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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추경의] 운심부지처 장서각 바닥에 왜 그런 책이?

20~21년 진행한 경의른 앤솔로지에 참여했던 글을 웹공개합니다.

Macross Galaxy by 쉐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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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심장이저보고죽는데요',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대사 일부를 차용했습니다.

아무리 빡빡한 규율을 자랑하는 고소 남씨라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고소 남씨의 그 빡빡한 규율에도 쉬는 시간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고소 남씨 사람들이 자유 시간을 만끽한다는 문장은 언뜻 듣는 사람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거나 고소 남씨 제자 남경의는 현재 쉬는 시간임에도, 장서각에 틀어박혀 있었다. 깐깐한 수염의 대명사 남 선생님이 들었다면 분명 겉으로는 잰 체 하면서도 내심 대견해 했을 테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알기 전까지는.

"...그대... 시력을 잃었다고 했으면서 나를 어떻게 알아봤소?"

".....(싱긋-)"

"...웃지 마시오! 날 어떻게 알아본 것이오!"

".....으니깐...."

".....뭐?"

"....그댈 보면 심장이 뛰었으니깐-"

여기까지 읽은 남경의는 감동적인 장면에 팍 찔러오는 대사가 너무나도 짜릿해 몸둘 바를 몰랐다. 손톱 밑을 잘근잘근 씹다 비명을 지르려던 것을 참던 그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깨물고 말았다.

***

이 소설로 말하자면 채의진 가판대가 그 시작이다. 때는 두어 달 전, 야렵에 나섰다 돌아오던 남경의는 채의진 가판대에 살 것이 없나 돌아다니던 차, 장사꾼이 실감나게 읽어대던 이 소설의 한 장면을 듣다 그만 그 자리에 못박혀버렸다. 그런데 그 장사꾼은 구연 솜씨만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중간에 끊는 실력 또한 탁월하여, 하필이면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중 위기 부분에서 이야기를 도중에 끊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결국 남경의를 비롯해 그의 구연을 듣던 행인들 대부분이 그 소설을 사 버리고 말았다.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인 이유는, 책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남경의는 그 책을 사 온 날 밤에 모두 읽었다. 책을 읽다가 해시가 넘어가는 줄도 몰랐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날 이후로 남경의는 ‘그런 류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 남에게 말 못할 취미가 생긴 셈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남경의 같은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러한 소설들로 말하자면 요즘 저잣거리에서 유행하는 삼류 연애소설로, 읽다가 금방 시간이 간다는 의미에서 살시(殺時)소설이라고 불리고 있는 듯 했다. 남경의는 딱히 자신이 읽는 소설을 부끄럽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고소 남씨에서는 일종의 불온서적으로 여겨질만한 요소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절대로 그 소설이 부끄럽거나 그것을 읽는 자신의 사회적 체면이 손상될 것 같다거나 한 게 아니다! 어쨌든 그러므로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은밀한 취향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았다. 같은 숙소를 쓰는 남사추에게도!

그렇기에 그는 책을 읽을 때에도 어딘가에 숨어서 봐야만 했다. 그가 며칠에 걸쳐 여러 곳을 물색해 본 결과 휴식 시간의 장서각이 가장 괜찮았다. 하루종일 시달린 고소 남씨 문하생 중 아무도 휴식 중에까지 책을 읽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경의는 조용한 장서각 분위기에 같은 가문 사람들에게서 인간미를 느꼈다.

***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짜릿한 소설의 맛으로 인한 기쁨의 비명 대신 고통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책을 대충 무릎 위에 내려놓고 아픈 손을 호호 불고 있으니 책장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숨을 삼키며 남경의는 익숙하게 옷자락 안에 얇은 서책을 집어넣고 짐짓 요마괴귀에 관한 책을 아무거나 하나 빼들었다. 이런 경우 인기척의 상대는 보통 모습을 드러내 아는 체를 하거나 자신의 볼일만 보고 장서각을 뜨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기척은 같은 곳에서 계속 느껴졌다. 상대가 얼른 사라지거나 나타나서 자신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남경의는 차선책을 택했다. 흐음, 하고 책에 집중하는 시늉을 하며 문제의 인기척을 지나쳐 장서각 입구 쪽을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필 아무렇게나 펴서 넘긴 책장 전체에 여귀의 끔찍한 모습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었다. 주변을 의식하는 척 하며 보지도 않고 책을 넘기다 무심코 여귀 삽화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버린 남경의가 꽥 소리를 지르며 책을 그 자리에서 떨어뜨렸다.

"경의, 괜찮아?"

고개를 들어보면 그곳에는 눈을 동그랗게 뜬 남사추가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일단 그에게 책벌을 줄 만한 위치의 선배들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남경의는 태연하게 말하며 허리를 굽혔다.

"사추였네. 난 괜찮아 보다시ㅍ.... 아아악!!!!"

그리고 또 여귀 삽화와 눈이 마주쳐 놀라버렸다. 남사추가 다가와 책을 덮고 주워서 건네자, 남경의는 쏜살같이 고맙다며 장서각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얇고 낯선 책이 한 권 남아있었다.

"경의, 여기 책 두고 갔는데...!"

남사추가 뒤늦게 그를 불렀지만 남경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

남사추는 처음에 남경의가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엔 쉬는 시간에도 늘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과제물을 해결하거나 했었는데 요즘은 쉬는 시간만 대면 갖은 핑계를 대며 사라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왠지 모를 서운함에도 남사추는 남경의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자신과 같이 다니는 것이 싫어서인지, 아니면 뭔가 서운한 게 있나 싶어 잠시 거리를 둬 보기도 했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사라지는 것은 변함 없었다.

자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기뻤지만 여전히 남경의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했다. 때문에 남사추는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뒤를 밟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남경의가 사라진 쪽과 그가 두고 간 얇은 서책을 번갈아 살펴보던 남사추는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빠르게 이해했다. 남사추 역시 살시소설은 아니지만 남몰래 간질간질한 연시를 보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남경의가 자신처럼 몰래 읽는 문학이 있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공통점이 많은 동기간 답게 남사추 역시 남경의가 놓고 간 책을 펼쳐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몰두해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휴식 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운심부지처 전체에 맑게 울리고, 남사추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손에 든 소설은 어느새 반쯤 읽어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남경의는 분명 이 소설을 읽는 것을 숨기고 싶어했으니, 대놓고 주면 심각하게 수치스러워 할 게 뻔했다. 남사추는 수업에 들어가면 그가 있을테니 몰래 그의 서책들 사이에 소설을 끼워넣기로 결정하고 장서각을 빠져나갔다.

***

남사추와 남경의는 어릴 적부터 운심부지처에서 자랐고 나이도 비슷한지라 수학 수준이 비슷해 늘 쌍둥이처럼 붙어다니곤 했다. 그말인즉슨 수업을 들으러 가는 시각도 늘 비슷했기에 나란히 앉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남경의가 일찍, 남사추가 수업 시작 직전에 들어가는 탓에 자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급한대로 비어있는 아무 자리에나 앉은 남사추는 품 안에 숨긴 남경의의 살시소설을 옷 위로 어루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아예 먼 자리라면 차라리 수업이 끝나고 건네줄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필이면 남경의의 서책더미에 팔을 뻗고 한 뼘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 대각선 자리였다. 잘만 하면 아주 감쪽같이 돌려줄 수 있단 뜻이었다.

별것 아니면 별것 아니고, 별거라면 별거인 번뇌와 함께 수업중인 부분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이 최근 배우고 있는 것은 수선계를 대표하는 가문들의 특이사항들이었다. 고소 남씨에 관한 것이야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함광군을 위시한 선배들과 선생님께 배웠으니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다른 가문에 대한 것은 기본적인 것만 배우다가 본격적인 것을 배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어릴 때쯤 멸문했다는 기산 온씨를 시작으로 고소 남씨와 아주 친밀한 난릉 금씨를 어제까지 배웠다면, 오늘은 운몽 강씨에 대한 것을 배울 차례였다. 

운몽 강씨는 기본적으로 물과 꽃이 많아 온화한 지역과 가풍으로 유명했으나 사일지정으로 한번 불타고 재건한 뒤로는 분위기가 예전과는 다르게 제법 바뀌었다고 했다. 현 종주의 외가인 미산 우씨의 엄한 가풍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가훈만은 예전의 것을 고수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으며 남사추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훈에 밑줄을 쳤다. 가훈의 내용은 이러했는데,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한다’ 였다. 가규가 삼천 줄인 고소 남씨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문장만큼 남사추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말이 없었다. 

남사추는 품 안에 넣은 서적을 꽉 쥔 채 결연한 표정으로 남경의의 등을 보았다. 남계인이 저편을 돌아다니며 다른 문하생에게 운몽 강씨의 선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바람처럼 빠르게 서적이 표창처럼 날아가 남경의의 공책 사이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서책이 꽂힌 곳은 누군가의 커다란 손아귀 사이였다.

“이게 무엇이냐?”

낭패감에 고개를 들어보면 남계인이 얇은 책을 쥐고는 딱딱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본 남경의가 남사추를 먼저 보고, 그다음 남계인을, 마지막으로 없어진 줄 알았던 얇은 책이 그 손에 들려있는 것에 이목구비를 모두 사용해 경악했다. 설상가상으로 남계인은 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남사추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읽었던 부분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한 소저는 문틈 사이로 지 공자를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여기저기서 흡, 하고 숨을 참는 소리가 났다. 분명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일테다…… 안타깝게도 여기서 웃지 못하는 것은 남경의와 남사추, 남계인뿐이었다. 그러나 남계인은 멈추지 않았다.

“이러지 마시오, 그대에겐 김 공자가 있지 않소… 싫소, 어째서요, 그대는 이제 나의 정인이니까…? ”

급기야는 숨을 참다 못해 호흡곤란이 와 허억, 하는 소리까지 곳곳에서 들려왔다. 남경의는 말액 위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다. 남사추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넙죽 엎드렸다.

“잘못했습니다……”  

실로 고소 남씨의 선조가 스님이었다는 것과 어울리는 초연한 자세였다.

***

“그냥 방에서 주지 그랬어!”

“네가 창피해할까봐…”

“그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이번 용돈으로 채의진에 가면 1편부터 4편까지 나온 장편 사 줄게…” 

남사추와 남경의는 물구나무를 선 채 가규를 필사하고 있었다. 남경의는 ‘운심부지처에서는 불온서적 소지를 금한다’라는 항목을, 남사추는 거기에 더해 ‘수업 중 딴짓 금지’가 언급된 항목까지 같이 적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남경의의 책벌이 먼저 끝나고, 다시 두 발로 땅을 딛게 된 그가 남사추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남사추 때문에 들키고 벌까지 같이 받게 됐지만 막상 벌을 서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남사추는 어쩐지 남경의가 툴툴대면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모습에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져 붓을 놀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예상보다 빠르게 책벌을 마치고 베껴쓴 가규를 남계인에게 가져다 낸 뒤 두 사람은 한 주향 정도 훈계를 더 들어야 했다. 훈계를 듣는 동안 남경의는 저도 모르게 남계인의 서안 위에 놓인 자신의 살시소설을 힐끗거렸고 분노한 남계인이 책을 흔적도 없이 찢어버렸다. 덕택에 훈계에서 풀려났음에도 숙소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반쯤 쭈그러진 콩나물 같았다.

결국 남사추는 아까 사 주기로 한 4편짜리 장편에 이어 3편짜리 장편까지 약속하고 말았다. 간식이나 새 필기구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남경의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기 때문일까? 물구나무를 섰던 바람에 욱신거리는 어깨를 기분 좋게 주무르며 남사추는 한 소저와 지 공자의 뒷이야기를 상상했다. 그리고 남경의와 자신의 뒷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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