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④

다른 건 믿지 마. 내 심장소리를, 들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

난 너를 믿었는데."

야렵대회 당일, 대회장인 백봉산 중턱에 모인 참가자들 앞에서 남망기는 참가자들의 무사 귀환과 성공적인 대회 마무리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본시 제관의 예복은 면사로 된 복면을 착용해야 했기에 남망기는 위무선에게 정체를 들킬 걱정 없이 예식을 치를 수 있었다.

제례가 끝난 후 황제의 짧은 격려사가 이어졌지만, 행렬의 맨 끝에 선 위무선에게는 그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황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위무선은 이 순간 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제대로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고 분했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남잠은 어디 있는 거야?"

위무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저를 감시하는 병사들을 괜히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뿐이었다. 남망기가 올 때까지만 기다리면 이 답답한 상황도 끝이니, 위무선은 조금만 참아보기로 했다. 이윽고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참가자들은 제각기 숲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니 멀리서 남망기가 위무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자."

남망기가 다가오자 병사들이 길을 내주었다. 그는 병사들을 물리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보네. 너도 대회 준비로 바빴나 봐?"

한적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위무선이 물었다. 남망기는 응, 하고 짧게 답했다.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더라고. 소 공공도 좋은 사람이긴 한데, 항상 나랑 잘 안 마주치려고 해."

"그래?"

남망기는 걸으면서 계속 위무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끔 응, 하고 맞장구치는 것 외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위무선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러던 두 사람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추었다.

"느꼈어?"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의 검 '피진'을 날려 보냈다. 괴상한 소리가 울린 뒤 돌아온 검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주시를 잡은 모양이었다.

"역시, 난 남잠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네 수련 경지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조심해!"

남망기가 위무선의 팔을 끌어당겨 품 안에 안았다. 그러자 위무선이 서 있던 자리에 주시 무리가 쿵, 쿵,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남망기가 빠르게 고금을 꺼내 현을 튕기자 주시들이 음파를 맞고 나뒹굴었다.

"어…, 구해줘서 고마워."

위무선이 말했다.

"방심하지 마."

"응, 잠깐, 남잠, 뒤!"

두 사람의 예상보다 주시의 수가 많았다. 남망기는 즉시 검을 휘둘렀지만, 혼자서는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두 사람은 다른 참가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왔기 때문에 주변에 아무도 없어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위무선은 내키지 않았지만,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이 힘은, 그가 정말로 쓰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캄캄한 죽음만이 가득했던 난장의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선택.

위무선은 홀로 피진을 휘두르며 고군분투하는 남망기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기력을 다스리며 피리의 음색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이내 그의 전신에서 심상치 않은 운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그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빛 한 점 들지 않던 난장강의 어둠과 같았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남망기를 향해 달려들던 주시들은 조금씩 위무선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 모였다. 어느 정도 주시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하자, 위무선의 운무는 이내 날카로운 창이 되어 주시를 하나둘씩 찌르고 베어 갈랐다. 사방에 피가 튀고 시체 조각이 널브러졌지만 위무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망기의 하얗고 아름다운 옷을 조금도 더럽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 몰려드는 주시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남망기는 한숨을 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끝난 건가? 그러나 주시는 다른 방향으로 몰려 가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검은 안개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남망기는 검은 안개의 중심에서 피리를 불고 있는 위무선을 발견했다. 그 검은 안개는 위무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기운은 분명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망기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위무선은 괜찮은 건가?

전쟁 이후 무슨 일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검을 버리고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남망기의 머릿속에 문득 위무선에 대해 조사한 자료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왜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마외도邪魔外道.

일국의 왕자가 익혔다고는, 차마 널리 알릴 수 없었을 터. 상당한 실력자로 알려졌던 위무선이었으니 갑자기 검을 버리고 사도를 익힌 것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었겠지.

그렇게 남망기는 차마 그 가운데 끼어들지도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위무선이 남은 주시를 유인하듯 천천히 절벽 쪽으로 뒷걸음질했다. 남망기도 정신을 차리고 즉시 그를 따라갔다. 위무선이 벼랑 끝에 선 순간, 그의 검은 기운이 일순 강해지더니 주시를 벼랑 밑으로 모두 날려버렸다.

"위영!"

주시들이 낙하하자, 위무선은 피를 토하며 입에서 피리를 뗐다. 남망기는 얼른 달려가서 비틀거리는 위무선의 어깨를 안고 자리에 천천히 앉혔다. 위무선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것을 본 남망기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괜찮아?"

남망기의 다급한 목소리에, 위무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잠, 너 다쳤구나."

위무선의 말에, 남망기는 그제야 자신의 팔이 깊게 베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려고 했지? 전혀 안 괜찮아 보이니까 어서 돌아가서 치료 받자."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지반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발밑이 무너지며 두 사람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

그때, 난장의 밑바닥으로 추락할 때에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위무선은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깼구나."

어렴풋이 정신이 든 위무선의 귓가에 남망기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이 남망기의 다리를 베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여긴?"

"절벽 중앙에 동굴이 있길래, 들어왔어."

그러니까,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위무선을 붙잡고 동굴로 날아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위무선은 남망기의 판단력과 완력에 감탄했다. 안 그랬으면 둘 다 지금쯤 저승 문턱을 밟고 있었을 테니까.

"가만, 너 정도의 실력이면 기절한 사람 하나쯤 더 태우고 어검해도 충분할 텐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었던 거야?"

위무선은 순수하게 그저 궁금해서 물은 것이었지만 남망기는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아무 답도 못했다. 사실 그 말이 맞았고, 남망기 본인도 그러려고 했다. 새하얗게 질린 채 의식을 잃은 위무선이 걱정되어 빨리 의원에게 데려가고 싶었지만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옷을 꼭 쥐고 있는 위무선을 차마 품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차가워진 위무선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영력을 주입해 주자 다행히 상태가 점차 나아졌기에 여기서 잠시만 쉬었다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위무선을 바라보던 남망기는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그를 이 외로운 땅으로 오게 한 것은 무심했던 자신의 오만한 명령이었다. 그를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고집 센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그러니 오늘, 그가 겪은 고통은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그럼에도 남망기는, 차마 그를 놓아줄 자신이 없었다.

"이제 그만 나갈까."

속내야 어떻든, 남망기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기에 위무선은 그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일어나서 어검할 채비를 하는데, 위무선이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

남망기가 뒤돌아보자, 위무선은 제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남망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망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위무선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나, 전부터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어."

남망기는 검을 집어넣고 위무선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위무선은 막상 말을 꺼내자 차마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남잠, 너, 그러니까,"

어두운 동굴 속이지만 위무선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붉어진 것이 선연히 보였다.

"나랑, 그날, 그러니까 무슨 뜻이야?"

생략된 표현이 너무나 많았지만 남망기는 알아들었다. 심지어 위무선은 그 일에 대해 한 번 끄집어내려 한 적도 있지 않았나. 그러나 그것을 회피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언제까지 모른 척 외면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

남망기의 마음속에 어떠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천하를 가진 그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 그리고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만 같았다.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을 것처럼.

남망기는 위무선의 어깨를 꽉 잡고 벽에 밀쳐 눌러버렸다. 그러고는 지난 봄의 찬란했던 어느 날처럼, 따뜻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쳐 얽어맸다. 폭풍우가 풍랑을 만들듯 점차 거세지는 남망기의 입맞춤은 위무선의 마음속에도 집채만 한 파도 같은 감정을 휘몰고 왔다.

위무선은 드디어 그 감정을 밀려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널,

"이걸로, 대답이 될까."

"응?"

남망기의 영문 모를 말에 위무선이 반문하자, 남망기가 재차 말했다.

"내 심장 소리를, 들어."

남망기는 위무선의 머리를 꼭 껴안아 자신의 품 안에 가뒀다. 그러자 위무선의 귀에 불규칙적이고 거세게 뛰는 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위무선은 그 불안한 소리에 왠지 마음이 녹을 것만 같았다. 그래, 네 마음도 나와 같구나. 위무선은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남잠,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나?"

외로웠던 내 정원에 너라는 나비가 처음으로 처음으로 들어왔던 날.

"너랑 함께 합을 맞춰 연주한 날, 왠지 난 널 처음 봤지만 아주 오래 만난 사이인 것 같았어."

위무선은 자신을 품에 가득 안은 남망기의 허리에 두 팔을 조심스레 감았다.

"내가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더라도, 그날은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아."

위무선은 고개를 들어 남망기를 올려다보았다. 남망기의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해 보이는 피부 아래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끓어 타오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잠, 난 네가 좋아.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단순히 벗으로서 하는 말은 아냐. 좋아, 바꿔 말할게. 널 은애해, 남잠. 네가 아니면 안 돼."

남망기의 대답은 없었지만, 위무선은 이미 그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걸. 남망기의 떨리는 손끝이 위무선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따스해서 위무선은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제, 나갈까."

남망기의 말에 위무선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어검해서 절벽 위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황실의 병사들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몰랐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고, 늦은 시간까지 황제가 보이지 않자 황실의 모든 병력이 나서서 온 산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횃불을 든 채 황제를 찾던 병사들은 그들이 찾던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위무선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남망기를 홱 돌아보았다. 남망기로서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였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위무선이 받은 충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조금 전의 온기는, 한순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이제야 드디어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은 한낱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다. 모든 속내를 터놓고 널 은애하노라고 용기 내 말한 지 일 각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남망기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진심이었건만, 남망기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고 기만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황제라니, 내 고통에 가장 공감해주고 날 위로해준 네가 내 고통의 근원이었다니.

위무선은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남망기를 노려보자 그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곧 황제를 태울 마차가 도착했다. 위무선은 타고 싶지 않았지만, 남망기가 함께 타도록 명했기 때문에 별수 없이 타야만 했다.

마차가 달리는 사이 위무선은 그제야 '황제'가 그 동안 몇 번이고 외출을 쉽게 허락한 것, 별원의 연못에 연꽃을 심어주었던 것, 위무선이 참석하는 공식 석상에서 반드시 얼굴을 가린 것, 그리고 이 야렵대회에 참가하게 해 준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 모든 일에는 꼭 남망기가 빠지지 않았고, 그 남망기가 황제니까.

위무선은 남망기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동안 있었던 모든 일, 조금 전까지 꼭 껴안고 했던 말, 들려주었던 심장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질 나쁜 장난처럼 느껴졌다.

"황제 폐하, 나에게 할 말 없어?"

위무선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지만 남망기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위무선의 눈에서 눈물이 구르듯 흘러내렸다.

남망기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위무선은 자신을 기만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불행하게도 남망기는 해명이나 변명에 그렇게 능한 편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능수능란하게 말을 할 줄 안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는 그 어떤 말도 해명이 되지 않을 터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던 사람은, 그렇게 다시 멀어져버렸다.

어느새 마차는 궁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각자의 거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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