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절취선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일곱 장 밖에 남지 않았던 여름의 끝자락부터 지금까지. 일기장은 네 이야기로 가득 찼다. 도서부 일이 보충 수업과 같은 날에 끝났다. 우연이었지만. 보충 수업보다 빨리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애들과 방학 잘 보내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교실로 가봤다. 계단을 오르면서 위를 올려다봤다. 빼꼼 내민 머리가 보였다. 바네사였다. 눈을 마주치니 배시시 웃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싶었는데. 수업이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올가를 기다려줬다. 햇빛을 혼자서 가득 담는 바람에 눈이 부셨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바네사와 함께 걸었다. 평소에 가던 길로 가지 않았다. 다른 길로 갔다. 바네사가 마음속에 특별히 아끼던 길.
그래서 올가에게 방학식 때 소개해줬던 길. 이번에도 마지막이니까. 의미 있는 길을 바네사하고 다시 한 번 걸어봤다. 그때와 같은 길이라고 말하기엔 어려웠다. 시간이 달랐다. 흘러가는 구름이 달랐다. 자라난 나뭇잎 때문에 비춰주는 햇빛이 달랐다. 바네사에게 대답하는 올가가 변했다.
바네사는 걷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올가는 마지막이니까 걷고 싶었다고 답했다. 걷고 있는 올가의 마음은 예전과 달랐다. 지금 올가에게 무엇이 달라졌냐고 물어본다면 어떨까. 스스로 말하기 힘들어서. 보기를 달라고 하지 않을까. 그나마 확실한 건 있었다. 바네사와 조금 더 오래 걷고 싶었다. 말 주변은 여전히 없지만. 얘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당분간은 또 못 보겠지. 아쉬움이 남았다. 방학 잘 보내. 올가에게 다정하게 인사하는 바네사가 보였다. 얼굴을 마주하면 어느새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기엔 짧고, 잠이 들기엔 이른 애매한 시간이라. 침대에 기대서 일기장을 썼다. 바네사에 관한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머리에서 바네사를 되짚어봤다.
되짚었을 때 느꼈던 감상을. 손은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누가 보면 넋을 놓고 끄적이는 거로 보일 정도였다. 귀엽다. 세 글자를 쓰고 점을 찍던 펜이 멈칫거렸다. 비로소 눈에 단어가 들어왔다. 귀엽더라. 귀엽던가. 단어 옆에 물음표를 그렸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바네사가 다시 떠올랐다. 물음표를 까맣게 칠하면서 지워냈다. 덕분에 크고 까만 점이 남아버렸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찾아왔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교실 문을 열자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새벽 공기를 즐기던 일상이 바뀌었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생겼다. 교실 문이 열리자 저절로 고개가 돌려졌다. 올가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바네사가 들어왔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변한 점이 많았다.
바네사도 춘추복을 입었다. 반장 선거 때 봤던 모습과 지금을 덧대어보았다. 그때도 춘추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가. 잘 모르겠다. 지금 보니 바네사하고 잘 어울렸다.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마주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이제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었다. 어쩐지 조금 지쳐 보였다. 기운 없어 보이는 모습이. 코끝에 매달린 피곤함이 마음에 걸렸다. 못 만났던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꾹 참아냈다.
가을이 되자 바네사만 변한 게 아니었다. 자리를 바꾸게 되었다. 뽑은 쪽지 번호를 따라 가보니 창가 자리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이쯤 되면 우연이라고 하기 힘들지 않을까. 올가를 바라보는 바네사가 있었다.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올가가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눈이 마주치게 되자. 걸려있던 그림자가 잠시나마 사라졌다. 바네사는 올가를 보고 반가워했다. 올가보다 더 기뻐했다. 감정이라는 건 참 신기했다. 남이 기뻐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자기 일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 올가도 기뻤다. 누군가의 장난이 고맙게 느껴졌다.
가까워졌으니 자주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도서부는 학기 초부터 바빴다. 신착도서가 있었다. 신착도서가 오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안내판을 만들고.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고. 고무인을 찍어야 한다. 모두 다 도서부가 직접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도서부인 올가도 빠질 수 없었기에.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가야 했다.
선생님이 야간 자습 신청서를 나눠줬다. 집에서 공부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신청하지 않았다. 반장인 바네사에게 건네줘야 했다. 건네주던 도중에 바네사가 쓴 야간 자습 신청서를 보게 되었다. 바네사는 야간 자습을 신청했다. 또 엇갈리고 말았다. 공부에 집중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이해했다. 바네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여름과 달라진 게 너무 많았다. 그렇겠네. 어딘가 아쉬운 마음에 혼잣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시간이 엇갈리다 보니. 바네사와 대화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도서부 일을 끝내고 교실로 들어오면 바네사가 앉은 자리에 눈이 갔다. 바네사 주변엔 반 친구들이 많았다. 얘기하면서 이따금 웃기도 했다. 애들과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보였다. 다행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자리 잡았지만. 엇갈려서 느끼는 아쉬움이라 치부하고 넘어갔다.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외로움을 느끼는 거 같았다. 가을은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라고 했으니까. 계절을 타는 게 아닐까. 수많은 가능성 있었지만. 올가는 지레짐작하지 않았다. 바네사를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과 추측을 곱게 접어서 서랍 안에 넣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겼다. 이곳에 남아야 하는. 앉아있는 바네사가 보였다. 내색하지 않고 손을 흔드는 바네사의 모습에. 마음이 쏠렸다.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가능하면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그날부터 올가는 바네사와 헤어질 때마다 꼭 인사를 했다. 아침에 소소하게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수업이 끝나면 헤어지는 걸 반복했다. 전에는 수업 시간에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치기라도 했는데. 이제 뒷자리다 보니 눈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해가 짧아지다 보니 돌아가는 길이 어둑어둑했다. 무심코 지나치던 풍경이었는데. 바네사가 돌아가는 시간에는 거리가 더 어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돌부리에 걸린 느낌이었다. 어두운 풍경이 마음에 걸렸다. 집에 돌아가서 공부하는 내내 끼어들었다. 시계를 보니 자습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책을 덮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방문을 열었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부모님은 올가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운동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잔소리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섰다.
서둘러서 학교로 가보니 바네사가 서 있었다.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먼 곳에서도 올가를 본 모양인지 걸음을 멈췄다. 올가는 손을 흔들었다. 보충 수업 마지막 날처럼 빠른 발걸음으로 바네사에게 갔다. 여기까지 온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거짓말까지 했으니. 돌이킬 수 없었다. 밀려가듯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같이 돌아갈래?"
바네사와 같이 돌아오니 늦은 밤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또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신경쓰지 않았다.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앉았다. 침대 옆에 있는 간이 등을 켰다. 가로등 조명 색과 비슷한 조명 색이었다. 주황빛을 받으며 일기장을 펼쳤다. 밤거리에 담아뒀던 기억을 일기장에 옮겼다.
밤에 같이 걷는 건 처음이었다.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은은한 가로등 조명을 받아서 그런지. 바네사가 빛나 보였다. 햇빛을 받은 모습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여름에 봤던 모습을 덧대어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바네사에게 괜찮냐고 물어봤다. 아침에 물어봐야 할 말을 밤이 되고 나서야 물어볼 수 있었다. 바네사는 괜찮다고 말해줬다. 대답해줄 때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거 같았다. 같이 걷는 것만 해도 위로가 된 거 같았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밤에 한 번 같이 돌아간 이후로. 두 사람은 가끔 같이 돌아가게 되었다. 이마저도 여름과 달라서. 여름처럼 매일 같이 돌아갈 수 없었다. 가끔은 바네사가 권유를 거절했다. 바네사가 거절하면 올가는 깔끔하게 물러섰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다. 오늘은 바네사가 권유를 받아들였다. 자습 시간에 맞춰서 바네사와 다시 만났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같이 걸었다. 짙은 밤공기가 두 사람에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학기 초부터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유독 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가라앉은 눈빛에 생기가 없었다.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어봐도 괜찮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저번에 대답했던 느낌과 정반대였다. 무언가를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바네사는 자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올가에게 일이 많이 바쁘냐고 물어봤다. 걸어가면서 도서부 일이 바쁘다는 걸 솔직하게 말해줬다. 대답하는 내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바쁘다 해서 사이가 멀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변변치 않은 핑계로 들릴 수도 있겠다. 정적이 감돌았다. 익숙한 느낌이 다가왔다. 불길함이 찾아왔다. 마음 한구석에 불길함을 껴안은 채 고개를 돌렸다. 느린 바네사의 옆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들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네사는 또 다른 생각에 젖어 들었다. 때로라 치부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많이 봐온 모습이었다. 함께 있어도 우리는 두 발자국 사이만큼. 그만큼 거리에서 서 있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을 아무리 쫓아봐도. 올가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미소 뒤에 있는 바네사는.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바라봐도. 차가운 모습이 보였다. 냉정함과 다른 느낌이었다. 무심함. 무심함일지도 모르겠다.
시선 너머에서 바라보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선이 그어진 느낌이었다. 올가는 선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중심에 나란히 서본 적이 없었다. 아까 던진 질문마저도. 바네사에겐 형식적인 질문이었을까. 바네사가 어떻게 대답할지 모르겠지만. 올가가 보기에는 그랬다. 코끝에는 피곤함이 또다시 달려 있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잘 안됐다. 이해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끌어안고 있는 사정이 있으니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거도. 비밀은 혼자 간직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거도. 다 이해했다. 이해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번만.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보여줄 수 없는 걸까. 보여주거나,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바네사를 생각하는 마음은 없었다.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었다면. 얘기해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지 않나. 얘기해 주지 않아도. 이해해줄 수 있어야지. 올가는 자신의 이기심을 자책했다. 이 정도로 이기적일 줄 몰랐다. 무엇이 이렇게 이기적으로 만들었을까. 평소처럼 바네사에게 끼어들 수 없었다. 한동안 바닥을 향한 시선을 들지 못했다. 묵묵히 걸어갔다.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진득하게 엉겨 붙은 듯이 찝찝했다. 무언가 잘못 먹은 거처럼 속이 쓰렸다. 두 번은 없었다. 걸으면서 말해줬던 말을 바네사에게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돌아갈 때까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나마 목소리를 들을 기회는 딱 한 번뿐이었다. 바네사가 먼저 인사해줬다. 잘 가. 그제야 올가는 바네사를 다시 바라봤다. 아까 봤던 느린 옆모습은 사라졌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네사가 있었다. 방학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은. 이런 모습밖에 없는 걸까. 미소 짓는 일이 이렇게 힘들었던가. 올가는 애써 미소를 지어줬다. 평소처럼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지만. 바로 열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네사를 배려하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바네사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마저 빼앗아버린 거 같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올가는 처음으로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수건을 마른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표정을 가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른 수건을 대충 걸어뒀다. 책상 위에 일기장이 놓여 있었다. 평소처럼 일과를 일기장에 적으면 될 텐데. 책상 앞에 깍지를 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우 펜을 잡고 일기를 썼다. 애써 바네사가 나오는 얘기를 뒤로 미뤘다. 다른 얘기로 채워나갔다. 도서부 일정이든. 학교 숙제든. 순서가 뒤죽박죽인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보고서 분량을 늘이려는 거처럼. 쓸모없는 얘기까지 긁어모았다.
사실 어디서 시작하든 상관없었다. 끝은 바네사였다. 아무리 다른 얘기를 끄집어내려 하고. 길게 써봐도 소용없었다. 바네사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기운 없어 보이던 모습. 느렸던 옆 모습을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얼굴을 찡그렸다. 북북 소리가 날 정도로 선을 그었다.
미소 지으며 인사하던 모습이 떠올렸다. 그은 선 밑에 한 글자를 적었다. 왜. 점을 찍었다. 그러다 두 선을 그었다. 곡선 하나. 점을 향해 내려가는 직선 하나.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를 한 글자가 남아버렸다.
책이든, 영화든, 가사든. 어지럽고 헷갈리는 건 봄이 떠맡는 몫이었다. 올가 마음속에 있는 시계는 가을이 봄인 걸까.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보며 스스로 물어봤다. 나는 지금 무슨 마음이냐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어서. 일기장을 덮고 말았다. 불을 끄고 말았다.
며칠 내내 고생했던 신착도서 작업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책에 스티커를 붙이고 나서야. 도서부 애들은 의자에 늘어지고 말았다. 사서 선생님이 고생했다며 애들에게 음료수를 나눠줬다.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였다. 올가가 바네사에게 건네줬던 음료수이기도 했다. 올가도 하나를 받아들고 창가로 갔다. 교실보단 시원하긴 했지만. 많이 움직이다 보니 열이 오르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창틀에 손을 대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음료수를 마셨다.
멀리 있어도 잘 보이는 건 착각인 걸까. 창밖 풍경을 구경하다가 익숙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바네사가 보였다. 인기가 많아서 그런가. 이번에도 올가가 모르는 사람하고 같이 있었다. 같은 반 애는 아니었다. 두 사람 주변에도 사람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바네사와 바네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구경하는 모양새였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무슨 일일까. 표정을 보니 싸우는 건 아니었다. 음료수를 쥔 채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 사람이 바네사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편지 봉투 같았다. 올가의 입이 달싹거리며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입 모양을 읽었다. 좋아해. 눈을 의심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조차 짧아서.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창틀에서 손이 떨어졌다. 바네사도 놀라서 입을 살짝 벌리는 게 보였다.
"사귀자."
와그작. 캔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요란한 소리 때문에 애들이 깜짝 놀랐다. 일제히 올가를 쳐다봤다. 옆 모습에서 드러난 표정을 보게 되었다.
"야, 너 표정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올가는 고개를 돌려 애들을 바라봤다. 애들은 올가가 짓고 있는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올가도 애들이 짓고 있는 표정이 보였다. 나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거울이라도 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인지 모르겠다.
애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제야 올가는 자기가 쥐고 있던 음료수 캔이 보였다. 힘을 버티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표정을 풀어야겠다 싶어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을 할 때마다 표정이 펴지긴커녕. 점점 구겨지는 게 느껴졌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이만 갈게."
이대로는 안 된다. 자리를 피해야 할 거 같았다. 일은 다 끝났기에 말리는 애들은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비켜줬다. 가방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소리마저도 요란했다. 하지만 올가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터질듯한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해졌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누군가에게 잡히기 싫다는 듯이. 혼란을 피해 도망치듯이.
왜 이러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스쳐 지나간 복도에 여러 감정을 떨어뜨리고 걸어갔다. 바네사에게 건넨 말은 고백이었다. 대체 왜.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느새 걷다 못해 달리고 있었다. 혼자 있던 바네사가 떠올랐다. 장애물에 걸린 듯이 멈추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올가가 서 있는 곳은 후문 쪽이었다. 바네사가 있던 곳과 정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지. 잔잔했던 물결이 순식간에 들끓었다. 해일이 밀려오는 거 같았다. 어떤 상태인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발이 바네사가 있는 쪽으로 향하지 못했다. 올가는 발이 향하는 방향대로 걸어갔다. 바네사가 있는 쪽을 등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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