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선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바네사는 일찍 등교하는 버릇이 있었다. 미리 가서 공부한다거나, 청소한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누가 오기 전에 창문을 다 열어놓는 걸 좋아했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빈 교실에 앉아 있다가. 혼자서 축축하고 푸른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게 기분 좋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느끼는 적막함이 편안했다. 중학생 때까지는 혼자서 느끼는 적막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었다. 달라지는 구간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입던 교복이 달라지고, 가야 하는 학교가 달라졌다. 고등학생이 되자 달라졌다. 심지어 교실로 향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어떤 마음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비유나 단어를 대어 봐도 부족할 거 같았다. 문을 여니 어김없이 올가가 앉아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더니 인사했다.
안녕. 짧은 인사였다. 바네사도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올가도 새벽 공기를 좋아했다. 좋아했지만 바네사를 건들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벽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가가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다. 나만 알던 시간에 누군가가 불쑥 끼어든 거 같은데도. 오히려 혼자 있을 때보다 편안했다.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이 신기했다.
아침 인사를 제외하면. 올가와 얘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반장이기에 공책을 제출하라거나, 담임선생님이 부른다고 말했던 거 말고는 없었다. 올가도 바네사에게 말을 건 적은 별로 없었다. 반장인 바네사에게 공책을 건네줄 때 부르거나, 일정에 관해서 물어보는 거밖에 없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반장. 너. 그게 다였다. 늘 있던 일이기에. 올가가 그렇게 불러도 개의치 않았다.
아침에 대화를 나눈 거도 최근 일이었다. 그마저도 한 두 마디가 오가면 끝이었다. 올가는 말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말했다. 그런 점 때문일까. 올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싶게 만들었다. 상쾌하고 차분한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만의 새벽은 아직 달라질 구간이 아닌 건지. 달력을 몇 번 넘겨도 계속 이어져갔다. 한 두 마디였던 대화도 서너 마디로 늘어났다.
대화는 조금 늘었을 뿐인데. 올가에 대해 알아가는 게 훨씬 더 많아졌다. 마음에 담아가는 정보가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에 첫 번째 중간고사가 지나갔다. 너무 더워진 춘추복 재킷을 벗었다. 시원한 하복을 입게 되었다.
선은 점이 움직여서 만들어지는 자취이다. 시작하는 곳과 머무르는 곳이 있기에 만들어진다.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시작하는 곳은 다를지 몰라도. 머무르는 곳은 항상 같았다. 바네사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늘 올가였다.
뒷모습이든. 옆모습이든. 올가를 바라보게 되었다. 시선이 머무르면 감상에 젖기 마련이었다. 눈에 담았던 사소한 거를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복을 입으면서 드러난 올가의 팔에 언뜻언뜻 근육이 도드라지는 게 보였다. 가끔 머리를 묶어 올리면 시원한 목선이 보였다. 올가는 풍경과 잘 어울렸다. 복도 창문에서 떨어지는 햇빛과 그림자가 지는 각도마저도. 점점 더워지는 공기와 온도마저도.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올가에게 잘 어울렸다.
단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다면. 가끔 올가의 시선도 바네사에게 머무르는 점이었다. 수업 시간에도 올가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가끔 올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마다 심장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는 느낌이었다. 잘못한 거도 없는데. 올가 몰래 무언가를 하다가 들키는 느낌이었다.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올가는 바네사와 눈이 마주치면 손을 내렸다. 올가에게 살짝 웃어줬다. 주책없이 뛰는 심장을 감추려고 했다. 웃어주는 바네사를 보다가 입 꼬리를 올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칠판을 봤다. 알 듯 말 듯한 미묘한 표정은 은유로 다가왔다. 바네사가 직접 해석하게 했다. 미소라고 봐야 할까. 정답을 알 수 없는 해석을 하며. 바네사도 고개를 돌려 공책을 봤다. 공책에 선이 그어져 버렸다. 올가를 바라볼 때부터, 올가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시선과 같은 선이 그어져서 페이지 절반을 차지했다. 지울 수도, 찢을 수도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될 거 같았다. 옆 페이지에 펜을 옮겨야 했다.
예고 없던 소나기가 색을 머금고 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 풍경을 수채화로 만들어버렸다. 기분 탓일까. 잔뜩 몰려온 먹구름 색도 오늘은 다른 느낌이었다. 바네사와 같이 나온 애들은 가방을 우산 삼아 뛰어가거나, 우산을 펴고 걸어갔다. 바네사는 교문 앞에 머물렀다. 일기 예보를 무시하고 우산을 안 가지고 온 게 화근이었다.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습기를 머금은 비 냄새가 짙었다. 언제 그치려나. 소나기니까 금방 그치지 않을까. 이어폰을 낀 채 음악을 들었다. 한 곡이 끝날 때 즈음. 누군가가 바네사의 어깨를 톡톡 쳤다. 뒤를 돌아보니 올가가 서 있었다. 너무 놀라서 굳어버렸다.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아쉽게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목소리를 막았다. 입 모양으로 말을 읽어내기 힘들었다. 올가가 가까운 거리에서 얘기하고 있는 탓에. 넋 놓고 바라본 탓도 있었다. 올가는 계속 말하다가 바네사가 끼고 있는 이어폰을 발견했다.
잠시 입을 다물더니 얼굴을 긁적였다. 머쓱해진 걸까. 그러다 바네사에게 손을 뻗었다. 잠시만. 세 글자만큼은 입 모양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이어폰 한쪽을 떼었다. 바네사에게만 들리던 음악이 밖으로 새어 나왔다. 올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바네사."
떨어지고 있는 빗방울처럼. 마음속에 목소리가 불쑥 들어왔다. 올가가 바네사를 이름으로 불러줬다. 스치듯이 흘끔흘끔 봤던 적은 많았지만. 눈이 제대로 마주치는 건 처음이었다. 서로를 눈에 담았다. 이어폰에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박자는 분명 바뀔 리가 없었는데.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느려진 흐름 속에 우산이 끼어들었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장대 우산을 건네줬다. 우산이 없으면 쓰라고 했다.
바네사가 머뭇거리자 걱정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자기가 쓸 거도 있으니 괜찮다고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머뭇거린 게 아닌데. 차마 말할 수 없어서 군말 않고 우산을 받아들었다. 올가는 팔에 걸고 있던 접이식 우산을 꺼냈다.
이상하다. 비가 내리면 우중충하지 않던가. 오늘따라 색이 예뻤다. 파스텔 빛 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팡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산이 펴졌다. 안녕. 평소에 건네던 짧은 인사였다. 올가는 바네사를 남겨두고 걸어갔다. 이상했다. 비가 내리는 거뿐인데. 내 마음에 무언가가 툭 떨어진 거 같았다. 바네사는 괜스레 뛰어오는 마음에 우산을 꼭 쥐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비가 내렸다. 침대에 누울 때는 천둥번개까지 치던 궂은 날씨였다. 귀에 들리는 천둥번개도 시끄러웠지만. 머리도, 가슴도 시끄러웠다. 귀에 오늘 들었던 올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바네사. 세 글자를 되새길 뿐인데도. 가슴이 콩콩거리며 계속 바네사가 잠드는 걸 방해했다.
잠을 설치고 늦은 밤에 잠들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겨우겨우 눈을 뜨고 커튼을 걷었다. 아침이 오자 밖이 화창해졌다. 먹구름을 걷어낸 아침 햇살이 눈 부셨다. 바네사는 교복을 입고 가방을 챙겼다. 우산을 챙기는 거도 잊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갈 때 TV에서 일기 예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돌려줘야 하는 우산은 있었다. 바네사는 이어폰을 끼고, 우산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걸어가고 있었다. 매번 등교할 때 듣는 곡을 듣고 있었다.
저 멀리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올가가 보였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올가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매번 바네사보다 일찍 등교하니,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바네사와 비슷한 시간에 서 있었다.
하얀 하복은 햇빛을 받아서 더 눈부셨다. 머리카락마저 빛을 흘러내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여전히 풍경과 잘 어울렸다. 누군가가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스위치를 눌렀을까.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곡이 달라지고 있었다.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이름을 불러봤다.
"올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점과 점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올가를 향해 걸어갔다.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굽 소리와 함께 가슴이 뛰었다. 바네사는 알고 있을까.
어제 내렸던 소낙비가 자기가 볼 수 없는 테두리 너머까지 촉촉이 적셨던걸. 적셔진 감정이 마음속에 천천히 번져가고 있다는 걸. 여름이 오고 있었다. 소나기가 내릴 날도 많고, 추억이 쌓일 날도 많은. 여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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