. 시간에 담아둬야 할까. 아니다. 밤은 너무 길다. 걷고 있는 거리에 담아둬야 할까. 안된다. 지나갈 때마다 올가가 떠오르겠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담아버리고 말았다.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눈에. 지나치게 선명한 목소리를 듣는 귀에. 작게 두근거리고 있는 마음에. 올가는 짙은 눈동자로 무언가를 말해왔다. 입 모양을 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또 앞이 잘린 질문을 들었다.
"괜찮아?"
"…어? 아, 괜찮아. 늦게 돌아간다고 더 늦게 자는 건 아니니까."
"그거도 있지만. 요즘 힘들어 보여서."
예전이라면 멍해져서 정적이 남았을 텐데. 바네사는 올가에게 바로 괜찮다고 말했다. 바네사 대답을 듣고 안심하는 걸까. 걱정이 실린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괜찮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주지 못했다. 지금 너에 대한 문제가 담긴 시험지를 풀 게 된다면. 시험지에 비가 내리다 못해 홍수가 나겠지. 모르는 사람이 풀어도 맞을 정도로. 정말 쉬운 문제가 있다 해도. 바네사는 맞추지 못할 것이다. 시험지에 동그라미가 그려질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의도에 완전히 벗어난 해석만 하고 있었다. 의도에 벗어나면. 다른 해석이 아니었다. 틀린 해석이었다. 손끝에 밤공기가 걸렸다. 슬프지 않았다. 한기가 닿아오지만, 올가를 잡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미안했다. 다정함을 다정함으로 받아주지 못했다. 계속 다른 단어로 바꾸려고 했다. 올가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 아닌 걸 알면서. 자꾸 틀린 해석을 반복했다.
가로등이 없는 거리로 들어섰다. 따스한 주황빛 대신 차가운 달빛이 비쳤다. 올가가 입고 있는 운동복에 있는 연두색 선이 짙어졌다. 누가 생각해도 운동이 끝나는 김에 바네사와 같이 돌아가는 거였다. 그런데도. 바네사는 무심코 시험지에 자신이 생각한 답을 적었다. 적어둔 답을 마음속에서 보자마자.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올가는 뒤늦게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 그림자에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바네사가 짓던 표정이 밤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며 다시 올가에게 다가갔다. 평소에 짓던 표정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방에 들어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 위에서 두 손을 배에 모은 채 천장을 바라보자. 어김없이 상영회가 시작되고 말았다. 천장을 스크린 삼아 올가가 떠올랐다. 담아뒀던 모습이 하나둘씩 꺼내지고 있었다. 두근거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지. 여름과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대답 대신 올가가 또 떠오르고 말았다. 간지럽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간질거리긴커녕 괴로웠다. 올가를 다시 떠올리자. 바네사가 적어놨던 답도 떠오르고 말았다.
그때 올가는 바네사가 걱정되어서. 운동도 미루고 같이 돌아간 게 아닐까. 그게 바네사가 적은 답이었다. 틀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렸어. 최악이었다. 그어둔 선조차 넘어버린 답이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기 전에는. 막연히 좋아하기만 했다. 깨닫고 나서 선을 긋게 되자. 좋아하던 걸 좋아할 수 없었다. 자꾸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넘을 듯 말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팔로 눈을 가렸다. 가리는 거로는 괴로운 마음을 지우기 부족했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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