湛婴錄 잠영록 (1)

망기무선 / 원작기반au

紅緣 by 가홍

- 정략혼으로 일황자 위무선에게 장가드는(...) 남망기.
- 원작 기반 au. 동성 간에도 혼례를 치른다는 설정입니다.


  • 경화(景和) 22년 맹하(孟夏). 일황자 무선과 고소 남씨 망기의 사주단자를 교환하다. 추길(諏吉)하여 택일단자를 내리니, 황송해하며 받들었다. 

  • 경화 22년 신추(新秋). 일황자 무선과 고소 남씨 망기에게 교지를 내리다. 보름 후 난장궁(蘭帳宮)에서 대례를 치르고 거하다.

  • 경화 24년 섣달. 일황자의 이혼장을 재허(裁許)하다. 일황자와 남가 망기와의 혼인 관계를 종료하고, 그에게 속히 본가로 돌아가라 이르다. 


"전하!"

요대를 든 궁인이 급히 제 주인을 뒤따르며 후배에게 눈짓했다. 어서 가서 고해. 조금 더 앳된 얼굴의 궁인이 선배와 주인을 앞질러 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주인은 큰 키만큼이나 보폭도 시원시원해서, 이제 갓 열셋이 넘은 어린 궁인이 겨우 따라잡았을 즈음에는 명가(名家) 고택의 굳게 닫힌 대문까지 고작 다섯 보 남겨두었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마차 안에서 궁인 둘이 달라붙어 그들의 상전을 가꿔놓아 얼핏 보기엔 그럭저럭 볼 만했다. 그러나 그건 궁 밖에 나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빠른 걸음 탓에 옷자락이 크게 펄럭이니 그의 허리 부근이 허전한 것을 누구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다행히, 부끄러운 줄 모르는 옷매무새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를 뛰쳐나간 그에게 예의 궁인이 신속하게 다가와 요대를 매어주었다. 마음이 급한 주인이 발을 동동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아서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숙련된 궁인에겐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부산스레 움직일 때마다, 높이 동여맨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고 강렬한 여름볕이 타고 흘렀다. 

"왜 이리 느린 거야. 한 번 더 불러봐라."

어린 궁인이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이리 오너라. 마침내 두꺼운 대문 저편 아주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 댁은 하인들마저 달리는 법을 모른단 말이야? 허리에 손을 얹고 비딱하게 선 사내가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발을 동동거렸다. 

"전하, 제발 몸가짐을……."

"내가 잘 보여서 무얼 해. 차라리 한껏 밉보여서 스승님 심기를 뒤틀어놓는 게 낫지."

그런다고 저쪽에서 물러주진 않을 텐데요, 하물며 어명인데. 

하나 굳이 그도 잘 알고 있을 이야기를 해보았자, 일황자가 대낮부터 고소 남씨 저택 앞에서 괴성을 지르며 떼를 쓰고 있더라는 말거리나 만들까 싶어 궁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게다가 어제 예부에서 한바탕한 이야기가 이미 저잣거리에 퍼져나간 터라 더 소란스러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황제 폐하야 황자들, 특히 일황자가 하루가 멀다고 치는 자잘한 사건사고에 일일이 예민하게 굴지 않으리라. 그러나 궁인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속한 내명부의 가장 윗전이신 황후마마의 불호령이었다. 또 황가의 체면을 깎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몽국의 일황자 위무선은 어제 그 난리를 치고 오늘도 침상에서 일어나자마자 궁인들의 진땀을 쏙 빼놓았다. 사시가 지나서야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를 겨우 자리에 앉혀 놓고 세안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역시 파혼하러 가야겠어'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외출할 준비를 하라 명하고 얇은 침의만 걸친 그 상태 그대로 날 듯이 달려 궁 밖으로 향했다. 

위무선은 명한 대로 마차가 준비된 것을 보고 '역시 말을 타는 게 빠르겠다' 하고 거기 매인 말에 뛰어 올랐다. 그 바람에 태감은 황자를 뜯어말려 겨우 안장에서 끌어내리고 마차 안에 궁인 둘과 함께 욱여넣어야 했다. 무더위는 한풀 꺾였다지만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이 계절에, 좁은 마차 안에서 옷을 갖춰 입히느라 어찌나 힘들었던지. 게다가 요대를 하지도 않고 마차에서 뛰쳐 나갔을 때는……. 이제 막 정오가 되었는데 궁인은 제 내의가 이미 땀에 젖어 몸에 축축 감겨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반듯하게 풀을 먹이고 향을 입힌 옷을 나름 단정하게 걸친 위무선의 자태는 오늘도 멋들어졌다. 비록 붉은 비단으로 높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중앙에서 조금 틀어진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그의 자유로운 성품을 드러내는 것 같아 어색함이 없었다.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날렵한 턱과 시원한 콧대와 눈매, 적당히 도톰한 입술과 균형 잡힌 신체까지 그야말로 운몽 최고의 풍신준랑이라는 명칭에 걸맞았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어젯밤 머리카락 끝과 손마디 사이까지 정성스레 입혀드렸을 향유의 흔적이 체취와 섞여 코 끝을 간지럽혔다. 

이리 잘난 분이 내 주인이다. 어느새 꿍얼거리던 것도 싹 잊고, 궁인은 자신이 예쁘게 가꿔놓은 화초를 보듯 뿌듯한 마음으로 상전을 바라보았다. 

그런 제 종자의 기꺼움보다 제 눈앞에 닥친 중대사가 급한 위무선은 대문이 열리자마자, 용건을 묻고 안으로 모시려는 남가 하인의 말은 듣지도 않고 불쑥 문턱을 넘어 고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평상시의 그답지 않게 상당히 무례한 처사였지만 누구도 감히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황자가 아닌가. 어찌 감히 그 앞을 막으랴. 인사치레 없이 들고 싶다 하시면 그렇게 하셔야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일황자의 소식을 전해 듣고, 그를 맞으러 나오던 남희신과 마주친 것은 그가 이제 막 두 번째 중문을 지날 때였다. 

"전하, 언질도 없이 어찌……."

"미안합니다, 종주. 아우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당장 만나야겠습니다."

"예?"

남희신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다짜고짜 제 아우의 안위를 묻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그는 몇 주 전부터 저택의 가장 깊은 곳, 안뜰을 지나야만 나타나는 사당 옆 작은 별채에서 머물고 있었다. 근래에는 흡사 폐관수련하듯, 가능하면 외출마저 삼가고 있는 그를 갑작스레 만나겠다고 찾아오다니. '아무리 전하라 해도 그것은 불가하다'는 뜻을 어떻게 에둘러 전할까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위무선이 다시 입을 뗐다. 

"만날 수 없는 게 법도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니 온 것입니다. 법도를 어기고, 혼약도 어기려고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 그러니까, 지금 내가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가 되어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곁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궁인들도 남희신도, 누가 귀 옆에서 징이라도 세게 울린 듯 정신이 아찔해졌다.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 방금 대화를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궁인 하나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상상의 가지를 부러뜨리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꼭, 지금 길일까지 근신하고 있을 예비 반려를 특별한 허락도 없이 만나서 뭐라도 저질러버리겠다는 것처럼……. 궁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편 남희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허합니다." 

"아니, 그러니까 소문만 내면 됩니다, 소문만. 내가 막 쳐들어가서 손목을 잡았다고 합시다, 예?"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 집안의 명예는 둘째치고서라도, 그의 체면을 위해서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위무선이 제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팡팡 치며 따졌다.

"아니, 왜요! 이 혼약이 맘에 드세요? 내가 뭐가 예뻐서!"

이제는 숫제 떼고집이었다. 궁인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남가 종주는 과연 군자였는지, 그런 행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곤조곤 타일렀다. 사실, 남희신은 어제 일황자가 예부를 휘젓고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라 혼례일까지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날벼락 같은 방식은 아니었지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번 혼약은 황가와 저희 고소 남씨 집안과의 화합을 상약(相約)하며 아주 오래전 결정한 일입니다. 게다가 이 혼례를 먼저 추진하신 것은 황상이시고요. 물론 저희 집안에서도 바라던 바라 기껍게 받아들였습니다만, 어명을 거역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은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몇 달 전 사주단자를 교환할 즈음에는 아무 말씀도 올리지 않으시더니, 이미 준비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이리 철없이 구시다니요."

조금 길게 말을 이어가던 남희신은 마치 멀지 않은 과거, 그의 선배로서 같은 선생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던 시절로 돌아간 듯 부드럽지만 엄중하게 진언을 마무리했다. 그러자 위무선도 그때로 돌아간 듯, 눈썹을 늘어진 토끼 귀처럼 늘어뜨리며 웅얼거렸다. 몰랐는데 어떡합니까, 몰랐는데…….

남가 종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하고 그저 소리 없이 실소만 터뜨렸다. 며칠 전 대례복을 맞추러 들고 온 궁인들을 보고 놀라서 펄쩍 뛰었다더니, 풍문이 사실이었나 보구나. 

곁에서 동동거리던 궁인도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만 돌아가요, 전하. 이러다 황후 폐하 귀에 들어가면 또 크게 혼나십니다. 그 말을 듣고, 남희신은 그제야 여기서 더 이러고 있다가는 궁에 말이 들어가기까지 기다릴 것 없이 당장 제집 담벼락 안에서 한 차례 경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가 들었다. 안 그래도 일황자의 배경 탓에 이 혼약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숙부님이신데, 어제의 일이 그분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 터였으니……. 그런데 지금의 소란까지 숙부 귀에 들어갔다가는, 집안 간에 화목은 커녕 괜히 그간 없던 불화마저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리 무례하게 행동하시면 저도 곤란합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

기운이 팍 죽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위무선이 안쓰러워보였다. 남희신이 위로하며 그의 축 늘어진 어깨를 다정히 토닥여주려는 찰나, 일황자가 들어 올린 왼팔 아래를 재빨리 스치더니 안뜰을 향해 달렸다. 얼굴을 숨기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탐색하고 있던 것이다. 평소 사냥과 승마를 자주 한다더니 일황자의 몸놀림은 고양이처럼 날렵했다. 뒤로 늘어지는 옷자락을 붙잡으려 두 사람이 뒤늦게 뻗은 팔을 가볍게 따돌리더니, 위무선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꼬리처럼 팔딱이며 손과 손 사이를 스쳤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두 사람을 따돌린 위무선이 안뜰로 이어지는 중문을 향해 시원히 내달리려는 그 순간.

"위무선!"

이 나라에서 일황자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다. 그중에서도 저렇게 험악한 어조로 그 이름을 부를 만한 사람이라면 단 두 사람뿐인데, 그중에서 궁 밖으로 나와 남가 고택까지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정체는 불 보듯 훤했다. 

과연, 남희신과 위무선의 종자가 나란히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니, 예상대로 장옷을 휘날리며 그 형제 못지않게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문을 넘어 오는 사내가 있었다. 일황자조차 걸칠 수 없는 짙은 자색의 외의를 걸칠 수 있는 자는 황제를 제외하면 이 나라의 태자뿐이다. 

그런데 태자 강만음은 항시 그를 보필하는 궁인 외에도 장검을 소지한 병사 여섯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마에 두른 건의 자수 장식을 보아하니 황제를 보위하는 금위군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앞서 나가 일황자가 진행하려던 방향을 가로막았고, 이미 강만음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제 계획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위무선은 제 앞을 가로막는 금위군들을 보고는 기함하고 말았다.

"너, 너, 나를 잡으려고 금위군까지 데려왔다고? 너무한 거 아냐?"

"흥, 일반 병졸들로 널 어떻게 제압하겠냐."

강만음은 위무선에게 응수하며 곁에 선 남희신에게 가볍게 공수하며 사과했다.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쳐 미안합니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만."

너그럽기가 하해와 같은 남희신은 태자께 빙긋 웃어 보였다. 

"예, 그럼요. 사정은 이미 파악했습니다, 태자 전하." 

제 편이 아닌 게 분명한 자들에게 둘러싸인 위무선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혼례 직전에 혼약자를 만나는 건 무리한 짓거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간단히 제지당할 줄이야. 혼약자가 있는 곳에 이르기는커녕 안뜰에도 발을 못 디뎠으니, 그런 점에서 체면만 잔뜩 구겼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빨리 알고 온 거야."

태자가 일부러 거만한 체하며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태감이 일러줬다."

"……우리 영감? 아휴, 그 노인네를 정말! 대체 어느 궁 태감인지 모르겠다. 사실 네가 심어둔 첩자 아냐?"

"너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자 눈물 많아져서 운다."

"네가 우리 영감의 뭘 알아!"

"흥, 내가 그자 손은 안 탔어도 곁에서 계속 봤는데 어찌 모르냐. 봐라, 너 혼롓날에 한구석에서 훌쩍훌쩍 울걸?"

"야! 너……." 

"알아. 그러니까 내가 네게 더 심한 행동 못 하게 이만 돌아가."

"……."

"형님 되시는 분 앞에서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송구합니다, 종주. 하나 아우분께서도 이 혼약의 의미를 잘, 기실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계실 터." 

남희신이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였고, 강만음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위무선. 네가 그에게 잘 말씀드리면 네가 바라는 것 하나 정도는 들어주지 않으시겠냐. 네가 그렇게 아집을 부리면 그분의 면은 어찌하라고. 네가 못 견디겠다 하는 것을 그는 견디고 계신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내가 아는 위무선은 절대 이토록 미련하고 불민하지 않다."

"넌 내가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

철모르는 동생을 꾸짖는 듯한 말투에 마침내 성이 나고야 말았는지, 항시 명랑하던 위무선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높은 분들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만 있던 궁인은 저도 모르게 등을 움츠리고 말았다. 아주 가끔, 한 해에 한두 번 들을까 말까 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제 상전은 현재 굉장히 심기가 나쁘다.

"정 없는 사람과 명분만으로 혼례를 치르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그께도 큰 각오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내 사적인 청까지 염치 없이 들어달라 할 만큼 내가 파렴치한은 아니야. 적어도 나는, 남가(蓝家)의 이름을 짊어지고 하필이면 나에게 혼례 드는 그 불쌍한 분에게 한평생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생각한다. 내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봐야겠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속에서 회한을 지울 수 없을 거야. 역시, 안 될 것 같더라도 해봤어야 했는데, 하고. 그러면 나와 그의 여생이 불행했다 이를 순 없더라도, 절대 부부로서 행복할 수는 없겠지."

"……."

"한데 나에게도 그에게도, 아직은 가장 좋은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냐. 혼례를 무르는 것."

"아니, 그건 이미 놓쳤어. 무르려면 석 달은 더 전에 나섰어야지."

"전적으로 내가 늦은 탓이다? 그렇게 생각해? 정말?"

"……."

강만음은 답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명분뿐인 혼약에서 위무선은 불가피하고 유일무이한 선택지였다. 애초에 태자인 자신은 이 혼례의 대상으로 고려되지도 않았으며, 장녀인 염리에게 바라지도 않는 정략혼을 강요할 만큼 황제 부부는 잔인하지 않았다. 그러면 결국, 다른 성씨를 지닌 채 강씨 황가의 일원이라 어물쩍 넘기며 수십 년을 흘려보낸, 반쯤 내놓은 황자 하나를 택할 수밖에.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지는 운몽국의 안녕은 황가가 취하고 마는, 그들로서는 흔치 않게 영악하고 실리적인 행보였다. 그러니 애초에, 이 혼담에서 위무선은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적어도 그를 친자처럼 여기는 황제는 그 모든 수를 계산에 넣지도 않았을지 몰라도, 겉보기에는 그리 읽힐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위무선은 냉정하게 몸을 돌려 저택 대문으로 향했다. 그의 주위를 포위하듯 따르는 금위군을 향해 파리를 내쫓듯 양팔을 휘젓더니 "내 알아서 간다, 간다고!" 하고는, 제 사람도 챙기지 않은 채 터벅터벅, 일부러 흙먼지를 일으키며 걸어 나갔다. 남겨진 궁인은 남희신의 그림자 속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제 주인을 뒤쫓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은 그렇게 떠났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희신이 말했다.

"노고가 많으십니다, 전하."

"……이리 살아왔는걸요."

아마도 위무선에게 극적인 심적 변화가 없었다면, 그의 여생에 대한 이 중대한 선고를 담담히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은혜를 알고, 그 대가로 치러야 할 책임과 의무도 알았다. 그것이 강만음의 어미가 누누이 가르쳐온 것이었다. 네 주제를 알아라. 나는 네게 베풀 만큼 베풀 것이나, 평생에 걸쳐 그를 갚아야 할 것을 잊지 말아라. 그 편파적인 가르침을 곁에서 지켜본 것 또한 자신, 강만음이었다. 그런데 어미가 제 형제에게 빚을 지우는 동안, 자신 또한 그 형제에 대한 빚을 쌓아갔다는 것은 아실는지. 강만음은 쓰게 웃었다. 

그가 떠나간 방향을 눈길로 뒤쫓는 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희신이 "아" 하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걷어내었다. 

"모처럼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그간의 안부도 전하고요."

남가 종주가 아닌 선배로서의 권유였다. 강만음은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위군에게 먼저 돌아가라 명했다. 그들이 물러가자 남희신이 긴 소매를 우아하게 펼쳐 후배를 외정원으로 안내했고, 급할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은 여유롭게 중문을 넘었다. 


그 모든 소란은 몇 겹의 담과 안뜰을 넘어 사당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 뒤편의 자그마한 별채까지도. 

여타 제대로 된 독채와 마찬가지로 검은 기왓장이 올라가 있을 뿐, 고소 남씨의 저택 안에 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낡고 허름한 별채는 이 광활한 저택의 숨겨진 중심 같기도 했다. 꼭 이 작은 두 칸짜리 오두막을 주위로 담을 두르고, 정원을 가꾸고, 그 밖에 좀더 높은 담과 건물을 쌓아 올려간 듯이. 그리고 지금 그 숨겨진 심장과 같은 곳에는 이레도 더 전부터 제대로 근신에 들어간 남가의 둘째 공자가 머무르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려온 것은 남망기가 여느 때처럼 경애하는 서책을 쌓아두고 한 자 한 자 곱씹다가, 마음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으면 옮겨 적어보기도 하며 어제와 같은 오전이 거의 다 흘러갔을 무렵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요란한 소리가 들려 어디서 새들끼리 싸움이라도 낫나 싶었는데, 이내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고, 굳이 물어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소란에 다른 소란이 더해지더니, 다행히도 곧 잠잠해졌다. 

배복들이 가져다준 오찬을 홀로 조용히 마치고, 반 시진쯤 지나자 남희신이 다과상을 들고 찾아왔다. 각자 차 한 잔씩을 들고, 다시 찻잔을 채우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생각도 없는 남망기에게 희신이 그 소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하께서 찾아왔었단다."

'전하'라 불릴 이는 여럿 있었지만 여기서 전하라 함은 필시 그분을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그렇다 하면 그 소란스러움도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어디든 조용히 들어와서 조용히 용건만 나누고 조용히 돌아갈 인물은 못 되는지라. 

남망기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 혼약을 깨고 싶어 못 참고 달려온 거겠지. 갑작스러운 교지에 크게 놀라 황제 내외에게 달려갔다는 소문은 반나절 만에 궁궐의 높은 담 밖으로 퍼졌다. 그 전에 예부를 한바탕 휘젓기도 했으니, 흥미로운 이야기라면 견디질 못하는 작자들이 바쁘게 이고 지고 나른 그 소식은 아정한 남가 담벼락도 타고 넘었다. 

하여 그의 인품을 떠올리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터라, 남망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가 전하와 면식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남희신은 속이 편치 않은 듯했다. 그는 이 혼담에 자신의 이름이 낀 것을, 그가 손쉽게 수긍한 것에 대해 거듭 미안해했다. 

"명랑하고 유쾌하신 분이란다. 때를 못 가리시는 분도 아니고. 다만……."

"심로(心勞)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러할 필요 필요 없단다. 전하께서도 곧 마음을 정리하실 것 같았어."

"그러하지 않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초연한 듯 담담히 말하며, 남망기는 열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순간 가늘게 떨린 눈빛을 그의 형장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그걸 알아채고도 남희신은 그의 심중을 헤아려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몇 주 남지 않은 혼례식 준비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마침내 남희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남망기를 남겨둔 채 별채에서 물러갔다. 하루 중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뿐인데도, 다시 홀로 남으니 어떤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를 심려하는 형장으로부터 제 속내를 갈무리하려면 다분히 심력을 쏟아야 하는 게다. 

남망기는 오찬 전까지 필사하고 있던 책들이 놓인 서안 앞에 앉아, 중단한 부분부터 다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습기와 열기를 머금어 뜨끈한 여름 바람이 불어오고, 서서히 글씨와 글씨 사이의 여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고소 남씨와 황가와의 혼약은 지금의 황제가 보위에 오르기도 전, 심지어 그가 보위에 오를 것이라 예상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직계 황손이 아니었던 그에게 황위가 돌아온 것은 본래 태자였던 자에게 닥친 불운과, 그 자신에게 찾아온 몇 가지 행운과 조력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실의 피를 잇지도 않은 이름뿐인 일황자와 자신이 혼례를 치르게 된 것도, 각자의 이득을 위해 하필 소중한 '둘째 공자'가 그 낡은 약속을 이행하게 된 것도, 집안의 어떤 어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 제게 닥친 중대사의 책임을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다. 게다가, 가문을 이끌고 후손까지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는 장남보다 차남을 혼약을 이행할 자로 택하는 것은 모로 봐도 합리적인 판단이지 않은가. 

남망기는 마치 다른 이의 삶을 재단하듯 그렇게 결단내렸고, 그다지 큰 고비 없이 살아온 제 인생에서 당연히 닥칠 몇 가지 굴곡 중 하나일 뿐이리라 받아들였다.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남희신은 여전히 그 부담을 온전히 짊어진 제게 어떤 부채감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희생이 아니라 그저 해야 하는 일이라 말해도, 아우의 걱정을 덜어주려 고개를 끄덕일 뿐 진심으로 짐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서로를 너무 배려한 나머지 그 누구도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지 못하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 

형장과의 일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서서히 나아지리라. 그렇게 기대하는 수밖에.

황실에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도 다른 성씨를 유지하고 있는, 이 톡 튀어나온 돌부리 같은 일황자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놀고 먹는 걸 좋아해 얼핏 한량 같은 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영특한 인물이라고, 숙부와 함께 입궁했다가 돌아온 남희신이 여러 차례 이야기해주곤 했다. 

'너와 동갑이라 하니 언젠가 우애를 다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와 우애가 아니라 부부애를 다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는 썩 첫인상이 좋지 못했으나, 형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진정 악한은 아니리라. 처음 혼담에 대해 들었을 때 크게 거부감이 없었던 것은 그런 연유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런데 오늘 제집까지 그가 찾아와서 혼례를 무르자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황자께서 다른 처자를 심중에 두고 있어, 어명에 반발해 예부를 한바탕 뒤집어놨다더라.'

'대전 앞에서 드러누워 명을 거둘 때까지 꼼짝도 안 하겠다 하는 바람에 금위군이 들것에 싣고 갔다던데.'

'궁인들을 시켜 그 처자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더라. 이름을 몰라서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고…….'

집안 분위기를 따라 하인들마저도 입이 무거운 남씨 저택 안에서도 온갖 이야기가 빠르게 돌 지경인 것을 보면, 일황자와 자신의 혼담이 세간의 관심을 적잖이 끌어모으는 모양이었다. 남망기는 그들의 수선거림에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으나, 금일의 일은 다소 놀라웠다. 

그렇게도 저와의 혼례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란 말인가? 혼례 직전에 만나서는 안된다는 금기를 어길 생각으로 담 안에 들어와 소란을 피울 만큼이나? 그도, 자신의 집안 못지않게 책임과 의무가 거대한 배경을 지고 있으면서도? 

집안과 집안 간의 거래 같은 혼례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도, 무게도 없었다. 본래 이성에게 큰 관심도 없었고, 제게 혼례는 때가 되면 그저 하게 되는 통상적인 절차였다. 꽤 이르지만 육례 중 하나를 무사히 치르고 나면 여생은 참선하고 수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터였다. 사는 터전이 바뀔 뿐이지, 제 삶은 여태까지와 마찬가지로 고요히 흘러가리라. 진정 처첩이 필요하다 하시면 그리하라 해야겠다는 결심마저 하고 있었다.

남망기는 숙부께 이 혼담에 대해 처음 들었던 순간보다도 참담한 기분에 빠졌다. 그때야, 정략혼이 흔한 것은 아니나 그리 특별한 것도 없지 않나, 하물며 자신들과 같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는, 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그의 속에는 유일무이하게 바라마지않는 반려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다면, 마침 운이 따라주어 그리 나쁘지 않은 부부 사이가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던 자신만 한심해지는 꼴이다.

결국엔 여인네에게 목숨을 거는 모양이 범부와 다를 바 없지 않구나. 

순간, 남망기는 제법 놀라며 붓 끝을 종잇장 위에서 급히 떼었다. 어느새 붓의 움직임이 멈춰 한 자리에 검은 점이 넓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필사하던 것을 이르게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곧은 글씨가 나올 리 없다. 딱히 뜨겁거나 차가울 것도 없는 미적지근한 연을 맺기조차 거부당하고 나니, 나이에 비해 인품이 고달한 경지에 올랐다 명성이 자자한 남가 둘째 공자의 심중에도 평생 처음으로 모진 마음이 번져가는 게다. 

생애 가장 붉고 고운 비단옷을 걸치고 이 별채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저택을 영영 떠나기까지 약 열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거추장스러울 비단옷을 최대한 빨리 벗어버리리라 결심하는 것 뿐이었다. 그 뒤로, 곧장 궤짝 가장 깊은 곳에 넣어버리고 다신 거들떠도 보지 않으리라. 제 생이 저물 때까지 다신 붉은 옷을 눈앞에 두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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