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때론 시간이 필요하다

뱀파이어 물네사 x 엘프 물올가

마주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두 사람은 자주 마주쳤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건 물론이고. 아파트 입구에서도 마주쳤다. 그때마다 바네사는 반갑게 인사했다. 올가도 나름대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거 같았다. 대화는 두 마디 이상을 넘지 못했지만. 바네사는 아침을 대화로 시작하는 게 즐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올가는 이미 바네사 정체를 알고 있고, 비밀을 지켜주는 든든한 이웃이기도 했다. 들킬까 봐 불안해하지 않고 대화하는 게 얼마 만인지. 올가와 헤어지고 마주하는 하늘은 예전보다 더 짙었다.

소소한 행복으로 만족했지만. 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와 준 이웃에게. 바네사는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집에 돌아가자 메모지를 찾았다. 문에 붙이기 좋을 크기의 메모지를 찾자 펜으로 정성스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웃에게 작은 이벤트를 남겨주기 위해서.

식사라도 같이하실래요?

이웃이 남긴 작은 이벤트에. 올가는 그림자가 어둠에 가려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단정한 글씨로써 있는 작은 초대장에는 날짜와 시간까지 적혀 있었다. 올가가 먹을 식사를 하고 오는 게 좋겠다는 친절한 설명은 덤이었다. 식사. 식사라니. 뱀파이어와 식사는 어떻게 하는 건지.

세기도 번거로울 정도로 긴 시간을 살아온 올가에게. 친절한 이웃이 남긴 작은 이벤트는 살면서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행동이 필요했다. 올가는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정말 바람직한 말이었지만. 바네사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과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집에 들어가서 자료를 찾아보는 올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웃이 자료까지 참고하면서 고민하는 시간이 지나고. 약속한 시각이 다가왔다. 바네사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음악을 틀어두고 기대감에 부풀고 있었다. 식사하면서 뭘 말해보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다. 이참에 좋아하는 음식도 물어봐야겠지. 직접 요리해주지 못하겠지만. 음식점에 주문하는 건 가능하니까.

특별히 더 예쁜 걸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식사는 정말 특별하니까. 콧노래를 부르며 잔과 그릇을 넣어둔 찬장을 열었다. 바네사는 가장 아끼던 와인 잔을 꺼냈다. 와인 잔을 깨끗하게 닦고 식탁에 예쁘게 올려뒀다. 깔끔하게 깔린 식탁보 위에 있는 와인 잔을 보며. 바네사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와중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올가가 온 모양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도어캠 화면으로 한 번 확인해보니. 역시 올가가 서 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봤던 검은색 정장을 입은 채. 문을 열어보니 시원한 민트 향이 밀려왔다. 막 씻고 와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웃으면서 올가를 맞이해줬다.

"어서 오세요, 올가 씨."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저녁이 아니라 좋은 아침이라니. 배려심이 묻은 인사에 또 웃고 말았다. 바네사 집 안으로 들어오자. 올가는 귀에 꽂고 있던 장치를 빼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담아온 거 같은 그릇이 보였다. 그릇에는 샌드위치가 올려져 있었다. 양상추와 햄만 들어 있는 간단한 샌드위치였다. 심지어 샌드위치 한 개를 반으로 가른 두 조각밖에 없었다.

저걸로 저녁 식사가 되려나. 걱정이 섞인 생각이 들었지만. 참견하지 않았다. 올가 나름대로 쌓아온 일상일 텐데. 쓸데없는 참견일 거 같았다. 덩그러니 놓인 샌드위치가 계속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참견하지 말자는 말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올가에게 앉을 자리를 안내해줬다. 올가도 왔으니 슬슬 피도 꺼내와야겠지. 피를 보면 꺼림직하게 느끼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저번에 셔츠가 피로 얼룩졌는데도 담담한 걸 보니 괜찮을 거 같았다.

올가는 커프스를 풀었다. 끝까지 채워서 답답한 건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커프스를 풀더니 소매를 걷어서 손목을 드러냈다. 왜 손목을. 영문을 모르는 행동의 연속이었다. 멍하니 보는 순간. 올가가 팔을 뻗어 식탁에 올려져 있는 잔을 잡으려고 했다. 

아니 잠깐. 느낌이 이상했다. 물이 마시고 싶었다면 바네사에게 물어봐도 되는 건데. 왜 잔부터 찾고 있는 거지. 소매는 왜 한 쪽만 걷어둔 거지. 심상치 않은 낌새에 올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올가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목소리로 올가에게 물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미리 따라둬야 할 거 같아서요."

"네…? 뭘 따라요?"

"드실 피 말입니다. 엘프 피라도 괜찮으십니까."

올가의 마지막 말에. 바네사는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지금 이 사람. 나한테 피를 주려는 거구나. 결론이 나자마자 어이가 없는 나머지. 올가한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전혀 안 괜찮아요!!"

현기증이 나는 나머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되짚어봤다. 올가를 식사에 초대한 게 문제인가. 아니면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게 문제인가. 아니면. 아.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마실 피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고 해도. 올가는 바네사 앞에서 또 소매를 걷고 피를 내줄 게 분명했다. 전에 편견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말했던가. 전에 했던 말은 취소다. 완전 취소다. 없던 일로 하고 싶다. 

괜찮냐고 물어보는 올가를 바라봤다. 당황했지만 표정 변화는 거의 없는. 정말로 몰라서 순수한 눈빛으로 걱정하는. 겁이 없다 못해 무모한. 이 친절한 엘프에게 필요한 건. 뱀파이어에 대한 상식과 개념이었다.

오후 열 시. 오해를 풀고 나서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었다. 음악은 끊겼다. 샌드위치가 담겨있던 그릇은 비어 있었다. 피가 담긴 병도 반 이상 비어 있었다. 바네사는 지친 표정으로 와인 잔에 피를 따르고 있었다. 잔에 피가 가득 찰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그릇과 잔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요새 피곤한 일이 왜 이렇게 많지. 따지고 보면 누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 모르기 때문이겠지. 동질감은 들지만 살아온 세상과 방법이 다르니까. 모르니까 마음이 제멋대로 오해를 키울 것이다. 해명이 없다면 오해가 커질 수밖에 없고. 좋든, 나쁘든 일이 터지기 마련이었다. 숨을 돌리며 피를 마셨다.

그래. 이거도 익숙한 과정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바네사에게 대접해줄 걸 생각하느라 벌어진 일이었다. 호의가 길을 잃고 엉뚱한 데로 빠진 격이었다. 그런 점은 다행인 걸까. 차분하게 생각해보니. 둘 다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그대로 부딪힌 거 같았다. 바네사는 잔을 비우고 올가에게 다시 설명했다.

"그러니까…. 저희는 이미 공급받는 피가 있어서 따로 피를 마실 필요가 없어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사람 피를 마시는 건 금지되어 있어요. 사람이 아닌 엘프 피도 마찬가지겠죠."

사람 피가 제일 맛있다는 소문이 있긴 했지만.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겨우 오해를 풀었는데. 그딴 걸 말했다간 기름에 물 붓는 격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부분은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올가가 말을 끊었다. 말끝이 흐려지더니 바닥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익숙한 말 줄임표. 이제는 머릿속에 저절로 완성되는 뒷문장이 있었다. 남들이 깨어있는 시간에 바네사는 없다. 올가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안 자도 지장 없다고 했지만. 어찌 되었든 올가는 낮에 시간을 보내고, 밤에 자야 한다.

바네사와 달랐다. 생각해보면 요 며칠간 시간이 엇갈려서 올가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걸 아는데도. 기분이 들떠서 시야가 좁아졌다. 생각에 잠겨서 가라앉을 즈음. 예상치 못한 말이 돌아왔다.

"욕심이 과했습니다."

참 알 수 없지. 예의상 하는 말일 수도 있고, 거짓말일 수도 있는데. 올가가 말하면 진심으로 말하는 거 같았다. 미안함이 담긴 눈빛과 진심으로 반성하는 태도 때문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내가 알고 싶은 게 아닐까. 근거 없고, 긍정만 가득한 생각이 바네사의 등을 떠밀었다. 바네사는 팔짱을 낀 채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분위기를 잡으면서 올가에게 말했다.

"맞아요. 혼자 욕심부리셨어요. 저는 올가 씨를 알지도 못하는데, 호의만 받으라는 거도 이상하잖아요."

"…예."

"그러니까 당분간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밀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어떻게든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웃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를 알고 싶다면. 나도 알려주면서 알아가야지. 어차피 이 사람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던 건 나였으니까. 우리에겐 시간이 아주 많으니. 의욕이 앞서더라도 천천히 나아가면 별문제 없을 거다. 등이 떠밀린 바네사는 생각하지 않았던 말을 건네게 되었다.

"저한테 알아갈 시간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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