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첫눈에

짤막한 쿠키

소란스러워서 깨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눈을 뜨고 일어나보니 위에 덮인 담요가 흘러내렸다. 담요는 떨어졌지만. 나른함이 떨어지지 않았다. 잡고 있던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시계를 봤다. 쉬는 시간은 안 끝났는데. 평소랑 다른 점이 있었다. 애들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흐리다 했더니. 드디어 첫눈이다. 드디어 내리는구나. 애들도 첫눈 때문에 들뜬 모양이었다. 쉬는 시간을 틈타서 연락하거나, 문자를 보내거나, 창밖을 보면서 눈을 감상하는 등 반응도 가지각색이었다. 시선이 창밖에서 벗어났다. 바네사의 시선은 앞으로 향하는 직선이 아니었다. 대각선으로 멀리 뻗어갔다. 너무 멀리 떨어져서 섬같이 보이는. 주인 없는 빈자리였다.

바네사 무릎에 올려져 있는 담요의 주인이자. 올가의 자리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서부 일 때문에 책상 위에 책만 올린 채 가버렸다. 빈자리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지. 턱을 괴고 있던 손에서 입꼬리가 밀려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바네사를 둘러싼 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바네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역시 올가겠지만. 관계를 정의하는 단어만 바뀌는 게 아니었다.

오늘이 올 때까지. 두어 번 자리가 바뀌었다. 자리를 바꿀 때마다 올가 옆자리가 되길 빌었지만. 아쉽게도 바네사가 옆자리에 앉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앞자리나 뒷자리조차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전보다 더 멀어졌다. 뒤에 앉을 때 장난이라도 많이 칠 걸 그랬나. 후회가 섞인 아쉬움이 들었지만.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여름의 바네사가 겨울의 바네사를 본다면.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어쩔 줄 몰라 하고, 불안했을 텐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면서. 아주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올가를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첫눈을 보자마자. 바네사가 떠올린 건 올가였다.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핸드폰을 꺼냈다. 올가에게 문자를 보내봤다. 길게 보내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걸 봤냐고 보냈다. 편지와 다르게. 문자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보낼 수 있었다.

대부분 그런 점이 안 좋으면서도. 가끔은 그런 점이 좋았다. 지금 올가에게 감정을 보내는 바네사에겐 후자였다.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가득 찬 대화창 맨 밑에서. 노란색 말풍선이 새로 떠올랐다. 답장은 못 보내겠지.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 기다려보니 답장이 왔다. 올가가 보내준 답장을 확인해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응. 나도 봤어.]

[끝날 때도 내리면 좋겠네.]

한 번에 보내도 되는 걸 띄엄띄엄 보낸 걸 보니까. 엄청나게 고민했구나.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게 고민한 거냐고 되묻겠지만.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올가가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보낸 답장이라는 걸.

올가 몰래 도서관에 간 적이 있었다. 바네사가 문자를 보낼 때 반응을 보고 싶었다. 문자를 보내고, 눈치채지 못할 거리에서 올가를 구경했다. 핸드폰을 꺼냈다. 멀리서 보여도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올가는 진지한 눈빛을 띤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한참 화면을 들여다봤다. 깊게 생각하는지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저러지 말라니까. 고심할 때마다 나타나는 올가의 버릇이었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바네사가 잔소리를 하면서 미간을 손가락으로 밀어주곤 했다. 몰래 바라보는 그 순간에도. 손가락으로 밀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걸 참으며 지켜봤다. 올가는 휴대폰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뭘 하나 싶었더니. 두 손으로 휴대폰을 잡은 자세 그대로. 자판을 하나하나 꾸욱 눌러가면서 답장을 쓰고 있었다.

사실 표정을 바라보는 거도 한계였는데. 저런 모습까지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덕분에 올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사서 선생님에게 주의를 받은 건 덤이었다. 바네사를 보자마자 당황하고 민망해하던 거까지 기억났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났더니. 답장이 늦어지면 고민하는 올가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몇 번을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귀여웠다.

답장을 보내니 쉬는 시간이 끝났다. 얼마 안 가서 종이 울리고, 올가가 돌아왔다. 선생님도 들어왔다. 휴대폰을 집어넣으니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다. 소란스러웠던 교실도 조용해졌다. 기말고사도 끝났고, 수업을 진행하긴 애매한 기간이었기에. 선생님은 자습을 시키거나, 영화를 틀어줬다. 수업 시간마다 다른 영화를 조각조각 보는 게 꽤 재밌었다.

쉬는 시간에 첫눈을 본 이후로. 딱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영화를 틀어줘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자습할 때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사이의 거리가 꽤 되는지라.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올가는 쉬는 시간이 되면 도서관으로 갔다. 바네사는 쉬는 시간마다 자거나, 자리 근처에 있는 애들과 수다를 떨었다. 가끔 눈이 마주치고, 서로에게 작게 손을 흔드는 게 전부였다.

같이 걸어가는 게 기대되긴 했지만. 목이 빠져라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자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다 끝나고 종례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었다. 소리 없이 내리 앉은 눈이 길 위에 소복하게 쌓였다. 소복한 눈길에 사박거리면서 발자국이 새겨지는 게 기대되었다. 그러니 바로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올가가 청소 당번이었다. 애들이 청소하는 걸 방해할 수 없으니까. 바네사가 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바네사가 복도로 나가려는 순간. 올가가 바네사를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올가는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왜 익숙하나 싶었더니. 올가가 아침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였다. 밖은 꽤 추울 거 같으니까. 잠깐이라도 두르고 있으라며. 바네사에게 목도리를 둘러줬다. 목도리에 묻어있던 시원한 민트 향이 스쳤다.

예전에는 사려 깊고, 다정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엉뚱하게 벗어나는 면이 있었다. 교실 밖이라 해도 말이지. 학교 안에서 기다리는 거잖아. 바네사는 마음속에서 튀어나오려던 말을 삼켰다.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았다. 바네사도 서툴렀다. 표현이든. 행동이든. 감정이 앞서서 매끄럽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마를 치고도 남을 행동을 하곤 했다.

그래도 올가는 이해해줬다. 오히려 바네사를 다독여주기도 했다. 올가도 서투름을 순순히 받아줬으니까. 이번엔 바네사가 받아줘야 공평하지 않을까. 올가가 읽지 못한. 쓸데없는 생각이 닿자. 목도리를 둘러주는 손길을 군말 없이 받아줬다. 기다리는 와중에 애들이 하나둘씩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교문 밖으로 걸어갔다. 비가 아니라 눈이라 그런 걸까. 우산을 안 쓰고 가는 애들이 더 많았다.

이유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어디서 봤지. 이런 풍경. 시야가 탁 트일 정도로 하얀 눈밭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속으로 겨울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느릿하게 숨을 내뱉자 입김이 흘러나왔다. 함박눈이 내리면 따뜻해진다고 했던가. 정말로 따뜻해지긴 하나 보다. 입김이 나오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심지어 볼에 닿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

눈이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올가와 같이 서점에서 책을 구경했던 게 떠올랐다. 언제였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인지 기억나질 않았지만. 깍지까지 끼면서 잡았던 손이 따뜻했고, 올가가 입은 코트가 멋있어 보였던 건 기억이 났다. 올가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자기도, 바네사도. 첫 문장과 첫 장을 쓰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썼던 걸 지워보고, 썼던 걸 고칠 수밖에 없어서. 서투른 건 당연하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자기도 서투르니까. 서운한 점이 생기면 말해달라고 해줬다. 이것마저도. 올가가 왜 이런 말이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기억력이 나빠졌나. 애꿎은 관자놀이만 꾹꾹 눌렀다.

입김이 또 새어 나왔다. 첫 문장이라. 지금 느끼고 겪는 게 다 새로우니까. 첫 문장이라는 올가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레짐작 상상만 하고, 거리만 뒀다가. 막상 손을 잡을 만큼 가까워지고, 원하던 걸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자. 가끔 꿈인가 확인해 보려고 볼을 꼬집어 볼 정도였으니까.

올가가 첫 문장이라고 생각했다면. 바네사는 첫 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풀어지거나, 긴장하면 제대로 낼 수 없는 첫 음. 여태까지 겪었던 게 연주를 하기 위해 연습한 거로 생각했다. 지금은 첫 음을 내고, 다음 음을 위해 적당한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합주. 그래. 합주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았다. 서로 다른 박자를 맞춰가는 합주. 올가한테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좋은 비유라고 해줄까. 아니면 무슨 소리냐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까. 어떤 반응이든 재밌을 거 같았다. 조금 있다가 같이 걸어가면서 말해봐야겠다.

"바네사."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올가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바네사를 바라보며 옅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이 내려서 그러나. 미소 짓는 모습에 빛이 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장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봤나 싶었는데. 여름 무렵에 올가가 건네줬던 장대 우산이었다.

여름 무렵에는 건네주고 가버렸지만. 지금은 같이 쓰고 가겠지. 변해가는 건 많았다. 감정을 품고 있을 때. 올가의 모든 게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다. 주변에 있는 다른 건 보이지도 않고, 올가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눈부신 빛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부시게 빛나던 빛이 은은하게 변하고 있었다. 빛이 은은해지자. 올가 주변에 있던 것들이 보였다. 올가를 더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참 신기하지. 올가를 알아갈수록. 올가 뿐만 아니라. 자신도 빛나는 느낌이 들었다.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볼 때 더 빛이 나는 거 같았다. 설렘은 변해갔다. 처음에는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입김 사이로 사라지는 온기처럼 따뜻하고 가벼웠다. 두 사람도 변했다. 사이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예전과 다르게.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서로에게 다가가며 거리를 좁혀왔다.

변해가는 건 많지만. 불안해하고 싶어도 불안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똑같을 수 없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는 올가가 손을 뻗으며 다가오고 있으니까. 바네사도 밝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손을 뻗으며 이름을 불러줬다.

"올가."

마치. 처음 불러보는 이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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