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 밤, 꿈, 그대

[마도조사&진정령][망기무선] 보름달 밤 꿈 그대①

악연도 인연이거늘


"너와의 만남이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악연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

"폐하, 사신단이 돌아왔습니다."

이 태감이 고하자, 막 돌아온 사신들이 일제히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 앞에 서 있던 황제, 남망기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옥같이 단아하고 정갈한 외모의 젊은 황제는 그 고운 얼굴이 무색해지도록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냉담한지, 눈부시게 빛나는 그의 새하얀 옷자락에도 서리가 나붓이 내려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젊은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냉철한 전략으로 전장을 이끌며 주변국들을 수차례 무릎 꿇린 지략가였다. 그와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어, 그가 즉위한 이래 제국은 유례 없는 번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로는 문무백관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그의 치세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정작 그 대단한 칭송을 받는 본인은 그 어떤 낭보에도 차갑고 엄숙한 표정으로 일관하여, 그가 웃는 모습을 본 이가 궁내에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사절단을 둘러보던 남망기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닿았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국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자는?"

황제의 하문에, 사절단장인 장 태감이 답했다.

"명하신 대로 이번에 다녀온 나라에서 볼모를 함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니까, 끌려온 패전국의 왕자라는 말이었다. 그 명을 내린 남망기 본인도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수고했구나."

남망기는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의 생략된 뒷말은 주로 이 태감이 이어서 하는 편이었다.

"공물의 절반은 국고에 귀속하고, 절반은 사절단장 장 태감께서 이번에 수고한 이들에게 배분하시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이 태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신의 상전을 향해 여쭈었다.

"폐하, '손님'은 어찌하라 이르면 좋겠습니까?"

볼모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던 황제였기에 당연히 그 부분은 하교문에 빠져 있었다. 남망기는 잠시 생각하더니, 재차 지시했다.

"별원이 비어 있으니 그곳에 거처하게 하고, 시중 들 궁인을 보내거라."

역대 황제들의 후궁이 거처하던 별원은 지금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선대 황제의 후궁들은 이미 늙어서 퇴궁하거나 사망한 후였고, 남망기는 그다지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편이라 후궁은커녕 아직 황후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교를 마친 남망기가 다시 뒤돌아서자, 사신들은 예를 갖추고 물러갔다. 이 태감은 수하를 불러 홀로 남은 적국의 왕족을 별원으로 모시도록 지시했다.

"그쪽은 존함이 어찌 됩니까?"

이 태감의 명을 받아 손님을 안내하던 환관 소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은 당황했다. 적국의 중심에 서 있는 이 이방인이 제 처지에 비해 너무나 태연해 보였기에.

"소하입니다. 소 공공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나는 위무선이라 합니다. 소 공공이 앞으로 내 처소를 담당합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나는 그대와 잘 지내야겠군요."

그렇게 말하고 위무선은 씩 웃었다.

본인의 처지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참아야만 했다. 자신의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황제에 복수하기 위해서는, 일단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지. 그래야만 기회가 생길 테니까.

어느새 그들은 별원에 도착했다. 그러자 소 공공과 담소를 나누며 걷던 위무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아무리 후궁들의 거처였다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처소가 왜 이래…,"

별원은 크고 넓었으며 아름다웠으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요란한 장식 따위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거나 해서 보고만 있어도 체할 것만 같았다. 옆에서 위무선이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 공공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설명했다.

"이곳이 취향에 안 맞으실 줄 알지만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투는 한없이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있었지만 속뜻은 확실했다. 고쳐 줄 수 없으니 대충 참고 살라는 말이었다. 위무선은 멋쩍은 듯 웃으며 괜찮습니다, 라고 말했다.

"곧 시중드실 궁인들을 붙여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은 언제든 지시하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먼 길을 와서 피곤한데, 좀 쉬겠습니다."

위무선의 말에 소 공공이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위무선은 침상에 앉아 이것저것 생각하다,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

우스운 일이었다. 그에게 복수하려면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나중에 또 기회가 생기겠지, 뭐."

위무선은 장화를 벗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어쩐지, 조용한 실내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위무선은 생각보다 대우가 좋은 것에 놀랐다. 삼시세끼 식사는 물론 원하는 간식이나 술도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고, 처소와 의관은 궁인들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해 주는 등 볼모로 끌려온 사람이라기보단 외국에서 손님이 오신 듯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별원이 넓고 아름다운 것도 풍류를 즐기는 위무선의 마음에 쏙 들었다. 정원 곳곳에 연못과 정자가 있었기에 위무선은 내키는 대로 가서 풍경을 감상하곤 했다. 하지만,

"여긴 연꽃이 없네."

그의 고향 왕궁에는 연못마다 연꽃이 그득해 참 아름다웠었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으니 아무리 즐거운 풍경을 바라본다 한들 머나먼 고국 땅에 대한 그리움만이 들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분 듯 아린 느낌이 들었다. 위무선은 피리를 꺼내 한 곡 불어볼까 하다가, 피리에 달린 연꽃 모양의 옥 장식에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보고 싶다, 다들."

위무선은 피리를 내팽개치고 정자 마루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지금쯤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하며 울적한 마음으로 하늘만 바라보던 그때, 연못가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위무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기척을 찾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혼자였다. 온통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허리에 검 하나만을 찬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갈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푸른 색의 끈이 길게 흩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위무선은 한눈에 그의 수련 경지가 높다는 것을 눈치챘다. 황제의 호위대라도 되는 사람인가? 위무선은 기척을 죽이고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


남망기는 자신이 또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황궁이지만 종종 생각에 빠지면 길을 잘못 들고는 했다. 처음에는 황제가 아무리 물리라 해도 꼭 호위와 궁녀들을 붙이던 이 태감도 웬만한 호위들 십여 명보다 황제 개인의 영력과 무술 실력이 더 높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황제가 혼자 다니도록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남망기가 길을 잘못 들어도 그것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별원에 와 있었다. 자신은 후궁이 없어 올 일이 없던 곳이었기에, 이곳의 경치가 조금 낯설었다. 그래도 잘 다듬어진 정원을 보니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랜만에 고금 '망기'를 꺼냈다. 황위에 오른 후 제대로 연주해 본 적이 없었지만, 왠지 오랜만에 한 곡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저귀는 새 소리, 바람결에 흐르는 물소리, 찌르르 울리는 벌레 소리와 그의 정결한 고금 소리가 어우러지자 그야말로 절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연주했을까, 어디선가 자연스럽게 청아한 피리 소리가 날아와 얹히는 것을 느꼈다. 피리 솜씨도 상당히 수준급이라 남망기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윽고 한 곡을 끝마치고, 남망기는 일어나서 피리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피리를 든 채 씩 웃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쪽은?"

남망기의 물음에 그가 답했다.

"위무선입니다. 그쪽은 누구신지?"

이 궁 안에 사는 사람 중에 황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니, 남망기는 조금 충격을 받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곳은 별원이고, 별원은 며칠 전에 볼모로 잡혀 왔다는 왕자가 기거하도록 내 준 곳이었고…,

모를 수도 있겠구나, 의외로 남망기는 납득이 빠른 편이었다.

남망기는 상대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비단 도포 자락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것을 단단히 묶고 있는 붉은 끈에서, 자신만만하게 씩 올라간 입꼬리에서, 투명할 정도로 깨끗하고 새하얀 두 뺨에서, 끝을 알 수 없이 빛나고 있는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제국 최고의 정원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어 놓은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의 앞에서는 빛이 바랜 것만 같았다. 그런 그의 앞에서 남망기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에 잡은 나비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남망기라고 합니다."

"남 공자, 길을 잘못 드셨나 봅니다. 고금 연주가 훌륭해서 끼어든 점 양해하시고, 들키기 전에 어서 나가시지요."

길을 잘못 든 건 맞지만 이 황궁에 자신이 못 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들켰다간 괜히 소란이 날 것이었기에 남망기는 잠자코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남 공자."

위무선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남망기는 대답 없이 별원을 빠져나왔다.



대전으로 돌아온 남망기는 이 태감에게 위무선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렇게 많은 내용이 적혀있지는 않았다. 이름은 위영, 자는 무선, 어릴 때 왕가에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천재적인 영력과 검술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쟁 이후 무슨 일인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검을 버리고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남망기는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 위에 자료를 놔둔 채 낮의 일을 회상했다. 눈부신 햇살과 그들의 합주가 떠오르자 한 번도 동요한 적 없던 그의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폐하?"

이 태감의 목소리에 남망기는 쥐고 있던 붓이 거의 부러지기 직전인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옥체가 상하시겠습니다."

"괜찮다."

남망기는 정신을 차리고 상소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이미 검은 도포 자락과 환하게 웃던 누군가의 얼굴로 뒤덮여 있었다.


"소 공공. 별원 밖으로 나갈 수 없겠습니까?"

어느새 위무선이 이곳에서 지낸 지 달포가 지났다. 이미 정원은 지겹도록 봤고, 궁중 음식도 질리도록 먹어봤으며,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 이곳이 슬슬 지겨울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위무선은 원래 한 곳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면 좀 알아봐 주시지요. 이대로 있다가는 유사 이래 최초로 지겨워서 사망한 볼모가 될 것 같단 말입니다."

위무선의 농담 섞인 말에 그간 그와 친해진 소 공공도 조금은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알아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나왔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 태감에게 전달하자마자 단박에 거절당했다. 소 공공이 멋쩍은 듯 물러가려는 그때,

"무슨 일이냐?"

언제 나왔는지 그들의 뒤에서 남망기가 물었다. 황제가 갑자기 나타날 줄 생각도 못 했던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소 공공이 차분하게 위무선의 의중을 전달했다.

"윤허한다."

"하지만 폐하, 그가 도주라도 하면 어찌 하옵니까."

"짐이 동행하겠다."

황제가 같이 나가겠다니!

위무선이 나가겠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이 발언에 수습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두 환관을 보며 황제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평상복을 가져오라."


타 플랫폼에 올렸던 글들을 이관하고 있는 중입니다.

펜슬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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