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完-

위영, 깨어나 줘. 기다릴게.

"내게 기회를 줘.

너를 지켜준다 했잖아."

"어떤가."

불려온 어의들이 진맥을 마쳤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비 전하께서는 독에 당한 듯싶사옵니다."

"해독제는?"

"이 독은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몸 속에서 계속해서 변이를 일으킵니다.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이 없,"

쿵.

남망기가 피진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러자 어의들이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통촉하시옵소서!"

"방법이, 없단 말인가."

남망기는 위무선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게 잠든 사람 같아, 독에 당해 의식을 잃은 사람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며 웃을 것만 같은데.

"이 독에 당하면 잠든 상태로 점차 내장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결국 쇠약해져 죽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길어야 3개월입니다. 하지만,"

가장 경력이 오래된 늙은 어의가 침착하게 설명하자, 남망기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사도의 주술을 쓰는 자가 이 독에 당한 사람을 깨워냈다고 하는데, 그런 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데다 고서의 내용이 사실인지도 의문입니다."

사도의 주술을 쓰는 자.

남망기의 머릿속에는 야렵대회날 위무선이 검은 안개에 휩싸인 채 피리를 불던 모습이 스쳐 갔다. 사도의 주술. 어쩌면 위무선은 스스로 해독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남망기는 어의들을 모두 내보내고 위무선의 침상 옆에 앉았다.

"위영, 깨어나 줘. 기다릴게."

남망기는 잠든 위무선의 귓가에 속삭이고 방을 나갔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단단히 지킬 것을 명하고, 그는 이 태감을 불렀다.


위무선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이곳은 마치 그의 내면을 오래도록 잠식해왔던 그곳, 이릉 난장강의 수해樹海와도 같았다.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축축한 숲 속에서 끝없이 헤매던 그때처럼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마저 들었다.

'남잠, 어디 있어? 남잠!'

있는 힘껏 남망기를 불러보았지만 자신의 목소리만 메아리 칠 뿐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없는 영원한 암흑 속에 갇힌 듯한 느낌.

분명 방금 전까지 남망기의 눈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이상한 곳에 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망기의 품에서 얻은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이 차디찬 공간에 홀로 내버려지다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는 반드시 나를 찾을 거야. 내게 약속했는걸. 나를 지키겠다고.

'남잠, 구해줘….'

위무선은 남망기의 이름을 부르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졸음이 몰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태감."

일련의 소동으로 지친 듯, 청아하던 남망기의 목소리는 다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보다 몇천 갈래로 갈라져 조각나 있음을, 이 태감도 모르지 않았다.

"그자를 쫓는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위무선이 서 있던 위치와 방향, 그의 목에 꽂혀 있던 독침의 각도와 높이, 연회장의 지형지물을 모조리 조사해 용의자는 쉽게 추려낼 수 있었다. 그는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하급 환관이라 아무도 그자의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망기는 급히 그자를 잡아들이라 명했으나 문제는 그자의 행방이 이미 묘연해진 뒤였다는 것이었다.

"백방으로 군사를 풀어 이잡듯이 뒤지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나 남망기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보다 중한 것은 위영이 깨어나는 것이지."

"사도의 주술을 쓰는 자 역시도 찾고 있으나 이미 사장된 지 오래인 터라 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근심 가득한 이 태감의 말에 남망기가 나지막히 말을 흘렸다.

"위영이 능히 해낼 수 있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이 태감이 그 말뜻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던 그때, 근위대장이 멀리서 황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남망기와 이 태감의 앞에 다다르자 무릎을 털썩 꿇었는데, 어찌나 급히 뛰어왔던지 숨이 턱끝에 차 한동안 말을 제대로 못 꺼낼 정도였다.

"폐하, 그 놈을 찾았습니다! 지하 감옥으로 연행하라 일러둔 뒤 바로 오는 길입니다."

누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망기는 즉시 그와 함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위무선은 눈을 떴다. 얼굴을 덮은 커다란 연잎을 치우고 몸을 일으켜 앉자 그곳은 작은 조각배 위였다. 원래 있었던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여긴,

"위무선, 너 또 땡땡이치냐."

"아선아, 수박 먹으러 올라와."

잔뜩 골이 난 소년과 옆에서 따사롭게 미소짓는 소녀. 강징과 강염리였다. 위무선은 반가워 한달음에 나루터로 뛰어올라갔다.

"강징, 누님,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위무선이 묻자 두 사람이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네가 또 수업 빼먹고 놀러나왔겠지. 부왕께서 너 어디갔냐고 찾으시던데."

그제야 위무선은 깨달았다. 아, 이건 모두 꿈이구나. 이제 아버지 같던 선왕 강풍면은 승하하고 없는데. 그러나 꿈이라도 깨고 싶지 않았다. 전쟁 전의 평화롭던 운몽, 아름답던 연화오, 그리고 셋이 함께 어울려 살던 그리운 시절에서 영원히.

"이제 그만 들어가자. 감기 걸릴라."

강염리의 다정한 말에 위무선은 눈물마저 날 것 같았다. 그는 이 행복한 꿈의 세계가 깨져버릴세라 꾹 참고 그들의 뒤를 따라 궁으로 돌아갔다.

"위무선, 어딜 쏘다니다 오는 게야?"

귀에 익은 불호령. 예전에는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자줏빛 영력 채찍, 자전이 참으로 무서웠는데. 그러나 지금의 위무선에게는 그마저도 너무나 반갑고 기꺼웠다. 부모 잃은 위무선에게 엄한 어머니였던 우자연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그녀는 알까. 위무선이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씩 웃자 우자연은 당황스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우 부인, 잘못했어요."

"잔망스럽기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그런 눈으로 날 보느냐? 들어가보거라. 전하께서 기다리신다."

우자연은 소매를 떨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강씨 남매와 위무선은 어리둥절해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우자연의 말이 헛은 아니었는지 강풍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무선은 반가움에 활짝 웃으며 다가갔지만, 강풍면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전하, 찾으셨습니까."

위무선이 묻자, 강풍면이 음, 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강징과 강염리가 나가려하자 강풍면이 그들을 만류했다.

"너희들도 앉거라. 중요한 이야기이니."

세 사람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자, 강풍면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구나.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걱정이 크다. 위무선,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긴다면 징이와 염리를 부탁한다."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물론 모든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위무선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꿈의 세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아버지'를 뵐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러나 강풍면이 덧붙인 한 마디에, 위무선의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것은 그가 아주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따뜻한 불씨였다.

"그리고 위무선, 내 아들아. 너도 반드시 살아남거라."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그 환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도망 생활로 이미 지쳐있던 데다 황제가 오기 전 이미 심한 문초를 당해 여기저기 찢기고 터진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들어서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소신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남망기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번 일을 지시한 자가 누구냐."

그러자 살려달라 울부짖던 그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남망기가 눈짓하자, 옆에 서 있던 병사들이 다시금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묻는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남망기는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제지했다.

"너는 이 일을 지시한 자로부터 보상을 약속받았겠지만, 발설하면 네 목숨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 또한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

아비규환 속에서도 지나치게 차분하고 냉담한 남망기의 목소리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뼛속까지 얼렸다. 환관은 덜덜 떨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이 도리어 긍정의 의미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남망기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가 지금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필시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이번 사건의 관련자가 있기 때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단 둘만 남게 되자, 남망기는 낮고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겐 선택지가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넌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짐에게 협조한다면, 너 하나만 죽는 것으로 끝날 것이다. 이미 네 가족, 친척, 너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신상은 파악했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네가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남망기의 눈빛이 한층 더 날카롭고 서늘해졌다.

"그들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숙청 대상이 되겠지."

환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남망기는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며 근위대장과 이 태감에게 지시했다.

"저자에게 의원을 보내고 감옥을 철저히 지켜라. 입을 열 때까지, 반드시 살려두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명을 받들자, 남망기는 소매를 거두며 황궁으로 돌아갔다.


위무선은 황량한 폐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니, 이곳은 원래 폐허가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는 운몽의 사람들이 날마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던 터전, 왕성 앞의 저잣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가거나 죽고 없었고, 거리는 곳곳이 불타고 부서져 까마귀만이 쓸쓸히 모여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위무선의 마음속에 검은 분노가 일렁였다. 그는 손에 쥔 피리와 무너진 성벽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제국군 장수 화단수의 손에 금단을 잃은 강징과 그를 위해 자신의 금단을 내어준 일, 이후 난장의 숲에서 얻은 사도의 힘까지.

'복수하고 싶지 않아?'

문득 위무선의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위무선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도와줄까?'

'남망기를 죽여.'

'제국은 너의 원수야.'

"닥쳐!"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위무선은 현기증을 느꼈다. 동시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나의 터전을 짓밟은 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은 자, 나의 원수, 제국의 수장 남망기.

위무선의 눈이 붉게 변하고,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울화가 치밀어올랐고,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 없앨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위무선의 눈앞에 불현듯 남망기의 모습이 스쳐갔다.

나의 원수? 그가?

새하얗고 청명하게 빛나는 고고한 사람. 누구보다 우아하고 정갈하며 아름다운 사람.

내가, 너무나도 은애하는 내 사람.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정신을 차린 위무선은 그 자리에 쓰러져 한참을 울었다. 무엇에 씌기라도 한 듯 맹목적으로 울분이 타올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리워 눈에 아른거리는데 어찌 내가 그를 잠시라도 원망하였을까. 이미 그를 받아들였고, 용서하였고, 그에게 안기고 싶건만.

"나를 지켜준다고 했잖아. 어디에 있어, 남잠."

위무선은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고 누군가 영혼을 빼간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누운 자리 그대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곳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홀로 헤매느라 지친 그에게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폐하, 운몽의 장공주께서 알현을 청하옵니다."

황제궁 침전에 위무선이 자리한 지 달포가 조금 넘었다. 그 사이 위무선의 일은 남망기의 지시로 운몽까지 전해졌고, 소식을 들은 장공주 강염리가 직접 제국 황궁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침전에 들어선 강염리가 처음 본 광경은 남망기가 위무선의 손을 꼭 잡고 침상 옆에 묵묵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황제의 용안은 속내를 짐작하기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염리는 어쩐지 그에게서 무거운 슬픔을 느꼈다.

"왔습니까."

한참 후에야 남망기의 입에서 인사 같은 말이 나왔다. 강염리는 그 목소리에서 그가 위무선의 일에 대해 자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소중한 동생을 데려갔으면 마땅히 지켜냈어야지. 탓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강염리는 어쩐지 그를 탓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남망기를 보았다면 위장택과 장색산인이 왔더래도 탓할 수 없었으리라.

"아선이는 어떤가요."

그녀는 자신의 물음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온하게 잠든 동생은 깨어날 줄을 몰랐고, 약이라고는 기력을 보하는 것 외에는 쓸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제 잘못입니다."

강염리는 남망기의 말에 놀랐다. 그는 대국의 황제임에도 소국의 왕족인 강염리의 앞에서 자신을 전혀 높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염리를 도려의 가족으로 정중히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염리는 그런 그를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위로하고 다독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염리의 물음에 남망기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를 돌려보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 위영은 운몽의 하늘 아래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을 것을. 욕심이 지나쳐 하늘이 내게 벌을 준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강염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선이는 폐하를 진심으로 연모합니다. 선이가 운몽에 사절로 온 날 저는 그것을 알 수 있었지요. 그 마음을 오롯이 끌어안고 운몽으로 돌아왔다 한들 이 아이가 행복했을까요. 지금의 일은 그저 못된 마음을 품은 자의 악한 소행 탓이지,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강염리는 침상으로 다가와 위무선의 곁에 앉았다. 선아, 네가 그토록 은애하는 이가 너로 인해 많이 아파한단다. 어서 깨어나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렴. 강염리는 속으로 그렇게 바라고 또 빌었다.


위무선이 이번에 눈을 뜬 곳은 어느 낡은 기와지붕 위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애가 타도록 보고 싶던 존재, 그의 도려 남망기가 옆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위무선은 너무 기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남망기를 와락 끌어안았다.

"드디어 날 구하러 와 줬구나, 남잠!"

그러나 위무선의 기대와 달리 그의 도려는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위무선은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제야 이곳이 남망기와 자신이 처음 함께 궁 밖으로 외출한 날 밤에 함께 달을 본 장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아직도 이 꿈이 끝나지 않았다니. 위무선의 마음은 한순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발 내보내 줘, 이제 그만 나를 깨워 줘.

"아, 그건, 어쩌다보니, 하하."

위무선이 얼버무리자 남망기는 더 묻지 않았다. 우아하게 앉아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위무선은 문득 함께 달을 보던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황제를 원망한다는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조금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당신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이 내 운명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을 다시 못 보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리 모진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을.

"남잠, 나 아주 좋은 노래를 알고 있어."

네가 나를 위해 만들었던 노래야.

이번엔 내가 널 위해 이 노래를 띄울게.

위무선은 자신의 검은 피리, 진정을 꺼냈다. 꿈결같던 그 노래를 기억나는 대로 연주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남망기가 조용히 고금을 꺼내 음을 얹었다. 과연, 원곡자의 곡 해석이라 그런지 훌륭한걸. 위무선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오랜만에 몸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남망기는 위무선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잠든 지도 벌써 두 달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초조한 마음이 몰려왔지만,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위무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위무선의 숨이 미약하게나마 붙어 있었지만 언제 꺼질지 몰라 남망기는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또 두려웠다. 그를 잃을까 봐.

그래도 그 두 달 사이에 남망기는 많은 것을 했다. 우선 위무선에게 독을 쓴 환관은 결국 제게 이 일을 지시한 자들을 모조리 불었고, 남망기는 엄한 법도로 그들을 다스렸다. 이번 사건의 배후자는 역모죄로 사지를 찢는 형벌을 내렸고, 그 식솔들은 모조리 노비로 만들어 전국에 흩어 놓았으며, 가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했다.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의 집안 또한 마찬가지로 처벌했다.

이 일의 동기란 정말 하찮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어, 남망기는 들어줄 가치조차 없다고 여겼다. 황후를 대대로 배출하던 가문의 수장이었던 범인은 위무선의 존재가 그들 집안의 장래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이같은 일을 벌인 것이었다.

그들을 모두 찢어 놓았음에도, 결국 위무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위영, 내게 기회를 줘.

널 지켜준다고 했잖아.

남망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도려는 평온하게 잠든 채 도무지 깨어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그의 곁을 밤낮으로 지킨 지 며칠이나 지났을까, 지친 남망기는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피리 소리.

늦은 밤, 남망기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아한 피리소리에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나 싶을 정도로 설게 잔 잠이었다.

"위영,"

남망기에게 익숙한 피리 소리였다. 그것은 분명 위무선이 갖고 있던 피리, 진정의 음색이었기에. 남망기는 황급히 침상을 보았지만 위무선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대로였다.

아니,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어두운 아지랑이가 위무선의 몸을 가득 휘감고 있었다. 남망기는 피리 소리를 자세히 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귀가 좋은 남망기에게는 잘 들렸다. 이 곡은 분명,

너와 나밖에 모르는 노래야.

남망기는 피리 소리가 끊길 세라 서둘러 고금을 꺼내 그 곡에 음을 얹었다. 네가 나를 부르고 있구나. 눈을 떠 줘. 내게로 돌아와, 위영.


'위영,'

위무선은 남망기의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망기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린 소리지? 위무선은 피리를 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곳에는 옆에 앉은 남망기와 자신 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목소리는 남망기의 것이었다. 옆에 앉은 남망기가 자신을 부른 게 아니라면, 설마,

'위영, 들려?'

틀림없었다. 현실의 남망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간 애타게 기다려 왔던 그가, 드디어 자신을 찾아낸 것이리라. 위무선은 허공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남잠? 어디야? 나 여기 있어!'

그러자 일순 사방의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처음 눈을 떴던 암흑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처음과는 달리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위무선은 그 빛을 향해 힘껏 달렸다. 몸이 불타오를 듯 뜨겁고 아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빛에 다다르자 그 빛이 자신을 한껏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위무선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떠 보았다.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두 달하고도 보름 만의 일이었다.

"남잠,"

고금 소리가 멈췄다.

"보고 싶었어."

남망기는 몹시 지쳐보였다. 그는 위무선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네가 깨어날 거라고, 믿었어."

남망기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위무선은 그런 그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의들은 위무선을 진찰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 전하의 예후가 매우 좋으십니다. 그러나 오래 누워 계셨으니 천천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내력을 다스리는 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약이 달여져 올 동안 위무선은 남망기에게 그간의 일을 전해 들었다. 자신이 두 달하고도 보름이나 누워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한순간 같기도, 아주 오래된 것 같기도 했다.

탕약이 들어오자, 남망기는 주위를 물리고 위무선에게 직접 탕약을 떠 주었다. 위무선이 약을 다 마시자 꼼꼼하게 입가를 닦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잠, 우리 달 보러 나가지 않을래?"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는 그의 목과 무릎을 받쳐 안아 들었다.

"저기, 이 자세는 좀 민망한데."

"어의가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고 했어."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기에 위무선은 얌전히 안겨있기로 했다. 문 앞에 서 있던 궁인들은 이미 익숙한 듯 알아서들 못 본 체하고 있었다. 곧 남망기가 침전 지붕 위에 위무선을 안전하게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위무선이 남망기의 어깨에 머리를 얹자, 남망기가 위무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남잠. 내가 얼마나 널 보고 싶어했는지 모르지. 너를 다시 만나면, 너랑 또 시내 구경도 나가고, 야렵도 나가고, 풍경이 좋은 곳도 찾아다니고 싶었어."

"다 해 줄게."

"너에게 안겨서, 네 심장 소리를 듣고, 몇 번이고 말하고 싶었어. 사랑한다고."

이번에는 남망기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심장 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불규칙해졌다.

"사랑해, 남잠."

남망기는 고개를 숙여 위무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매일, 매 순간 기도했어. 네가 깨어나게 해달라고."

남망기의 손이 부드럽게 위무선의 뺨을 어루만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뺨을 스치자, 위무선의 마음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널 지키겠다고 했던 약속, 반드시 지키겠다고. 널 다시는 잃지 않겠다고. 그러니 널 내게 돌려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어."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이 웃었다. 남망기의 얼굴에도 드물게 웃음이 번졌다.

"남잠, 저 달을 영원히 함께 보고 싶어."

남망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크고 둥근 보름달빛이, 두 사람을 환히 감싸고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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