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어느 날의 연회

평화로운 어느 날

오늘은 로드가 주최하는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동맹국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아발론에서 기사들끼리 즐기는 연회였다. 딱히 기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단 이유로 연회를 벌이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로드 뒤에서 루인이 예산 때문에 골치아파 했지만.

바네사는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파란색 실크 드레스가 결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갔다. 오랜만에 입는 드레스였다. 손으로 드레스 끝자락을 쥐어봤다. 부드러운 옷결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던 도중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올가가 서 있었다. 올가는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고, 완벽하게 갖춰 입은 연미복이었다.

연회가 처음인 건 아니었다. 왕국에서 지내며 여러번 참석했고, 동맹국들이 참석한 연회에도 갔으니까. 문제는 연회에 같이 갈 파트너였다. 처음 연회가 열렸을 때 아발론에 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올가가 떠오르게 되었다. 파견을 같이 가면서 대화도 많이 하고 교류가 있었으니까. 그나마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하다가 같이 파견을 가게 되었을 때 말을 꺼냈다.

올가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조심스레 부탁했다. 올가는 부탁을 듣자 고민하는듯이 턱에 손을 댔다.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더니 바네사의 부탁을 받아줬다. 그날 이후로 연회가 있으면 올가는 늘 바네사의 파트너가 되어줬다. 이번 연회도 마찬가지였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손을 건넸다. 바네사는 손을 얹으며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네. 맡겨주십시오."

올가가 에스코트를 처음 하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올가는 연회를 임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엄호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부탁에 고민한 거도 이런 이유였다. 연회장에서 바네사를 어떻게 엄호할지 고민하고 있던 거였다. 오랜 시간 군인으로 지내다보니, 사교를 위해 열리는 연회와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결국 바네사가 몇 시간을 걸쳐서 오해를 풀어야했다. 그러고나서 올가에게 책을 추천해줬다. 연회에 관한 정보가 담긴 책이었다. 올가라면 책을 정독하다 못해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있지 않을까.

올가와 함께 계단을 내려와 연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씩 연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깜깜해지지 않은 저녁 하늘은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여 있었다. 경계에 있는 보라빛 덕분에 한층 더 분위기가 살았다. 야외에 마련된 연회장에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다들 한껏 분위기를 낸 옷을 입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유리 잔과 여러가지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나무들 사이에 무언가 휘감겨 있었다. 지나가는 말로 고대에 쓰던 조명이라고 들은 거 같았다. 밤에 섞인 조명은 꾸덕하게 풀어놓은 물감 같았다. 로드가 만든 작품이었다. 며칠 내내 장식을 고심하던 로드를 본 적이 있었다. 때로는 지나가고 있던 기사들에게 물어보며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다 프라우를 부르게 되었고, 결과가 지금 보이는 연회장이었다. 로드는 자신이 꾸민 연회장을 보며 흡족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로드 뒤에 있는 루인이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루인이 그러거나 말거나 로드는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고대에 쓰던 물건을 공수하면서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었을까. 조명 말고도 연회에 들어간 예산이 어마무시 할텐데. 다들 애써 루인을 모르는 척 하거나, 몰래 등을 토닥여주고 지나갔다. 바네사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루인의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해줬다.

격식을 갖춘 연회는 아니었다. 로드도 이번 연회에는 우리만 있으니, 우리끼리 자유롭게 즐기라고 말할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손에 잔을 든 채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술을 많이 마셔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바네사와 올가에게 샴페인을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올가는 권해준 한 잔만 마셨다. 딱 한 잔만 마시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한 모금을 마시자 상큼하고 알싸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바네사도 올가처럼 한 잔만 마시려고 했다. 드레스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니 한 잔이 두 잔이 되었다. 건배를 하면서 잔을 채우고 부딪히느라 세 잔이 되었다. 몇 잔을 마셨는지 세다가 까먹어버렸다. 즐거워서 들뜬 바람에 취기가 더 빠르게 올라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게 느껴질 정도였다. 취기와 열 때문에 나른해졌다. 바네사 옆에 잔이 건네졌다. 또 누군가 샴페인을 권하는 거라 생각했다. 이제 정말 한계니 사양하려고 했다. 고개를 들자 올가가 보였다. 물이 담긴 잔을 들고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며 물어봤다.

"괜찮으십니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올가 눈에는 괜찮아 보이지 않았나보다. 바람을 쐬러 가는게 좋겠다고 말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올가를 따라서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바네사에게 말을 걸기도 전에 올가가 신속하고 단호하게 차단했다. 걸으면서 점점 정신이 들긴 했지만 아직도 나른했다.

갑자기 뒤쪽이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술에 취한걸까. 아니면 분위기에 취한걸까. 기사들이 술잔을 들고 작은 호수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풍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웃음 소리가 들렸다. 몇 명은 억지로 끌려간건지 성을 내는 목소리도 들렸다. 진짜로 화난 건 아닌지 유쾌한 목소리였다.

소리만 들어도 즐거워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활기차고 즐거운 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정원이 있는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길로 나왔을 뿐인데 서늘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여름이 다가오지만 아직 밤은 서늘했다. 바람은 술기운 때문에 달아오른 뺨을 식혀줬다. 열기와 나른함을 한 번에 날려줬다. 찬 바람을 맞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올가는 묵묵히 입고 있던 자켓을 벗었다. 그러더니 벗은 자켓을 바네사에게 건네줬다. 드레스를 입은 바네사를 위한 배려였다.

올가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자켓을 입었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누그러졌다. 단정한 셔츠가 청아한 달빛을 듬뿍 받았다. 검고 푸른 실루엣이 올가를 드러내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길을 걷는 내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바닥에 굽이 부딪히면서 나는 마찰음만 날 뿐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지만 틈이 있었다. 계속 두 발자국 정도의 틈을 유지한 채 걸어갔다. 두 사람의 틈이 좁혀지질 않았다. 틈을 좁혀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정도 거리여도 고개만 돌리면 얼굴을 볼 수 있고, 나란히 걷는 걸 볼 수 있었다.

바네사는 그런 거리를 만족했다. 조금 더 걸어보니 정원이 보였다. 달빛이 가득한 정원이었다. 보라빛 하늘과 달빛을 조명 삼아 잔디와 꽃들이 빛나고 있었다. 꽃잎 색을 마음 가는대로 칠한듯이 정렬되어 있지 않았다. 드문드문 다른 색의 꽃이 섞여 있었다. 로드와 기사들을 생각해보면 아발론에 잘 어울리는 정원이었다. 평소라면 벤치에 앉아 햇빛을 쬐거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거나, 정원을 구경하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매번 활기가 넘치던 정원이었다.

다들 연회를 즐기고 있는지 정원에 사람이 없었다. 오늘만은 두 사람만 아는 비밀 정원이 된 느낌이었다. 바네사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서 두 손가락에 걸었다. 맨발로 잔디를 밟았다. 부드럽게 밟히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어릴 때부터 자리잡힌 버릇이었다. 시작은 어디었을까. 어릴 때 왕궁을 돌아다니다 정원사를 본 적이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정원사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고 있었다. 정원에 시든 잔디를 뽑아내고, 새로운 잔디를 심었다. 두꺼운 삽으로 땅을 파서 꽃을 심었다.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정원사들이 심은 잔디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정원사들에게 시원한 물을 가져다줬다. 아마 그쯤이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신발을 신는 걸 잊어버렸다. 신발을 손에 든 채 맨발로 걸어와 카펫을 흙투성이로 만들고 말았다. 그날은 부모님에게 왕녀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엄하게 혼났다. 혼나고 돌아온 바네사를 모두가 달래줬다. 그리운 추억이었다.

바네사에게 긴 옛날 얘기를 듣고 올가가 건네준 말은 한 마디였다. 그랬군요. 너무 간단한 말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길든 짧든 한 마디로 받아줬다. 다른 사람들이면 서운할 법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올가는 달랐다. 간단하게 반응해주지만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거 같았다. 올가는 이미 한 손에 자신의 구두를 들고 있었다. 바네사를 따라 맨발로 같이 걸어주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제멋대로 해석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정해줬다. 바라보기만해도 기분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길을 벗어나 잔디 밭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을 따라서 꽃 향기가 피어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원은 평화롭고, 향기롭고, 조용했다. 이따금 올가를 바라봤지만 올가는 앞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바이올린 음색이 흘렀다. 연주회를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바네사도 이번 연주회에 참여하려고 했다. 로드가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이번만큼은 바네사도 참석인으로 즐기라고 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퍼뜩 든 생각이 있었다. 그러면 연주자들도 다 고용한 거 아닐까. 루인이 손으로 이마를 짚은 이유가 조명뿐만은 아니었다.

웃음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어도 행복으로 가득찬 웃음이었다. 이런 웃음 소리를 들은 게 얼마만일까. 시간을 더듬어 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바로 다른 발걸음 소리도 멈췄다. 옛날 생각이 나서. 술 기운이 조금 남아서.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평화롭네요. 앞으로도 이랬으면."

말꼬리가 잔디밭에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갔다. 예산을 병력을 늘리거나 전쟁에 쓰는 게 아니라, 즐기는 데 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람들과 샴페인을 마시고 얘기하며,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즐거운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평화롭고 즐거운 아발론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바네사도 같이 즐기다가도 문득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굳이 평화로운 게 이어지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는다. 평화로움을 굳이 자각하지 않았다. 생각없이 계속 즐길 뿐이었다. 바네사는 자꾸 앞을 내다보게 된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뭉쳐서 굴러가던 말꼬리가 올가의 발끝에 걸렸다.

"앞으로도 평화로울 겁니다."

말꼬리를 주워담았다. 확신에 가득찬 말을 건넸다. 예고도 없이 떠나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으면서. 확신이 가지는 무게가 얼만큼 무거운지 알면서. 기꺼이 무게를 짊어졌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바네사에게 다정하게 말해줬다. 마음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게 느껴졌다.

바이올린에 이어서 피아노 선율이 들려왔다. 익숙한 곡이여서 저도 모르게 어떤 곡인지 생각했다. 연회에서 만찬을 마치고 춤을 출 때 자주 쓰는 곡이었다.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곡을 편곡해서 피아노로 연주하고 있었다.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쯤 춤을 추고 있을까. 춤을 추더라도 박자에 맞춰서 추는 춤은 아니겠지.

연회장이 저절로 상상이 되어서 즐거웠다. 상상을 펼치던 도중 사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돌아보니 올가가 몸을 숙이고 있었다. 올가의 구두가 잔디밭에 놓여졌다. 무언가 하려는 걸까. 바네사도 올가를 따라서 구두를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올가가 천천히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두 발자국 거리였던 사이가 반 발자국이나 좁혀졌다. 손만 뻗으면 닿을만큼 좁아진 틈이었다.

올가는 바네사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올가의 손이 바네사의 손을 조심스레 받쳤다. 달빛이 바네사의 손에 드리워졌다. 다음에 할 행동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올가는 바네사의 예상대로 따라줬다. 정직하다 못해 너무 올곧아서. 예상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려웠다. 바네사의 손등에 살짝 입 맞췄다. 지금을 즐겨 달라는 입맞춤이었다. 손을 잡은 채 정중하게 요청했다.

"바네사 경, 제게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고개를 내려 눈동자와 마주했다. 눈동자는 오롯이 바네사를 향했다. 올가에게 지금은 임무가 아니었다. 배워서 실천하는 게 아니었다. 꽉 잡지 않아 벌어진 틈새에서 꽃이 피어났다.

"물론이죠. 올가 경."

틈이 좁혀지면서 꽃이 눌리자 향기가 되어 퍼져갔다. 향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주한 눈동자 때문일까. 바네사는 미소를 지었다. 온기가 밀려와 또 다른 꽃을 피워냈다. 오직 둘만의 비밀 정원에 피어난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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