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기무선] 그의 유산
이릉노조의 부고에 난장강으로 향한 함광군
"망기."
누군가 말을 걸어 오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폐관 수련을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초주검 상태에서 회복되기 위해 하루종일 엎드린 채로 수많은 생각을 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부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망기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남의 말을 듣는 것은 절대로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는데, 계편을 맞고 폐관에 들어간 뒤로는 누군가 드물게 말을 걸어도 반응하는 법이 없었다. 잘못 맞아 귀머거리가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는 목석처럼 엎드린 채 눈도 돌리지 않았다. 자연히 그의 형장마저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오늘, 남희신은 아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남망기는 고개를 돌려 남희신을 보았다. 귀가 아주 멀어버린 것은 아니었구나, 그러한 안도에도 잠시, 남망기는 미친 사람처럼 중의 차림으로 패검을 차고 정실을 뛰쳐나갔다. 제 형장은 안중에도 없이, 어디에 간다 고하지도 못한 채로 그는 검에 올랐다.
"위 공자가 죽었다더구나. 그가 부리던 것들에게 삼켜져..."
남망기는 이릉 난장강으로 갔다.
그것을 고소 남씨의 누구도 모를 리 없었겠지만, 아무도 뒤따르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를 쫓을 필요가 없단 뜻이기도 했는데, 이는 더이상 남망기를 삿된 길로 인도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도굴당한 묘지마냥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남긴 것들은 모조리 다 사라지거나 빼앗겨버렸다. 일부는 운몽, 일부는 난릉, 일부는 청하에서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고소에서는 위무선이 남긴 그 무엇도 가져오지 않았다. 아마 자신 때문일 것이다. 함광군 남망기를 사특한 길로 꾀어내 제 사형들을 공격하게 만든 자의 물건을 운심부지처에 들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계편에 맞은 상처가 여태 아물지 않은 몸에서는 이상하게도 있어야 할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이 아팠다. 망연한 모습이 스산한 바람을 맞아 희게 나부꼈다. 새하얀 옷을 보며 피마대효라고 놀려대던 목소리가 선연했다. 마침내 남망기의 흰 의복은 그를 위한 상복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지않은 체취라도 맡아보기 위해 숨을 들이켰지만 들숨을 타고 들어오는 것은 산자락 아래 썩어가는 시체들에서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뿐이다.
슬픔이 극에 달해 온 몸의 감각이 없어진 것만 같은 상태로 얼마간을 서 있었을까.
귀신과 대화를 하고 시체가 일어서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숨이 끊어진 것이 크게 대수였느냐 묻는다면 아닐테지만, 죽지도 않고 다치기만 한 제 몸뚱이도 이리 찢어질 듯 고통스러운데, 마지막에 흔적도 남기지 않고 먹혀버렸을 그는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심지어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제 편이라곤 하나도 곁에 두지 못한 채로 외롭게 죽었다. 그 곁에 서지 못했고, 그 마지막도 지키지 못한 채로, 살아있다는 사실이 남망기를 무엇보다 괴롭게 했다. 어쩌면 이미 사태가 끝난 것을 전해받은 시점에서 이곳에 오면 안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 그는 죽고 그가 가졌던 얼마 없는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데 시체조차 없는 무덤에 입을 맞춰 무엇 하겠는가.
어느새 다리에는 힘이 풀려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아 흰 의복이 더럽혀져 있었다. 위영이 딛었을 그 척박한 땅을 남망기는 몇 번이고 문지르고, 손에 쥐었다. 미안해, 미안해. 속으로 되뇌이던 중,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났다.
자주 들었던 종류의 소리인가 하면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살아있는 자가 시체의 산, 죽음의 땅에서 들은 익숙한 소리라면 마땅히 산 자의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기민하게 감각을 세운 남망기는 인기척이 난 곳으로 향했다. 잎이 나지 않은지 오래인 앙상하고 거대한 나무 아래 뿌리 밑에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다. 소리는 그 안에서 나고 있었다. 더렵혀진 백의를 개의치 않고 남망기가 힘을 주어 뿌리를 쥐고는 들어냈다.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분명한 태양의 불꽃이 새겨진 자그마한 소매가.
남망기는 의식을 잃은채로 끙끙 앓고 있는 온가 어린아이를 구덩이에서 꺼내었다. 알지 못하는 소리를 내며 앓는 아이의 몸은 마치 불덩이 같았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누군가가 숨겨둔 상태 그대로 몇날 며칠을 스산한 시체의 산에서 웅크린 채 보냈을 아이를 생각하니, 인간이자 어른으로서 마땅히 느낄 괴로움과 측은지심이 몰려들었다. 위영을 찾아 이릉에 왔을 때 제 다리에 붙었던 아이다. 이제 위영은 없고 자신과 아이 둘만 남겨져 있었다. 차가운 손으로 아이의 뜨거운 뺨을 어루만지며 남망기는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위영이 남긴 가장 소중한 것을 찾기 위해서였던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흙투성이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남망기는 다시 검에 올랐다. 품 속의 유산은 너무도 뜨거웠고 가슴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사랑이었다.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 상실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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