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⑥

어디에도 없구나, 나의 쉴 곳은.

"이역만리 타국의 이방인은

고향에서도 이방인이 되어버렸네."

강징은 며칠 사이 조금 야윈 듯 보였다. 제국에서 갑자기 사절단을 파견하겠다고 전갈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의전은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했기에 신경 쓸 것도 준비할 것도 많았다. 그동안 제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파견하는 정기 사절단 외에는 따로 간섭한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늘 오던 시기도 아닌 때에 당장 사절을 보내겠다고 통보한 것이었다. 물론 황제로서는 부담을 줄 의도가 전혀 아니었으나, 강징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소란이 그저 강대국의 횡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제국에서 이토록 소란을 떠는 목적은 새 황귀비가 책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일이라고. 황후가 즉위해도 이렇게는 안 하겠다. 그러나 어쨌든 제국의 사람이 온다니 성심껏 맞이해야 했다.

"전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좀 쉬시지요."

"누님."

강염리가 양손에 탕 냄비를 든 채 다가왔다. 푹 삶아져 구수하고 포근한 연근 갈비탕의 향에 강징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의 누님은 고귀한 신분임에도 제 동생들을 먹일 때면 여염의 소저처럼 부엌일을 손수 하기를 마다치 않았다.

"탕이 따뜻할 때 좀 들고 하렴, 징아."

"역시, 누님뿐이에요."

탕을 한술 뜨는 강징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염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사절단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많이 피곤하겠구나. 어찌 이리도 갑자기 내려온다 하니."

"그토록 오래 비워둔 후궁에 새 사람을 들였을 정도니 황상의 총애가 지극히 깊은 모양이지요."

강징의 말에 가시가 뾰족이 박혀 있음을 염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그저 부드럽게 웃기만 했다.

"누님, 이번 사절단에 그 황귀비도 함께 온답니다. 얼마나 빼어난 미인이길래 그 대단한 황제가 제 궁에 들여앉혔는지 볼 수 있겠네요."

그러나 며칠 뒤, 그 '빼어난 미인'을 마주한 운몽의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징과 강염리는 사절단과 인사를 나누는 예조차 잊을 정도였다. 강징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래서 황귀비 책봉 기념 사절을 그리도 급히 내려보낸 것이었구나….' 였다.

"아니, 너, 그,"

"강징, 잘 지냈어?"

위무선의 웃음소리가 어색하게 울렸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번 사절단의 대표는 귀비를 모시는 태감으로 승진한 소하였다. 그는 제국 사절단의 대표로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고 대국의 신하로서 소국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앞으로 나섰다.

"이분은 제국 제1 비 전하십니다. 형제의 정이 애틋함은 충분히 이해하나, 제국의 사절로 오신 분이니 그에 맞는 예를 갖추어 주시면 좋겠습니…, 전하!"

소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위무선의 고개가 꺾이고 한쪽 뺨이 붉게 물들었다. 양국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앞을 보자, 강징이 손을 떨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위무선의 존재가 마뜩잖은 제국 사람들이라 하여도 황제의 유일한 총애를 받는, 사실상 황후와 다름없는 비가 이와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제국에 대한 도전과도 같이 받아들여졌을 터. 이에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자 위무선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비 전하!"

소하가 기가 찬다는 듯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는 나 위무선의 문제이지 제국 황실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강징, 우리 일 크게 만들지 말자."

위무선의 말에 강징도 그제야 자신의 위치와 책무를 떠올린 듯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연회를 준비하였으니 가시지요."

강징은 허탈한 눈으로 위무선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사절단을 연회장으로 인도했다. 연회장까지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강염리만이 뒤에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강징과 위무선은 연회장의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 먼저 강징이 환영의 인사말을 했고, 위무선이 뒤이어 답사를 했다. 그러자 소하가 황제의 하사품 목록을 공개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하사품에 강징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기적으로 내려주는 하사품보다 열 배는 많았기 때문이었다.

"위무선, 혹시 이거, 친정에 보내는 혼인 예물이냐…?"

물론 남망기의 의도는 사랑해 마지않는 비의 위신을 살려주고자 함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강징은 이 모든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속이 상했다. 마치 제 형제를 팔아 재물을 받은 것 같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위무선도 남망기가 이렇게 많이 준비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강징과 같이 놀라고 있었다. 그는 강징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몰라…."

"하! 우리만 바보가 됐네. 이렇게 잘 지내는 줄 알았으면 걱정도 하지 않는 건데. 누님은 한시도 너를 잊지 않고 매일 네가 무사히 잘 지내기만을 기도하던데, 무사함을 뛰어넘어 적국의 황귀비 마마가 되셨군. 아주 잘 지내네! 황은이 대단히 망극하옵니다."

위무선은 연회장의 소란스러움에 강징의 비아냥대는 말이 묻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 좀 가려서 해, 강징."

"내가 원래 직설적인 거, 잊었어?"

"아무도 듣지 못 했으니 망정이지. 아까도 네 기분대로 행동했다가 분위기 험악해진 거 못 봤어?"

"그래서? 이제 높으신 비 전하의 눈치를 보라 이거야?"

"아니."

위무선이 힘없이 웃었다.

"때려도 사람들 안 보는 데서 때리란 거지."

강징이 황당한 듯 그를 빤히 쳐다보자, 위무선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오랜만에 고향의 달을 감상하던 위무선에게 소하가 다가왔다.

"난 괜찮습니다. 소 태감은 들어가 쉬지 않구요."

"사실은 소인도 운몽은 처음인지라, 설레어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소하의 말에, 위무선이 빙그레 웃었다.

"연꽃이 아름답지요?"

"그러네요."

잠시 두 사람 사이로 밤바람이 흘러갔다. 못에 핀 연화蓮花가 바람의 움직임에 맞춰 살랑거리며 춤을 추었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소하의 물음에 위무선은 제 손으로 뺨을 살포시 감싸더니, 씩씩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붓지도 않았고."

그러나 소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쓰리실 듯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문이 막힌 위무선은 입을 닫았다. 그러자 한동안 평온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제국에서도 나는 영원히 이방인이겠지요. 그러나 이제는 고향에서마저 나는 이방인이 되어버렸습니다."

퍽 쓸쓸한 듯 울리는 위무선의 목소리에, 소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이제는 폐하께서 전하의 고향이 되지 않겠습니까. 소인이 오래도록 폐하를 뵈어 왔으나 이토록 한 분을 마음에 품는 것을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 말에, 위무선의 얼굴에 찬란한 빛이 떠올랐다. 마치,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자 구원이라는 듯.

그때,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위무선과 소하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상대는 굳이 숨을 생각이 아니었던지 점차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님?"

"장공주 마마."

다가온 사람은 강염리였다.

"소 태감, 밤이 깊어 피곤하시지요. 비 전하와 담소를 나누고자 하는데 먼저 들어가 쉬셔도 된답니다. 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장공주 마마, 그러면 소인이 다과상이라도 봐드리고 들어가겠습니다."

강염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곳은 운몽이니, 마땅히 소녀가 대접해야 할 일이지요. 걱정 말고 들어가 쉬세요."

"그래요. 내 누님과 조금만 회포를 풀다 쉴 테니, 소 태감은 먼저 들어가셔도 됩니다."

두 남매의 등쌀에 밀려 들어가면서도, 소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강염리의 얼굴을 본 순간 위무선의 얼굴에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님, 이 늦은 시각에 어찌 오셨어요."

"오늘 왔는데 내일 바로 떠난다 하니 너와 이야기를 못다 한 것이 아쉬워서 잠이 오지 않았단다. 아까 징이가 네게 화를 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쓰여서.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아선아. 징이도 아닌 척하면서 항상 네 생각을 하고 있단다. 네가 이해해 주렴. 몸은 건강하고? 먹는 건 입에 좀 맞니?"

염리의 걱정에 위무선은 안심하라는 듯 웃었다.

"전 제국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폐하도 제게 아낌없이 잘 대해 주시고."

"네가 타국의 사람이라 괜히 구박받지는 않을까 걱정이란다."

순간 위무선의 머릿속에 제국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들이 스쳤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염리에게 괜히 걱정만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절 지켜주시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누님도 좋은 사내와 어서 혼인하셔야지요."

위무선의 말에 염리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전쟁 전부터 혼담이 오가던 금가의 사내를 떠올렸음이리라. 위무선은 이전에는 그 사내를 '공작새'라고 칭하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가 염리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들었기에 요즘은 조금 생각이 바뀌어가던 중이었다.

"금 공자는 좋은 분이지."

"누님을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라면 전 누구든 응원할 거예요."

두 남매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다음에 올 때는 누님의 곁에 그 사내가 함께 서 있겠구나. 위무선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혼례복을 입은 염리의 모습을 자신은 볼 수 없을 것이기에.

곧 다시 떠나야 하는 실향민의 쓸쓸한 밤은, 야속하도록 짧았다.

다음날 아침, 제국 사절단은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운몽 사람들의 배웅을 받았다. 위무선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 모두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징은 고개를 돌린 채 그를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강염리는 마지막까지 위무선의 두 손을 꼭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선아, 항상 건강해야 해. 밥도 잘 챙겨 먹고."

"누님, 쟤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안 할까 봐."

사절단이 들을 세라 강징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지만, 강염리의 걱정은 끊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끔이라도 소식 전해주고, 조심해서 돌아가렴."

"누님도 건강하세요. 편지할게요."

아쉬운 듯 맞잡은 두 손이 떨어지고 뒤돌아서자마자 위무선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아 꾹 참고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합시다."

위무선의 말에, 행렬이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 땅을 힘차게 밟는 말발굽 소리에 그의 울음소리가 묻혔다.


"폐하, 요사이 침소에 드시는 시각이 너무 늦어지신 듯하옵니다."

이 태감의 근심어린 충언에, 달을 바라보던 남망기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달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 말에 이 태감이 달을 바라보니, 과연 동그랗게 떠 청명히 빛나는 것이 아름다운 보름이었다.

"비 전하를 생각하시옵니까."

남망기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를 위해 해준 것이 없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태감이 잠시 주저하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것은 위무선이 운몽으로 떠난 직후 남망기가 은연 중에 내비친 소망으로, 흘려가듯 한 말이었지만 이 태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문서 한 장으로 끝난 것이 못내 아쉬우시지요? 비 전하께 즉위식을 성대히 열어주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까."

궁중밥만 수십 년을 먹어온 이 태감으로서 감히 상전의 속내를 헤아려 입 밖에 낸다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 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남망기의 얼굴에는 조금의 노기도 없었다.

"성군도 암군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지."

예로부터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므로, 신하들의 반발을 염려한 말이었다. 그러자 이 태감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축하 연회 정도는 어떻겠사옵니까. 이번 사절단을 위해 마련하는 자리를 겸한다고 하면 큰 반발도 없지 않겠사옵니까."

남망기의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으나, 이 태감은 황제가 이를 윤허할 것을 확신했다.

"준비하도록 하라."


마차는 꼬박 한 달을 달려서야 제국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받았던 남망기는 그들이 도성에 들어섰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황궁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위무선이 황궁 정문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남망기였다. 그는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남잠! 하고 부를 뻔하다,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폐하를 뵙습니…, 남잠!"

이번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남망기가 다가와서 그대로 위무선을 끌어안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여기는 보는 눈이 너무 많은데. 위무선은 주위의 눈치를 보며 저를 꼭 안은 남망기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남망기는 전혀 그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남잠, 저, 우리 서로 사회적 체면이라는 것을 좀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위무선이 속삭이자, 남망기가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라고 해. 네가,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아, 알겠으니까 일단 좀 들어가자. 이 사람들 다 너 때문에 아직도 무릎 꿇고 있잖아."

그제야 남망기가 위무선을 놔 주었다. 위무선은 휴, 하고 한숨을 돌리며 사절단과 함께 남망기의 뒤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황제궁 앞에 다다른 위무선은 또 한 번 당황하고 말았다.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성대한 연회장이 그들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남망기는 연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기에 그가 즉위한 후로 연회를 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망기에게 지금 이 연회는 아주 중요한 자리였기에,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연회보다도 화려하게 준비하라 이른 참이었다.

위무선과 남망기가 연회장에 들어서자 양측에 이미 착석해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두 사람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장 상석으로 향했다. 남망기가 옥좌에 앉고, 위무선은 한 단 아래에 앉았다. 남망기는 그를 자신의 바로 옆 자리에 앉히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이 쓰였다.

"오늘의 연회는 폐하께서 사절단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특별히 준비하셨습니다. 또한 이 자리는 별원의 새 주인이신 비 전하를 위한 것이기도 하므로, 이를 함께 축하하고자 하는 성심聖心 역시도 충분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태감의 말이 끝나자 연회장에는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황은皇恩이 내리는 곳에 사람도 모인다 했던가. 위무선의 앞에는 어느새 그에게 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남망기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위무선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소 태감, 잠시만요."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진 위무선이 소하를 조곤히 불렀다.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조금 피곤한데요."

소하가 위무선의 앞에 끝없이 늘어선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웃었다.

"폐하께서 전하를 그리도 아끼시니 어쩔 도리가 있나요. 그래도 정 버거우시다면 잠시 나가서 쉬시겠습니까?"

"그럴 수 있을까요?"

소하가 맡겨만 달라는 듯 빙긋 웃더니, 황제의 지밀인 이 태감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이 태감이 남망기에게 다시 무언가를 속삭였다. 잠시 후 남망기가 몸소 단 아래로 내려오더니, 아무 말 없이 위무선을 번쩍 안아 들었다.

"나, 남잠,"

위무선이 다급한 목소리로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남망기의 발걸음은 황제궁 침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회장의 모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멀뚱히 서 있었다. 그저 '비 전하께서 먼 여정에 피로하시답니다.' 라는 말 한 마디만 전했던 소하나 이 태감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대처했다.

"잠시 후에 다시 나오실 테니 걱정 말고 연회를 마저 즐기시지요."

이 태감의 말에 연회장에는 다시 풍악이 울리고 술잔이 돌았다. 소하와 이 태감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착하지, 오라버니. 이제 그만 내려 줘. 부끄러워."

위무선의 애교 섞인 말에도 못 들은 척하던 남망기는 침상에 다다라서야 위무선을 내려놓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위무선에게 이불을 꼭꼭 덮어준 뒤, 남망기가 나지막히 말했다.

"뭐가?"

"그간 제대로 쉬지 못 했을 텐데. 연회를 며칠 뒤로 잡을 것을."

위무선은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 간지러워졌다. 짧은 한 문장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은 남망기의 변함 없는 마음이었다. 늘 내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위무선은 이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침상 옆에 앉아 있던 남망기의 팔을 잡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잠시만 이렇게 쉴까?"

기골이 장대한 사내의 넓은 가슴팍에 제 몸을 묻은 채 위무선은 생각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이 온기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지났을까, 깜박 잠이 들었던 위무선이 부스스 눈을 뜨자 옆에 누워 있던 남망기가 말을 건넸다.

"잘 잤어?"

위무선은 잠이 덜 깬듯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남잠, 나 꿈결에 아주 좋은 노래를 들었어."

"그래?"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남망기였지만 귓볼이 붉어지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위무선은 쿡쿡 웃으며 그의 볼을 찔러댔다.

"아, 선인처럼 참 고운 목소리였는데. 한번 더 듣고 싶은데. 어디로 갔을까? 그 선인."

그러자 남망기의 귀는 붉어지다못해 터질 듯이 뜨거워졌다. 위무선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조금 안쓰러워져 그만두기로 했다.

"그 노래, 제목이 뭐야?"

위무선이 물었다.

"맞혀봐."

"처음 듣는 곡이었는데, 설마 네가 만든 거야?"

남망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무선은 자신을 위해 직접 만든 노래를 불러준 것이 기뻐 수십 개의 이름을 대 보았지만 남망기는 그 어느 것도 맞다, 틀리다를 명확히 답해주지 않았다.

"제목을 안 지은 거야?"

위무선의 의문은 지극히 타당했지만 남망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수십 개의 이름을 댔지만 다 아니래놓곤."

짐짓 토라진 듯한 위무선의 말투에도 남망기는 그저 웃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나 이제 괜찮아."

위무선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망기도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침전 밖으로 나가자 술을 돌리며 연회를 즐기던 이들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다시금 인사를 올렸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신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술잔을 높이 들며 길게 읍했다.

"황제 폐하의 은혜가 실로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으니, 이는 제국의 복이옵니다. 그 복으로 말미암아 별원의 새 주인께서 자리하시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닙니까. 폐하와 비 전하께 이 술을 올리나이다."

남망기는 평소 지나친 미사여구를 갖다붙여 아첨하는 자를 못마땅히 여겼지만, 어쨌거나 조금 전의 건배사는 요약하자면 새 비를 들인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므로 관대히 넘어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남망기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지만, 위무선은 남망기와 눈을 맞추고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남잠, 널 위해 건배할게."

그 말을 하는 위무선의 눈빛을 남망기는 한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선연히 빛나는 그의 맑은 눈동자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무선이 빈 술잔을 내려놓자, 별안간 목덜미에서 따끔한 느낌이 났다. 벌레라도 물렸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잠시 후 눈앞의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며 어지러워지고, 점점 흐려지더니 어두워졌다. 몸에 힘이 빠진 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위영!"

"비 전하께서 쓰러지셨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망기는 즉시 어의를 부르라 지시하며 위무선에게 뛰어갔다.

"위영, 정신 차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그의 도려는 깨어날 줄을 몰랐다.

"비 전하를 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소하가 덜덜 떨며 말하자, 남망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궁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고는 손수 위무선을 등에 업었다. 지켜보던 모든 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지만 남망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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