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점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새로운 교복을 입고 맞이하는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반 친구들의 이름도 다 알지 못하는 시점. 반장 선거가 시작되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먼저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님이 추천할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제야 칠판에 차례대로 이름이 적히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반장을 할 생각도 없었기에. 별 감흥 없이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적히게 되었다. 선생님은 더 추천할 사람이 없냐고 물어봤다. 이대로 투표한다고 말할 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출발하려는 버스를 겨우 타는 듯이. 누군가를 추천했다. 추천받은 사람은 곤란해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았다. 대화가 들렸지만 한 귀로 흘려들었다. 추천한 사람과 추천받은 사람은 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에 이름이 적혔다. 바네사. 세 글자가 칠판에 적혔을 뿐인데. 모든 게 흐릿했던 초점이 제대로 맞춰졌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이 흐려지고 바네사가 선명하게 보였다. 여태까지 지나치고 말았던 기억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지금을 위해서 보관했다는 듯이 머리에서 기억을 하나둘씩 꺼내왔다.

중학생 때 복도에 붙여져 있던 전교 회장 투표 결과가 떠올랐다. 학생회장 옆에 적힌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거 말고도 이름을 봤던 적이 있었다. 음악 경연 대회 중등부 1위. 기억이 맞는다면. 바이올린으로 상을 받았던 거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름을 보고도 지나쳤던 적이 많았다. 지나쳤던 이름이랑 지금 보는 모습을 처음 대어봤다. 말로만 듣던 사람을 처음 보는 느낌이 이런 걸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진 기억이 많은 게 신기했다. 바네사는 자기소개 겸 공약을 말하기 위해 교탁으로 걸어갔다. 다들 바네사를 알고 있는 거 같았다. 바네사가 나갔을 뿐인데도. 이미 누구를 뽑을지 정해진 분위기였다. 바네사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발표가 끝나자 손뼉 치는 소리마저 컸다. 다른 사람들이 말할 때와 비교도 못 할 정도였다.

인기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거 같지만. 선생님은 투표용지를 나눠줬다. 올가는 바네사의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반장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걸까. 바네사는 틈만 나면 올가에게 존재를 드러냈다. 공지 사항이나 일정을 알려주는 식으로. 전처럼 지나치고 넘어가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바네사가 올가 근처에 다가온 적도 많았다. 공책을 제출해달라고 말했다. 친근하게 말했지만. 올가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었다. 공책을 받으면 다른 공책을 받으러 떠났다.

교류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부드럽다고 생각한 목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었다. 올가는 창가 자리에 앉았기에. 햇빛을 받는 바네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다가올 때 미소를 지어줬다. 여기. 고마워. 매번 두 글자와 세 글자로 반복되는 대화가 끝이었다. 아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대화가 없다고 아쉬워할 사람도 아니었다. 남이 먼저 올가에게 들어온 적도 없고, 올가가 먼저 남에게 들어간 적도 없기에. 일 년 동안 바네사와 나눌 대화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안녕."

 

가장 먼저 등교하느라 비어버린 교실에서. 혼자 창문을 열어뒀다.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새벽 공기가 신선했다. 새벽 공기를 즐기던 도중에. 기분 좋은 냄새가 부드러운 목소리에 끼어들었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바네사는 손을 흔들면서 인사했다. 올가도 바네사에게 인사를 건네게 되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돌렸다. 책상 하나를 비워둔 거리에서. 어김없이 올가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였더라. 바네사와 새벽 공기를 같이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변하게 된 시점을 알 수 없었다. 일기장을 펼치면 알 수 있겠지만.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혼자만 누리던 적막감을 다른 사람과 나누게 되었다. 적막감 사이에 목소리가 끼어들게 되었다. 싫지는 않았다. 애당초 교실은 모두가 쓰는 건데. 싫을 리가 없었다.

바네사는 매일 올가에게 물음표를 건네줬다. 물음표에 담긴 질문이 부드럽기 때문일까. 애쓰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던진 물음표에 올가가 대답하고 나면 무언가를 더 내밀지 않았다. 억지로 대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올가도 더 다가가지 않았다. 딱 책상 하나의 거리였다.

그런 점이 좋았다. 기분 좋은 거리감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눠서 그런 걸까. 새삼스레 눈에 띄는 점이 많아졌다. 다르게 느껴지는 점도 많아졌다. 바네사의 눈빛은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남을 대하는 태도도 눈빛과 다를 바 없었다. 눈빛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정했지만 마냥 착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목소리마저도. 처음 들었던 목소리와 다르게 느껴졌다. 바네사가 책을 읽고 있으면 목소리가 교실 공기를 울렸다. 진동이 조금씩 번져서 손끝에 닿는 기분이었다.

매번 흘려듣던 대화에서 듣게 되는 이름이 생겼다. 반 애들이 말하는 대화에 바네사가 들어가 있으면 듣게 되었다. 수업을 잘 듣는다고 했다. 글쎄. 그랬던가. 수업 시간에 가끔 바네사와 눈이 마주쳤다. 올가를 보고 웃어줬다. 올가도 미소를 지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대화를 듣다 보면 애들이 생각하는 바네사를 알 수 있었다.

바네사는 다정하고, 뭐든지 잘하는 반장이었다. 쉽게 단정 지어 말했다. 올가는 달랐다. 바네사를 단정 지어 말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하나였다. 하복이 잘 어울렸다.

담임선생님과 면담하던 도중에 빗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보니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 예보에서 비가 온다는 건 들었다. 알고 있었지만. 예고도 없이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다. 면담을 마치고 교실로 가보니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보는 빈 교실하고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빈 교실을 보자 바네사가 떠올랐다. 우산을 가져왔던가. 기억을 되짚어보니 가방만 들고 온 거 같았다. 사물함에 넣어뒀던 접이식 우산이 있었다. 미리 가져온 장대 우산을 우산꽂이에서 꺼냈다. 우산이 두 개가 되었다.

서론. 아직 안 갔냐고 물어본다. 본론. 우산이 없다면 이걸 쓰고 가라고 한다. 결론.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머릿속에 정해둔 대화를 되새기며 걸어갔다. 걸어갔다기보다는. 뛰어갔다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교문 쪽으로 가보니 역시나 바네사가 있었다. 혼자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보였다.

다가가서 어깨를 손으로 톡톡 쳤다. 바네사는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올가와 마주했다. 갑자기 불러서 놀란 모양이었다. 바짝 솟은 어깨가 눈에 띄었다.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준비한 티가 팍팍 날 만큼 딱딱하게 말했다. 누가 들었다면 국어책 읽고 있냐고 핀잔을 주고도 남았다.

이상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로 말하면 대답하고도 남았을 텐데. 바네사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불쑥 끼어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바네사를 살펴봤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준비해둔 말이 아무 소용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 무슨 말을 꺼내지. 난감해져서 얼굴을 긁적였다. 일단 끼고 있는 이어폰을 빼줘야겠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성큼 다가갔다. 매번 책상 하나를 두고 벌어져 있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양해를 구하기 위해 짧게 말했다. 잠시만. 세 글자 정도는 입 모양으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어폰을 빼려고 뻗은 손에 머리카락이 스쳤다. 부드러운 느낌에 잠깐 멈칫거리고 말았다.

신기했다. 이렇게 가느다란데 온기가 전해진다는 게. 이어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금이면 들을 수 있겠지. 문제가 있다면. 바네사에게 건넬 말을 준비하지 못했다. 눈을 마주했다. 우중충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일까. 마주한 눈동자는 반짝였다. 눈동자에 올가가 담긴 게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바네사."

 

매일 쓰는 일기장에 점이 남아버렸다. 뒷면에 묻을 정도로 아주 진하게. 일기를 쓰려고 준비했던 잉크 펜이 한 곳에만 머물다 보니 잉크가 점으로 뭉쳐버렸다. 점을 보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았다. 일기는 희미해진 흔적을 되짚으며 남기는 건데. 그때 그 모든 게 너무 선명했다.

바네사에게 장대 우산을 건네주고 나서. 올가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급하게 자리를 뜨고 말았다. 얼마나 급하게 떠났는지. 집에 돌아와 보니 신발이 푹 젖어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펜을 내려놓고 손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닿았던 게 떠올랐다. 손가락에 남은 촉감도 여전했다. 일기를 덮어버렸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그때 느꼈던 습한 공기도 여전했다. 작은 그 무엇도 잊을 수가 없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저도 모르게 불렀던 이름을 떠올렸다. 마주친 눈동자를 생각했다. 몸을 뒤척였다. 오늘 교문에 서 있던 자신과 바네사가 마음에 점으로 남아버렸다.

티도 안 나게 살짝 찍었을 뿐인데. 비에 젖어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번져갔다. 밖은 비가 거세지더니, 천둥번개가 하늘을 찢을 기세로 우르릉거렸다. 올가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빨라진 심장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처음 겪어보는 느낌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에 맞춰 떨리고 있는 손가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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