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그림자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같이

"요즘 비가 잦네요."

바네사가 내민 손바닥에 빗방울이 담겼다. 손금 사이로 밀려나던 빗방울은 속절없이 밑으로 흘러갔다. 모든 게 아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일이 끝난 이 시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비로 적셔져서 색이 더 짙어졌다. 파견을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쏟아지다가 잠시 멈춰 숨을 고르기도했다. 끝난건가 싶어서 우산을 내리면 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틈이 있어도 끝은 없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옆에 있던 올가는 동의하면서 바네사에게 우산을 건넸다. 우산. 파견을 나와서 처음으로 산 물건이였다. 얼마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우산마저 사온 날부터 지금까지 착실하게 쓰고 있었다. 바네사는 오늘도 우산에 감사해하며 올가와 같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반기는 건 온기가 아닌 한기였다. 얇게 저민 공기 사이를 빗방울이 겹겹이 틈을 메웠다. 폐허마냥 온기 하나 느낄 수 없는 한기가 서려왔다. 온기를 뺏긴 실내 분위기도 음산하게 물들었다.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몰래 새어 나온 달빛이 바닥을 캔버스 삼아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유령의 손가락처럼 늘어지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올가는 한숨 쉴 시간조차 아까운 건지 조용히 걸어갔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등불을 켰다. 등불에 붙은 주황색 불이 어둠 뿐만 아니라 한기까지 몰아내는 느낌이었다. 한기를 정리하고, 두 사람 다 목욕을 끝내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서야. 긴장 때문에 바짝 솟은 어깨가 내려올 수 있었다. 피곤해서 침대에 걸터앉은 바네사와 달리, 올가는 책상 쪽으로갔다.

올가와 같이 파견을 나와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올가는 자신이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조건 해야했다. 그 누가 말리든, 반대하든. 바네사도 한 두번 올가를 말렸으나. 결과는 뻔했다. 괜찮다는 말이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면 답답해 할지도 모르지만. 바네사는 올가를 이해했다. 그렇게 해야만 떨쳐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겠지. 그렇기에 오늘도 바네사는 올가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사부작 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아는 건지. 올가는 바네사 쪽으로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바네사도 예의상 너무 늦지 않게 자라는 인사로 답했다. 빗소리도 잦아들고, 사각거리는 펜 소리가 일정해서 그런걸까. 바네사는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올가의 뒷모습을 보며 바네사는 서서히 눈을 감고 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네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건 위화감이였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올가는 없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먼저 일어난 올가가 바네사에게 인사해주는 게 일상이었다. 창 밖을 바라보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거나, 장비를 정비하고 있거나. 어떤 일을 하든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고개를 돌려서 바네사를 바라봤다. 가끔은 잠이 덜 깬 바네사에게 더 자라고 권해줬다. 노곤한 눈을 깜빡이며 올가를 보다가 다시 잠든 일도 다반사였다. 그랬는데. 매번 바네사 옆에 있어줬던 올가가 없었다.

"올가 경?"

바네사가 질문했지만, 올가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대충 옷을 걸쳐입었다. 책상에 놓인 등불을 만져봤다. 등불은 잔열기도 없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올가가 없었다. 바네사는 모자를 쓰고 올가를 찾으러 나섰다.

어째서인지 발에 추가 달린 거처럼 무거웠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발밑에서 진득한게 붙었다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끈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 같은데. 이상한 느낌에 밑을 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착각이겠지. 기분탓 일거야.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나아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바네사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가 그새 그쳤나. 밖으로 나가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밖으로 나왔는데도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상했다. 구름도 없는데 하늘이 새하얗다. 하늘 뿐만 아니었다. 바네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이 색을 잃었다. 색깔을 잃어버린 세상이었다. 어느샌가 바네사는 달려가고 있었다. 길에 부딪히는 구두 굽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고요함이 바네사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뚫린듯 허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중한 무언가 잃어버린 거 같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추운거 같았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광장이 보였다. 광장에도 사람이 없었다. 광장 중앙에 하얀색 관이 놓여 있었다. 열려있는지 관 뚜껑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익숙해졌던 일이 아예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거 같았다. 그런데도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놓여 있는 관으로 향했다. 저도 모르게 조금 더 다가갔다. 바네사는 눈 앞에 보이는 모습에 짧은 숨을 삼켰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은 잠든 모습은 평온했다. 하얀 뺨은 온기가 없어 창백했다. 입술은 색을 잃어갔다. 그래도 바네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숨을 쉬지 않을 뿐이었다. 단지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바네사는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다. 아니다. 아니야. 이럴리가 없어. 당신이 어째서. 기억은 순식간에 익숙한 모습을 덧대어버린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만 보았던 그림이 머릿속에 제멋대로 완성된다. 어째서 그렇게 평온하게 있을 수 있어요. 오라버니도, 당신도. 덧대어진 그림에 이름표가 붙여졌다. 죽음. 가장 치열하게 싸워왔던 사람이 맞이하는 안식. 두 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올 수 없다는 선고.

죽음을 맞이하는 곳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바네사를 두 번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걸어왔던 길을 돌아봤다. 검은 그림자가 바네사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진득하게 달라 붙어 있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바네사 곁을 떠났다. 죽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도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또 다시 바네사에게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서 연주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름을 불러보려고 했다. 목끝에서 막히는 느낌에 쇳소리만 새어나왔다. 바네사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 걸까. 한 번 뿌리박힌 비극은 머릿 속에 사라지지 못한다.

바네사 뒤에 드리웠던 그림자는 스멀스멀 올라와서 입을 쩍 벌렸다. 숨이 막혀온다. 그림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대로 바네사의 어깨를 물어 뜯어버렸다. 물어뜯긴 어깨를 타고 몸안에 있던 기억을 밖으로 솟구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죽고, 죽어버리는 모습들이 흘러내렸다. 색을 잃었던 사방을 검게 물들였다. 모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네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잡았다.

"안돼!!!!"

쥐어짜듯이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숨을 들이키며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건 빗소리였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리는지 빗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등불마저 꺼지는 바람에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꿈에서 깬게 맞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마음 속에 맞춰진 그림 때문에 감각이 돌아오질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한참을 뛰어다닌 거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꿈이었다. 꿈이다. 전부 상상일 뿐이야. 불안감에 먹혀들어간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그래도 혼란이 가라앉질 않았다. 애매하게 겹쳐진 경계가 허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누군가가 꿈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나에게 알려줬으면 좋겠다.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리 타일러도 모르겠다.

의지할데 없이 경계에서 헤맸다. 헤메는 바네사를 붙잡은 소리가 났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어두워졌다. 바네사의 귓가에 강직한 말투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경계가 녹아내렸다.

"괜찮습니다. 바네사 경."

혼란이 잦아들었다. 마음이 놓였다. 갑자기 줄을 놓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감으로 가득찼던 줄을 놓자 감각이 뒤늦게 쏟아져버렸다. 은은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눈을 가려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기침을 하면서 쏟아낸 따끔함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전해지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꿈이었구나. 여기가 현실이구나. 자각하는 순간 눈물이 났다. 평소라면 참았을지도 모른다. 떨어지려는 눈물을 꾹 참으려 했다. 모든 게 힘들었다.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흐르다가 무언가에 걸렸다. 바네사의 눈을 덮어줬던 손이 눈물을 훔쳐냈다.숨을 고르라고 했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자기는 여기에 있다고 했다. 그제야 바네사의 눈에 올가의 모습이 보였다. 단지 어두워서 표정이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올가는 다시 손으로 바네사의 눈을 가려줬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이 오려면 멀었습니다."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에 걸쳐 흘러내리던 눈물이 멎었다. 올가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으라고 했다. 눈을 감았다. 사륵거리며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언가 덮여졌다. 흔들림 없이 강인하고 단호한 올가의 모습에 안심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늘 그랬다. 늘 그랬던 모습으로 바네사를 안심시켰다.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속삭이듯이 말하는 올가의 말이 들렸다. 대답하지 못하고 올가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확신과 안심을 품은 채 잠에 빠졌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불이 켜졌다. 등불에서 나오는 희미한 주황빛이 방 안에 퍼져갔다. 누워있느라 머리가 흐트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올가는 등불을 바라보다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비어있는 침대 옆 자리에 눕지 않았다. 의자를 끌어와서 바네사 옆에 앉았다.

올가는 소리에 민감해서 작은 소리에도 쉽게 잠이 깼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빗소리가 더 거세져서 잠에서 깨고 말았다. 뒤척이면 바네사가 잠에서 깰 거 같았다. 문득 드는 생각에 침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혹시 깨지 않았을까. 바네사를 살피려고 옆을 봤다.

바네사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앓는듯한 소리를 내며 괴로워 하는게 느껴졌다. 올가가 군인으로 지내면서 많이 보던 모습이었다. 늪에 빠졌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더 깊숙하게 빠지는 고통의 늪에. 앓던 소리가 고통에 찬 신음으로 바뀌었다. 신음을 듣자마자 몸이 먼저 나갔다. 판단은 필요 없었다. 바네사를 깨우려고 손을 뻗었다. 손으로 바네사를 잡기도 전에, 바네사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게 끝이었다.

등불 빛에 희끗희끗 보이는 바네사의 표정이 보였다. 눈이 부셔서 깰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깊게 잠들어서 아까보단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올가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바네사를 바라봤다. 불안하게 들썩거리던 숨소리도 새근거리며 잦아들었다. 바네사가 덮은 이불에 조용히 손을 얹었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바네사도 자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악의를 품은 폭력에 당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끔찍한 경험이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되어 한 데 뭉쳐진 하나의 비극이었다. 비극은 사람들에게 기억을 억지로 삼키게 만들었다. 삼켜진 기억은 몸 안에 깊숙이 퍼져나갔다. 기억을 뿌리 뽑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있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악의 뿐만 아니라, 삼켜진 기억과 싸워야만 했다. 잊을 수가 없어서. 잊힐 수가 없어서. 평생 데리고가야 하는 그림자였다. 끔찍한 비극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흩뿌린걸까. 눈을 내리깔며 잠든 바네사를 지켜봤다. 여기까지 오면서 바네사도 자신이 안고 가야하는 고통을 삼키며 걸어왔겠지.

공기에 묻어나는 습기가 답답할 만큼 짙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삼키고 있을까. 비는 계속 거세게 내렸다. 그날만큼은 그 무엇도 씻어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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