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사심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언제부터였을까. 올가에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혼자 있는 교실에서 창문을 열었다. 가방을 자리에 올려뒀지만,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대로 팔을 창틀에 대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른 시간이라 등교하는 애들이 보이지 않았다. 등굣길이 텅 비었기에. 올가가 기다리던 사람도 잘 보였다.

때로는 기분이 좋은 건지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때로는 잠을 설쳤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노곤하게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걸어왔다. 시선 끝에 바네사가 머무르게 되었다. 바네사를 보면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매일 달라지는 바네사를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지켜보던 바네사가 교실로 오면 인사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게 되고,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즐거움만 앉아있던 자리에. 다른 감정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나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그때 즈음인 거 같았다. 감정과 같이 자리 잡은 질문이 있었다.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서랍 속에 넣고 잊어버린 질문이었다. 꺼내 볼 일이 없어서. 평생 잊어버릴 줄 알았다.

그러다 올가에게 해일이 덮쳐왔다. 바네사가 고백받은 걸 보게 된 날. 뛰쳐나가듯이 집으로 달려가서 그랬을까. 해일은 더 거칠어졌고, 모든 걸 휩쓸어 가버렸다. 간직하고 있던 서랍마저 거친 물결을 못 버티고 부서졌다. 부서진 서랍 속에 담아놨던 것들이 쏟아졌다. 사소하다고 느꼈던 질문마저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나뒹굴던 질문과 엉겨 붙었던 기억을 같이 건졌다. 올가에게 먼저 다가와 줬던 건 바네사였다.

왜. 혼자 있던 올가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넌 왜 그랬을까. 인기도 많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는데. 왜 나였을까. 대답을 찾기 전에 다른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고백하던 사람이 바네사에게 편지를 건네주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은 왜. 그날은 일기를 쓰지 못했다. 남겨보려고 되짚어본 기억이 오히려 종이를 찢을 기세로 거칠게 그은 선을 남기고 말았다.

왜. 짧은 한 글자가 머릿속을 쉴 새 없이 휘저었다. 휘저으면서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올가는 그날 이후로 바네사와 마주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로 피해 다녔다. 애들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려봤다. 어떤 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네사에게 그런 표정을 보여주면 안 될 거 같았다. 생각이 안 들도록 일을 억지로 만들어 봤다. 그러다 도서부 애가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었다.

올가는 다친 애의 몫까지 도맡아서 했다. 애들이 무리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해줬지만. 올가에게 와닿지 않았다. 어찌 되어도 상관없었다. 묵언 수행을 하는 거처럼. 올가는 다른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바네사를 만나는 시간이 더 줄어들었다. 얼굴을 보는 횟수를 손가락으로 세도 될 만큼. 나눈 대화 수를 손가락 하나만 들어도 될 만큼. 애들이 오히려 올가에게 쉬라고 말할 때까지 일했던 거 같았다.

말을 줄이고, 일을 늘리고, 마주칠 기회를 없애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지만. 효과는 없는 거 같았다. 아무리 바쁘게 자신을 스스로 몰아대도. 마음과 머리가 온통 일이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바네사가 고백을 받던 장면이 계속 떠오르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장면을 지울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장면을 지우기 위해 몸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장면은 사라질지 몰라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 바네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반납대에 있던 책 중에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얄궂기도 하지. 방학 숙제로 읽어야 했던 책이었다. 지우려고 노력하는 올가에게 자꾸 계기를 건네줬다. 방학식 때 같이 걸어가던 바네사가 생각났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라서 그런 걸까.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바네사가 가르쳐 준 길을 같이 걸으며. 올가가 다음에 또 오자고 말했을 때. 햇살을 받으며 환하게 웃어줬던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는 미소가 밝다고만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은 그날의 자신 앞에서 웃던 바네사가 다르게 보였다. 뒤늦게 깨달았다. 바네사를 예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매일 쓰던 일기를 쓰지 못했다. 어느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어울리지 않았다. 며칠 동안 겪었던 일을 쓰거나, 느꼈던 감정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일기장에도 머물지 못한 말이 마음속에 가라앉았다. 바네사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행동을 반대로 뒤집으면 그만이었다.

아침에는 교실에 가장 늦게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 오면 도서관에 갔다. 수업 시간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바네사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바네사의 목소리가 부드럽지 않았다. 가라앉은 걸 어떻게든 끌어올리는 느낌이었다.

듣고 있는 올가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공책에 머물던 샤프심이 부러지고 말았다. 왜 행복한 목소리가 아닐까. 고백까지 받았으면서. 대답도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공책에 남은 자국으로 남겨 놨다. 자국을 따라 쓰라림이 느껴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서관에서 돌아가는 길에 자판기가 보였다. 무심코 동전을 넣어버렸다. 음료수 밑에 있는 버튼에 손을 대었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반환 버튼을 주먹으로 꾹 누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동전이 반환 구로 나왔다. 수업 종이 울렸다. 올가는 반환 구에 있던 동전을 찾아가지 않았다. 동전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교실로 돌아갔다.

습관은 무서웠다. 나가던 시간에 맞춰서 운동복을 입어버렸다. 티셔츠 위에 재킷을 걸쳤다. 지퍼를 올리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나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지퍼에 머물던 손이 멈추고 말았다. 방문이 열려 있었기에. 부모님이 거울 앞에 서 있는 올가를 볼 수 있었다. 올가를 보며 오늘도 나가냐고 물었다. 이제 올가가 밤에 나가는 게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옷까지 입어놓고.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잘 다녀오라고 배웅하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분명 방향을 정하지 않고 헤매듯이 걸었는데. 발걸음이 닿는 곳은 하나였다. 어느덧 학교에 오고 말았다. 아직 자습 시간이 끝날 시간은 아니라서. 교문 근처에도 사람이 없었다. 바로 발길을 돌리면. 올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처음 해보는 일은 아니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쉽게 해야 하는데. 올가는 매번 발길을 바로 돌리지 못했다. 무언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다가.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올가는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목적지 없이 떠돌듯이 걸었다. 걷던 도중에 공원 입구가 보였다. 공원에 갔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운동하는 거처럼 뛰어갔다. 길을 따라 힘껏 뛰어가다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느리게 걸었다. 숨을 완전히 고르게 되면 또다시 발을 구르며 달렸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밤공기는 서늘한데 턱 끝에 땀이 맺혔다. 숨이 반밖에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하다. 땀을 닦아내며 다시 숨을 골랐다.

뛰지 못하고 걷기 시작했다.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또 바네사 생각이 났다. 바네사의 모습을 되짚은 게 아니었다. 바네사를 향한 느낌을 되짚어 봤다. 차오른 숨을 밖으로 내뱉을 때마다. 억지로 미뤄놨던 생각이 꺼내졌다. 머릿속에서 이미 모든 모습을 그려봐서 그런 걸까. 바네사를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얘기를 하다 보면 소소한 거까지 말해줬으니까.

이번에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바네사가 올가와 얘기를 나누게 된다면. 올가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것이다. 아침에 일찍 등교한다면. 둘만 있는 교실에서 얘기해주겠지. 고백을 받았다고 말할 때. 아마 밝은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겠다. 고백을 받아줬다고 말할 때. 고백 덕분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꽤 힘들어 보였으니까. 바네사가 직접 말해주는 순간을 맞이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바네사를 피했다. 피하면서도. 완전히 바네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 헤어질 때 뒤에 앉아있던 바네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어떤 감정인지 몰랐기에. 처음에는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바네사가 자신에게 자랑하듯이 얘기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이기심.

친구가 잘되는 걸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가시를 드러낼 거 같다는 치졸함. 좋은 구석 하나 없는 감정이기에. 한심한 모습을 자책했다. 그랬지만. 조금 더 물러서서 돌이켜보니. 단순한 질투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로등 조명을 받으며 우두커니 섰다.

바네사가 그었던 선 안에. 바네사의 옆에. 정말로 자신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다. 마음속에 손을 깊숙하게 넣어봤다. 끝내 내뱉지 못해 가라앉았던 말들이 많았다. 손으로 휘젓다가 손가락에 턱 걸리듯이 닿은 말이 있었다. 바네사에게 고백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여태까지 해왔던 일은 더 못하게 되는 걸까. 그대로 끝내야 하는 걸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질문만 남아버렸다.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이제 소용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안 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쓸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마음속에 가라앉혔다. 다시 걸음을 옮기니 발끝이 한적한 벤치에 닿았다. 벤치에 앉았다. 올가만 앉은 벤치에 빈자리가 생겨버렸다. 비어있는 옆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빈자리에 손을 뻗었다. 식어버린 나뭇결을 만지듯이 손을 얹어봤다.

지쳐 보이던 바네사가 생각났다. 환하게 웃어주던 때와 다르게. 요즘 바네사는 지치다 못해, 위태로운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해 휘청거리는 거 같았다. 찬 공기가 머리맡에 내리 앉자.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듯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고백했던 사람과 잘 된다면. 사랑받으며 기댈 수 있다면. 여름 방학에 지나쳤던 그 날처럼 웃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바네사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올가가 없다 해도. 테두리 근처에서, 바네사의 옆에서 축하하고 싶었다.

나는 그러지 못 해줬으니까. 바네사에게 향한 감정이 어떤 이름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너를 만나서, 네가 말하는 말로 끝을 맺더라도. 앞으로 바네사에게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만큼은 진심인 거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올가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바네사를 피하는 건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바네사를 만나서 얘기를 듣기 전에. 여태까지 피해서 미안하다고. 잘못한 일을 먼저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했는데. 타이밍이 참 좋지 않았다. 책을 옮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조금 있으면 바네사는 교실에서 자습하겠지. 잠깐 교실에 들러서 바네사와 얘기하면 되겠다고. 올가 기준에서는 흠잡을 데 없는 계획을 세웠다. 바네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가 문제였지만. 자신만 알고 있는 고민을 안은 채 문을 열었다.

바네사가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바네사를 불렀다.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이 누군지 아는 걸까. 바네사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대로 올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올가는 자기 쪽을 바라보는 바네사를 보자 멈칫거렸다. 미소 짓거나, 반가워하는 반응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바네사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방금 울었는지 눈 밑도 새빨갰다.

푸른빛이 잔뜩 내려앉은 모습을 보게 되자. 올가는 여태까지 안고 있던 고민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났으니까. 바네사에게 조금 더 괜찮은 말을 해줄 수 있을 거 같았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전부였다. 움찔거리던 손이 바네사 어깨에 닿지도 못했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 올가에게 괜찮다고 말했던 거랑 달랐다. 당황해서 진심으로 끄덕이고 있는 점. 단 하나만이 다행이었다.

직접 물어볼 수 없어서. 올가 혼자서 바네사가 울었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오만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떠올리는 수많은 이유 중에서. 올가가 들어가는 건 없었다.

생각에 빠지던 도중에 고개를 돌렸다. 도서부 애들이 보였다. 머리로는 오해라는 걸 아는데도. 만에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애들을 바라보는 표정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당연히 애들은 오해라며 올가에게 해명했다.

도서부 애들도 상황 파악이 된 건지. 올가에게 네가 책임지라면서 가방을 던져줬다. 뭐라 말도 못 한 채 바네사랑 같이 도서관에서 나와버렸다. 결국 바네사와 마주 서게 되었다.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는 계기가 이런 걸 줄이야. 어색했지만 바네사를 살펴봤다. 눈물은 그친 거 같았다. 그래도 일단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바네사에게 가방에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올가가 조금 걷자고 권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욕심이었다. 방금 울어버린 사람한테 필요한 건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었다. 바네사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마주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두 발자국 정도 앞서 걸어갔다. 걷는 내내 바네사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학교에서 얘기하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고민하던 도중에 또 기억이 끼어들었다. 고백하던 날에, 두 사람을 구경하던 애들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애들이 바네사를 보게 된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따라오거나, 대놓고 물어보겠지. 그러면 바네사가 곤란할 거 같았다. 애들이 없는 곳만 골라서 걸어갔다. 다행히 학교에서 벗어날 때까지 애들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걷다 보니 이 시간에는 공원이 한적하다는 걸 떠올렸다. 바네사와 함께 공원에 갔다. 예상대로 공원은 사람이 없어서 한적했다.

공간이 남아버렸지만. 혼자 앉을 때처럼 텅 비어 보이진 않았다. 올가는 조용히 바네사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름에는 이 시간에도 밝았는데. 지금은 벌써 달이 보였다.

바네사와 만나게 되었고, 대화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온갖 가능성을 담은 시나리오만 만들면서 머리만 굴릴 뿐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다가 바네사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마주 본 올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서론 없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무엇을 사과하나 싶었는데. 여태까지 대화를 끊기게 만들었다는 점과 도서부 애들에게 사정을 들었다면서 올가를 오해했다는 점을 사과했다. 바네사다웠다. 올가에게 나를 왜 피하냐며 따지듯이 물어볼 법한데. 너무 다정한 나머지. 무엇이든 먼저 사과해버렸다. 아무래도 올가가 바네사에게. 품고 있어야 하는 숙제를 한껏 안겨준 모양이었다.

말재주가 도통 없었기에. 어떻게 바네사를 위로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팔짱을 끼고 턱에 손을 대었다.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지. 숨긴다고 모든 게 좋아지진 않으니까 말이다. 바네사를 피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아니었나 보다. 바네사는 올가가 해준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떨궜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올가에게 다시 사과했다.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간 바네사가 또 자기 탓을 할 거 같았다.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원인은 네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바네사가 자기에게 잘해줬던 점을 나열했다. 말하다 보니 깨달았다. 그 정도로 올가를 배려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바네사가 비밀을 숨긴다는 점에 서운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꼭꼭 숨기고 있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는 게 순서에 맞았다.

그런데 나는 어땠나. 바네사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고 오해했다. 일부러 피하면서 일을 키워버린 건 자신이었다. 뒤늦게 미안함이 후회와 함께 밀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너한테 그러지는 말아야 했는데.

흔들리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자니. 마음이 아려왔다. 미안한 만큼 솔직하게 말해줬다. 피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부터 피했던 이유까지. 전부 다 말해줬다.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바네사가 오해하면서 자기를 다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오해를 풀고 올가를 탓해주길 바랐다. 마음에 담아놨던 걸 전부 꺼냈다. 털어도 먼지가 안 나올 만큼 숨김없이 꺼냈다. 모두 다 털어놓고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다. 아무리 바네사라도 이 정도면 화를 내 거나 질책하겠지. 어떤 반응이든 당연한 반응이기에. 담담한 마음으로 바네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바네사에게 돌아오는 말은 질책이 아니었다. 당황함과 어리둥절함이 섞인 목소리로 던진 질문이었다.

 

"좋은 일이라니?"

 

결국 와버렸구나. 운동복을 입었다면 주머니에 손을 숨겼을 텐데. 지금은 교복이라서 손을 숨길 데가 없었다. 주먹을 살짝 그러쥐고 말았다. 대답을 듣게 되는 순간이 와버렸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피하지 말고 마주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음과 다르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말아쥐던 주먹을 살짝 폈다. 말하는 걸 머뭇거리게 되었다. 올가가 머뭇거리자, 바네사가 인상을 살짝 쓰며 재촉했다. 결국 올가 입으로 대답을 구해야 했다.

 

"고백 받았잖아."

 

한 마디에 바네사가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반응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아니라면서, 고백은 거절했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거절했다니. 대답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바네사를 보게 되었다. 놀람과 당황이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올가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반응을 보며 오해의 끈을 조금씩 잡아당겼다.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자.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부끄러움이 가득 차고 말았다.

마른 침을 삼켰다. 민망해졌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바네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도 오해했으니까. 이것마저 바네사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서로 오해로 얽혀 있었다.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쌓아왔던 오해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오해가 무너져 내린 벤치에는 어색함이 남고 말았다. 어색함이 정적을 남기고 말았다.

문을 두드리는 건 늘 바네사였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자기 사정을 말해줬다. 길지 않았다. 요즘 들어 정신이 없었다는. 많은 말을 괄호로 생략해버린 말이었다. 바네사에게 있어서. 그 정도가 최선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조금만 드러내는 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지. 올가는 이해했다. 바네사는 사정을 말하는 거로 끝내지 않았다.

모든 게 끝나면 올가에게 꼭 말해주겠다고 약속하더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다. 남들에게 어려운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올가에게는 너무 쉬운 부탁이었다. 부탁하는 바네사와 눈을 마주쳤다.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니. 바네사가 달라 보였다.

모습을 떠올릴 때 달라 보이던 느낌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매일 두 발자국 거리에서 지켜봤으니까. 바네사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이런 사람일 거라고.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지레짐작해버렸다. 정작 바네사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여태까지 힘들어 보였던 모습. 어찌 보면 자신을 스스로 지켰다는 흔적이기도 했다. 바네사는 계속해서 자신을 지켰다. 이번에 올가에게 부탁한 말도. 혼자서 해내겠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자기 일은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마음. 바네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잘 해결되면 좋겠다. 부탁을 받아주고 진심을 담아서 응원해줬다. 대화가 끝날 때 즈음 가로등이 켜졌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면 훈훈하게 끝날 수 있었는데.

손수건을 돌려받을 때 손가락이 닿아서 그랬을까. 올가는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아주 조그만 욕심이 삐져나왔다. 평소라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텐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바네사는 올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보충 수업 마지막 날에 기다려준 거처럼. 올가는 바네사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 말했다. 올가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네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직 무엇을 부탁할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올가에게 뭐든지 말만 하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어떻게든 보답해주려는 모습이 귀여웠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올가에게만 주어진 특권은 아니었다. 감히 특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다만. 옆을 돌아보면 자신이 옆에 있어 준다는 것. 그것 하나만 알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바네사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핑계를 대며 정당화했다. 욕심을 구석에 숨겨놓은 부탁을 건넸다.

 

"그러다 지치면 그때는 조금 기대줘."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저장해둔 기억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퍼즐 조각처럼 조각 조각나버렸다. 순서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나마 떠오른 게 몇몇 있었다. 바네사와 평소보다 더 가까워졌다. 두 발자국이 아니라. 반 발자국이 되어버린 거리.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코끝에 향이 닿았다. 햇빛 냄새. 오랜만에 느껴보는 향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바네사의 옆모습을 봤다. 매번 코끝에 달려있던 피곤함이 사라졌다. 푸른빛이 살짝 옅어진 게 보였다. 바네사에게 막연한 말을 건넸다.

다 잘 될 거야. 올가는 막연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해결책 없이 막연히 기대를 주게 된다면. 실망만 주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기시감이 들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여름 방학에 책을 빌려줬던 게 떠올랐다. 바네사는 어느새 예외가 되었다. 올가가 만들어둔 규칙이나, 가치관에서 벗어나 버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올가가 내릴 차례였다. 밖으로 나와서 뒤를 돌아보니 바네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똑같이 손을 흔들어 주다가 평소와 다른 점을 눈치챘다. 바네사가 웃고 있었다. 여름에 지었던 미소와 똑같을 수 없지만. 환하게 미소짓는 모습을 마주했다. 심장이 묵직하게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문은 곧바로 닫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바네사는 올가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올가는 누가 볼세라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님과 마주치기 전에 방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들어올 틈조차 만들지 않고 방문을 꽉 닫아버렸다. 심장이 내려앉을 때 반동을 받더니. 마음속에 숨어있던 욕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욕심만 튀어나온 줄 알았더니. 틈을 비집고 이기적인 마음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기적인 마음은 올가에게 반갑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선물이라도 주는 거 마냥. 올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네줬다. 상자를 열자 오늘 담아뒀던 기억이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올가에게 어떤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바네사가 눈을 크게 뜨고, 올가에게 아니라고 말했던 때. 고백을 거절했다고 말할 때의 장면. 일시 정지가 된 장면에서야.

비로소 그때 바네사도, 자기 자신도 몰랐던 변화를 눈치채버렸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 드러났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마음속으로 작게 기뻐했다. 그랬던 이유는. 이유를 찾던 도중에. 올가는 또다시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아까와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이제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고. 귀 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위했지만. 온전히 바네사를 위한 마음이 아니었다. 이제야 확신했다. 좋아해. 세글자를 읊조리다가 입가를 가렸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욕심이 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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