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디딤돌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여름 방학이 왔다. 도서부 일 때문에 방학 내내 도서관에 가야 했다. 당번을 정할 때 미리 짜기라도 했나. 모두 오전 시간을 피했다. 보충 수업이니, 학원이니. 핑계는 많았지만, 일찍 일어나는 게 싫은 거 같았다. 덕분에 올가는 오전 시간을 독차지 할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은 이러면 피곤하지 않겠냐고 예의상 물어봤지만. 올가는 고개를 저었다. 오전이 더 좋다는 말에 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상관없었다.

오전 시간에 와야 보충 수업과 시간이 맞았다. 수업을 끝마친 바네사와 만나서 같이 돌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조금 남긴 했지만. 복도에서 기다리다 보면 금방이었다. 수업이 끝나는 걸 알리는 종이 울리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바네사만 남게 되었다.

모두 다 사라지고 바네사만 남겨진 순간. 올가는 그 순간이 좋았다. 바네사가 손을 흔들어줬다. 올가도 바네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그때만큼은 창문이 닫혀 있어도 바람이 불었다.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기분 좋은 여름 방학이었다.

방학 숙제에 감상문이 있었다. 읽었던 책이라 어려운 건 없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꺼내서 다시 읽었다. 하루 만에 다시 읽고, 감상문을 다 쓰게 되었다. 책을 덮기 전에 밑줄 쳐둔 문장이 있는 장을 펼쳐봤다. 우연은 필연을 끌어안는다.

여유로웠던 올가와 다르게. 애들은 필사적이었다. 감상문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 도서관에도 있는 책이었다. 책을 빌리려는 경쟁은 치열했다. 올가와 같은 학년인 애들이 도서관에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다. 다들 같은 책을 찾다가 돌아가는 게 다반사였다. 돌아가는 애들을 보다가 바네사가 떠올랐다. 수많은 애가 찾아왔지만. 바네사가 도서관에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났다. 감상문을 다 썼는지. 한 명이 한 권을 반납했다. 바네사에게 말해줄지 고민했다. 도서관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건. 이미 다 썼다는 의미가 아닐까. 망설이는 도중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바네사 때문이 아니었다. 남아있던 한 권을 누군가가 빌려갔다. 기간 연장까지 해버렸다. 지금 건네준 책이 방학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바네사에게 말해주지 못했다. 그날 꽂아놨던 책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가방 안에 넣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방학에 도서관은 한산했다. 감상문 책을 찾는 일은 많았지만 없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라. 번거로운 일은 아니었다. 푹 찌는 여름 더위를 피하려고 오는 애들이 대부분이어서 얌전히 책을 읽고 갔다. 도서부 애들도 넋 놓는 일이 많았다.

잠깐 물을 마시고 돌아와 보니. 익숙한 모습이 보여 시선이 저절로 고정되었다. 도서관에 바네사가 있었다. 맨 위쪽을 바라보며 눈으로 책장을 살피고 있었다. 올가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바네사에게 무슨 말을 건넬지 미리 생각하는 버릇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다가가면서 화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서 있는 책장을 보니 무슨 책을 찾는지 알 거 같았다. 감상문 책을 찾나 보다. 말해줘야겠다. 화제를 찾았다. 말을 걸 수 있는 화제를 생각보다 빨리 찾았다. 발걸음이 살짝 빨라졌다. 바네사 뒤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올가가 말을 걸면 바네사는 움찔거리며 놀랐다. 바네사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도서부 애들도 가끔 옆을 돌아보다가 가슴팍을 쥐어 잡았다. 가끔 놀라다가 무릎을 책상에 받아버려서. 아픈 무릎을 쥐어 잡기도 했다. 소리 좀 내고 다녀라. 너 때문에 수명이 절반은 준 거 같다. 영문 모르는 올가에게 핀잔을 줬다. 너무 소리 없이 다녀도 문제인가보다.

쓰러진 책을 세우면서 말을 이었다. 도서관이라 시끄럽게 얘기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얘기해도 이상한 정적이 감돌았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올가는 말을 멈췄다.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새 눈이 파악하고 있었다.

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바네사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겠지. 잠자코 옆모습을 바라봤다. 바네사는 책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이 없었다. 바네사의 옆모습은 항상 느렸다. 항상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먼 세계에서 잠깐 들른 사람 같을 때가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통과할 수 없는 투명한 유리 벽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 같았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걸까. 바네사 눈에만 보이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가끔은 눈에 담고 있는 모습이 궁금했다. 때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친해지고 나서 바네사가 자신에게 많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보여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모두 보여준 거 같지만, 실상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느낌이라서. 알고 있던 면과 다른 면을 보게 되어서. 그런 느낌이 낯설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걸지도.

세상으로 끌어오는 건 올가의 역할이었다. 방해꾼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올가는 바네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손은 저절로 바네사를 향했다. 올가가 끼어들면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제야 올가를 바라봐줬다. 눈동자에 올가가 담겼다. 마주친 눈동자는 부드러웠다.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워서. 평소에 하지도 않았던 짓을 해버렸다.

 

"괜찮으면 내 책이라도 빌려줄까?"

 

집에 돌아와서 책장을 바라봤다. 당분간 채워지지 않을 빈 곳이 생겼다. 빈 곳을 손가락으로 대어봤다. 바네사에게 책을 빌려줬다. 올가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책장에 비어있는 곳이 보이면 책을 빌려 간 사람이 떠올랐다.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원인을 차단한 거나 다름없었다. 나름대로 정해둔 원칙이었다.

정해둔 원칙은 어떻게든 어그러지기 마련이었다. 바네사를 보게 되었다. 딱 봐도 곤란해 보였다. 책을 빌려주는 거로 바네사를 도와줄 수 있다면. 빌려주고 싶었다.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 어찌 되었든 일방적인 호의기에. 바네사에게 부담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괜찮다는 말에 쓸데없는 말을 덕지덕지 덧붙여서 건네줬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순간에 마음이 바뀔까 봐. 바로 가방이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을 가방에 넣어둔 보람이 있었다.

며칠 내내 가방에 잠들어있던 책을 꺼냈다. 책을 받고 나서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올가에게 학생증을 맡겼다. 애들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필요한 거다 보니. 올가 입장에서는 자주 보던 물건이었다. 올가는 바네사가 건네 준 학생증을 받아들었다.

바네사의 학생증은 다른 애들과 다를 바 없었다. 증명사진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도치 않게 학생증에 있는 바네사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으로 보니 느낌이 달랐다. 색다르긴 했지만. 역시 사진보다 실물이 더 좋았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잃어버리지 않게 지갑에 넣어 놨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일기장을 펼치고 날짜를 쓰고 나서야. 책을 빌려준 지 일주일이 지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려줘야 할까. 도서부에서 일하다 보니. 애들에게 대출한 책이 연체되었다고 알려준 적이 많았다. 어떤 점에서 무서움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올가에게 책을 주면서 바들바들 떨던 애들도 많았다.

그런 모습을 바네사와 겹쳐봤다. 저절로 고개를 저었다. 학생증까지 맡겼으니 돌려주겠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믿기로 했다. 등교하다가 덥다면서 뺨이 살짝 붉어졌던 모습이 신경 쓰였다.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음료수가 나왔다. 수업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신경 쓰지 말기로 했다. 그날 뽑았던 음료수를 바네사에게 건네줬다.

어김없이 복도에서 바네사를 기다렸다. 점점 흐려지더니 비가 내렸다. 심지어 천둥번개까지 쳤다. 굉음 때문에 바네사가 움츠러들었다. 파란 비가 쏟아졌다. 일기 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와서 다행이었다. 바네사가 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지고 온 걸까. 어떤 말을 꺼낼지 생각하며 바라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바네사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올가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랑 비슷했다.

난감해지기 전에 우산을 펼쳤다. 바네사의 옆모습이 또 느려지기 전에. 선수 치기로 했다.

 

"같이 쓰자."

 

우산을 같이 쓰고 돌아갔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있는 건 아직 어색한 건지. 바네사는 거리를 뒀다. 어깨가 젖는 게 마음이 쓰였다. 아직은 이 정도 거리에서 있어야 하는구나. 바네사가 정해둔 거리라고 생각했다.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래도 비가 내리니까. 이번만큼은 우산 안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더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제야 주춤거리며 더 안으로 들어와 줬다. 어깨가 젖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같이 다니고, 친하게 지냈지만. 이 정도로 가까이 있던 적이 없었다. 평소대로 걸어가면 바네사가 비를 맞을까 봐. 일부러 더 느릿하게 걸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걸음을 바네사에게 맞춰주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이 있으니까 알겠다. 바네사에게 좋은 냄새가 났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퍼뜩 떠오른 게 있었다. 햇빛 냄새. 건조기에서 나온 빨래를 꺼냈을 때 맡을 법한 냄새.

바네사에게 어울리는 냄새였다. 습기 때문에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주변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내리는 비 때문에 어깨가 젖고, 팔에 빗물이 흘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산을 바네사 쪽으로 더 기울여줬다.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아파트에 도착해서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도 소용없었다. 바네사가 한쪽 문을 완전히 열어뒀다. 소소한 거까지 배려하는 모습이 좋았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건 우산뿐만이 아니었다.

푹 젖어버린 어깨부터 흐른 빗물이 팔뚝까지 타고 내려갔다. 개의치 않고 뒤따라서 걸어갔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바람 때문에 젖은 어깨가 시원하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부르르 떨다가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을 바라봤지만,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바네사를 살펴봤다. 가방 군데군데 물기가 남았지만. 많이 젖지 않았다.

다행이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한 층 차이지만. 올가가 먼저 내려야 했다. 내릴 때마다 아쉬움이 남았다. 왜일까. 문에 손을 대는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바네사가 밖으로 나왔다.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아. 또다. 먼저 올가에게 다가왔다.

푹 젖어버린 어깨와 팔을 수건으로 대충 닦아냈다. 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에는 바네사가 돌려준 책이 올려져 있었다. 책장의 빈 곳에 책을 꽂으려고 했다. 책장이 다시 꽉 차게 되었다. 바로 꽂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책 테두리를 잡은 채 삐딱하게 세웠다.

바네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다급하게 내린 게 떠올랐다. 아직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잔뜩 상기 된 얼굴로 책을 건네던 모습. 그만큼 약속이 중요했던 걸까. 나에게 꼭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게. 그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기시감이 들었다. 바네사가 맡긴 학생증을 봤을 때랑 똑같았다. 이유를 찾을 새도 없이.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좋아졌다. 그냥 좋았다.

손가락을 놓고 책을 책장에 밀어 넣었다. 책장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채워졌다. 올가는 기억을 되감았다. 바네사를 다시 떠올리더니. 조용히 입술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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