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미뤄둔 숙제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새로운 걸 맞이할 때는 질문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호기심이든, 의심이든, 걱정이든. 돌이켜보면 별거 아닌 질문도 크게 다가오는 때가 있다. 바네사에게 따라온 질문들은 사소했다.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숙제도 많던데 언제 다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가진 채 여름 방학을 맞이했다.

알림을 맞춰두니 어떻게든 일어났다. 늦잠을 자더라도 부모님이 깨워줬다. 보충 수업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에게 물어봐서 해결했다. 방학 숙제는 중학생 때 했던 방식이 있었다. 공책에 해야 할 숙제를 적어두고 순서대로 해결했다. 많은 질문에 부딪혔지만 하나씩 풀어갔다. 차근차근히 해보니 별거 아니었다. 역시 하나씩 풀어나가는 게 중요하구나.

교훈과 함께 자신감을 얻었다. 여름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어느덧 여름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바람이 점점 사라졌다. 습기 찬 더위가 슬슬 하복을 뜨겁게 적셔왔다. 교실에 있던 애들도 더위에 허덕였다. 바네사도 더위를 느꼈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무언가 다른 거 같았다.

밖이 더운 건지, 마음이 뜨거운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 문이 열렸다. 한 줄기였던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가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에 가려져 풍경을 담은 초점이 흐릿해졌다.

전부 바람에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처럼 흩어져버리면. 어느새 흐릿했던 초점이 선명해졌다. 복도에는 한 사람만 남겨져 있었다. 바네사를 기다려주는 올가가 있었다. 바네사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면 올가도 작게 손을 흔들어줬다. 방학을 맞이하면서 얻었던 교훈대로. 바네사는 올가한테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갔다. 모든 일이 똑같이 해결되면 좋으련만. 올가에게 다가가는 발걸음 하나에도. 어째서 즐거우면서도, 간지러운 건지.

신호를 기다리느라 나란히 서 있는 발을 보게 되었다. 신호가 조금 더 늦게 떨어지길 바랐다. 멈춰버린 바네사와 다르게 신호가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올가를 뒤따라서 걸었다. 한 두 걸음 앞서 걷던 올가가 어느새 바네사와 나란히 섰다. 신호가 걸린 거도 아닌데도 같이 걸어갔다. 걷는 속도를 맞춰주는 걸 느꼈다. 어째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이 원래 이랬던가. 원래 어땠는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햇빛에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밟으며 같이 걸어서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반짝이는 문에 서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갈게. 짧게 인사하던 올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잠깐 고개를 돌려 바네사를 보더니 한 마디를 얹었다. 돌아가면 물 많이 마셔. 문이 닫히면서 올가의 모습이 완전히 가려졌다. 내리기 전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봤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리면서 손등을 볼에 가져다 대어봤다. 뜨거운 햇빛 때문에 그런지 열기가 느껴졌다. 더우니까. 달아오른 얼굴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계절이 아니었다. 그래. 이상한 게 아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여름은 계절 탓을 하며 정당화하기 아주 좋은 계절이었다.

볼펜 끝으로 공책 한구석을 톡톡 쳤다. 숙제는 미루라고 있다는 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공책에 적힌 마지막 숙제가 있었다. 감상문. 다른 숙제를 핑계로 미뤄왔다. 도서관에 가야 했다. 도서관. 공책에 적어보면서 단어를 되새겨봤다. 보통 책을 떠올리겠지만. 책이 아니라 올가가 먼저 떠올렸다. 도서관에서 올가를 본 적이 있었다. 보충 수업이 끝났지만, 올가가 하던 일이 끝나지 않았다.

반납 대에 있는 책들이 보였다. 매번 올가가 기다려줬으니까. 이번엔 올가를 기다려주고 싶었다.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서 올가를 기다려줬다. 올가는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책도 쉽게 들었다. 앉아 있는 바네사에게 금방 끝내겠다고 말해줬다. 미안해하는 거 같아서. 자기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책장 앞에 서서 책을 꽂았다. 듣기만 했던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책을 들고 있는 손이 조명을 받았다. 조명을 받은 새하얀 살결이, 잡고 있는 책이 모두 다 빛났다. 무거운 책을 한 손으로 들면서 가볍게 턱턱 꽂아 넣었다. 집중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했더니 걷잡을 수 없었다. 멋있어 보이던 모습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적어둔 글씨 주변에 원을 휘휘 그리면서 생각을 걷어냈다. 

바네사가 올가를 한 번 기다려주고 나서. 도서관에 갈 일은 없었다. 감상문을 마지막으로 미뤘기에. 책을 빌릴 일이 없었다. 올가도 계속 바네사를 기다려줬다. 다른 숙제는 다 해치웠고. 이제 정말 감상문밖에 남지 않았으니. 원을 그리던 펜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많이 그었는지 얇은 선은 두꺼운 선이 되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잠들 시간이었다.

내일은 도서관에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스위치를 껐다. 도서관에 올가가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이불 위로 누웠다. 올가를 만나도 아무 일 없을 거다. 머리를 베개 위로 떨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일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서 바네사를 바라봤던 게 떠올랐다. 벽 쪽으로 돌아 누우며 잊으려고 애썼다. 별일 없이 인사만 하고 끝나겠지. 별일 없을 거다. 자기 암시를 하듯이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돌아 눕는 방향대로 한숨이 와르르 쏟아졌다.

어젯밤에 결심한 대로. 바네사는 도서관 앞에 서 있었다. 뭐라고 이렇게 떨리지. 잘못한 게 있는 거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뒤돌아 가고 싶었지만. 해야 하는 숙제를 떠올렸다. 이제 핑계 댈 거리도 없고, 미루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바네사에게 있어서 배수진이나 다름없었다. 해야만 한다. 마음속으로 다독이며 심호흡을 했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기가 바로 들이닥쳤다. 한기 때문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교실보다 도서관은 너무 시원했다. 애들도 자리에 많이 앉아 있었다. 학교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올가는 보이지 않았다. 고민한 의미가 없어졌다는 의미였다.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거에 비해 결과는 싱거웠다. 사실 고민할 거리도 아니지 않나. 올가가 있다 해도 인사만 나누면 끝일 텐데.

바짝 솟았던 어깨가 김이 빠져서 푹 가라앉았다. 사서 선생님이나 도서부 애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찾아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만에 끝날 일이었다. 바네사는 선생님과 도서부 애들을 지나쳤다.

오래 걸리는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 못 찾겠다 싶을 때 물어보자고 정했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현대 문학이라고 적힌 책장으로 걸어갔다. 소설이었으니 이쯤에 있지 않을까.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맨 윗단부터 눈으로 살펴봤다. 중학교 때 읽은 책도 있고, 처음 보는 책도 있었다. 익숙한 책을 찾으면 소소하게 즐거웠다.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들을 보다가 유독 비어있는 공간을 봤다. 보자마자 찾는 책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비어 있는 공간 때문에 꽂아 뒀던 책이 쓰려져 있었다. 쓰러진 책과 빈 곳 사이를 손으로 대어봤다. 공간에 끼어드는 바네사의 손처럼. 옆에서 다른 사람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귓가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감상문 책 찾고 있는 거라면 애들이 다 빌려 가서 없어."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바네사의 몸이 움찔거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이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시원한 민트 향이 코끝에 스쳤다. 향을 맡자마자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상쾌한 기분과 반대로. 가슴이 제멋대로 뛰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올가가 있었다. 바네사가 놀랐다고 생각했나 보다. 올가는 움찔거린 바네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고동에 귀가 먹먹해졌다. 먹먹한 귀를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했기에. 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올가는 쓰러져 있는 책을 바로 세웠다. 바네사 말고도 책을 찾는 애들은 많았다. 방학 숙제니까. 학교 도서관부터 찾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딱 한 권이 남긴 했는데. 저번 주에 한 명이 빌려 갔다고 말해줬다. 빌린 책을 알차게 써먹을 생각이었는지. 기한 연장까지 했다고 덧붙여줬다. 간단히 말해서. 버스는 이미 떠났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배차 간격이 끔찍한 버스가.

이래서 미루는 버릇이 나쁜 거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매번 늦어지는 거 같았다. 자세히 설명하기엔 애매하고 사소한 것들이 계속 늦어졌다.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이 생각이 굴러갔다. 턱에 손을 댄 채 곰곰이 방법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학교 근처에 있는 시립 도서관이 생각났다. 여기에 없다면 거기도 마찬가지일 거 같았다. 직접 가서 확인해야겠지만. 생각은 이미 나쁜 쪽으로 치우쳤다.

아무래도 없을 거 같았다. 없으면 서점이라도 가야 하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진 생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불어난 생각을 파고들었다. 파묻힌 채 계속 고민했다. 덕분에 바네사를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얇은 하복을 타고 온기가 느껴졌다. 어깨에 손바닥이 닿았다. 파묻히던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올가가 손을 뻗어 바네사 어깨에 얹었다. 옅어졌던 민트향이 또다시 찾아왔다. 마주친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잔잔했다. 너무 잔잔해서 오히려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바네사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올가가 말하는 걸 제대로 듣지 못하는 버릇이. 말을 끝까지 들은 적이 별로 없었다. 한 두 번이면 다시 물어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한두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물어보는 대신 요령이 생겼다.

군데군데 들린 단어를 겨우겨우 모아서 추측했다. 아니면 끝에 말하는 단어만 입 모양을 보고 알아차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입 모양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주어도, 목적어도. 자신이 쳐버린 괄호에 들어간 말을 들었다.

 

"빌려줄까?"

 

책을 말하는 거겠지. 곤란해 보이는 모습을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난 걸까. 바네사를 바라보더니 다른 말을 더 붙여줬다. 자기는 감상문을 다 썼으니 빌려줘도 괜찮다고 했다. 이미 다 썼구나. 당연한 거지만. 올가는 바네사와 다르게 숙제를 미루지 않았다. 올곧게 호의를 건네주지만. 억지로 권하지 않았다. 일방적이거나, 날카롭지 않았다. 남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미리 자기 사정을 말해줬다.

그 정도로 올가가 신경 써줘서 말해주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네사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올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가져오겠다고 할 줄 알았다.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올가는 대답을 듣자마자 몸을 휙 돌렸다. 결정이 빨랐다. 말없이 빠르게 걸었다.가려는 곳이 분명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올가가 향한 곳은 책상이었다. 머뭇거림이 없었다. 책상 위에 올려둔 가방을 열었다. 가방을 몇 번 뒤적이더니 책을 꺼냈다. 매일 들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책인 걸까.

여기. 공책을 건네던 거와 같은 말투로 말하며 책을 건넸다.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공책을 받듯이 고맙다고 말하면서 손을 뻗었다. 책을 건네던 올가의 손에 손가락이 스쳤다. 두 뺨이 뜨끈해졌다.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책을 바라봤다. 옆을 보니 책장에 무언가가 많이 끼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책에 표시한 게 많다는 말을 얼핏 들은 거 같았다. 정말로 좋아하는 책이구나. 머뭇거리며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소중한 책을 남에게 쉽게 빌려줘도 되는 걸까. 나는 그냥 받아도 괜찮을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애가 책을 빌리려고 학생증을 건네는 게 보였다. 머리 위에 전구가 팟하고 켜졌다. 학생증을 꺼내서 올가에게 건네줬다.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삑하는 소리와 함께 책에 있는 바코드가 찍혔다. 올가 옆에 있던 도서부 애가 책을 건네줄 때, 바네사는 올가에게 말했다.

"빌리는 거니까, 이거라도 맡길게."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면 어쩌지. 학생증을 잡은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올가는 확실하게 말해줘서. 바네사에게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거절할 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올가가 아니라고 말하면 정말로 아닌 거다. 그렇다고 떨릴 거까진 없는데.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힘을 줬다. 요즘 따라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많아졌다. 거절하면 민망해질까 봐 이러나.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오해할까 봐 이러나. 오해할 건 또 뭐가 있지.

꼭 돌려주겠다는 의미로 맡기는 건데. 이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오히려 꼬여버리고 말았다. 복잡해지고 있는 바네사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올가는 건네준 학생증을 받아줬다. 착각이라고 넘기려 했는데. 올가의 손에 맞닿은 손가락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손가락에 남아있던 잔열기는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먹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가라앉은 저녁 공기마저 후덥지근했다. 더위 때문일 거야. 또 여름 탓을 했다. 만만한 게 여름이었다. 그래도 더운 게 맞았던 걸까. 차가운 물로 씻고 나니 열기가 사라졌다. 머리를 말리고 가방에 넣어뒀던 책을 꺼냈다. 책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다 읽고 감상문만 작성하면 모든 숙제가 끝난다. 책 옆에 펼친 공책을 놔뒀다. 빌린 책이니까 적어둘 건 공책에 적기로 했다.

분량이 많지 않으니 부지런히 하면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을 거다. 준비를 마치고 첫 장을 펼쳤다. 첫 장은 깨끗했다. 초반부에는 올가가 표시해둔 게 없었다. 무난하게 읽을 수 있었다. 몇 장을 더 넘겨보니 올가가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문장 구석에 올가가 쓴 글씨가 날렵하게 새겨져 있었다.

깔끔한 필체가 올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옅고 부드러운 밑줄도 보였다. 딱 봐도 다른 거로 줄을 그은 거 같았다. 자로 그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거의 다 일직선으로 그어뒀다. 줄마저 올가답다고 생각해서 웃음이 나왔다.

남겨둔 흔적이 번질까 봐 귀퉁이만 조심스레 잡았다. 남겨둔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같은 장면을 바라봐도. 바네사와 다르게 느끼는 지점이 있었다. 바네사가 밑줄을 그었을 문장이 있지만. 올가가 그어두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바네사는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었다. 올가는 지나치지 못하고 의문을 남겨두기도 했다.

흔적을 따라가며 되짚었을 뿐인데. 올가가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올가에게 직접 말을 걸어서 알던 거와 다른 느낌이었다. 감상을 적어가며 읽다 보니 어느덧 후반부까지 오게 되었다. 올가가 밑줄을 쳐둔 문장에 눈이 머물렀다. 홀린 듯이 책에 있는 문장을 공책에 옮겼다.

 

우연은 필연을 끌어안는다.

 

바네사는 지금까지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 되어주고, 필연이 이어져서 인연이 되어준다고 생각했다.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필연이었던 걸까.

사람은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비춰보는 게 아니었다. 보고 있는 풍경에도, 걷고 있는 거리에도, 읽고 있는 책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고, 자신을 대입했다. 눈은 책을 보고 있지만. 머리는 글자 너머로 희미하게 누군가를 그리고 있었다. 바네사는 문장에 자신을 비춰봤다. 자신뿐만 아니라. 올가를 옆에 세워봤다.

우리가 만난 거도 필연적이라 할 수 있을까. 생각에 빠지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공책에 무언가를 적어냈다. 멍하니 있다가 펜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의식하자마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공책에 적은 문구를 봤다.

우리도 그랬으면. 끝마치지 않은 문장이지만. 머릿속으로 문장을 완성했다. 완성한 문장을 떠올리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올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공책에 남겼던 선처럼. 지울 수가 없어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책도 다음 장으로 넘겨버렸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뺨을 가볍게 톡톡 쳤다.

책까지 빌려왔는데. 빨리 돌려주려면 오늘 안에 다 해결해야지. 도서관에 서 있던 자신을 다독이던 방식과 비슷했다.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나아가는 게 바네사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마음을 다잡으니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후반부를 전부 다 읽었다.

공책에 적어둔 감상을 정리해서 감상문까지 썼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펜을 내려놓았다. 몇 시간 내내 앉아 있다 보니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쭉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방학 숙제를 적어둔 공책을 펼쳐서 감상문에 선을 그었다. 드디어 숙제가 다 끝났다. 주먹을 살짝 쥐며 마음속으로 축제를 벌였다. 집중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정리하고 일찍 자야겠다. 

감상문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파일에 끼워뒀다. 책은 조심스레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을 챙기고 나서 불을 껐다. 침대 쪽으로 비적비적 걸어갔다. 여름 방학 숙제를 전부 다 끝냈지만. 왜인지 모르게 숙제가 남은 기분이었다. 침대에 눕기 전에 책상에 놓인 가방을 봤다. 다 읽었으니 책을 돌려줘야 했다. 돌려주려면 올가와 만나야했다. 올가와 만나면. 그대로 침대에 쓰려졌다. 올가가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으며 지워냈다.

오늘은 숙제를 끝내느라 고생했으니까. 생각도. 계획도. 전부 다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미뤄둔 숙제마저 언젠가는 풀어야 한다는 사실도 미룬 채. 바네사는 이불을 끌어왔다. 이불을 배에 덮은 채 눈을 감았다. 바네사가 느낄 수 없게. 바네사가 잠들자 마음 한구석에서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바네사 몰래 가슴이 콩콩 뛰게 했다. 숙제는 미룰 수 있지만. 감정을 미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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