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⑤

꽃 피는 봄이 오면

"계절은 돌고 돌아,

결국 봄이 오는구나."

계절이 바뀌어 봄이 찾아오자 정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위무선은 곳곳에 피어나는 꽃들을 구경하며 문득 옛 후궁들이 이것을 심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황제의 총애를 가득 받았던 후궁의 정원에는 갖가지 화려한 꽃들이 가득했겠지만 눈 밖에 난 후궁의 정원은 그저 휑하고 심심했겠지.

그러나 황제를 더없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신의 궁에도,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날마다 작은 새들이 날아와 포근한 봄날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나무들은 그에 화답하듯 봄바람에 가지를 떨어대며 춤을 추었다.

그 모든 것이, 위무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유흥이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 봄기운이 완연해질 때까지 별원 밖에 전혀 나가지 못해 무료했지만 위무선은 나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혼자 나갈 수 있을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가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떠오를 테니까. 그와의 추억이 닿지 않았던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으니까.

"소 공공, 지필묵을 좀 준비해 주시렵니까?"

소하는 그간 위무선을 쭉 지켜봐 왔기에 그의 마음이 어떨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남망기와의 정이 깊었던 만큼 '황제'에 대한 배신감과 미움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남망기를 향해 품은 마음으로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하도 모르지 않았다.

위무선은 소하에게 지필묵을 받아 들고 오랜만에 정자에 올랐다. 풍경화라도 그리면서 지루함을 달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보자마자 그는 가차 없이 찢어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붓 가는 대로 그렸던 그림은 풍경화가 아니라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위무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정자에 드러누웠다. 그러자 봄바람에 꽃향기가 실려와 코를 살그머니 간지럽혔다.

"이러고 있으니까 그때가 생각나네."

처음으로 그 사람을 만났던 날. 햇살 눈부신 날 그들의 합주가.


"폐하?"

지난 몇 달간 그의 상전이 이렇게 다른 생각에 빠진 모습을 보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지만, 그때마다 상전을 현실로 모셔 오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이 태감은 굳게 믿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 말했지?"

"북쪽 지방에 양식이 모자라니 구휼미를 내려주십사 하였습니다."

"그러도록 하라."

남망기의 시선이 다시 탁자 위의 두루마리로 향했다. 그는 지금, 그 문서에 가장 적고 싶지 않은 내용을 적고 있었다. 그렇기에 한 글자 한 글자를 더욱 정성들여 쓰고 있었다.

이것이, 네가 보는 마지막 내 모습일 테니까.

"저, 폐하."

남망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태감은 말을 이어갔다.

"별원에 다녀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붓을 움직이려던 남망기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폐하?"

"그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남망기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 태감이 그의 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달조차 비추지 않는 아주 어두운 밤이면 남망기가 몰래 별원을 찾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언젠가 상전의 행보가 심상치 않아 몰래 뒤를 밟았던 날, 이 태감은 그가 멀리서 조용히 위무선의 침전을 바라보며 옥루를 하염없이 떨구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남망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궁에 있었던 이 태감은 그가 장성하여 위세 높은 제국의 수장이 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이 태감조차 남망기가 그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봤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태감이 그리도 안타까워하는 동안, 마지막 글자의 획을 마무리 지은 남망기의 손이 옥새로 향했다. 이윽고 황제의 관인이 문서 위로 무겁고도 선명하게 내리 찍혔다.


"황제 폐하의 어명이오. 위 공은 나와서 칙서를 받으시오."

위무선은 아침 일찍부터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꼈다. 문을 열고 나와 보니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환관들이 보였다. 위무선은 영문도 모르는 채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금일(今日)부로…,"

칙서의 내용을 가만히 듣던 위무선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귀가 울려서 무슨 말인지 끝까지 차분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원했던 일이건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이 계속 들 뿐이었다.

적힌 내용을 다 읽은 환관이 두루마리를 위무선에게 넘겨주자, 그는 펼쳐서 다시 한번 내용을 자세하게 읽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겠지.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글자는 조금도 잘못 적혀있지 않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금일부로 운몽 왕가의 위무선을 본국으로 귀환 조치한다.'

남망기는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썼을까. 단정하고 우아한 필체의 글씨가 아름답게 나열되어 있었지만 위무선의 눈에는 피로 쓴 글씨처럼 처참하게 보였다.

"폐하께서는 채비가 끝나는 대로 떠나도 좋다고 하시며, 병사를 붙여 안전하게 모시라고 하교하셨습니다."

너무나 돌아가고 싶던 고향이었지만 막상 돌아갈 수 있게 되자 위무선의 마음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대로 떠나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게 네가 원한 일이야? 위무선은 자신에게 되물어 보았지만 명확하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게 되었군요."

옆에서 지켜보던 소하가 축하의 말을 건넸지만 위무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밤, 남망기가 잠들기 위해 막 불을 껐을 때였다.

어두운 방 한구석에서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남망기는 본능적으로 곁에 둔 피진을 손으로 꼭 쥐었다.

"누구냐."

남망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황궁의 심장부에 아무도 모르게 침입할 정도면 보통 실력은 아닐 터. 그러나 상대는 딱히 기척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남망기는 그 점이 의아했다. 대체 목적이 뭐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기척이 난 곳을 눈으로 살피고 있던 중, 기척이 난 곳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왔다. 검은 도포를 입고 있는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과 모자를 벗어서 내팽개쳤다. 그러자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온 달빛에 상대의 얼굴이 환하게 비쳐 보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한 순간,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남망기의 눈이 커졌다.

"위영?"

"그래, 나야."

위무선이 천천히 그의 침상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남망기의 귀에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본국으로 귀환 명령을 내렸으니,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했겠지. 나를 죽이고 싶다고 했었으니. 남망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방해하거나 저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그는, 남망기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나를, 죽일 거야?"

남망기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남망기는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위무선이, 숨죽여 울고 있었다.

"남잠, 말해봐. 너는, 날,"

위무선이 끝내 잇지 못한 말. 남망기가 몇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 그러나 할 수 없던 말.

"네가 그랬잖아.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모이가 고급이라고 좋아하는 것, 봤냐고."

처음으로 함께 궁을 나갔을 때, 위무선이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자유롭게 날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 새는 왜 이렇게 날개가 부러진 것처럼 울고 있는지.

"말해줘, 남잠. 내가 너를 용서할 수 있게."

남망기는 눈물로 엉망이 된 위무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신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견뎌온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졌던 그날 뭐라도 변명할 것을. 널 기만하고자 했음이 아니었다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네가 내 안에서 커져 버렸다고. 그렇게 뭐라도 말할 것을.

위무선이 원한 것은,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였을 텐데.

"좋아해, 위영. 널 항상 곁에 두고 싶어. 계속 널 바라보고, 지켜주고 싶어."

남망기는 잠시 주저하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아니면 안 돼."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은 긴장이 풀린 듯 바닥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는 그대로 남망기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조용히 울었다. 남망기의 떨리는 손이 위무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매끄럽게 휘감겼다.

"남잠, 네 정체가 뭐든 이젠 상관없어. 너를 못 본 몇 달 동안, 사실 계속 네가 보고 싶었어.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남망기는 위무선의 양쪽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그를 침상 위로 끌어올려 앉혔다. 눈물로 온통 얼룩진 그의 얼굴은 창밖에서 은은하게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실로 아름답지 않은가. 하늘에 떠 있는 저 달도 이 사람의 뽀얗고 보드라운 살결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감출 것이다. 남망기는 이런 상황에서도 주책맞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너를 다시는 울리지 않을게. 너를 내가 지켜줄게.

"위영. 내 곁에 있어 줘."

남망기는 조금 더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내 도려가 되어줘, 위영. 내가 너를 평생 지킬게."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입가에 물결이 일듯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망기의 얼굴에 그간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환한 빛이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지나고, 뜰 밖으로 나서는 동안 당번을 서고 있던 모든 궁인과 병사들이 깜짝 놀라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정원으로 나서는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보름달이 비추고 있었다. 달은 마치 두 사람이 처음 함께 궁 밖으로 나갔던 그날처럼 밝고 찬연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국무회의를 하기 위해 대전에 모인 대소신료들은 자신들이 뭘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그 조서에는 간략한 것을 좋아하는 황제답게 아주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으나, 그 짧은 문장을 발표하는 이 태감조차 자신이 뭘 읽고 있는 건지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볼 정도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운몽 왕족 위무선을 황귀비에 책봉한다.'

"폐하, 이는 실로 있을 수 없는 처사이옵니다."

"있을 수 없다면, 지금부터 있게 만드시오. 그것이 경이 할 일이오."

국가의 중대사인데 마치 아주 간단한 것처럼 말하는 황제에게 대신들은 어떻게 반대해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상대는 출신도 출신이거니와 심지어 남자인데! 그러나 눈앞의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주변국을 모두 평정하며 절대황권의 최고 정점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모두 입을 다물었다.

결국 대신들은 눈물을 머금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설마 후궁을 한 명만 들이시겠어, 나중에 후사를 볼 여성 후궁이나 황후도 들이시겠지, 라고 애써 희망을 갖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신들은 그나마 황후로 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비 전하를 뵙습니다."

역대 후궁 중 가장 특이한 존재인 이 '비 전하'는 이 호칭이 낯간지럽기만 했다. 그는 코를 긁으며 그 호칭은 좀 어떻게 안 되나, 싶었지만 도려의 체면을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고할까요?"

"그래 주게."

잠시 후, 들어오라는 말을 듣자 위무선은 안으로 들어섰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 잠시 자리에 선 채 남망기를 바라보자 그가 탑처럼 높이 쌓인 국정 문서들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대제국의 정사를 돌보느라 늘 바쁜 사람. 저리 무리하다 병이라도 날까 위무선은 늘 걱정이 되었다.

조심하느라고 했지만 위무선의 기척을 금세 눈치챈 남망기는 곧바로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위무선은 그제야 남망기에게로 다가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자 남망기가 좌우를 살짝 보았다. 이 태감이 눈치 빠르게 방 안의 모든 사람을 물렸다.

"휴, 남잠 너 한번 만나기 정말 힘드네."

위무선이 옆에 와 앉으며 너스레를 떨자, 남망기가 웃었다.

"저녁에 갈 텐데, 기다리지 그랬어."

"격무에 시달리시는 우리 황제 폐하께서 미천한 소첩까지 챙기실 시간이 있겠사옵니까?"

"그럴 리가."

남망기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위무선은 남망기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남망기는 팔로 위무선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바닥에 그를 눕혀버렸다.

"자, 잠깐, 지금 여기서 하면 밖에 다 들리잖아,"

"들으라고 해."

"난 싫거든!"

그러나 위무선은 알고 있었다. 불붙은 남망기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어느새 위무선의 옷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남망기의 촉촉한 입술이 위무선의 목과 쇄골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고, 가슴을 깨물었다. 위무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참는 것뿐이었다. 물론 밖에 서 있던 궁인들은 다 들려도 애써 못 들은 채 하고 있었지만.

"잠깐, 잠깐만, 정말 내 체면도 좀 생각해 달라고. 이따 밤에, 응?"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조금은 토라진 듯한 남망기를 잘 달랜 위무선은 옷을 매무시하고 남망기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러자 남망기가 책상 위에 펼쳐 두었던 문서가 보였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이었지만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 나라에 보낼 조서야?"

"응.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강징이 이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위무선이 상상만 해도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위영. 고향에 다녀오고 싶지 않아?"

갑작스러운 남망기의 질문에, 위무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조서를 보내는 사절단에, 너도 함께 갈래?"

위무선은 말문이 막혔다. 그야 물론 고향에 가고 싶기는 했지만 원수의 도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국의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소식은 그간 몇 차례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도 차마 적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녀오는 데만 왕복 두 달이잖아. 그렇게 오래 널 기다리게 해서 되겠어?"

위무선은 부러 웃으며 거짓으로 둘러댔지만, 그 마음을 눈치챈 남망기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워하지 마. 널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남망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위무선은 한참이나 조서와 남망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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