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몇 편의 낮

뱀파이어 물네사 x 엘프 물올가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서 있었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햇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둡지 않았다. 바네사 앞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 부분이 검게 칠해져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을 봤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가슴이 타들어 가다 못해 녹아내릴 거 같았다. 찢어질 듯이 아팠다. 신음조차 나오지 못하고 마른기침만 뱉어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슴팍을 붙잡은 채. 계속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시선은 그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주저앉아 울고 있는 바네사를 보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려고 했다. 바네사는 쥐어짜 내듯이 외쳤다. 아냐. 말하지 말아줘. 제발. 절박한 외침에도 사람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바네사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미소에는 생기가 없어보였다. 모든 걸 놓아버릴 듯이. 그들은 지치다 못해 바스라진 미소를 지으며. 바네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있어. 바네사."

눈을 다시 떠보니. 바네사가 사는 세상이었다. 오늘따라 방 안이 더 어두운 느낌이었다. 코끝에 눅눅한 습기가 내려앉았다. 집 안에 들리는 소리라곤 빗소리밖에 없었다. 비가 내리는구나. 빗소리 때문에 아까 전까지 꿨던 꿈도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기억이 쓸려나가고 말았다. 바네사는 머리를 감싸 쥐다가. 한껏 늘어지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니. 검은색 하늘에 회백색 구름이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빗방울은 베란다 창문을 적시며 노크를 하고 있었다. 문을 열자 열린 틈으로 파도가 넘실거렸다. 종일 내렸는지 비를 머금은 습기가 짙었다. 습한 냄새에 숨을 내쉬자 입김이 흘러나왔다. 한 박자 늦게 시원한 바람이 창틀을 타고 흘러왔다.

시간을 확인해봤다. 밤 여덟 시. 핸드폰이 보여주는 시간 아래에 메시지가 보였다. 올가가 미리 보내둔 메시지였다. 비가 내려서 집에 돌아오는 게 늦을 수 있다고 했다. 보낸 시간을 보니 이미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올가가 아무리 늦더라도 바네사가 갈 준비를 끝내면 시간이 딱 맞을 거다. 시간이 맞아도 언제 갈지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예의상 한 시간 후에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바네사는 핸드폰을 제자리에 두고 비적비적 걸어갔다. 거실로 가자 현관에 꽂혀있는 우산이 눈에 띄었다. 우산은 가져갔을까. 올가라면 준비성이 철저하니 가져갔겠지. 준비하는 내내 의식이 흘러가는 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우산을 가져갔을까 하는 걱정이 올가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올가를 지켜본 결과. 바네사는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이 사람. 아니, 이 엘프. 사람 같이 사는 점이 하나도 없다. 인간이 아니라 엘프긴 하지만. 바네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사실 같이 식사하는 건 만족스러웠다. 한쪽은 피를 따라 마시고, 한쪽은 음식을 먹는 이상한 풍경은 사소했다. 두 사람이 식사할 때 라디오를 틀었다. 철이 지났지만 유명했던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다.

바네사가 따라부르곤 했다. 올가는 따라부르지 않고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분명 집에 오기 전에 일을 끝냈다면서. 올가는 매번 어디선가 서류나 노트북을 가져왔다. 틀어준 TV를 보고 있는 바네사 근처에서. 서류를 보거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계속 작성하고 있었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나겠거니.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다.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올가는 바네사가 돌아갈 때까지. 그러니까. 새벽 내내 일을 했다. 그것도 지치거나 피곤한 기색 없이. 처리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거짓말을 한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일은 딱히 할 게 없으니 하는 것이고, 건강이나 일정에 지장 없으니 괜찮다고 했다. 오히려 올가가 바네사를 걱정했다. 자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니냐고 하는 바람에. 바네사는 자기가 괜찮다는 걸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올가는 끝도 없이 펼쳐진 눈밭 같았다.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고, 자국이 남아도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밭. 바네사는 서랍을 열어서 상자를 꺼냈다. 포장을 뜯지 않아서 비닐이 그대로 남아있는 상자였다. 상자에는 멋들어진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림 밑에는 명화 퍼즐이라고 쓰여 있었다.

퍼즐을 식탁 위에 올려뒀다. 방에서 하드보드지를 꺼내고, 냉장고에서 병을 꺼냈다. 준비물은 네 개로 끝이었다. 복도로 나와서 올가 집으로 걸어갔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문 앞이었다. 들고 있던 걸 옆구리에 끼고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다.

손이 초인종으로 향했다. 그런 도중에도 생각이 흐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올가가 살아온 방식이니까 존중해야겠지만. 올가가 하는 모든 행동이 마음을 쓰게 만들었다. 분명 올가에 대해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던 거 같은데. 금방 다짐을 어기고 말았다.

자는 시간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줘도. 바네사에겐 충분하지 않아 보였다. 우리가 하루 이틀만 사는 게 아니고.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계속 살아가야 할 텐데. 물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건 중요하다.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중요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삶이 지겨워진다면. 그다음은.

초인종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머리에서 건져 올린 흐릿한 기억이 점점 모양을 잡으려고 했다. 바네사는 고개를 젓고 초인종을 눌렀다. 생각하지 말고, 의식하지 말자. 되도록 꺼내 보지 말자. 오늘도 어김없이 초인종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한결같은 검은 셔츠가 맞이해줄 거라 예상했다. 예상과 다르게. 올가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바네사를 맞이했다. 검은색인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티셔츠였다.

잘 때는 검은 셔츠 안 입고 자겠구나. 처음 보는 모습에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올가가 수건을 머리에서 걷어내자. 물기가 약간 남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아직 장치를 안 뺐는지. 귀 모양이 평소랑 달랐다. 다른 건 많았지만. 바네사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오라고 말하는 모습은 여전했다. 

매번 주름 없이 반듯한 검은 셔츠만 입던 올가가 티셔츠를 입은 걸 보니. 방금 씻고 머리를 말린 거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 우산을 안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깨가 푹 젖은 정장 재킷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역시 비를 맞았구나. 바네사는 올가를 따라가면서 물어봤다.

"비 맞으셨어요?"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올가는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넣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돌아올 때는 비가 잠깐 멈춰서 맞지 않았고, 집에 도착할 때 즈음 비가 다시 쏟아져서 겉옷만 젖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연락했다면 우산이라도 가져갔을 텐데.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바네사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올가에겐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둘째치고. 올가 성격이라면 바네사에게 부탁하지 않을 게 뻔했다.

바네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기에. 올가는 장치를 빼며 바네사가 가져온 게 뭐냐고 물어봤다. 그제야 옆구리에 끼워놨던 퍼즐과 하드보드지가 생각났다. 역시 유명한 그림이라서 그런가. 올가에게 퍼즐 상자를 보여주니 단번에 어떤 작가의 그림인지 알아봤다. 심지어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바네사는 가져온 퍼즐을 같이 맞추자고 올가에게 권했다. 올가는 당연히 받아줬다. 그러자 바네사가 한 가지 조건을 더 걸었다. 퍼즐을 다 맞출 때까지. 밤에 서류나 노트북은 보지 않을 것. 오늘 퍼즐을 다 맞추지 못해서 다음 날로 넘어가도. 조건은 유지해달라고 했다. 조건을 듣자 놀란 눈치였다. 짧은 침묵과 고민이 지나가고 나서. 바네사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였다.

책상에 퍼즐을 두고 거실로 갔다. 퍼즐 맞추면서 아무것도 안 틀면 심심할 테니까. TV를 틀까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빗소리를 듣고 싶기도 하고, TV를 틀면 화면 때문에 산만해질 거 같았다. TV 대신 라디오를 가져왔다. 라디오를 켜니 매번 들었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잔잔한 노래는 덤이었다.

하드보드지 위에 올려져 있던 상자를 열었다. 퍼즐 조각과 포스터를 꺼냈다. 올가는 상자에 들어있던 AS 카드를 꺼내서 읽었다. 설명서 같으면 꼭 확인해 보는 게 버릇인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귀여운 버릇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우선 칸막이로 상자 안에 구역을 나눠서 색이 비슷한 퍼즐끼리 분류하기로 했다. 퍼즐을 분류하고 나면. 포스터를 보며 테두리부터 맞춰보기로 했다. 올가는 명령이 입력된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올가에게 얘기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바네사는 혼자 퍼즐을 맞추는 게 취미였다. 이 퍼즐보다 더 조각이 많은 퍼즐도 혼자 맞추곤 했으니까. 바꿔서 말하면. 집중을 덜 해도 지장이 없다는 뜻이었다. 바네사는 빗소리가 섞인 잔잔한 소음 속에서 올가를 구경했다. 

올가는 평온하게 퍼즐을 분류하고 있었다. 서류나 노트북을 찾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퍼즐 맞추는 게 재밌는 걸까. 아니면 일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생기면 상관없는 걸까. 생각보다 분류가 빨리 끝났다. 이제 퍼즐을 테두리부터 맞춰볼 차례였다. 올가는 포스터를 한 번 보더니. 바네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명화가 취향입니까?"

바네사도 포스터를 바라봤다. 하얀 구름이 흩뿌려진 청량한 하늘 아래에 양산을 든 사람이 서 있는 그림이었다. 햇빛을 한껏 받는 그림. 뱀파이어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사람들이 물어봤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말겠지만. 올가는 바네사가 뱀파이어인거도 아는데. 굳이 감출 필요가 없었다. 바네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취향이라기보다는…. 옛날에 이런 그림이나 사진을 많이 찾아봤어요. 어떻게든 사람들이랑 얘기해보려고 노력했거든요."

사람들은 밤을 지내지 않아도, 밤에 관해 얘기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는 낮을 지내지 못하고, 낮에 관해 얘기할 수 없었다. 햇빛에 약한 뱀파이어에게 낮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햇빛에 노출될 경우 강한 화상을 입는 건 물론이고, 시간이 지나면 잿더미가 되고 만다.

날씨가 좋다는 얘기에도 끼어들지 못했다. 아예 보지 못한 걸 얘기할 수 없었다. 좋은 걸 느낄 수 없으니 동감하지 못했다. 억지로 얘기해봤자 이상하게 들릴 게 뻔했다.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해본 적은 있었다. 노력과 결과는 관계가 없었다. 노력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노력 덕분에 인간관계를 맺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억지로 만들어낸 관계는 넓고 옅었다. 각별한 관계는 없었다.

"그마저도 잘 안됐어요."

뱀파이어라는 정체 때문에 관계가 깊어질 수 없었다. 가끔 마음에 들어오는 사람이 생긴다고 해도. 바네사가 먼저 정리해 버렸다. 잘 지내려고 했던 노력은 놓치고, 놔버리고, 미련만 잔뜩 남은 채 끝나버렸다. 기억이 자꾸 모양을 잡으려고 했다. 그래. 끝나버렸지. 아주 극단적인 결말로.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눈빛이 가라앉았다. 바네사는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도 비가 내렸다. 희뿌연 창문에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손금 사이로 타고 흐르는 것처럼. 희뿌연 창문에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선을 따라서 자국이 남았다. 남아버린 빗자국을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뱀파이어만 아니었어도. 고개를 돌리니 퍼즐을 맞추고 있는 올가가 보였다. 바네사를 나름대로 배려한 거 같았다. 올가의 모습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간신히 삼켰다.

"아, 이젠 아니예요. 요즘은 궁금해서 찾아보는 편이니까요."

위로나 동정을 바라고 말한 건 아닌데. 오늘따라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대답하다가 여기까지 이야기가 샐 줄이야. 대신 다른 말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자 올가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노력하신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올가는 바네사를 동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노력에 대한 말만 할 뿐이지.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 갔을 때도 그랬다. 바네사가 얼버무리면, 나름대로 선을 지키며 배려했다. 이런 엘프를 걱정하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거람.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퍼즐을 맞춰나갔다. 혼자서 맞추면 이틀이 걸리기도 했는데. 역시 둘이서 하면 속도가 빠르긴 하나 보다.

해가 뜨기 전에 퍼즐을 다 맞춰버렸다. 둘이서 만든 거니 기념으로 액자로 만들자고 권했다. 올가는 이번에도 별말 없이 받아줬다. 상자에 들어있던 유액과 밀대를 꺼냈다. 밀대로 퍼즐 위에 유액을 발랐다. 퍼즐에 바른 유액이 말라야 하기도 하고, 바네사도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퍼즐은 내일 밤에 액자를 가져와서 걸어두기로 했다.

뒷정리도 끝났고, 내일 일정도 정했으니. 정말로 헤어질 시간이었다. 신발을 신고 나서 손잡이를 잡으려고 했는데. 올가가 바네사를 불렀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바네사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줬다. 머뭇거리던 올가는 바네사에게 작별 인사 같지 않은 말을 건넸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올가와 헤어지고 우편함을 확인하러 가는 길에도. 마지막에 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오늘따라 올가가 새삼스레 달라 보이는 점이 많았다. 올가는 바네사 덕분에 쉴 수 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오히려 바네사가 올가 덕분에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눈밭이나 겨울 바다같이 고독하고, 황량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표현이 건조하고 딱딱할 뿐, 마음은 정말 따뜻하고 자상했다.

이런 식으로 고맙다는 말을 처음 들어서 그런가. 이가 간지러웠다. 피만 마셨는데 이가 간지러울 수 있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귀여운 강아지 영상을 보면 가끔 이가 가려웠다. 그렇다면. 올가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나. 뜬금없는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쁨 때문에 옷 위에서도 가슴이 작게 콩콩거리는 탓도 있었지만. 우편함에 꽂혀있는 편지를 보게 되었다.

편지를 조명등에 비춰 보자. 간지러움도, 두근거림도 없어졌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씰로 밀봉된 검은 편지. 동족이 보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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