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달

[채햄] 손톱달 - 3

썰 수정본 백업

손톱달

w. 주인장


기현은 형원의 손을 찾으려 자신의 손끝을 그의 손바닥 위에서 더듬거린다. 형원은 제 손바닥 위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촉감에 손을 살짝 웅크렸고, 이내 기현은 그의 손을 맞잡는다. 확실히, 자신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것은 인간의 온기임에 틀림없었다. 형원은 기현을 조심히 일으켜 세우고 다른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싼다. 자신의 어깨에 닿는 손은 제 한쪽 어깨가 한번에 들어찰 만큼 큰 듯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저가 여윈 탓도 있으리라. 기현은 남자가 걸음을 옮기는 속도에 맞춰 발을 내디뎠고, 형원은 기현이 한 걸음을 떼면 그제야 자신도 한 걸음 더 떼어 그와 걸음을 맞췄다. 긴 거리가 아님에도 동굴을 나서기까지 한참이 걸렸던 것 같다.

기현은 제 코끝에 닿는 서늘한 산 공기에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간만에 느껴 보는 산뜻한 바깥 공기였다. 기현이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으면서 입을 살짝 벌리는 것을 형원은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앞에 등을 보이며 몸을 숙인다.


"업히시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산길이 험하니 제 등을 빌리셔도 됩니다."


기현이 이 산길을 알 턱이 없었다. 처음 이 동굴에 올 적에도 형원에게 안겨 왔었으며, 그 이후로 동굴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기현은 쭈뼛거리다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손을 더듬으며 형원의 등을 찾는다.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등을 찬찬히 더듬다가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기대면, 형원이 기현의 양쪽 무릎 밑에 손을 넣고서 그를 지고 일어난다. 기현은 순간 제 몸이 허공으로 수욱 솟아오르며 느껴지는 고도에 저가 떨어지지 않게끔 형원의 목을 끌어안는다. 형원은 제 목을 감은 팔을 한번 내려다 봤다가 걸음을 옮긴다.

이 험한 산길에도 도가 터 있는 자신이었다. 가파른 경사를 대수롭지 않게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면, 자신이 지어 놓은 오두막이 나온다. 두 사람이 들어가도 그리 좁진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제 목덜미 위로 옅게 흩어지는 남자의 숨을 느낀다. 오두막까지는 금방이었다. 나무판자로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은은한 솔향이 풍긴다. 기현은 온통 숲 내음으로 가득한 곳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고을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향이었다. 형원의 집은 평민의 초가집에서도, 양반의 기와집에서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저 홀로 살아 가면서 자신에게 맞춰 끊임없이 개조한, 삶을 이어 가려는 투쟁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었다. 평평하고 고른 바닥 위로 산짐승의 가죽이 깔려 있고, 그 위로는 한 명이 족히 자리할 만한 작은 나무 탁자와 등받이 없는 의자가 놓여 있다. 벽 쪽에는 직접 깎고 두들겨 만든 듯한 선반과 궤짝. 그리고 이 작은 방 한 켠에는 이부자리를 놓기 위해 형원이 고심한 끝에 고안해 낸 침상이 있었다. 네 개의 모서리에 다리를 만들고, 그 위로 짐승의 가죽을 씌운 두꺼운 나무판자가 끼워져 있었다.

형원은 이부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침상에 아차 했다가, 제 등에 업힌 이를 앉혀 놓을 만한 곳을 물색한다. 그나마 넓어서 앉히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 곳이 탁자였다. 기현은 제 엉덩이 밑으로 닿는 딱딱한 촉감을 손바닥으로 더듬거린다. 자신의 옆으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스쳐 지나가고, 이내 자신의 뒤에서 천이 허공을 넓게 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이곳이…."

"당신의 거처가 될 제집입니다."


기현은 '아'하고 작게 입을 벌리면서 이곳의 향기를 기억에 새기려 집중해 본다. 집안 전체에 퍼져 있는 솔향, 은근히 풍기는 비린 피 냄새, 그리고 아까 자신을 업고 온 남자의 희미한 체취까지. 제법 접점이 없는 향들이 한데 뒤섞여 오묘한 내음을 만들어 내고, 방금 전까지 남자의 등에 업혀 있었던 탓인지 그의 향이 진하게 코끝에 맴돌아 되려 따뜻하고 포근하다는 느낌이 든다.

기현은 긴장이 풀리면서 노곤해진 탓에 탁자 아래로 달랑거리는 제 다리를 괜히 앞뒤로 왔다 갔다 흔들어 본다. 형원은 제 침상 위에 기현을 위한 이부자리를 마련하고서야 다시 기현 쪽으로 몸을 돌린다. 탁자 밑으로 팔랑거리는 두 다리에 잠시 시선을 뒀다가, 등을 구부리고 얌전히 앉아 있는 그의 등을 타고, 거의 다 풀어진 댕기 머리까지 시선을 옮긴다. 아직 상투도 틀지 못한 게지. 하긴,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니.

저가 댕기를 하지 않아도, 상투를 틀지 않아도, 하물며 남들보다 짧은 머리칼을 하고 있어도 인간들은 제게 관심이 없었다. 신체 발부 수지부모라 하나, 그저 자신은 부모도 없는, 인간도 짐승도 아닌, 미천한 백정이었기에. 형원은 불현듯, 그의 칠흑의 고운 머리칼을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현의 뒤로 다가가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분히 내려앉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가, 곧장 홱 하고 돌아가는 고개에 손을 떼어 낸다. 기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무엇 하시는 게요."

"아, 나는 그냥,"


형원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그렇지, 기척이라고는 소리로밖에 알 수 없는 당신이 많이 놀랐겠지. 형원은 채 끝마치지 못한 말을 마저 꺼낸다.


"미안합니다. 그저, 이제 내게는 없는 것이니 그 촉감이 그리워 그만."


형원의 말에 기현이 팔을 허공에 뻗어 형원의 머리통을 찾는다. 형원은 그의 손에 맞춰 그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어 준다. 손끝으로 닿는 뻣뻣한 머리칼을 천천히, 한올한올 손끝으로 매만져 본다. 그의 참이었다. 형원의 머리칼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짧디짧은 것에 기현은 그의 머리를 찬찬히 쓸어 준다.


"어찌하여?"


처음이었다. 천것인 저의 얘기를 먼저 들어 주려 한 이는. 형원은 제 머리 위에 얹어진 기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리고서는, 투박한 자신의 손에 잡힌 고운 하얀 손을 내려다 본다.


"…신체 발부 수지부모라 하나, 이 천것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천것이라니요."


기현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이가 아픈 말을 내뱉으면서도 제법 덤덤한 말투였기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하였으나, 여전한 암흑에 그저 체념한다. 저 평온한 목소리로 저린 말을 내뱉는 이의 속은 아마도 문드러졌을 것이겠지. 형원은 기현의 손을 한참이고 쥐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쉬시오. 이부자리는 마련해 뒀으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를 부르시오."


형원은 말을 마치고 기현의 무릎 밑으로 한 팔을 끼워 넣고, 다른 팔로 그의 등을 받친 채 기현을 안아 든다. 아무래도 내일은 간만에 푸짐하게 먹을 것을 준비해야겠노라 생각한다. 기현은 자신의 등 뒤로 얇은 이불이 닿는 것을 느낀다. 받은 만큼 베풀 수 없음에 기현의 안에 다시금 죄스러움이 쌓여 간다. 저를 안았던 팔이 제 몸을 벗어나는 느낌에 기현은 다급하게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의 손은 그저 허공을 휘적거린다. 형원이 허공에 뻗친 그의 손을 붙잡아 내려 주며 가려진 그의 눈에 시선을 맞춘다.


"필요한 것이 생기셨소?"

"이름…."

"이름?"

"그대를 부르려면, 그대의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현의 귀에 살풋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형원. 채 가 형원이오."

"아, 채 형원…."

"그럼 나는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되겠소?"

"유 가 기현이오."

"목소리 만큼이나 고운 이름이오."


형원은 발을 떼기 아쉬운 마음에 기현의 머리를 한번 스윽 쓰다듬어 준다. 곱게 타진 가르마가 헝클어져 손에 닿는 머리칼의 촉감이 복슬거린다. 기현은 제게 닿았던 손이 떨어지고 나서 발걸음이 멀어져 가는 소리를 귀에 담는다.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공간에 저 혼자 남게 되는 것인가. 이제 피붙이 하나 남지 않게 된, 앞이 보이지도 않는 자신이었기에 더는 홀로 있는 것을 견디기 싫었다. 기현을 가둬 놓은 어둠은 그가 혼자 있을 때 그를 더욱 옥죄었기에.


"저, 형원!"


그의 발걸음 소리가 이 공간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를 불러야 한다는 마음이 앞서, 다급하게 그를 불러 본다. 철컥 하는 소리가 멈추고 다시 발걸음이 제게로 가까워진다. 바닥에 쓸리는 발 소리가 자신의 앞에서 멈추고, 다시 그의 온기가 제 손에 전해진다. 아, 이제야 안심이 되는 듯하다.


"무엇이 필요하시오?"


필요한 것이라 함은, 그저 나의 가까이에 그대가 있는 것뿐인데.


"잠은 어디서 청하시오?"

"그대에게 침상을 내어 드렸으니, 새 침상을 마련해야겠지요."

"그런 것이라면,"

"금방이면 됩니다. 나가서 나무만 해 올 것이니,"

"내일 하시면 안 되겠소?"


가엾은 사람. 형원은 기현의 뺨을 그러쥐면서 엄지로 그의 눈두덩이를 덮고 있는 천을 찬찬히 쓰다듬는다. 얼마나 깊은 어둠 속에 살고 있기에 이리도 겁을 내는지. 형원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자리한다.


"이 정도 거리면 되겠소?"

"…고맙소."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 드리면 되겠소?"

"그저…."


기현은 말 꺼내기를 망설인다. 염치도 없다. 부덕하다.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받기만 해야 할까.


"곁에 있어 주시오."


형원은 결국 그의 청을 들어, 기현이 내어 준 옆자리에 조심히 제 몸을 누인다. 제 옆에 사람을 가까이 둔 적이 없던 형원이었기에, 옆에 곤히 누워 가슴팍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내를 한참 바라본다. 두 사람이 눕기에는 넉넉지 않은 침상이라, 좁은 거리를 남겨 두고 마주한 얼굴로 옅은 숨이 흩어진다. 안대에 가려진 저 두 눈은 지금 감겨 있는 것인지,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주무십니까?"


형원의 낮고 먹먹한 목소리가 기현에게 닿고, 기현은 뒤늦게 입술을 연다.


"쉬이 잠들기 어렵습니다."

"혹, 몸이 차서 그런 것입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형원은 자신의 몸 위에 얹은 손을 한 번 주먹 쥐고 펴냈다가 그 손을 기현의 손 위에 겹쳐 본다. 찹찹한 그의 체온이 여실히 느껴짐에 그저 얹어 두었던 손으로 그의 양손을 따스히 쥐여 준다. 그러다 문득 지난 기억이 스치기에 그의 손을 쥔 채로 입을 연다.


"기현."

"예."

"내가, 그대의 몸을 데워 드려도 되겠소?"

"어찌 하시려고요?"

"내가 짐승의 꼬리로 그대를 덮어 주었듯 말입니다."


기현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아'하고 작게 소리 내고서는 이내 작게 웃어 보인다.


"되었습니다. 지금은 인간이시지 않습니까."


기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형원은 잡았던 손을 풀고서 팔을 뻗어 기현을 자신의 팔로 조심히 감싸 안는다.


"이리 하면 되겠소?"


괜한 긴장감이 어린다. 타인의 품에 안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기현은 형원의 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신기하게도 따뜻해지는 느낌에 작게 미소 짓는다.


"예. 따뜻합니다."

"그리고 청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대와 나 사이에 신분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합니다."

"…."

"혹, 제가 그대보다 천하여 제 청이 불편하셨거든, 사죄드리겠습니다."


기현은 제 머리 위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한다. 다소 무거운 말들이 불안정하게 그의 목소리에 섞여 들면서, 역설적이게도 되려 저를 편안하게 만드는 듯도 하다. 와중에 형원은 감히 천것인 자신이 주제 넘는 말을 하였구나 뒤늦게 후회하며 기현을 감싸고 있던 팔을 거두려는 찰나, 기현이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내게 은인과도 같거늘, 어찌 그것이 불편하겠습니까."

"…."

"이미 그대와 나 사이에 신분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

"내게 편히 말해 줘. 나를 높이지도 말고, 너를 낮추지도 말고."


기현은 보이지 않는 형원의 얼굴을 찾으려 더듬거린다. 두 사람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간 양손이 형원의 가슴팍을 더듬거리다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가 그의 턱을 어루만졌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의 위치와 코의 위치와 눈의 위치를 찾고, 그것들의 생김새를 기억하려 한참을 어루만진다. 형원은 그저 기현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을 뿐이었다. 기현은 제 손끝에 닿는 말캉함과, 부드러움과, 곡선의 정도까지 빠짐없이 기억해 내려 노력한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그려지는 그의 얼굴에 살풋 미소 짓고는, 기현의 손끝이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진다.


"이제 됐다, 형원아."

"무엇이?"

"너를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이."


형원은 기현의 손을 가져다 다시 제 얼굴에 올려 두고서 그 위에 제 뺨을 부빈다. 꼭 무리를 잃은 늑대가 새로이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되도록 네가 나를 더 상세히 기억할 수 있도록. 행여 내가 너를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네가 나를 기억할 수 있도록.


날이 밝으면 형원은 장에 나설 준비를 한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저 집을 데우던 불씨가 잘 꺼졌는지 확인하고 집을 나설 때 문을 걸어 잠그면 되는 것이었으나, 기현이라는 변수와 함께하게 되면서 집을 데우는 불씨가 잘 살아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기현은 가만히 침상에 앉아 있다가 부산스러운 소리 사이에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형원아."


형원은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기현을 바라본다. 고개가 제 쪽을 향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꽤 생소하다 생각한다.


"응, 기현아."

"나도 가면 안 될까?"

"밖이 차."

"혼자 있으면 더 추워."


기현과 함께 지내면서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에게는 은근한 고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형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기현에게 다가간다. 기현은 제게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형원은 기현의 양 뺨을 그러쥐고서 가려진 기현의 두 눈을 마주한다. 숲에 혼자 남겨져 떨고 있던 그가 여즉 눈에 아른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기현의 말에 마음이 동하는 게 사실이었다.


"그냥 여기 있지, 따뜻하게."

"나 혼자 있다 불씨가 튀어서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리고 사람 내음도 그리워."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인간을 너는 그리워 한다는 것이 그저 신기했다. 딱한 사람.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들어 줘야겠지.

기현을 업은 형원은 평소보다 더 느릿하게 산길을 걸어 내려간다. 행여나 저가 발을 헛디뎌 기현이 다칠 일이 없도록 발로 땅을 한번 다지고서 밟아 내려갔다. 기현은 자신의 코로 산속의 풀 냄새와 꽃향기를 한껏 들이 마신다. 기분 좋은 청명함이었으나, 제법 아픈 냄새였다. 풀 냄새와 솔향이 짙어질수록 기현은 형원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의 향을 들이 마신다. 형원과의 첫 만남을 되새기며 그때의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함이었다.

산내음이 옅어질수록 장터의 정겨운 냄새가 짙어진다. 언젠가 먹은 적 있던 구수한 국밥 냄새, 엿장수가 온 것인지 단내도 섞여 있었고, 여인네들이 쓰는 진한 향료의 냄새도 맡아지는 듯했다. 저 멀리에 푸줏간이 보이자 형원은 기현을 조심스레 내려 주고는 그의 손을 잡는다. 행여나 그를 푸줏간으로 데려갔다가, 저와 같은 천것 대접을 받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형원은 기현이 항상 자리했던 그곳으로 데려다주려 그의 손을 이끈다. 기현은 제 귀로 들리는 어수선한 사람들의 말소리와 분주한 발걸음 소리에 내심 들떠 있었다. 인파에 섞이는 게 얼마 만인지. 지독한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소음 속에 섞이면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기현아. 이따가 또 올게, 알겠지?"

"알겠어."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가 어찌 가겠어. 지팡이도 없는데."

"수상한 기척이 들리면 꼭 날 불러야 돼."

"걱정 마."


기현의 입꼬리가 예쁘게 말려 올라가며, 끝에 가는 입 동굴을 만들어 낸다. 형원은 기현의 작은 부분들까지 눈에 담으며 그의 손을 제 얼굴로 가져가 댄다. 그의 촉감에 다시 자신을 새기기 위해서였다. 너는 시각이 없으니, 다른 감각으로 날 기억하라고. 기현을 두고 오면서도 몇 번을 뒤돌아봤던 것 같다. 덕분에 느릿하게 푸줏간에 돌아온 형원은 주인장에게 험한 소리를 들어 먹었지만, 그것이 개의치 않을 만큼 자신의 온 신경은 장터 한가운데에 남겨진 기현에게 향해 있었다. 도마 위로 칼을 내려 치던 형원의 귀로 그 언젠가 저를 홀렸던 고운 목소리가 들리기에 형원은 칼질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어? 아이고, 그 눈먼 청년이 다시 왔나 보네."


고기를 기다리던 여인은 고개를 뒤로 쭉 빼고서 기현을 찾는 듯했다. 자신을 다그치는 주인장의 목소리에 형원은 다시 고깃덩이를 나누어 여자에게 건넨다. 노래를 부르는 그가 그리웠건만, 푸줏간 앞에 줄지어 선 아낙네들을 확인하고서 형원은 깊게 한숨을 내쉰다.

기현은 제 주변으로 모여드는 웅성거리는 소리에 저를 둘러싼 공기가 옛날의 그것과 상동되는 것을 느낀다. 아, 그랬지. 이게 제 삶의 낙이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장에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저 멀리서 제 아비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났었는데. 기현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본 적도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목이 멘다. 자신의 목으로 더 이상 노래가 나올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기현은 곡조를 멈추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저를 둘러싼 것들은 예전과 같은 것이었으나, 정작 저에게는 그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사무친 것이다. 기현은 가만히 서서 주먹만 꽉 쥘 뿐이었다.

그때였을까. 자신이 혼란한 틈을 타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인기척에 기현은 당황할 새도 없이 목뒤가 휑해지는 것을 느낀다. 기현이 채 자신의 뒷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전에 기현의 귀로 비수가 꽂힌다.


"저 장님 놈, 애비도 잃었다지? 어차피 상투도 못 틀 텐데 댕기가 다 무슨 소용이냐."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때 저를 도와줬던 것이, 그 익숙한 피비린내.


"혀, 형원아…."

"천것보다 못한 꼴을 하고서는."

"형원아!"


절박한 자신의 외침을 비웃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뒷목 언저리에 뒤늦게 손을 가져다 대자 허망하게 잘린 머리칼이 처량하게 만져진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누구도 저에게 손을 뻗지 않는다.

아, 차라리 집에 있을걸. 밖이 차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혼자서 쓸쓸함을 견뎌 내 볼걸.

주저앉은 기현의 옆으로 흙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피비린내가 짙어진다. 일순간에 정적이 일더니, 이내 아녀자들의 짧은 비명이 들린다. 기현은 저를 감싸 안는 이를 밀어내려다가, 익숙한 체향과 목소리에 그를 밀어내려던 팔에 힘을 푼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지금만큼은 기현이 저를 볼 수 없다는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형원은 기현을 품에 안고 그를 달래면서, 시선은 제 앞에 있는 남정네 무리에게 고정시킨다. 그들은 짐짓 겁을 먹은 듯도 했다. 그럴 만하지. 자릴 박차려는 제게 푸줏간 주인이 돼지 피를 뿌렸으니. 형원은 제 품에서 기현을 조심스레 놓아주고서 몸을 일으켜 기현의 댕기를 손에 쥐고 있는 남자에게로 걸음을 옮긴다.


"네 이놈! 어디 천한 백정 놈이!"

"닥쳐."

"뭐라?!"

"잘 들으시오, 나으리."


형원이 피 묻은 손으로 주름 하나 없는 남자의 비단 옷깃을 쥔다. 남자는 멱살이 잡히면서 코를 찌르는 역한 피 냄새에 얼굴을 엉망으로 찌푸린다. 형원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형체를 잃고 흐트러지는 검을 머리칼에 시선을 뒀다가, 기현이 들을 수 없게 남자에게 작게 읊조린다.


"초승달이 뜨는 밤, 문을 잘 걸어 잠그시는 게 좋을 겝니다."

"이, 이놈이, 내가 누군 줄 알고,"

"서 영감댁 장남을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시뻘겋게 물든 눈을 하고서 시선을 피하지 않는 형원에 남자는 마른침을 삼킨다. 형원의 눈에 드러나는 형형한 살기를 그대로 받아 내기에는 그의 그릇이 작은 탓이었다.


"부디, 그 귀한 몸 조심하십시오."

"…."

"미천한 제가 지금은 나으리의 멱살을 잡고 있지만,"

"…."

"다음 번에는 꼭, 나으리의 숨통을 물어뜯을 것입니다."


남자는 형원의 팔을 있는 힘껏 뿌리쳐 내고서 제 옷을 내려다 본다. 저를 향해 있는 주변의 시선에 남자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형원을 비웃는다. 네놈이 그래 봤자 천한 백정 것인 것을. 기현에게 다가간 형원을 향해 남자는 뒷짐을 지고서 으름장을 놓는다.


"여봐라, 옷이 더러워졌구나."


형원은 남자의 말에 제 손을 옷에 대충 슥슥 닦고는 기현의 두 귀를 막아 준다.


"내가 이 옷값을 무엇으로 치룰지는 기대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남자의 말이 기현의 귀로 흘러 들어가지 않게 기현의 귀를 더 틈 없이 막으며, 형원의 기현의 찌푸려진 미간에 입을 맞춘다.

괜찮아. 다 괜찮다, 기현아. 네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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