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11화

난 계산이 확실한 게 좋아서.

INTERLUDE by 렌틸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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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경은 오늘 강의를 끝까지 듣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밖으로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땡땡이였다.

강은재는 조금 의아했다. 물론 수업에 출석하는 이유는 하나고, 땡땡이를 치는 이유는 수만 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강은재는 조금 이상한 이유를 떠올렸다.

‘혹시 자기랑 같이 다니는 모습을 안 보이려고 먼저 나간 걸까.’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지난주의 개총 때문이었다. 그는 그 깽판을 친 다음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김혜지와 최동우가 붙잡지 않았다면 정말 그대로 가버렸을 것이다.

보통은 ‘아까 그 고학번들 미치지 않았냐’며 어떻게든 자기 편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유이경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란 거 이제 다 알았겠죠.’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유이경이 자신을 배려하느라 수업까지 빠진다는 게 더 이상하다. 강은재는 고개를 살짝 털어 쓸데없는 생각을 내보내고는, 강의가 끝난 뒤 백팩을 챙겨 등나무 벤치로 향했다.

등나무 벤치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니 몸이 점점 처졌다. 체력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주말에 무리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밤에 하는 일이라 해도 아침에는 끝난다고 생각했다. 웨이터는 퇴근 시간이 되면 퇴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를 해 보니 달랐다. 다른 선수 말로는 아침 9시까지 노는 정도는 양반이랬다. 어떤 손님은 오후 두세시까지 놀고 가기도 한단다.

언덕과 관목 사이로, 벤치에 앉은 유이경의 뒷모습이 조금씩 떠올랐다. 어느 정도까지 가까워지자 인기척을 느낀 그가 돌아보며 웃었다.

“왔어?”

강은재는 저번처럼 유이경의 근처에 서 있으려 했지만 오늘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결국 유이경의 옆에, 학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 경치 괜찮지.”

“네.”

유이경은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더니 잠시 가만히 있었다. 강은재도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으므로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말 없는 시간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평소에는 유이경이 놀리듯 말하면 강은재가 약간 발끈하곤 했는데, 유이경이 입을 열지 않으니 강은재도 반응을 할 일이 없었다.

강은재는 유이경의 말을 기다리며 무의식적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입가에 난 상처가 눈에 띄었다. 이제 보니 긁힌 것 같기도 하고, 쥐어 뜯긴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작다면 작지만 유이경의 피부가 흰 편이라 눈에 꽤 띄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술에 떡이 되어 뻗은 다음날, 이 상처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술만 들어 있는 냉장고, 피 묻은 옷, 콩나물 해장국까지... 놀랄 일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안 아플까. 밥 먹을 때 불편하겠다.’

강은재가 이딴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유이경이 불쑥 움직였다. 유이경은 움찔하는 강은재에게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날 빨래하고 갔더라. 침대 시트까지. 가사 도우미 제안할 때는 거절하더니 말야. 아무튼 난 계산이 확실한 게 좋아서. 일당이야.”

“그건… 감사해서 그런 건데요.”

강은재는 왠지 울컥했다. 설마 용건이 ‘일당’이었을 줄은 몰랐다. 적어도 오늘은 돈 얘기 따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시간은 빨래만 했을 것 같던데? 감사한 건 알겠는데, 너무 열심히 했어. 넘쳤다.”

유이경은 미소를 지으며 강은재가 제 무릎 위에 가만히 얹어 둔 손등을 톡톡 쳤다. 그는 너무나 가볍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일을 했으니 돈을 준다고.

하지만 강은재는 웃음까지도 돈으로 수렴되는 경험을 주말 밤 내내 질리도록 했다. 자신이 감사해서 한 일까지 돈으로 계산되는 건 싫었다.

그냥, 고마워서 그랬다. 유이경은 자신을 업어서 옮기고, 잠자리를 내주고, 칫솔도 주고, 아침에는 해장국도 줬다. 그게 고맙고 미안해서 그랬다. 이 인간의 사전에는 ‘호의’나 ‘감사’ 같은 게 없나? 돈이 아니라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행동의 소중함을 몰라?

‘이 사람은 성격이 은근히… 아니, 대놓고 나빠.’

그렇다. 유이경은 성격이 나빴다. 평소에 늘 웃고 다니기 때문에 가려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운한 와중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절박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 절박함은 결국 ‘서운함’과 싸워 이겼다.

돈이 필요한 곳이 어디 병원비와 사채 이자뿐인가. 고시원 월세도 든다. 통신비, 교통비, 식비…. 이 도시에서는 숨을 쉬며 존재하는 데만도 돈이 든다.

강은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봉투를 받았다. 하지만 욱하는 감정을 다 누를 수는 없었다.

“그럼 선배가 저 재워주셨으니까, 따지자면 제가 돈을 드려야 하지 않나요? 일당에서 그만큼 돌려드릴게요.”

강은재는 이 말을 하고선 유이경에게 얼마나 돌려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안을 내놨다.

“모텔비 정도면 되겠어요?”

“내가 너 데려왔잖아. 내가 모텔비 냈다 쳐.”

“…….”

강은재는 말문이 턱 막혔다. 급기야 얼굴까지 붉어지고 말았다. 유이경은 귀 끝에서부터 빨개지는 강은재를 못 본 척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그러다가 강은재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을 겨우 떠올렸다.

“그런데, 선배. 얼굴 다치신 거 말인데요.”

강은재는 제가 혹시 술 먹고 선배 친 거 아니죠? 라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유이경의 손이 멈칫했다. 사실 멈칫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찰나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강은재는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그 잠깐의 허둥거림을 못 볼래야 못 볼 수가 없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았다. 그러고 보니 이경 선배네 집에서 눈을 뜨기 전 이상한 꿈도 꿨던 것 같다.

눈을 뜨고 나서의 상황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서로 옷을 움켜쥐고 있었다…. 주먹다짐을 할 때도 그렇게 되지 않나?!

선배를 팬 것과, 선배에게 술 처먹고 키스한 것 중 어느 게 더 최악일까? 강은재는 0.1초 동안 이 미친 선택지 두 개를 저울질하다가 전자를 택했다.

“제가 혹시 선배를… 때렸나요.”

이 말을 하자 담배를 입에 물었던 유이경은 사레가 들었다. 강은재는 반사적으로 등을 두드려주려 했지만 유이경은 손을 내저어 거절했다. 한참 기침을 하던 그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는 헛웃음을 쳤다.

“콜록… 괜찮아. 안 때렸어. 그날 말했잖아. 너 얌전히 잠만 잤어.”

어쩐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이경이 말을 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근데… 진짜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구나. 보통은 드문드문이라도 기억이 있잖아. 며칠 뒤에 생각난다든가.”

“아….”

“뭐, 무거웠던 거 빼면 다 괜찮았어. 신경 안 써도 돼.”

듣고 보니 그랬다. 개총이 있던 날에는 김혜지, 최동우, 유이경이 담배를 피는 데 끼어 있던 장면이 기억의 끝이었다. 유이경의 집에 어떻게 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거라곤 이상한 꿈 뿐이지만… 그 꿈대로 정말 자신이 해까닥 돌아서 이 사람에게 키스를 했거나… 팼다면… 지금 자신을 이렇게 대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온몸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강은재는 유이경의 볼일도, 자신의 볼일도 끝났으니 빠르게 자리를 뜨기로 했다.

“선배, 저는 다음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일당 주신 건 감사합니다.”

그때 유이경이 강은재를 불러세웠다.

“은재야.”

강은재는 곧장 언덕을 내려가려다가 뒤돌아 섰다. 유이경은 다리를 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언제 사레가 들었냐는 듯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가사 도우미 일 정말 생각 없어? 벌써 한번 했잖아.”

이제 와서 수락하기에는 늦었다. 강은재는 당장 목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게에 마이킹을 썼다. 마이킹을 갚기 전까지는 가게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 돈은 할아버지에게 보냈으니 이미 갈가리 조각나서 필요한 곳에 쓰였을 것이다.

“말씀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 바뀌지 않았어요.”

강은재는 돈 봉투를 두 손으로 쥔 채 유이경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언덕을 내려갔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유이경은 조금 심란해졌다. 그는 겨우 딱지가 앉은 입가의 상처를 만지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 일은 아무래도 끝까지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그런데 유이경이 강은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또 있었다. 강은재는 몰랐겠지만, 마담이 쓴 돈은 ‘일수’였기 때문에 유이경은 한동안 강은재가 일하는 가게에 매일 갔다. 강은재가 바빠서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강은재가 선수를 시작하게 된 지난 주말에도 가게에 있었다.

마담은 그날따라 일수 도장을 찍으면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마치 물어봐 달라는 듯 콧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는 게 조금 짜증이 났다. 그냥 물어보고 끝내고 싶은 마음에 유이경이 입을 떼었다.

“박 실장님,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으응— 완전. 우리 가게에 은재라고 있는데. 사이즈가 좀 되거든? 유 실장도 봤나?”

“글쎄요. 이 사무실에 선수만 100명인데. 일일이 기억 못하죠.”

유이경은 강은재의 얘기가 나오자 일부러 그를 모르는 체했다. 마담이 강은재를 뭐라고 설명하는지 궁금했다.

“은재라고 있어. 애가 진짜 괜찮아. 내가 또 전설 하나 만들어 보려고 공들였지. 근데 오늘 딱 내 사람 됐다는 거 아냐. 마이킹 2천에.”

이 말을 들은 유이경은 가까스로 표정을 단속했다. 마담은 유이경에게서 이상한 기미를 감지하지 못한 채 계속 떠들었다.

“유 실장 있을 때 우리 참 좋았잖아. 그렇게 칼같이 관둘 때 얼마나 슬프던지. 근데 이제 괜찮아. 은재 잘 키워 볼거야. 유 실장도 나중에 기회 되면 얼굴이나 한번 봐봐. 내가 장담하는데, 걔는 두 달 안에 메인 단다.”

유이경은 할 말이 없어서 웃었다. 오늘따라 은재를 못 본다 싶었더니 선수를 시작해서였다. 웨이터들은 계속 돌아다니기에 마주칠 일이 많은데, 선수들은 대기실에 있거나 한 방에 눌러앉아 있으니 볼 일이 없는 거였다.

‘사정이 더 안 좋아졌나.’

강은재의 생활이 안 좋으리란 건 처음 만난 날 눈치챘다. 백 만원을 줄 테니 기라는 진상의 요구에 주저없이 몸을 낮추지 않았던가. 하지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진짜 강은재’가 아닐 경우 언제든 그의 인생에서 빠져야 했으니까.

물론 확실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유이경은 벌써부터 강은재의 상황을 미리 알아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왜 초짜한테 마이킹을 2천이나 해주셨어요?”

“내가 유 실장한테는 1억도 해줬는데 뭘.”

마담은 이렇게 말하며 집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유이경은 담배 한 대를 꺼내 그에게 건네고 불을 붙여 주었다. 지금이야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지만, 전에는 유이경이 마담의 밑에 있었다.

유이경은 예전 습관대로 담배를 건네고는 내심 놀랐다. 하지만 마담은 유이경의 행동이 흡족했는지 곧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애가 사정이 좀 안 좋아. 걔 할아버지가 사채를 썼는데 5천이 됐대. 조폭 애들이 연 39% 복리 많이 하잖아? 그거 같더라. 지금 걔는 한 달 이자만 백 넘게 나올걸.”

유이경은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며 마담 앞으로 재떨이를 밀어놓았다. 마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마이킹 2천? 그거 갖고 안돼. 조만간 더 달라고 할 거야. 그거 다 갚을 때까지 우리 사무실에 묶이는 거고. 딴 데 못 가지.”

그는 이렇게 말하며 유이경에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누구 때처럼 남한테 뺏기진 않으려고.”

희뿌연 담배 연기를 사이에 두고 유이경과 마담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가게를 나온 유이경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가빠오는 숨을 느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까는 마담의 앞이라 가능한 여유로운 척 했지만 사실 손끝이 떨렸다.

농담으로라도 ‘곧 선수 할 것 같다’ 따위의 말은 안 할 걸 그랬다. 후회했다.

강은재가 돌려줬던 지포 라이터는 차가웠다. 라이터에 새겨진 이니셜 각인이 오늘따라 선명하게 느껴졌다. 유이경은 라이터를 부서질 듯이 꾹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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