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전환점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시 찾아오게 될 테니까. 언젠가는 올가와 만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엉망진창인 상태로 만날 줄은 몰랐다. 바네사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흔한 말조차 생각나질 않았다. 고장 난 거처럼 멀뚱멀뚱 올가만 바라보게 되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망설임도 없이 바네사에게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민트 향이 더 진해져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올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바네사를 바라보는 얼굴에 걱정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어째서일까. 올가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가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서 눈을 찌푸리는 건 봤지만. 이 정도로 인상을 쓰는 건 처음 봤다.

올가가 바네사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입 모양으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본 거 같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거기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올가는 바네사와 같이 있던 도서부 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머리카락에 가려져서 표정이 보이질 않았다.

애들이 억울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좋은 표정을 지은 건 아니었나 보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역시 좋은 의미로 바라본 게 아니었다. 도서부 애들은 올가에게 투덜거리면서도 가방을 건네줬다. 도서부 일은 됐고, 너 때문에 얘가 울었으니까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는 건 덤이었다. 해명할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얼떨결에 올가와 같이 나오고 말았다.

도서관에서 나오자 올가는 손수건을 건네줬다. 얼떨결에 받았지만 닦아낼 눈물이 없었다. 바네사에게 조금 걷자고 제안했다. 끄덕끄덕.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대답해줘도 될 텐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사소한 거마저도 미안해졌다. 올가는 개의치 않고 걷기 시작했다. 올가를 따라서 걸어갔다. 길고 먼 복도를 걷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애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애들이 없는 곳만 골라서 걸어가고 있었다.

올가는 나란히 서지 않았다. 바네사보다 두 발자국 앞서서 걸어갔다. 바네사에게 말을 걸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올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걷는 올가를 흘끗 쳐다보는 걸 반복했다. 뒷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자꾸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고백하려던 사람이 바네사를 밖으로 데리고 가던. 시작도 끝도 아닌 애매한 지점이었다.

그때는 단편적인 순간으로 받아들였지만. 돌이켜보면 그때도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은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연결된 기억을 끊임없이 겹쳐보고,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도 지금과 똑같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바네사보다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런데도 그 사람과 달라 보였다. 겹쳐있던 모습을 손으로 긁어냈다. 다시 올가가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올가는 운동복이 아니라 춘추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같이 걷는 건 오랜만이었다. 맥락 없는 생각이 떠오르자 정신이 들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학교에서 벗어났다.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공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공원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았지만. 공원에는 희한하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애들은 벌써 돌아가고, 남아있는 애들은 자습을 시작할 시간이라 그런 걸까.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걷게 되었다.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어느새 주황색에서 남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저녁 색으로 물들어진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이 떠 있었다.

올가는 벤치를 가리키며 잠시 앉자고 했다. 오늘은 올가가 제안하는 게 많았다. 바네사가 제안을 받아주는 게 많았다. 오늘만큼은 서로가 바뀐 기분이었다. 한적한 벤치에 앉을 때까지도. 올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지만. 사람 한 명이 더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다.

꼭 쥐고 있던 마른 손수건이 보였다.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올가를 찾으러 갔는지. 보고 싶다는 이유도 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자기를 피하는 이유를 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올가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시선도 먼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용기가 나질 않아 계속 테두리만 겉돌았다. 망설였던 발을 움직였다.

 

"고마워."

그제야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봤다. 바네사도 올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바네사 쪽으로 그림자가 반쯤 져 있었다. 짙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먼저 전하기가 이토록 어려운 줄은 몰랐다. 손수건 끝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미안해."

 

꺼내기 쉽지 않았던 한 마디를 시작으로. 마음속에 있던 서랍을 열었다. 여태까지 담아뒀던 말을 차례대로 꺼냈다. 바네사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뭉뚱그려서 얼버무리지 않았다. 올가가 선심 써서 먼저 다가와 줘도. 바네사는 되려 물러섰다. 대화가 끊기게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호의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올가에게 사과할 첫 번째 행동이었다.

도서부 애들에게 들은 얘기도 털어놓았다. 올가는 멈칫거렸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애들에게 얘기를 듣기 전까지. 올가가 자신을 피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상황이 바네사를 하여금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올가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자신만의 생각에 틀어박혀서. 사정조차 물어보지 않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결과는 보다시피 엉망이었다. 사과해야 할 두 번째 행동이기도 했다.

소리를 내어 생각을 정리해서 그런 걸까. 며칠 내내 진정할 틈이 없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올가는 아무 말 없이, 흔한 위로도 없이. 바네사가 말을 끝낼 때까지 계속 기다려줬다. 모든 걸 털어놓고 올가에게 사과했다.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자기 사정만 실컷 말해두고. 이해해달라는 강요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미안한 마음과 진심을 눌러 담아 사과했다. 올가는 팔짱을 끼더니 턱에 손을 대고 있었다. 고민할 때마다 보이는 버릇이었다.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바람이 두 사람을 두어 번 스치고 나서야. 올가는 숨을 고르더니 바네사에게 말했다.

 

"오해한 게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너를 피했으니까."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걸리는 일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떠올랐다. 역시 내가 한눈을 팔았던 거 때문이겠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과하는 이유를 알았는지. 올가는 고개를 저었다. 바네사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라면서 단번에 부정해줬다.생각이 꼬리를 물기 전에 끊어줬다. 대화가 어긋나는 일이 종종 있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가끔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해줬다. 하지만 올가는 바네사를 비난하지 않았다.

바네사가 흘리고 깜빡했던 걸 올가가 대신 주워서 건네주는 거처럼. 오히려 바네사가 올가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던 걸 하나씩 나열했다. 처음 올가에게 먼저 인사해준 거도,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거도 바네사라고 했다. 여름방학 때 우산을 들고 있던 올가를 위해 한쪽 문을 열어둔 거도 얘기해줬다. 바네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거조차. 올가는 다 기억하고 말해줬다. 내가 그랬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랬어. 짧은 한마디로 확신했다.

건네주는 거로 끝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종종 대화가 끊기는 건 그럴만할 힘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바네사를 이해한다고 말해줬다. 가던 길에 흘렸던 걸 다시 흘리지 않도록. 두 손에 꼭 쥐게 했다. 피하게 된 이유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바네사가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오해하기 전에. 올가가 선수를 쳤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같이 좋아해 주고, 축하해줘야 하는데.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 하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요동치는 감정이 태도로 나타날 거 같았다. 그러다 바네사에게 저도 모르게 상처를 줄 거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도서부 일을 핑계로 바네사를 피해 다녔다고 털어놓았다.

원래 의도가 아무리 바네사를 위한 거라 해도. 결국 바네사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어버렸다면서. 올가도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말하다 보면 핑계나 거짓이 섞인 설탕을 살짝 뿌릴 법한데. 아무것도 뿌리지 않았다. 담백한 사과마저 올가답다고 느꼈지만. 듣는 도중에 물음표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이라니. 며칠 동안 바네사에게 좋은 일이라고는 지금뿐이었다. 올가를 만난 거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좋은 일이 뭐냐고 올가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올가는 대답하는 걸 망설였다. 이상하다. 수상함을 느끼고 끈질기게 물어봤다. 올가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바네사의 재촉에 못 이기고 말을 꺼냈다.

 

"고백 받았잖아. 받아줬…."

"뭐?! 아, 아냐!! 안 받아줬어!"

 

상황 파악이 되어서 눈을 크게 떴다. 고백받았을 때 주변에 애들이 숨어서 엿 들은 건 알고 있었다. 소문이 돌았겠지. 중학생 때도 몇 번 경험했던 일이었다. 쉴새 없이 몰아치는 해일에 휩쓸리다 보니. 소문이 떠도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애들이 소문을 듣고, 반이나 도서관에 소문을 퍼뜨린다면. 올가도 들었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올가에게 오해받고, 얽히고설키는 게 싫었다. 지금 이 만큼의 거리마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바네사 표정에서도 감정이 다 드러난 건지. 올가는 바네사를 보고 놀람과 당황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당황해서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려진 걸까. 반응이 한 박자 늦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걸까. 아. 올가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감탄사 끝에 마른 침을 삼키는 게 보였다. 다른 데로 눈을 돌리며 바네사의 시선을 피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짤막하게 사과했다.

차분하고 딱딱 끊어지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였다. 말끝을 흐렸다. 민망해하는 거 같았다. 매번 보던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스러웠던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런데도 가슴이 작게 뛰고 있었다. 겉꺼풀이 하나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좋아해야 할 부분이 또 생기고 말았다.

짝사랑은 어쩌면 몰래 올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올가가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걸까. 역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구나. 두 손을 들고 순순히 인정하고 말았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냈다.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지금의 자신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면서 대판 싸울 일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게 없는데. 바네사는 계속 변하고 있었다. 오해가 풀리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차갑지 않았다. 시간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며칠 동안 살얼음 같았던 살벌한 정적을 버티다 보니.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그리웠다. 이상한 하루였다. 부모님과 싸울 때부터 지금까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절망적인 하루가 반복되었는데. 올가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의외로 괜찮은 하루가 아니었냐며. 오늘에 붙은 최악이라는 이름표를 떼어주면서. 괜찮은 하루였다고 착각하게 되었다.

자기보다 훨씬 잔잔한 올가가 옆에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잔잔해진 물결을 따라 생각이 흘러갔다. 해일에 휩쓸려서 쓰라린 아픔도, 얼룩진 오해 때문에 끌어안았던 슬픔도, 눈 가리고 아웅 거리며 미뤄뒀던 문제도. 결국은 내 것이다. 남이 해결해 줄 수 없었다. 내 힘으로 스스로 해결해야겠지. 올가와 대화를 나누며 오해를 풀었던 거처럼.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올가에게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볼 용기가 생겼다.

 

"있지…. 여름 방학 때부터 급한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어. 다 해결하면 너한테 꼭 얘기해줄게."

 

평소처럼 대충 웃고, 얼버무리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제 올가한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기다려줘. 올가에게 꼭 얘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완전히 보여주지 않았지만. 숨기거나 거짓을 뿌려놓지 않았다. 마음속 깊숙이 묻어놨던 상자를 꺼내서. 상자 속에 있던 걸 조금이라도 꺼내서 보여줬다.

그 정도만 보여줬을 뿐인데. 올가는 순순히 받아줬다. 숨기는 게 있냐고 추궁하지 않았다.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말해준다고 말하면. 바네사가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줬다. 잘 해결되면 좋겠다며. 자그마한 위로를 건네는 거도 잊지 않았다. 생각 외로 오래 앉아있었나 보다. 공원에 있던 가로등이 켜졌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자습 시간이 끝날 시간이었다.

올가도 시간을 확인했나 보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네사는 일어나기 전에 올가에게 손수건을 돌려줬다. 받고 나서 한 번도 안 썼으니 깨끗하다면서. 고마웠다고 덧붙이며 건네자.

올가는 순순히 받아줬다. 학생증을 건네줬던 때처럼 손가락이 맞닿았다. 뜨겁지 않고 따뜻했다. 올가는 손수건과 바네사를 번갈아서 봤다. 할 말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이번에는 바네사가 기다려줬다.

자기도 바네사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 했다. 바네사가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대답하자.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답하는 모습이 웃긴 건지. 바네사를 보고 웃음을 빚어 입술에 얹었다. 혼자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지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 기대 달라고.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너무나 다정한 부탁이었다. 부탁만 들어도 올가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가슴 속으로 올가의 마음이 젖어 들었다. 두근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여름 방학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작은 두드림이 귓가에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내가 가진 문제를 남이 해결해 줄 수 없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더 앞서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다.

아무도 없던 공원을 벗어나서, 시원한 남빛이 내리 앉은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니 희미했던 달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천천히 걷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신호를 기다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반 발자국 거리를 두고 걸어가고 있었다. 매번 유지하던 거리가 좁혀졌다.

가끔 어깨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공원에서 돌아가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올가는 멀어지지 않았다. 가까워진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다 잘 될 거야.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토닥여주는 말이 무척이나 따뜻했다. 올가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자. 어느새 올가도 돌아봐 주고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히고, 한 층을 더 올라가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바네사가 내릴 차례였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 발을 디뎠다.

꼭 길을 알고 있어야 걸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길 위에 서 있다면. 일단 그 길을 걷는다. 그러다 막다른 길에 닿으면. 뒤돌아서 또 다른 길을 걸으면 된다. 막다른 길까지 닿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결심을 했는지도 모른다. 문손잡이를 잡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른 길을 걷든, 머무르든.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었다.

거실에는 간이불이 켜져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든 소파에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는데도 시선은 창밖에 머물고 있었다. 며칠 내내 그랬듯이. 부모님이 그러거나 말거나 방으로 들어가면 되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에 우두커니 섰다. 조명이 꺼지고 말았다.

바네사에게 있어 부모님은. 서 있기도 힘들 만큼 거센 물결이었다. 발을 잘못 디디면 넘어질 거 같아서. 쉽게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을 뿐이었다. 매번 뒤를 돌아보거나,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거센 물결과 함께. 바네사는 늘 마음속에서 난기류를 느끼는 거 같았다. 불규칙적이고 기분 나쁜 진동이. 어떻게 해결 해야 할지 몰라서 찾아오는 혼란스러움이. 항상 마음을 괴롭혀왔다. 좋게 해결되거나, 잘 풀릴 거 같다는. 막연한 믿음 같은 건 없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가자. 현관 조명이 다시 켜졌다. 매끄러운 바닥에 닿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애꿎은 가방끈만 꽉 쥐었다. 부모님에게 다가갔다. 먼저 인사했다. 부모님은 당황한 얼굴로 바네사를 바라봤다. 바네사는 동요하지 않았다.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이라고 해서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가가 그렇게 응원해줬다면. 불안한 마음을 안고, 물결을 거슬러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견디지 않으면 주저앉게 되어버리니까. 이겨내고 싶었다. 이겨내지 않으면 약속을 지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앉기 전에 식탁을 손바닥으로 꼭 짚었다. 식탁을 짚은 채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바네사가 의자를 끌어와서 앉자, 부모님은 맞은편에 앉았다. 부모님하고 다시 마주 앉게 되었다. 누군가가 손목시계 옆에 달린 버튼을 잡아당긴 거 같았다. 시곗바늘이 멈췄다. 바네사 앞에 찻잔이 놓였다. 주말에 맡았던 향과 같은 향이 느껴졌다. 같은 찻잔에 같은 차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잡아당겼던 버튼을 뒤로 돌리자, 뒤로 향하는 시곗바늘처럼.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어떨지 몰라도. 바네사는 달라졌다. 달라지긴 했지만. 경연 대회에서 바이올린으로 첫 음을 낼 때처럼 떨렸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바네사가 꺼낸 얘기는 짧았다. 억지로 대회에 나가거나, 강요받는 건 싫었다. 싫은 건 싫다고 했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싶은 건지, 계속하고 싶은 건지 아직 모르겠다.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서랍에 넣어놨던 걸 차근차근 분류했다. 다르게 생각할 여지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말했다. 단호했지만 원망은 섞이지 않았다. 부모님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만을 말했다. 그리고 가장 끄트머리에 넣어놨던 말을 꺼내서 부모님에게 보여줬다.

 

"앞으로는 제가 선택하고 싶어요."

"…선택에 책임이 따르는 건 알고 있지?"

 

부모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전까지 생각한 게 있었다. 부모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듣게 된다면. 감정이 또 넘쳐나지 않을까. 넘친 감정이 싸움으로 번지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앞섰는데. 부모님이 던진 질문에 가시가 돋아나지 않았다. 바네사도 감정이 치솟지 않았다.

덕분에 조금 더 물러서서. 마음속에서 꺼낼 말을 차분하게 고를 수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할 거라면. 적어도. 내가 선택하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조금씩 선택을 늘려가다 보면. 언젠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떤 걸 원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멀리 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보이지 않을 만큼 멀더라도. 마음에 방향을 정해두고 싶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맞는 길로 가는 건지 아직 헷갈리지만 말이다.

최소한 자신과 관련된 것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바이올린이든. 미뤄와서 쌓여있는 마음속 문제든. 이쯤 되면 부모님이 무슨 소리냐며 따질법한데.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예전과 다른 반응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듣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버렸으니. 지긋지긋하게 붙들고 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싶었다. 또다시 싸움이 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털어놓고 싶었다. 차분함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식어버린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응원해달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알려드리고 싶어서 얘기한 거뿐이에요."

"…."

"만약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제가 선택한 거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진심으로 말했다. 이 정도로 말했으니 한바탕 밀려오겠지.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았다. 감싼 손에 힘을 주자 물결이 쳤다.

 

"…그래, 알겠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놀라서 움찔거리고 말았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며칠 만에 부모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걸까. 눈이 살짝 충혈 되어 있었다. 눈과 볼 밑이 푹 파여 검은 그림자가 졌다. 부모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네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바네사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쉬거라. 짧은 말을 마지막으로. 바네사를 지나쳐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히 닫혔다.

그때와 똑같이 바네사만 남겨지고 말았다. 바네사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찻잔을 바라봤다. 물결치던 찻잔 속이 어느새 고요해졌다. 차를 마셔봤다. 지금 겪고 있는 상황처럼 미지근했다. 차를 다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자. 맨 끝의 건반을 누를 때 나는 낮은음처럼 한꺼번에 힘이 빠졌다. 긴장했던 다리가 반쯤 가라앉았다.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실감이 나질 않아서 몇 번이고 볼을 꼬집어봤다. 꼬집을 때마다 아픈 걸 보면 현실인 거 같은데.

알 수 없는 짜릿함에 입꼬리가 자꾸 올라갔다.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입가를 가린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손바닥에서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기분이 좋은 걸 보면. 정말로 후련한가 보다. 골치 아플 거 같았던 문제가 생각보다 빨리 해결되었다. 정말 이렇게.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걸까. 바네사는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짧은 웃음소리를 내버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스위치를 눌러버린 기분이었다. 그때만큼은 바네사를 방해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후련함을 마음껏 즐겼다.

처음으로 해방감과 승리감을 느끼게 되어서 그런 걸까. 그날은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다음 날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하다 못해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교복을 입고 등교 준비를 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부모님과 마주쳤다.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스치는 찬바람마저 기분 좋게 만들었다. 미소를 지은 채 걸어갔다.

학교에 오자마자 교무실로 향했다. 깜빡하고 교실에 먼저 갔다가, 교무실을 오갔던 걸 반복하다 보니. 머릿속에 저절로 입력되고 말았다. 제일 먼저 교실 문을 여는 게 익숙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열쇠를 챙기려고 했다. 교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곳에 시선을 옮겼다.

자리가 비어 있었다. 걸려있어야 할 열쇠가 없었다. 그렇다면.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때문에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급했는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바네사를 보더니. 선생님이 뛰지 말라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

서둘러서 교실로 가보니. 교실 문이 열려 있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열려있는 교실 문 틈새로 비친 모습을 봐서 그런 건지. 마음이 주체 못 하고 뛰기 시작했다. 문을 요란하게 열고 말았다. 문턱 너머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너였구나. 풀어내지 못한 유일한 문제이자. 바네사가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네가 있었다.

올가는 요란한 소리에 놀란 기색이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네사를 바라봤다. 올가의 두 눈동자에 오롯이 바네사만 담겨있었다. 미소를 지으며 인사해줬다. 그 모습에 숨이 차오르는 거도,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달라붙은 거도 잊어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분명 마음속에 남아있는 문제인데. 미소를 숨기기 힘들었다. 올가라는 문제를 풀어내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 될지 모르고,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왜일까. 언젠가는 풀어낼 수 있을 거 같다고. 막연히 믿게 되었다. 무언가가 다시 시작될 거 같은 설렘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밖에서 햇빛이 들어왔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바네사를 가득 담았다. 바네사도 올가를 가득 담고 미소를 지었다. 올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마치. 처음 보는 거처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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