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낮밤] 10화
일 났네. 1억 되는 거 순식간이겠어.
그날 저녁, 강은재는 출근을 했다. 그런데 가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번씩 흘긋 쳐다보는 듯했다. 그럭저럭 말을 섞고 지내던 선수 하나가 말없이 어깨를 토닥이고 가기도 했다. 그때 마담이 손짓으로 강은재를 불러냈다.
강은재는 마담을 따라 사무실의 소파에 앉았다. 마담은 따뜻한 카모마일 차 한 잔을 강은재 앞으로 밀어주고는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어쩐지 마담의 표정에서 묘한 기색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카모마일 차에는 천장의 실링팬이 비쳤다. 강은재는 찻잔 안에서 팬이 빙글빙글 도는 걸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강은재가 생각하던 대로, 마담의 입에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은재야. 너 사채 썼니?”
강은재는 고개를 들었다. 이 바닥에서 사채 쓰는 사람이 한둘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일하는 곳의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건 느낌이 좀 달랐다.
게다가 아까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가게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것 같았다. 강은재는 차를 마실 생각도 못하고 두 손을 꽉 마주잡았다.
“어제 사채꾼들 와서 너 찾더라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제 가게에 사채업자들이 들이닥치더니 막무가내로 손님들이 있는 방을 열어젖히며 자신을 찾았다고 했다. 결국 마담이 나와서 강은재는 오늘 휴일이라고 했는데, 사채업자들은 이자가 연체되었으니 강은재 월급을 자기들이 받아야겠다고 했단다.
“너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월급을 홀라당 주긴 좀 그렇잖아. 근데 분위기 보니까 조폭 애들이 하는 데 같더라고. 여기 사무실 박살나면 사장님한테 내가 깨질 것 같아서, 그냥 줬다. 현금으로.”
강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가게에 폐를 끼치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은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담에게는 그럴 의무가 없는 것도 맞다. 그가 지켜야 하는 건 가게니까.
그리고 강은재가 ‘네, 제 월급 사채꾼한테 주세요’라고 했든, ‘그래도 월급은 저한테 주세요’라고 했든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그 돈은 결국 사채꾼 손에 들어갈 돈이었다.
강은재는 그들이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까지 찾아갈까 봐 지금 일하는 가게와 월급날을 순순히 고해바친 적이 있었다. 그게 후회가 됐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다만 강은재는 다달이 할아버지에게 돈을 부쳤다. 이자를 못 낼 돈은 아니었을 텐데.
마담은 발을 까딱거리며 조용히 물었다.
“지금 얼마니?”
“…5천이요.”
“일 났네. 1억 되는 거 순식간이겠어.”
“…….”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사채를 쓴 할아버지? 사채업자들? 아니면 이 돈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신?
그때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강은재가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마담을 한 번 쳐다보자, 마담은 가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강은재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
— 은재야, 혹시 거기는 별 일 없냐. 이 할애비가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너한테 면목이 없다. 우리 강아지, 한창 공부해야 할 땐데.
들어보니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 조치를 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병원비가 밀린 탓이었다. 겨우 퇴원을 면할 만큼 돈을 내고 보니 이자를 낼 돈이 부족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제야 대학에 들어간 강은재에게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뤘다. 사채업자들의 행패는 자기가 견디면 된다고 생각했단다.
설마 손자가 있는 곳까지 찾아가지는 않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이 사채업자들은 이 집에서 정말 돈을 벌어오는 게 누구인지 이미 파악을 끝낸 것 같았다. 그나마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할아버지에게 알려지지는 않은 듯했다. 할아버지는 강은재가 평범한 호프집에서 일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이자만 겨우 내고 있는데 원금을 갚을 수 있긴 할까. 만약 이렇게 계속 연체를 하게 된다면 그들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을까.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할까? 손가락이라도 자르려나?
“괜찮아요, 할아버지. 너무 걱정 마세요. 대환 대출도 알아보고 있어요.”
강은재는 한참을 통화하며 할아버지를 달랬다. 자신에게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비는 할아버지가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삭아드는 것 같았다. 강은재는 가게 뒷편 골목의 벽에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그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골목은 이렇게 조용한데, 바깥은 네온이 꺼지지 않는 불야성이었다. 강은재는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게로 돌아가 다시 마담을 찾았다.
“…실장님. 저 선수 시켜 주실 수 있나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담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사무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는 눈을 빛냈다.
“정말? 잘 생각했어. 그런데 은재야, 너 혹시 돈이 급하면….”
이야기가 끝난 뒤, 마담은 강은재에게 10만원을 쥐여주며 어느 헤어샵, 그리고 주소 하나를 알려줬다. 강은재가 쓰는 첫 마이킹이었다. 마담은 강은재를 보내기 전 헤어샵에 전화해서 신난 듯이 말했다.
“어어, 김 실장님. 내가 우리 새끼 선수 하나 보낼 거거든? 오늘 연예인 뺨치게 해줘야 된다?”
그러고는 강은재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강은재는 바닥으로 꺼질 듯한 걸음을 끌며 마담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알고 보니 옷을 빌려주는 곳이었다. 건물 한 층 절반을 쓰는 공간에 반짝이 자켓부터 청바지까지 온갖 옷이 걸려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중이었다. 카운터 같은 공간에 선 남자가 강은재를 보고 인사를 했다.
“니가 박 실장 새끼 선수구나?”
“…네.”
“키도 크고 등빨도 좋고… 확실히 튀네. 오늘은 처음이니까 부담스럽지 않게 맞춰줄게. 너는 정장보다… 남친 스타일로 입는 게 낫겠다.”
그렇게 그 남자가 골라준 옷은 진회색 슬랙스에 린넨 소재의 연파랑 셔츠였다. 신발은 로퍼를 신겼다. 남자는 셔츠를 빼내는 정도까지 거울 앞에서 세세하게 맞춰주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강은재가 대답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마담은 싫어하겠지만 2차 열심히 나가. 선수가 돈 벌려면 2차 나가야 돼. 꽁으로는 절대 하지 말고. 그거 소문 퍼지면 또 걸레라고 싫어해.”
“너 진짜 청순한 맛이 있다. 어려서 그런가. 누나들 눈에 쌍심지 켜지겠네.”
그는 한참이나 옷을 만지작거린 뒤에야 강은재를 보내주었다. 다음으로는 헤어샵에 가서 드라이를 받았다.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장한 강은재는 다시 밤거리를 걸어 가게로 돌아갔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중 아무리 봐도 같은 부류인 것 같은 남자가 강은재에게 명함을 쑥 내밀며 말했다.
“돈 잘 버는 알바 생각 없어?”
“하고 있어요.”
“아… 어쩐지. 많이 벌어라~”
스쳐가는 짧은 대화였지만 마음이 더 가라앉는 듯했다. 강은재는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유이경은 담배를 자주 피웠다. 그는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을까.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을지도. 아니면 더 이른 때였을지도.
마담은 강은재가 가게로 돌아오자마자 당장 초이스 들어갈 곳이 있다며 등을 밀었다.
“은재, 너어무 예쁘다.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지. 드디어 오늘 데뷔시키네. 마침 아베크 방 하나 있어. 비즈니스 하시러 오는 단골이라 매너 좋으셔. 오늘은 옆에 앉아서 분위기만 익혀. 이름은 뭘로 할까… 수빈으로 하자. 너 그 배우랑 분위기 비슷해.”
그는 가게의 수많은 방 중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은재를 밀어넣었다. 마담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어색하게 들어가 보니 이미 다른 선수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마담이 자랑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들. 얘 한번 보여드리려고 얼른 데리고 왔어요. 너네, 같이 초이스 봐도 괜찮지?”
선수들이 은근히 눈을 흘겼다. 마담이 직접 선수를 꽂아넣고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강은재도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선수는 초이스를 볼 때 센스 있는 멘트로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었다. 그냥 잘 하는 걸 할 뿐.
“안녕하세요. 수빈입니다.”
초이스는 강은재가 받았다.
강은재는 어느 때보다도 정신없는 주말을 보냈다. 가게 영업이 정말로 시작되는 시간은 새벽 2시라고 할 수 있는데, 어느 방에 들어갔다가 아침 9시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고시원으로 돌아와 쓰러져 자고 다시 일을 나갔다 왔더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마담 말로는 이제 처음 시작하는 새끼 선수가 이렇게 초이스를 잘 받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이틀을 열심히 뛰어 손에 쥔 돈이 80만원이었다. 마이킹 10만원을 갚고 나니 70만원이 남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등바등 했던 알바들이 우스워지는 돈이었다.
이외에도, 강은재에게는 이제 2천 만원이 더 있었다.
‘은재야, 너 혹시 돈이 급하면… 마이킹 한번 당겨 줄까.’
마담은 선수를 하겠다는 강은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은재는 이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까지… 주실 수 있나요.’
‘원래 처음 하는 애한테는 크게 못 땡겨줘. 돈 들고 나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죠.’
‘근데 형이 너 믿고 한번 가볼란다. 2천이면 급한 불은 끄겠어?’
‘급한 불’을 끄기에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강은재는 마담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지 못했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마담을 빤히 쳐다봤더니, 마담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유 실장 얘기 했었지. 나 걔한테는 마이킹 1억도 땡겨줘 봤어. 더 벌 거라고 믿었고, 걔는 그렇게 했거든. 나 사람 보는 눈이 좋아.’
강은재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유이경의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마담은 강은재가 선수 생활을 계속 할 거라고, 그렇게 해서 2천 만원보다 더 많은 돈을 가게에 벌어다 줄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강은재는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빚만 갚으면’ 이 일을 그만둘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킹을 쓰면 상황이 달라졌다.
마담의 제안은 파격적인 배려가 맞다. 2천 만원이면 할머니가 곧 앞둔 수술비와 간병비, 이자 몇 달치가 해결된다. 하지만 2천 만원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를까, 자신이 마이킹을 갚는 속도가 빠를까.
이 돈을 받는다면, 얼마나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할까.
하지만 강은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바로 차용증 쓰자. 너 잘할 거야. 나랑 잘해 보자.’
강은재는 그렇게 받은 돈을 전부 할아버지의 계좌로 보냈다. 그러고는 ‘아는 형에게 빌렸다’는 문자를 남겨놓았다.
기쁘지도 않았고, 서럽지도 않았다. 그저 발등에 찰랑찰랑거리던 어둠이 무릎까지 깊어진 느낌일 뿐이었다.
월요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시작하는 전공 시간도 돌아왔다. 강은재는 저도 모르게 강의실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오늘도 강의실에서 ‘유 실장’을 보게 될까. 사채업자들이 강은재가 일하는 가게로 찾아와 월급을 뜯어간 것처럼, 그도 어딘가에서 이런 짓을 해 가며 ‘수금’을 할까? 얼마 전 유이경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하긴, 사연 없는 선수 어디 있나.’
‘…저 선수 아니에요.’
‘좀 있으면 하게 생겼던걸.’
그는 이 바닥의 법칙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럼 자신을 보자마자 이렇게 될 걸 알았을까. 결국 그의 말대로 됐다.
그런데 강의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강은재를 어딘가에서 보기라도 한 듯, 유이경에게 문자가 왔다.
[수업 끝나고 잠깐 볼까?]
도서관 쪽 벤치에서 만나자는 얘기 같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굳이 불러내는지는 몰랐지만, 강은재는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을 했다.
[네. 이따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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