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시간과 시간 사이
뱀파이어 물네사 x 엘프 물올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건조한 하루다. 일정 확인하고, 서류를 작성하고, 업무 메일을 보내고. 아무 문제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다섯 손가락이 처리한 서류를 툭툭 치고 있었다. 의자를 반쯤 돌리자 시원하게 뚫린 통창이 올가를 반겼다. 구름 없는 하늘이 화창했다. 파랗고도 파란 물속에 담아둔 하얀 캔버스처럼.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올가가 티도 안 날 정도로 파란색이 번져갔다.
하늘이 점점 깊어졌다. 밤공기가 점점 서늘해질 때부터 느꼈지만. 계절이 바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창밖을 봤다. 올가밖에 없는 사무실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따뜻한 햇볕이 슬며시 다가와 검은 구두 발치까지 드리웠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아득한 기분이 들거나, 아름답다고 느끼고도 남을만한 풍경이었다. 스며드는 햇빛이 간지러워 눈을 감았다.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제야 올가는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등졌다. 안으로 들어온 직원이 올가에게 다가왔다. 직원은 올가에게 결재할 서류를 확인해달라고 했다. 서류 하나가 책상 위에 펼쳐졌다. 동시에 핸드폰도 반짝였다.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간 한 문장. 올가는 서류를 보던 와중에도 반짝였던 문장을 놓치지 않았다.
오늘 영화 보러 가지 않을래요?
부지런히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에 비해 머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서류에 검토하는 내내 이웃의 모습이 수도 없이 그려졌다. 조그만 소동 이후로. 바네사는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교류가 필요하다면서 전화번호를 교환한 건 덤이었다. 번호를 알려주고 나서.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거 외에도. 바네사는 올가에게 드문드문 문자를 보내곤 했다. 방해될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조용했던 일상이 부산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영화라.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기 전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떻게 이 시간에 보낸 거지. 햇빛이 내리비치는 이 시간. 바네사한테는 한밤이나 다름없는 시간대이었다. 바네사는 올가와 다르게 잠을 적게 자면 피곤해했다. 자야 할 시간에 문자를 보내는 걸 보면. 올가에게 맞춰주려고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랜 시간 사는 뱀파이어인데. 자기 나름대로 관리하고 있겠지. 자기와 비슷한 존재라고 의식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걱정하는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수많은 생각 중에 타협안을 건져 올렸다. 오늘 만날 때 물어보자. 손은 펜을 잡고 서류에 서명했다.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주면서 고개를 들었다. 직원 표정이 이상했다. 긴장한 게 아니었다. 망설이는 눈빛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말하기 편하게 해줘야겠지. 올가는 우물쭈물하는 직원에게 물어봤다.
"보고할 사안이 남아있습니까?"
"그게…. 서류가 아니라 대표님 핸드폰을 주셨는데요…."
말을 따라 자기 손을 바라보니. 서류가 아니라 핸드폰을 건네고 있었다. 어쩌면. 누가 누구를 걱정할 상황이 아닐지도.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회의가 생각보다 더 늦게 끝나버렸다. 바네사한테 조금 늦을 수 있다고 미리 연락은 했지만. 올가에게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화관이 있는 건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다행히 약속 시각보다 늦지 않았다.
바네사가 미리 알려준 영화관 쪽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올라가면서 바네사의 모습이 서서히 보였다. 바네사는 팜플렛을 구경하고 있었다. 올가와 같이 볼 영화를 고르는 모양이었다. 다 올라오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올가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잠은 충분히 잤는지 맑은 눈빛이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미소도 여전했다.
오기 전에 결정해둔 타협안이 소용없게 되었다. 어쨌든 바네사가 괜찮아 보이니까. 그걸로 됐다. 타협안은 곱게 접어서 마음속 서랍에 넣었다. 오히려 바네사가 올가를 걱정했다. 덕분에 서로 안부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인사를 끝내고 영화를 고르려고 했는데. 심야 영화다 보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상영 시간이 가까운 영화를 선택했다. 팜플렛을 보니 내용도 무난해 보였다.
무인 발권기에서 표를 끊고, 시간이 되자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상영관을 통째로 빌린 거도 아닌데. 들어간 상영관은 텅 비어있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도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두 사람은 정중앙에 앉았다. 좌석에 앉고 나서 얼마 가지 않아 조명이 꺼졌다.
팜플릿에서 적힌 내용대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영화를 조금 더 보니 확실해졌다. 대성당 아래에 있는 커다란 공원, 오후가 되자 무더기로 밀려온 사람들, 크게 틀어둔 라디오. 사람들이 입은 옷이든, 화면에 걸린 라디오든. 과거가 묻어있었다.
지금보다 꽤 거리가 있는 시절이었다. 이제는 책이나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올가에겐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리운 풍경이었다. 사람들을 담아둔 색감은 따뜻했다. 뒤돌아서 시간을 더듬어봤다. 어렴풋이 세어도 사십여 년이 훌쩍 지난 풍경이었다. 풍경을 감상하던 도중에. 작게 속삭이는 한 마디가 끼어들었다.
"저 옷 아세요? 예전에 유행했던 옷인데."
바네사도 올가와 비슷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구나. 한 마디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올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네사는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올가도 저런 옷을 입어봤냐고. 글쎄. 저런 옷을 입어 봤던가. 기억을 담아둔 서랍을 열어서 찾아보니. 그때 기억은 흐릿한 형채만 남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입은 걸 본적은 많았는데. 입은 적은 없었던 거 같았다. 기억나는 만큼 말해줬다. 표현력이 부족한 말이었지만. 바네사는 그대로 수긍해줬다. 이후에도 추억을 건드릴만할 소재가 많이 나왔다. 아무도 없는 극장이라서 큰 소리를 내도 괜찮았지만. 두 사람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도 몇몇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나왔던 시간을 지금과 이어붙일 수 있다면. 영화는 그걸로 역할은 다 한 거다. 두 사람만 추억 할 수 있는 시간을 공유했기에. 영화를 보면서도 서로의 문장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추억 여행을 끝낼 때. 주인공도 여행을 끝났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지막 장면이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네사는 앉은 채 엔딩 크레딧을 봤다. 바네사의 옆 모습은 올가가 봤던 모습과 달랐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보이는 건 엔딩 크레딧 뿐이었다. 올라가고 있는 글씨 너머에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이제야 올가가 보였나보다. 엉거주춤 일어나며 지루하면 가도 괜찮다고 했다. 다 보고 가도 괜찮다며 자리를 지켰다. 바네사도 도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이었다. 영화관에서 대화를 나눈 것도.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남아있는 것도. 한 번 정도는 할 법했는데 왜 못 했을까.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보려고 하는지. 지금은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바네사는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크레딧을 끝까지 보고 나서 밖으로 나올 때까지. 영화에 대해 얘기를 했다. 영화에서 보여준 시간의 모습과 기억 속에 담아둔 시간의 모습을 비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얘기하는 바네사의 모습을 보니 즐거워 보였다. 영화를 보기 잘했다면서 만족한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크레딧을 보고 있을 때와 정반대의 눈빛이었지만. 정말로 즐겁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즐거움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주변에는 지루한 삶이라며 불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올가는 원래부터 즐거움을 찾는 편은 아니라서 개의치 않았다. 마음에 담아둘 게 별로 없었기에 흘러가는 대로 흘러갔다. 건조하다면 건조한 올가에 비해서. 바네사는 작은 즐거움을 찾고, 누릴 줄 알았다. 저런 점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날이 쌓일수록. 즐거움을 찾는 건 더 어려워지니까.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 차가운 밤하늘, 꺼져 있는 신호등, 둘만 서 있는 텅 빈 시내, 길거리를 겨우 비추는 가로등. 달랐지만 익숙한 세상이었다. 영화는 특별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영화관을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았다. 짙은 밤공기가 맴돌고 있는 두 사람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목소리 대신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신호등이 꺼져서 신호가 없는 걸 아는데도. 두 사람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지나갈 리 없는 차가 오는지 확인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매번 차가 지나가는 시간에 걷는 올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네사도 차를 살피는 게 익숙해 보였다. 건너편 보드 블록에 발이 닿을 즈음.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도 차가 가끔 지나가더라고요."
어설픈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본질을 희석했다. 낮처럼 행동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과 어긋난 시계가 약점이 되어버린 걸까. 오랜 시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약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가 뭐라 해도 바네사에게 이 시간은 낮이니까. 적어도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은 앞서지만 배려하는 방법은 아직도 모르겠다. 저번에도 앞서가다가 사고를 치지 않았던가. 올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길을 건널 때는 언제나 조심해야죠."
길을 건너갔을 뿐인데. 밤이 더 깊어졌다. 그렇게 걸었는데도 둘만의 하늘이 번져갔다. 두 사람은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깊은 밤에 가라앉는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왜일까. 같이 걷고 있는 바네사를 보자 영화가 생각났다. 우연히 만나서 친해진 뱀파이어와 같이 영화를 보고, 새벽을 가로질러 산책하고 있는 일.
오늘 일도 돌아보면 영화 속 풍경처럼 추억이 되겠지. 그만큼 시간이 지나면. 그만큼 긴 시간이 지나면. 어떤 기억이 되어있을까. 적어도 나쁜 기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 바람이었다. 이렇게 깊은 밤을 같이 걸을 수 있는 친구는 흔치 않으니까. 걷던 도중에 바네사가 말했다.
"다음엔 올가 씨가 알려줘요."
"…어떤?"
"어떤 걸 하면서 밤을 보내는지요. 서로 알아가기로 했잖아요?"
걸음을 멈추고 바네사를 바라봤다. 바네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원하는 걸 했으니, 다음에는 올가가 원하는 걸 하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같이' 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그래서일까. 누군가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모르면서. 올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공평한 거라면. 나름대로 노력해봐야겠지.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계속 보게 될 테니까. 옅은 가로등에 남아있는 여운을 툭툭 털어내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작별 인사나, 헤어짐 없이. 지금은 약속만 담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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