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방학과 여름 사이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계기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맞닿을 수 있는 게 중요한 걸까. 소나기가 내리던 날. 바네사는 올가에게 우산을 빌린 적이 있었다. 우산을 한 번 빌렸을 뿐인데. 올가와 더 많이 얘기할 수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노크일지도 모르겠다. 올가는 조심스러운 노크를 받아줬다. 문을 열어줬다. 다음은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누가 먼저라고 따질 틈도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교실에서 나누던 대화랑 다를 게 없었지만. 밖에서 얘기해서 그런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올가는 바네사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걸 알게 되었다.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거도, 오늘은 늦잠을 잤다는 거도.누군가를 알아가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올가가 도서부라는 걸 알고 의외라고 생각했다. 의외인 면도 좋았기에.

알고 싶었다. 올가에 대하여. 조금 더. 가능하다면 올가가 말해줄 수 있는 전부를. 올가도 바네사에게 궁금한 걸 물어봤다. 바네사를 알아가려고 했다. 그렇다 해서. 바네사와 똑같다고 말하는 건 힘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산을 빌리기 전까지. 서로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이어진 거 같았다. 잘 보이지 않아서. 투명하다고 느낄 정도로 얇고 가느다란 실로 이어진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들어서. 바네사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올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수업 끝나면 같이 돌아가지 않을래?"

 

난생처음 내딛어보는 곳을 향하는 모험이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올가에겐 이래도 괜찮을 거 같았다.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아직 올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서 이러는 걸까. 올가는 더 다가와 준 바네사에게 맞춰줬다. 대답해주는 목소리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그래."

 

여름이 다가오면 방학도 다가오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처음 맞이하는 여름 방학이었다. 보통 방학 얘기가 나오면 들뜨기 마련인데. 고등학생으로 맞이하는 여름방학은 즐겁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보충 수업 신청서를 나눠줬다. 애들은 반장에게 신청서를 제출하고, 반장은 제출한 걸 모아서 자기에게 전달해달라고 하는 건 덤이었다.

신청서와 함께 나눠준 시간표를 봤다. 아침에 등교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말이 방학이지. 학교 가는 건 똑같겠구나.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올가 쪽을 봤다. 올가도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신청하는 걸까. 표정을 봐도 모르겠다. 강요하는 건 아니었기에 올가에게 달린 일이었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올가라면 확실하게 대답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올가에게 물어보면 부정할 틈도 없이 확실해지고 만다.

그날도 어김없이 올가와 함께 돌아갔다. 약속한 적도 없는데. 수업이 끝나면 같이 돌아가는 게 약속처럼 자리잡히고 말았다. 한 발자국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걸어갔다. 여름이 와서 그런지 해가 길었다. 돌아가는 길에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었다.

걷는 내내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다. 올가에게 요즘 더 더워진다는 얘기를 꺼냈다. 질문은 꺼내지도 않았다. 올가도 대답만 해줄 뿐. 바네사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확답을 듣고 싶지 않은 마음은 뭐라고 해야 할까. 그날따라 돌아가는 길이 너무 짧았다.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신청서를 보여줬다. 수업을 빠짐없이 들으라는 말이 돌아왔다. 고등학생이니 당연한 건가. 서명란에 적힌 서명을 보며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싱거운 한숨을 쉬었다. 바네사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오빠가 교복을 입고, 방학 내내 학교에 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기에. 안쓰럽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막상 겪으니까 쉽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느꼈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긴 있구나. 퍼뜩 올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작게 저었다. 신청했냐고 묻지도 못하면서 이런 걸 어떻게 물어본담.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답답한 마음을 접듯이 신청서를 곱게 접었다. 접은 신청서를 가방에 넣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다른 애들은 바네사에게 신청서를 제출했다. 정작 바네사가 기다리는 올가는 제출하지 않았다. 올가가 다가올 때면 괜히 두근거렸다. 설마 하는 마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올가가 건넨 건 신청서가 아니라 공책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공책을 받았지만 민망함이 올라왔다. 올가가 보지 않을 때 몰래 헛기침을 했다. 내심 기대했던 걸까.

올가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방학에도 공부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기대했던 거 같았다. 바네사의 기대와 다르게. 올가는 신청일이 끝날 때까지 바네사에게 신청서를 주지 않았다. 마음을 알리가 없기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책이나 창밖을 보고 있었다. 올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물어볼 걸 그랬나. 결국 방학식이 다가오고 말았다. TV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도 관심 없어 하는 거 같았다. 방송이 끝나자 선생님은 방학 숙제가 적힌 목록을 전해주고, 전달사항을 간단하게 말해줬다.

보충 수업을 듣는 사람은 일정을 잘 확인하라고 했다. 보충 수업은 일주일 후에 시작한다고 했다. 그마저도 애들이 떠드느라 전달 사항 절반 이상이 묻히고 말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끝나버렸다. 다들 신나서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 바네사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올가가 기다려줬다. 처음 내디딘 건 바네사였는데. 한결같은 건 올가였다. 고개를 들어 올가를 바라봤다. 올가를 보면 답답했던 마음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창문을 확 열어버린 기분이었다. 하복은 여전히 잘 어울렸다. 어쩌면 여름에 보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올가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다른 길로 갈까?"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한 박자 늦게 후회했다. 교실에서 바네사가 제안하자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는데. 바네사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괜찮냐고 재차 물어봐도 괜찮다고 해줬다.

이 길은 바네사가 봄에 발견한 길이었다. 많이 돌아가는 길이라서 그런지. 더운 여름에 굳이 이런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둘이서 걷고 있으니까. 그래도 군데군데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있고, 바람도 불어서 걷기 힘든 날씨는 아니었다.

남에게 보여주거나, 알려준 적이 없는 길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길을 아는 사람이 널리고 남았다. 그래도 바네사가 알고 있는 걸 남에게 알려 줄 때. 그때는 늘 즐거우면서도 두근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도 좋아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이번에도 걷는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잔잔한 진동을 느끼며 올가를 바라봤다. 앞을 바라보며 걷던 올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 좋다. 시원한 목소리로 짧게 감상을 남겼다. 목소리에 잔잔한 진동이 점점 격해졌다. 들뜬 기분 때문일까. 올가 말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아졌다.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게 같다니. 다행이다. 뿌듯함을 느꼈지만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진작 오자고 할걸. 후회는 늘 늦었다.

찾으려고 할 때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럴 때에야 모습을 드러내 줬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박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바네사의 박자는 느렸다. 바로 느끼지 못했다. 많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엇박자가 되어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못 보겠네."

 

자주 연락하자고 할까. 가을에 보자고 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고를 수가 없었다. 올가는 걸음을 멈췄다. 바네사도 같이 걸음을 멈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쨍한 여름 햇살을 받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올가가 더 눈부셨다.

 

"도서부는 방학에도 나와."

 

바네사가 멍하니 바라봐서 그런 걸까. 올가는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했다. 도서부 일 때문에 방학 내내 도서관에 가야 했다. 아침부터 나와야 하는 일정이었고, 나눠준 보충 시간표를 보니 보충 수업은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충 수업 신청을 안 했다고 말해줬다. 사실 자세히는 모르겠다. 방학에도 나와. 한마디를 할 때. 올가가 눈부셔서 잠깐 멍하니 바라봤다. 언제 이런 적이 있던 거 같았는데. 아. 떠올랐다.

소나기가 내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어폰을 껴서 그렇다 쳐도. 오늘은 왜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걸까. 한참 설명하듯이 말하던 올가가 말을 멈췄다. 이 모습도 저번이랑 똑같은 거 같았다. 올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어폰을 빼줬을 때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방학에도 볼 수 있어."

 

집에 돌아가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점심이 지난 시간이라서 다행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부모님이 봤다면 엄하게 혼났겠지. 아랑곳하지 않고 베개를 끌어와서 머리를 폭 묻었다. 머리를 묻은 채 가만히 있다가도. 침대를 팡팡 소리가 날 때까지 발을 파닥거렸다. 왜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다.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봤던 올가와, 오늘 헤어지기 전에 말하던 올가가 겹쳐 보였다.

그때처럼. 올가는 바네사를 담았다. 그때와 다르게. 바네사를 보며 미소를 지어줬다. 미소가 살아있었다. 미소 지은 올가가 해줬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다음에 또 오자."

바네사 귓가에 직접 말하는 느낌에. 귓끝이 빨개지고 말았다. 베개를 인형처럼 꼭 끌어안았다. 콩콩 뛰는 가슴 때문에 다시 한 번 머리를 푹 파묻었다. 다음이라는 말이 기분 좋은 말이었구나. 비가 내리지 않는 쨍쨍한 날씨인데도. 옅은 비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왜 이럴까. 자신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 올가가 또 떠올랐다. 바네사는 이유 모를 두근거림이 낯설었다. 적응하지 못해서 몸을 뒤척일 때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적응하지 못한 몸이 점점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더워진 날씨 탓을 하며. 여름 탓을 하며. 바네사는 베개를 더 끌어안았다. 겪었던 여름 중에서 가장 더운 여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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