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첫 만남

뱀파이어 물네사 x 엘프 물올가

빛도, 소리도 들어오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있으면. 적막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는 거 같았다. 눈을 감으면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없고, 아무 색도 없는 곳에는 관들이 놓여 있었다. 관에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모은 채 잠든 모습은 평온했다. 누워있는 사람들마저. 서 있는 곳처럼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투명한 관 뚜껑에 손을 얹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대답해주지 않기에, 스스로 대답을 찾지 못했기에.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잠들지 못했기에 또다시. 끝없는 시간 속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울리며 자고 있던 바네사를 깨웠다. 핸드폰이 보여준 시간은 오후 열한 시. 침대를 대충 정돈하고 거실로 나섰다. 불빛이 없고,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둔 거실은 어두웠다. 커튼을 살짝 들춰보니. 달이 옅은 달빛을 걸어뒀다. 멀리서 맴돌고 있던 어둠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어김없이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침.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시계는 밤이라고 가리키는 이 시간. 바네사가 가진 시계는 아침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옛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서 시간이 다른 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납득할만할 이유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바네사가 가진 이유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지 않을까. 와인잔을 꺼내서 식탁에 놓았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어떤 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병에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와인잔을 채우는 붉은 액체. 와인과 비슷했지만, 색이 미묘하게 달랐다. 그것만 봐도 꺼림직할 법한데. 바네사는 개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 흡혈귀. 뱀파이어.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바네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곳에 지내면서 나름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집은 늘 깨끗하게 유지하기. 이웃하고 사이좋게 지내기.이웃하고 만날 일이 없어서 사이좋게 지내는 건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지내고 있다는 건 자부했다. 깨끗하게 씻고, 집을 정돈하고, 단정한 옷을 입었다. 인간은 아니었지만 일과는 평범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시계를 바라봤다.

느긋하게 있다간 영화 예매 시간에 늦을지도 모르겠다. 바네사는 나가기 전에 텀블러를 꺼내더니. 그 안에 피를 가득 채웠다. 영화를 볼 때 홀짝홀짝 마시려는 속셈이었다. 아침에 영화를 보면서 마시는 피는 각별하니까. 하루에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텀블러 뚜껑을 닫을 때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렸다. 텀블러를 든 채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검은 밤이 자욱하게 깔렸다. 오늘은 유독 하늘을 덮은 까만 도화지가 두꺼웠는지. 어느 별 하나 힘차게 뚫고 오지 못했다. 은은한 가로등이 별을 대신했다. 얇게 저민 밤공기 사이에 알싸한 한기가 틈을 메웠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바네사만 걷고 있었다. 원래도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대부분 잠들 시간이니 당연했다. 혼자 있는 게 새삼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무리 속에 있어도. 속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 테니. 그런 거보다는 예매 시간에 제때 가는 게 더 중요했다.

바네사는 핸드폰을 번갈아 보며 걸어갔다. 앞을 살피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모퉁이를 돌았을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맞부딪혔다. 그러더니. 헐거웠던 텀블러 뚜껑 사이로 피가 쏟아지고 말았다. 놀람과 동시에 속으로 비명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바네사 옷은 물론이고 바네사와 부딪힌 사람의 옷에 피가 묻어버렸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이 흰 셔츠였다. 셔츠를 물들인 붉은 색이 더더욱 도드라졌다.

부딪힌 사람도 적잖이 놀랐는지. 절반 이상이 붉은색으로 얼룩진 셔츠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야 하는데.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텀블러 뚜껑이 신발에 닿고 나서야. 바네사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괜,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바네사에 비해 부딪힌 사람은 차분했다. 셔츠에 묻은 게 주스라고 착각했나 보다. 근거 없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었다. 지금으로선 희망을 붙드는 게 최선이었다. 주스가 아니라는 걸 들킨다 해도. 세탁비를 지불하고 나면 더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대로 잊히면 그만이다. 바네사는 행복한 계획을 세우고 있건만. 애석하게도 현실에 있는 사람은 바네사의 상상을 깨부쉈다.

"그런데 보통 주스가 아니라 피군요."

"…네?"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생각도 두 박자 늦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로 무슨 소리냐고 물어야 했는데. 적어도 토마토 주스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했는데. 정적을 주고 말았다. 바네사가 반응하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팔짱을 낀 채 턱에 손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을 들었다면 상황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바네사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네사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들러붙었다. 머리에서 겨우 명령을 내렸다. 도망치자.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도망치지. 그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방심하는 틈에 밀치고 죽자 살자 뛰어야 할까. 뛴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면 도와달라고 소리라도 지를까. 소리를 질러봤자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소용없었다.

온갖 상상을 해봤지만. 이 사람에게 도망치기 어려워 보였다. 바네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대로 경찰서에 끌려가도 골치 아픈 일이지만. 더욱 큰 문제가 있었다. 여기서 인간이 아닌 걸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별안간 도시 괴담이 떠올랐다. 사람이 아닌 걸 보면 신고해서 실험체로 넘긴다는 단순하지만 무서운 괴담. 실험체로 넘겨지면 어떻게 하면 될지 뻔했다. 영화에서 보던 외계인들처럼 실험당하는 상상을 하자. 두려움에 온몸이 쭈뼛 솟아났다.

그 사람은 바네사를 불렀다. 놀라서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눈빛만으로 바네사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무언가 보여줄 게 있다면서 자기 귀에 손을 댔다. 귀에 꽂았던 무언가를 빼자. 봐도 믿기지 못할 일이 바네사 앞에 펼쳐졌다. 그 사람의 귀가 갑자기 길어졌다. 뾰족하고 길어진 귀가 눈에 띌 정도였다. 지금 보니까. 눈동자 동공도 달라졌다.

누가 봐도 평범한 모습이 아니었다. 바네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 사람을 바라봤다. 설마. 설마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부류인걸까. 직접 봤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파란 눈동자에 자신을 바라보는 바네사가 담겼다. 

놀람 반, 의심 반으로 바라보는 바네사를 보며. 그 사람은 확신했다. 여태까지 바네사가 보인 반응이 추측을 확실하게 만들어줬다. 피를 가지고 다니는 이상한 인간이 보일만할 반응이 아니었다. 고약한 취미를 가진 이상한 인간이 아니라면 저 사람은 분명. 추측이 확신으로 굳어지자. 그 사람은 바네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바네사에게 말한 한마디가. 정말로 비슷한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닿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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