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가운뎃점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끝나지 않을 거 같았던 뜨거운 여름이었다. 두꺼운 책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다 읽은 거처럼. 하루하루 지나가다 보니 마지막 장이 보였다. 여름의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 보충 수업도 마지막이었다. 선생님은 더위에 지쳐서 늘어져 있는 애들을 보더니 웃었다. 학교에 수업 들으러 오느라 고생했으니. 오늘만큼은 일찍 끝내주겠다고 했다.

선생님도, 애들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미련 없이 마지막을 만끽하러 떠났다. 바네사는 가방을 챙기며 마지막을 준비했다. 교실 한구석은 여전히 무더운 햇빛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책을 담아내던 손이 멈췄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올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봤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담아냈다.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담아냈다. 두 글자만 입에 담았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큰일 났다. 책을 넣고 지퍼를 잡아 한 곳으로 끌었다. 옆구리에는 가방을, 얼굴에는 열기를 잔뜩 담은 채 복도로 나섰다. 손 부채질을 해도 열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복도로 나가보니 아직 올가가 오지 않았다. 오늘은 바네사가 조금 더 빨랐다. 도서실로 가지 않았다. 멋대로 움직이면 길이 엇갈리니까. 핑계를 대며 정당화했다.

가만히 서서 올가를 기다렸다. 복도에서 교실을 바라봤다. 방학 동안 올가가 바라보는 느낌은 이렇구나. 실없이 나오는 웃음소리가 신발을 타고 떨어졌다. 발소리가 들려 계단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다. 올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바네사가 복도에 있어서 놀란 눈치였다. 바네사를 보자마자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올가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누군가 기다려주는 걸 왜 미안해하는 걸까.

저기. 너는 매번 기다려줬잖아.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삼켜냈다. 괜찮다는 말로 넘겼다. 매번 돌아가던 길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른 길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저번에 갔던 길이었다. 방학식 때 바네사가 올가에게 알려준 길. 계절은 바뀌지 않았다. 방학식과 똑같은 여름이었지만. 방학식에 보냈던 여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올가에게 물어봤다. 이쪽 길로 가는 이유가 있냐고. 돌아오는 말은 간단했다. 마지막이잖아. 무심하게 던지는 느낌이 드는 한 마디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올가는 무심했던 적이 없었다.

바네사가 알려준 길을 기억해주고 다시 와줬다. 매번 바네사를 생각해줬다. 걸어가는 올가의 옆모습을 봤다. 얼굴에는 나뭇잎이 군데군데 부숴놓은 햇빛 가루가 쏟아졌다. 민트 향이 한 무더기로 내려앉았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런 여름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가를 보면서. 올해 여름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돌아가는 내내 가방끈을 몇 번이고 고쳐 맸다. 보충 수업이 끝나서 등교는 안 하게 되었지만. 방학은 일주일이나 남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올가를 일주일 동안 보지 못하니까. 그때 동안 붕 뜨는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을 수 있겠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식탁에는 이미 부모님이 앉아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부엌에 세 명만 남겨지게 되었다. 어색함과 무거움이 감돌았다. 바네사에겐 익숙한 분위기였다. 부모님에게 인사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가끔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났다. 식사 중에 말을 꺼내는 쪽은 항상 부모님이었다.

화기애애한 대화는 아니었다. 학교 일정을 물어보고, 성적에 관해 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바네사는 부모님이 건네는 말을 하나씩, 차례대로 대답했다. 흡사 면접을 보는 분위기였다.

바네사에게만 이러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은 가족 모두에게 엄격했다. 부모님에게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자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책임은 학생이라는 자리에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식전 기도처럼 듣는 말이 있었다. 무언가 하려거든 반드시 최고가 되어라.

공부가 아닌 다른 일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부모님은 바네사가 대답한 말을 묵묵히 들었다. 한동안 또 숨 막히는 식사가 계속되었다.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했다. 앞으로도 잘하고."

"…네."

 

부모님이 먼저 식기를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세워졌다.

"바이올린은."

 

불쑥 내던진 질문에 방학 내내 붕 뜨던 마음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현실을 마주 보게 되었다.

 

"정말로 그만두는 거냐?"

 

질문에 목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음식이 더 넘어가지 않았다. 생각 중이에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물로 남아있는 음식을 삼켰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맡에 있던 탁상시계를 잡았다. 뒤에 있는 나사를 만져 시곗바늘을 돌렸다. 드르륵드르륵. 몇 번이고 되감아 지던 바늘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데까지 지나온 한 바퀴. 지나온 일 년. 결정하는 건 짧은 순간이었다. 바이올린을 처음 손에 잡은 건 세 살 때였다. 움직임에 맞춰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그건 행복의 시작이었을까.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네사는 또래 애들보다 더 뛰어났다. 가르쳐주던 선생님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며 칭찬했다. 부모님도 선생님이 했던 말에 만족했는지. 열심히 하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칭찬을 받는 거도 기쁜데, 응원까지 받았다. 하루하루 즐거웠다. 가끔은 바이올린에 열을 올리고 연습하느라. 열 손가락이 부어서 반창고를 둘렀다. 그래도 즐거웠다. 바이올린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즐거웠다.

중학생이 되자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 부모님과 바네사가 생각하는 길은 달랐다. 바네사는 그저 연주가 하고 싶었다. 관현악단에서 신입 단원을 모집한다는 홍보물을 보게 되었다.

가입하고 싶어서 홍보지를 집으로 가져왔다.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재능이 아깝다고 했다. 바네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고 했다. 부모님에게 매번 듣던 말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최고를 노려라. 재능이 만든 자리에 앉아라. 말에 밀리고 밀려 홍보지를 내려놓았다. 홍보지 대신에. 부모님이 건넨 신청서를 잡게 되었다. 관현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연 대회에 신청하고 말았다.

모든 건 순간이었다. 부담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연주는 완벽하게 끝냈다.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격렬한 칭찬이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박수갈채를 받는데도. 바네사는 즐겁지 않았다. 자그만 트로피를 받았다. 가족들도 꽃다발을 안겨주면서 잘했다고 칭찬해줬다. 어릴 때는 너무 기뻤는데. 이번엔 무언가가 엉겨 붙은 듯이 찝찝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참가자들이 있는 대기실 맨 끝, 맨 구석까지 가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한숨을 돌리는 와중에 아무도 없는 구석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소리가 난 곳으로 가봤다. 구석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쥐고 있었다. 그 사람은 울고 있느라 바네사를 보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 바네사는 유령을 본 거처럼 얼어붙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이 흔들렸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자리에서 벗어나고 맞이한 복도는 고요했다.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걸어가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다. 그제야 상을 받을 때 스쳐 지나갔던 표정이 떠올랐다. 울렁거리는 걸 참으려 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걸음을 멈췄다.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부담이라니. 여태까지 남을 짓밟고 올라온 주제에. 내게 어울리는 자리라니.

애당초. 누군가가 앉아있는 자리를 빼앗고 앉아 있으면서. 그대로 대회장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구석에서 울고 있던 사람처럼. 바이올린 케이스를 잡은 바네사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게 점점 겁이 났다. 어깨에 얹었다. 활을 제대로 쥐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즐거운 음을 냈는데. 음악이 아니라 마찰음이 되었다. 즐거움이 사라졌다. 연주하는 음은 소음에 불과했다. 책장에 꽂혀있던 악보집을 모조리 모았다. 그대로 서랍 안에 구겨 넣듯이 넣어 놨다. 바이올린을 넣고 케이스 지퍼를 잠갔다.

지익. 지퍼를 올리는 소리와 함께 선이 그어졌다. 그어진 곳이 공책이었다면 선을 따라 찢어졌을 정도로. 거칠게 그어졌다. 바이올린과 악보가 다시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재능이 만든 자리는 바네사에게 의미가 없었다. 바네사 마음에 거칠게 그어진 선이 남겨졌다.

마지막이 있다면 시작도 있기 마련이었다. 여름을 넘기자 가을이 시작되었다. 춘추복을 입어야 하는 계절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소매를 파고들었다. 무더운 여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동안 올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던져놓은 질문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버스 안에서 손잡이 없이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깔끔하게 끝맺은 거 같았는데. 전혀 깔끔하지 않았다. 생각도, 행동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길을 다시 걸었다.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말없이 몇 바퀴를 반복하며 걸었다. 일주일 내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미련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미련이 끝맺는 걸 방해하는 거 같았다. 이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엉켜있던 미련을 붙잡았다. 끌어올리지 않았다. 억지로 떼어내었다.

내가 선택해서 그만둔 거야. 미련 가지지 말자. 정리가 아니고 타협이나 다름없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선을 따라서 다시 그었다. 더 넘지 말라는 듯이. 날카로운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그었다.

며칠 동안 발걸음이 목적지 없이 떠돌 더니.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어김없이 학교에 가야 했다. 오랜만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올가와 같이 다니면서 음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올가와 얘기해야 하고, 올가가 하는 말도 들어야 하다 보니. 음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익숙한 음이 들렸다. 얼마 만에 듣는 건지 모르겠다.

넋 놓고 듣고 있다가 화면에서 눈에 띄는 제목이 보였다.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들었던 곡이었다.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서둘러서 버튼을 눌러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발걸음도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교실 문 앞에 서게 되었다. 여태껏 모르는 척했지만.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다.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아버려서, 모른 척하기 힘든 사람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올가가 있었다. 요즘 정신없는 일이 있었으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올가를 보자마자 바네사 마음속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비상등이 켜지자 바로 기억을 꺼내오고, 감정을 꺼내왔다. 그러더니 제멋대로 올가의 모습을 마음속에 담아냈다. 모든 감정과 감각이 올가에게 향했다.

춘추복을 입은 모습을 처음 보는 게 아닌데. 춘추복 색은 어두운 계열인데. 어째서인지 눈부셨다. 올가만 앉아 있는 교실이 한층 더 밝아진 기분이었다. 인사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자연스럽게 하던 일도 어색해졌다. 심호흡하듯이 작게 숨을 삼켰다. 올가에게 손을 흔들며 먼저 인사했다. 그제야 창밖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바네사를 담았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안녕.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들었던 인사와 목소리인데도. 오랜만에 보네. 덧붙인 한 마디 때문에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물론 올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란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도 좋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는 내내 올가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커튼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올가는 흔들리지 않았다. 기복이 없어 보였다. 지금 짓고 있는 표정 그대로였다. 올가 특유의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바네사가 겪고 있는 해일이 올가에게 똑같이 덮쳐진다 해도. 올가라면 평정심을 잃지 않을 거 같았다. 바람 때문일까. 아니면 올가를 봐서 그런 걸까. 일주일 내내 바네사를 붙들던 생각이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유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선생님은 쪽지가 가득 담긴 통을 교탁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칠판에 좌석을 그리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늘 맞이하는 시간이었다. 자리 배정 시간이었다. 반 애들이 통에서 쪽지를 하나씩 뽑았다. 바네사도 쪽지를 뽑았다.

원래 앉았던 자리에 있던 짐과 가방을 챙겼다. 쪽지에 적힌 숫자와 맞는 자리로 갔다. 밖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칠판하고 너무 가깝지 않고, 멀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다.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짐을 내려놓았다. 짐을 정리하고 나서 교탁 쪽을 바라봤다. 남은 애들이 쪽지를 뽑았다.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올가는 없었다. 그새 다른 자리로 간 걸까. 고개를 돌려 다른 자리를 둘러봤다. 친한 친구하고 옆자리나 뒷자리가 되어서 기뻐하는 애들이 보였다. 거기에도 올가는 없었다. 한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머물렀다. 고개를 저었다. 아쉬움을 쫓아냈다.

앞을 보던 시야에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방을 보기 전까지. 비어있던 앞자리에 가방이 올려졌다.

가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누가 보일지도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여기에 올가가 있었다. 누군가가 바네사 눈에 감정으로 만든 셀로판지라도 끼워놨는지. 올가는 바네사를 반가워하는 거 같았다. 거울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틈을 비집고 생각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걱정 때문에. 바네사는 정적이 생기는 틈을 주지 않았다. 올가에게 반가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올가가 자리에 앉았다. 뒤를 돌아보고 바네사를 바라봤다.

그저 바라봤을 뿐인데.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너무 들떠버리고 말았다. 실없는 말을 계속 건넸다. 키가 비슷해서 칠판을 가릴 일은 없겠다거나. 공책 받을 때 편하겠다거나. 쉬는 시간에도 얘기할 수 있겠다거나. 기쁘다는 말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했다. 배려가 살짝 부족해졌다. 올가는 묵묵히 들어줬다. 듣는 내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바네사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지 않았다. 상대를 기다려주고, 배려해주는. 어른스러운 얼굴이었다. 바네사는 네가 앞에 앉아서 기쁘다고 말하고 나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셀로판지를 눈에만 끼워둔 게 아니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귀에도 끼어놨나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기뻐."

 

이가 간지러울 정도로 달콤한 말인데. 어째서인지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결국 정적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올가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교과서와 공책을 꺼냈다. 공책을 넘기던 도중에 멈칫거렸다. 저번에 남긴 선이 보였다. 고개를 들었다.

수업 내용이 써진 칠판과 함께, 올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제 수업 시간에 눈이 마주칠 일은 없겠지. 쉬는 시간에 어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수업 시간만큼은. 너의 뒷모습과 옆모습만 바라보게 되겠지.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게 되면서 다짐한 게 있었다. 꿈은 꿈으로 남겨두자. 소중하게 간직하는 거까진 괜찮아도. 이루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자. 이루려고 애쓰지 말자. 감정은 없었던 일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일은 없을 거다. 올가를 마음에 들어온 자리 그대로에 두기로 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했다.

딱 거기까지는. 그 정도까지는. 괜찮을 거 같았다. 여태까지 유지한 거리가 멀어질 일도, 가까워질 일도 없는 상태라면. 올가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을 거 같았다. 지익. 익숙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또 다른 선이 그어졌다. 바이올린에 선을 그은 거처럼. 올가에 대한 마음에도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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