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미제

어려운 문제의 이름은

올가는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했다. 해결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문제에 맞춰서 미리 준비해둔 답을 답지에 적었다. 문제마저 간단했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일 뿐이었다. 주관식도 마찬가지였다.

지켜야 하는 규칙에 맞춰서 답안을 작성하면 끝났다. 선택이 어려운 순간은 있었지만, 문제가 애매한 적은 없었다. 어떤 상황이든 명확하게 문제를 풀어냈다. 올가에게 있어 정해진 규칙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규칙에 예외는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바네사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산책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갈 때 다른 길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골목길이었다. 군데군데 녹음이 가득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은 시간을 멈추게 해줬다. 걸어가면서 아주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바네사가 말을 걸면 올가가 대답하는 게 반복되는 대화였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하나씩 얘기했다. 중간중간 길고양이를 구경하느라 발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서로의 문장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올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사소한 거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던가. 얘기한 적이 없기에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하고 이런 주제로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 올가에게 모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이 걸으며 얘기했을 뿐인데도 평소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두 사람이 걸었던 골목길은 괜찮은 산책로가 되어줬다. 순찰하고 남는 시간에 종종 산책을 즐겼다. 바네사가 산책을 권하면 올가가 응해줬다. 처음처럼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편안했다.

시간은 시계처럼 흐르지 않았다. 그늘에서 길고양이가 느긋하게 자는 걸 봤다. 시간이 멈춘 거 같았다. 그늘을 벗어나 햇빛이 들어오는 곳을 걸었다. 멈췄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거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감상을 표현했다. 바네사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소리 내 말해줬다. 목소리로 받은 인상의 표현을 남겼다.

올가는 바네사가 해준 말을 묵묵히 들어줬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표현을 강요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괜찮다는 듯이. 오후 햇살이 바네사의 손끝에 걸렸다. 거기까진 별반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바네사가 올가에게 질문을 던지기 전까지는.

"올가 경 일정에 방해가 되진 않았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본 질문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목소리는 답지로 변해 올가에게 건네졌다. 눈동자가 올가 쪽으로 살짝 움직였다. 올가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다른 곳을 바라봤다. 올가는 답지를 받아든 채 바네사를 바라봤다. 바네사가 던진 질문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상황을 보고하거나, 작전을 설명하는 문제라면 자신 있을 텐데. 이번에 풀어야 할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올가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문제였다. 산책이 싫은 게 아니었다. 방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느낀 그대로 말해주면 될 텐데. 아쉽게도. 올가는 감정을 능숙하게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차선책을 택하기로 했다. 바네사가 건네준 답지에 정답을 적었다. 정직하게 사실만 써둔 답지를 건네줬다. 올가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괜찮습니다."

바네사는 올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답지를 돌려주며 지어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올가가 내민 답지에 바네사가 세모를 그려줬다. 동그라미와 빗금만 있던 답지에 새로운 게 그려졌다. 바네사를 따라 걸어가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른 말을 해야 했을까. 무심코 던진 질문이 신호도 없이 마음속에 떨어졌다. 누구도 내지 않은 문제가 또다시 올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불쑥 찾아온 불청객 같은 문제. 올가는 문제를 해결하는 걸 미뤄야 했다.

산책이 끝나고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올가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책장에 꽂혀있던 책을 꺼냈다. 화술 책이었다. 책을 끝까지 읽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애당초 효율적인 전쟁을 위한 책이었다. 이런 책에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적혀있을 리가 없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유도 질문을 하고, 주도권을 얻기 위해 감정을 이용하고, 협상하는 방법뿐이었다. 군인으로서 유용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달랐다. 올가는 책을 덮었다. 책을 꺼낸 시점부터 알고 있었다. 책이 닳을 정도로 많이 읽어봤던 책이었다. 정확히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문제를 풀 때 볼만할 참고서나 해답지는 없었다.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였다. 켜뒀던 등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발끝까지 밤이 흠뻑 젖고 나서야 잠들 수 있었다. 잠들 때도 살며시 바네사의 모습을 그려냈다.

시간이 또 다르게 흘러갔다. 미뤄둔 문제는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계속 테두리만 맴돌았다. 바네사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평소에도 모르는 게 있다면 물어봐서 알아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결심하면 바로 실천하는 게 올가였다. 바네사가 지내는 방에 도착했다. 문 앞에 서서 손을 올렸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려고 했던 손이 멈칫거렸다.

문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햇빛이 구름에 잠시 가려졌다. 밝았던 곳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발끝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올가가 정해둔 모든 법칙에 바네사만 예외가 되는 기분이었다. 문제를 미루는 것도, 결심했던 걸 포기하는 것도. 허공에 머물던 손을 내려놨다. 올가는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희미한 소리가 멎는 걸 듣고 나서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내내 바네사를 만나지 못했다. 미묘하게 시간이 엇갈리고 있었다.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미뤘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올가는 혼자서 산책을 해봤다. 바람이 코끝과 귓가를 지나갔다. 머리칼 끝을 살랑이게 만들며 스쳐 지나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걷다가 바네사를 생각했다. 문득문득 걸음을 멈췄다. 바네사라면 날씨가 좋다고 말해주겠지. 지금 스치는 바람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올가에게 살며시 미소 지었던 모습을 그려냈다.

미소 지은 부분만 머릿속에서 느릿하게 반복되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본 모습에서 감정을 건져냈다. 미소에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바네사는 무엇을 걱정 한 걸까. 어떤 말을 해야 안심했을지 모르겠다. 다른 말을 해줬다면 안심했을까. 나는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날도 문제에 빠진 채 미로 같은 밤을 보냈다.

감정이란 문제에는 명확한 답이 없었다. 미리 주어진 선택지나 미리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 매번 풀어냈던 문제보다 더 어려웠다. 해답을 내기 힘들었다. 로드에게 보고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서 바네사가 보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바네사와 마주쳤다. 바네사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바이올린 연습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올가를 보고 살짝 웃어줬다.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산책할 때 봤던 길고양이처럼 느긋하고 부드러웠다.

그늘이 없는 바네사의 모습에 알게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서로 가볍게 묵례를 하고 스쳐 지나갔다. 생각마저 스쳐 지나갔다. 오늘은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올가는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바네사는 계속 걸어갔다. 바네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예 몸을 틀었다. 너무 애쓰다 보면 눈앞에 있는 걸 못 보게 된다. 자꾸 멀리 있는 걸 찾게 된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겨 바네사에게 다가갔다. 소리 내 바네사를 불렀다.

"바네사 경."

바네사가 걸음을 멈췄다. 다가갔던 올가도 걸음을 멈췄다. 한 걸음 남짓인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봤다. 오후의 햇살은 바네사에게 잘 어울렸다. 따사로운 눈동자 색이 빛을 받아 더욱 선명했다. 마음속에 펜으로 말을 몇 번이고 쓰다가 또 지웠다. 방해하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야 할까. 어떤 말이든 전에 건넸던 답지와 같아 보였다. 같은 답안에 갇혀버린 기분이었다. 다시 펜을 잡았다. 어떤 말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올가는 짧게 숨을 삼키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평생 적어볼 일이 없었던 말을 답지에 적었다. 적어본 적은 없지만, 결은 같은 말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는 말이었다. 이름도 모를 기분에 뜸을 들였다. 바네사는 다음 말을 기다려줬다. 지울까 말까 고민했지만 마음속에 있던 펜을 내려놨다. 답이 틀리더라도. 문제가 영영 해결되지 않더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며 답지를 건넸다.

"시간이 되신다면, 같이 산책하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바네사가 미소를 지었다. 올가가 내민 답지에 동그라미를 쳐줬다. 저번에 지었던 미소와 다른 미소였다. 두 사람의 발이 같은 곳을 향했다. 부드럽게 내리 앉은 햇살이 손끝에 걸렸다. 풀린 해답이 온기로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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