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연체 도서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내일이 오면 올가에게 바로 책을 돌려주자. 그렇게 다짐했건만. 바네사는 올가에게 빌린 책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했다. 이유는 그때그때 달랐다. 서랍 속에 넣어뒀던 수많은 이유를 꺼내서 골라봤다. 올가가 음료수를 들고 있었다. 더워 보이는 데 이거라도 마시라면서. 바네사에게 건네줬다. 음료수 표면에 이슬이 맺혀있었다. 차갑지 않고 미적지근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단맛이 퍼졌다. 달콤한 향이 입에 남았다.

너무 달콤한 맛에 적응하지 못한 걸까.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손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다 마실 때까지 음료수를 두 손으로 쥐게 되었다. 가방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덕분에 돌려줄 책을 꺼내지 못했다. 내일 보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현관문을 닫고 나서야. 책을 돌려주지 못한 걸 깨달았다. 짧게 탄식하며 이마를 쳤다.

또 뭐가 있을까. 올가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어 올리는 걸 봤다. 능숙한 손길로 머리를 묶자. 얼굴선과 예쁜 목선이 드러났다. 화사한 햇빛이 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바네사의 모든 생각이 눈부신 모습 때문에 묻혀버렸다. 넋 놓고 바라보느라. 책을 건네줄 틈을 놓치고 말았다. 꺼내 보니 부끄러워질 정도로 사소한 이유밖에 없었다.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였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로. 바네사는 계속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도서관 대출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바네사가 책을 빌린 지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올가가 빌려준 책은 연체 도서가 되었다. 바네사는 연체자가 되었다. 바네사에겐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학교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학생들이 책을 반납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다를 바 없었다. 가끔 올가가 반 애들에게 대여한 책이 연체되었다고 알려주곤 했다. 반납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도서부인 올가의 몫이었다. 올가는 어떤 요령도 쓰지 않았다. 그저 연체되었다는 사실만 담담하게 말해줬다. 감정이 안 읽히는 무표정과 차분한 목소리가 무섭게 다가온 걸까. 애들은 올가가 말해주면 바로 책을 반납했다. 되짚어보니 책을 건네줄 때 바들바들 떠는 애도 있었다. 덕분에 장기 연체 도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애들한테 말해줬던 거처럼. 자기한테 말해주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면 애들처럼 올가에게 바로 돌려줄 수 있을 텐데. 바네사가 내심 바랐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가는 묵묵히 기다려줬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복도에서 바네사를 기다려줬다.

소식 없는 책에 관해 물어보지 않았다. 빌려줬다는 기억을 잊어버린 걸까. 그날도 올가에게 책을 돌려주지 못했다. 또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지금이라도 불러야 할까. 입이 달싹거렸지만 열리지 못했다. 닫히는 문 틈새로 올가가 보였다. 마른 침을 삼켰다.

아. 또다. 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문이 닫히자 옅게 뛰는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낮은 한숨을 쉬었다. 미룬 건 방학 숙제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바네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미루게 되었다.

너무 신경 써서 그런 걸까. 꿈을 꾸고 말았다.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를 푸는 꿈이었다. 시험지에는 문제가 하나밖에 없었다. 시험지 옆에 놓인 책이 보였다. 참고할만한 책일까. 자세히 보니 올가에게 빌린 책이었다. 딱 봐도 도움이 될만할 책은 아니었다. 바네사는 문제를 보고 당황했다.

올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올가에 대한 문제였다. 주관식은 아니었다. 보기 중에 알맞은 답을 고르는 객관식이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다. 솔직하지만 속을 알 수 없다. 이해심이 깊고 다정하다. 전부 다 맞는 말 같았다. 눈으로 보기를 읽어가던 도중에. 마지막 보기를 보고 멈칫했다.

좋아한다. 잠깐만. 이런 거는 왜 있는 거지. 좋아한다니.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실제로 보는 시험이면 선생님에게 이의 제기라도 했을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없지만, 올가가 보였다. 문 앞에 올가가 서 있었다. 바네사를 한 번 보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떠나야 하는 시간인 건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떠나려는 올가를 보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펜이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다급함이 앞섰다. 올가를 부르려고 하는 순간. 알림 소리가 들렸다. 눈을 번쩍 뜨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부모님이 그만 일어나라고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 참.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볐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TV를 보니 비가 내릴 수도 있다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날씨도 참.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으려고 했다. 지퍼를 열다가 안에 있는 책을 보고 멈칫거렸다. 책이 흐트러지지 않게 반대쪽에 넣었다.

오늘이야말로. 올가에게 책을 돌려주자. 수업을 들으며 필기를 하던 도중에 다짐했다. 이상한 꿈을 꾸게 된 거도 책 때문이겠지. 미뤄둔 숙제는 빨리 해결해야겠다. 여름과 마찬가지로. 핑계 대기 쉬운 단어가 되었다. 이유마저도 숙제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해결했다.

올가를 만나면 바로 건네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한 바네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교실 안이 어둑어둑해졌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조명은 켜져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회색빛 구름이 바네사를 반겨줬다. 창문을 빗줄기로 툭툭 건드렸다. 코끝에 눅눅한 습기가 얹어졌다.

수업이 끝나자 애들은 비가 왜 이렇게 자주 오냐며 한두 마디씩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에 성이 난 걸까. 으르렁거리더니 천둥번개가 쳤다. 가방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올가는 장대 우산을 들고 있었다. 꿈과 다르게 시계는 안 차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나 싶었더니.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들고 있던 우산이었다. 올가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또다시 들리는 굉음 때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교문으로 가보니 파란 비가 쏟아졌다. 굵은 빗줄기를 보니 소나기로 순순히 끝날 생각은 없는 거 같았다. 이럴 줄 알고 챙겨왔지. 우산을 챙겨온 자신을 마음속으로 칭찬했다. 가방을 열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올가와 눈이 마주쳤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묻은 건 없었는데. 바네사를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가방을 향하던 손이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바라보는 눈빛에 우산을 꺼내야 하는 걸 까먹고 말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짧은 사이에 올가가 정해둔 시간이 다 지나갔나 보다. 짤막한 말이 들렸다. 같이 쓰자. 한 마디에 모든 게 파악이 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산을 안 가져왔다고 착각했나 보다. 오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올가가 더 빨랐다.

우산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되돌릴 틈도 없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우산이 펴졌다. 먹구름 때문에 칙칙했던 풍경이 한층 더 밝아진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양심은 올가에게 사실대로 말하라고 떠넘겼다. 우산이 있다고 말해. 비릿한 흙내음이 올라왔다. 사실을 담은 말을 입 밖까지 밀어내던 양심이. 잘 가다가 어딘가에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장대 우산이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기엔 좁았다.

둘 다 비를 안 맞으려면 완전히 붙어야 할 정도였다. 어떤 의미냐면. 올가와 더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마른 침을 삼켰다. 막혀있던 말이 마음속으로 삼켜졌다.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거리를 두느라 어깨가 우산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리는 비가 어깨에 스며들었다.

올가는 이상한 걸 알아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다가가지 않았다. 우산을 바네사 쪽으로 기울여줬다. 직접 바네사를 붙잡아서 자기 쪽으로 이끌지 않았다. 말로 이끌어줬다. 아무것도 붙이지 않는 담백한 말이지만. 바네사한테 너무 다정하게 들렸다. 바라보는 눈빛마저 부드러워 보였다.

 

"비 맞겠어. 더 가까이 와."

 

주춤거리며 올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은 두 발자국 떨어진 거리를 유지해왔다. 여태껏 좁혀지지 않았던 거리가. 우산을 같이 쓴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좁혀졌다. 비를 머금은 공기는 파도 같았다. 습기가 묻어났다.

파도에 밀려오는 건 습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민트향이 습기를 머금고 더 진해졌다. 예전에도 맡아봤지만. 가까이 있다 보니 확실히 알겠다. 올가를 볼 때마다 민트향을 맡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온몸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하고 싸한 향기 덕분일까. 습한 공기를 마시는데도 답답하지 않았다.

걸어온 길이 얼마나 된다고 벌써 신발 속으로 빗물이 새어들었다.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거센 비를 헤쳐 나가는 건 올가한테도 어려웠나 보다. 그럴 만 했다. 혼자 걷는 거면 모를까. 누군가와 같이 우산을 쓰고 가는 거니까. 걸어가는 내내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적막 사이를 빗소리가 채워줘서 어색하지 않았다.

우산에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상하다. 비가 오면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신호에 걸려서 잠시만 멈췄으면 좋겠다. 우산을 쓰고 같이 걷는 시간이. 조금 더 길게 이어졌으면 좋겠다.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다가 넣어뒀던 우산이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적에. 간식을 몰래 꺼내먹고 싶었다.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어린 애가 말하는 엉성한 거짓말은 들키기 마련이었다. 당연히 부모님에게 엄하게 혼났다. 이후에 거짓말했던 걸 후회했다. 어린 바네사는 두 번 다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바네사는 거짓말을 했다. 오랜만에 해버린 거짓말에는 후회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설렘은 가슴을 뛰게 했다. 어렸을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킬 거 같은 조바심에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린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가방 안에 여전히 우산이 들어있었다.

자기만 아는 사실이 올가에게 들킬 거 같은 마음에. 혹시나 우산이 들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러는 게 아닐까 하고. 곁눈질로 올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올가는 계속 우산을 들고 있었다. 애꿎은 가방끈만 더 꽉 쥐었다.

물에 젖은 길을 헤치고. 드디어 아파트에 도착했다. 체감상 몇 시간은 걸은 거 같았다. 여전히 비는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 우중충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올가를 위해 한쪽 문을 완전히 열어줬다.

올가는 바네사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우산을 접었다. 우산 끝에 빗물이 뚝뚝 흘렀다. 들어가기 전에 우산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바네사를 따라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 물기를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어서. 걸어가는 대로 우산에 묻은 물기가 따라다녔다.

엘리베이터에서 누르는 버튼에도 물기가 묻어났다. 뒤늦게 에어컨 바람이 두 사람을 덮쳤다. 습기를 빳빳하게 말리는 냉기였다. 찬바람에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 층 차이라 별 차이가 없지만. 올가가 먼저 내려야 했다. 슬슬 헤어질 시간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고마움을 전해야 할 거 같아서. 올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올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우산 씌워줘서 고마워."

"응. 내일 보자."

 

문이 열리고 올가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꿈에서 등을 돌리던 게 떠올랐다. 그 때문일까. 가방 안에 있는 책이 떠올랐다. 책을 떠올리고 나서야. 올가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바네사는 어깨가 젖지 않았다. 가방에 물기가 살짝 묻은 건 별거 아니었다.

올가의 어깨가 푹 젖은 게 보였다. 팔뚝에 빗물이 흐르고 있었다. 흘러내리던 빗물은 탄탄한 팔을 타고 흐르다가. 손가락 끝에 매달렸다.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보자. 처음으로 올가가 다르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깨달았다. 여름 방학 동안 올가를 이름으로 부를 일이 없었다. 한 글자를 밖으로 내려는 순간. 짜릿하고 따끔한 느낌이 귀까지 올라왔다. 이름을 부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닫히려는 문 틈새에 발을 끼웠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열렸다.

올가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는 열린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올가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비에 젖지 않은 손으로 올가에게 책을 건넸다.

 

"이거…! 잊어버릴 뻔했어."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미루는 건 반항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 해결하기 싫은 마음에 미루고, 또 미뤄왔다. 감정이 흘러가던 마음속에 댐을 놓았다. 숙제를 풀어내면서 스스로 댐을 무너뜨렸다. 뒤에 쌓여 왔던 감정이 저절로 쏟아지면서 바네사를 덮쳤다. 꿈에서 풀어야 했던 문제를 뒤늦게 풀어냈다. 마음속으로 보기 중 하나에 표시했다. 좋아한다. 덮쳐온 감정에 흠뻑 젖다 못해 발이 닿지 못할 정도로 잠겨버렸다.

여름도. 숙제도. 이유가 되어주지 못했다. 핑계 대지 않았다. 마음은 호수보다 점점 커지다 못해 바다가 되어버렸다.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전개되는 일은 없었다. 올가가 미소를 띠며 책을 받아줬다. 내일 학생증을 돌려주겠다고 해줬다. 손가락이 닿았다. 헷갈리지 않고 확신했다. 네가 좋아져 버렸어. 바네사는 미뤄왔던 숙제를 드디어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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