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손톱달 - 2
썰 수정본 백업
손톱달
w. 주인장
기현이 눈을 떴을 때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등에 닿아 있는 딱딱하고 서늘한 감촉, 저 멀리서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무거운 물방울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웅웅거리는 소리들은 기현의 신경을 긁어 놓기엔 충분했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본다. 흉흉한 짐승 울음소리, 그리고 피비린내. 기현은 그 마지막 기억의 끝에 아직 자신의 숨이 붙어 있어 내심 안도한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란 말인가.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어차피 똑같은 암흑인 것에 이내 절망한다. 기현은 뒤로 몸을 빼고서 등에 닿는 투박한 돌의 촉감에 기대어 몸을 웅크린다. 제 아비는 어떻게 된 것인가. 이곳에 함께 있는 것일까. 함께 있다면 살아 계신 것인가, 돌아가신 것인가. 산속에 두고 온 것이 있다던 그의 기척은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았다. 기현이 세운 무릎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댄다. 낯선 곳에서는 방향감도 찾을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을진대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나마 멀리서 들리는 새의 지저귐 소리에 지금이 밤은 아니겠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푹 숙인 기현의 목이 순간 뻣뻣하게 굳는다. 그 피비린내였다. 익숙한 듯 하나, 늘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그 냄새.
"…뉘시오."
기현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말을 꺼낸다. 피비린내의 주인은 동굴의 입구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몸을 웅크려 앉아 열 뼘 남짓 떨어져 있는 기현을 가만히 바라본다. 형원은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목소리를 내어 봤자 짐승의 포효에 가까운 소리가 나올 뿐이니, 그것을 들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형원은 이 산속에서 그가 먹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 본다.
"대답해 주시오. 여긴 어디이고… 나를 어찌 데려온 것이오."
나는 그저 그대가 걱정되었을 뿐이고, 그대를 안전히 지킬 수 있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을 뿐이오.
형원은 이 말을 뱉지 못해, 답답한 마음에 코로 크게 한숨을 내쉰다.
기현은 짐승의 호흡 소리가 공허하게 울리는 것에 이곳이 동굴임을 확신한다. 이 습한 공기와 물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작은 소음도 울리는 공간이라면 동굴밖에 없을 것이다. 허나 의문인 것은, 왜 저 짐승이 산 인간인 내게 달려들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기현은 이내 대답을 들으려던 생각을 접는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물어봐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지독하게 외로웠다. 얼마나 큰 공간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어둠에 혼자만 남았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들고 쓸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국밥이 죄다 소화되고 위장에 남은 게 없어 배가 고팠으나, 그보다는 변소를 찾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현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는 보지를 못하고, 함께 있는 것이라곤 말 못 하는 짐승뿐이니. 저것이 제게 달려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섣불리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아… 설상가상에 진퇴양난이구나.
기현은 저것의 주위를 돌릴 궁리를 하며 바닥을 더듬거리다, 작은 돌멩이를 주워서는 피비린내가 나는 쪽으로 멀리 던진다. 돌멩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동굴에 울리더니, 짐승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더는 짐승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기현은 돌멩이의 소리가 멈춘 쪽을 향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발을 움직인다.
아무래도 저잣거리에 지팡이를 놓고 온 것이 실수였음을 다시금 절감한다. 한참 동안 주변을 더듬거리며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다, 제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에 드디어 밖으로 나왔구나 싶어 짧게 심호흡 한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기현이 벽을 짚고 서 있자,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형원은 기현의 길을 안내하려 거친 발톱이 날카롭게 자리한 손으로 기현의 하얀 팔을 조심스레 쥔다. 기현이 기겁하며 놀라 손을 뿌리치자, 형원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도 않고 걸음을 옮긴다.
기현은 떨리는 몸을 하고서 가만히 서 있다가, 짐승의 걸음이 느린 것에 정말 저를 해치지 않을 생각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저를 해칠 것이라면 어제 진작 제 목을 물어 뜯었겠지. 기현은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짐승은 마치 저와 걸음을 맞추는 듯, 기현이 한 발을 옮기면 그것도 한 걸음 내딛고, 기현이 멈추면 그것도 걸음을 멈췄다. 이내 형원이 적당한 장소를 찾아 주고, 기현이 그 장소에 도착하자 등을 돌리고 주변을 살핀다. 이곳에는 멧돼지가 자주 나오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해야만 했다. 물론 혼자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온전한 인간인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어떠한 기척도 없어 형원은 잠시 한시름 놓는다.
그때였다. 제 뒤편에서 빠르게 풀을 헤치는 뜀박질 소리는 자신이 우려했던 그것이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삽시간에 이 근처를 덮칠 것이라는 신호였다. 형원은 안광을 빛내며 주변을 경계하다, 측면에서 튀어나오는 그것을 온몸으로 막아선다. 저를 튕겨내지 못한 멧돼지의 송곳니를 잡아 던져 내고서, 나뒹굴어진 멧돼지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물어 뜯는다. 덜렁이는 가죽 안으로 생살이 뜯겨 나가고, 푸른 잡초 위로 검붉은 피가 쏟아진다. 아직도 숨통이 끊이질 않았는지 제 팔을 무는 놈의 턱에 발톱을 박아 넣는다. 한 번 더 놈의 목을 물어 뜯자 그제서야 놈이 움직임을 멈추고 잠잠해진다. 형원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도 무시하고 제 뒤편에 있었을 그에게 다가간다.
기현은 가까워지는 피 냄새와, 하루 사이에 익숙해진 짐승의 털 냄새에 혼란스러워진다. 기척이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팔을 뻗어 허공을 더듬거리자, 형원이 고개를 숙여 기현 쪽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제 손에 닿는 짐승의 털을 찬찬히 쓰다듬자, 형원은 그제서야 그의 옆에 편하게 자리 잡고 앉는다. 기현은 제 손바닥에 닿는 거친 털의 촉감을 찬찬히 느껴 본다.
"나를 구해준 것이야?"
그대가 내 삶에 낙을 주었기에 구해준 거야.
"미안해. 나는, 그저 네가 나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여…."
괜찮아. 여느 인간이든, 다들 나를 그런 취급을 하였으니. 내가 인간의 모습이든, 짐승의 꼴을 했든.
"이 은혜를 네게 어찌 보답을 하면 될까."
그저 네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면 돼. 그뿐이다.
기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웃어 보인다. 그것은 형원이 생전 처음 본, 저를 향한 미소였다. 어떤 때에는 차라리 자신이 짐승의 꼴을 하고 있는 게 속 편하기도 했다. 인간인 저는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천한 백정이었으니. 저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따스히 웃어 주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이대로 짐승의 꼴로 평생 숲에서 썩어들어 가도 나쁘지 않은 삶일 것이라 생각한다.
형원은 기현의 미소를 머리 속에 그려낼 수 있을 때까지 눈에 담는다. 두 눈이 가려져 있었으나, 그를 드러냈더라면 필시 더욱 아름다운 미소였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대의 두 눈을 가리고 있는 그것을 내가 풀어 내도 될까. 하지만 내 모진 발톱이 그대에게 생채기라도 낸다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것임이 분명하여, 그저 고운 호선을 그린 입꼬리를 눈에 담을 뿐이다.
"너는 동굴에서 지내는 것이지?"
기현은 형원의 꼬리털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래도 동굴은 비가 새지 않아 다행이야. 내가 살던 곳은, 비가 오면 행여나 집이 젖을까 노심초사 해야 했거든."
자신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삐죽 솟아 있던 털들이 가지런히 정리되는 것이 느껴져 괜스레 뿌듯해진다.
"볕이 강할 때는 또 어떻고. 그 얇은 벽으로 열기가 느껴져 문을 닫고 있자면 불가마가 따로 없었지."
기현은 자신의 부친과 살았던 집의 촉감과 온도를 떠올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마을보다야 산에 있는 것이 마음은 편했다. 주변에서 저와 아비를 향해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가슴에 얹혀 있던 부친의 상실이 고개를 쳐들어 손끝이 저려오는 듯했다. 아비가 저를 버리고 타지로 떠났든, 그렇게 세상을 떠났든, 그의 선택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럴 만하다 생각했으니. 어느샌가 아비의 얼굴을 매만질 때면 주름은 더욱 깊어져 있었고, 그의 어깨를 주무를 때면 하루가 다르게 굽어지는 어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곤 했다. 기현이 꼬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자, 형원은 아직도 피가 흐르는 팔을 내려다 보다가 기현을 올려다본다.
"네게는 과분한 청이겠지."
뭐든 할 수 있으니 말만 해.
"네가 날 처음 봤던 곳으로 데려다주겠니?"
형원은 몸을 일으켜 네 발을 땅에 딛고서 그에게 등을 내어 준다. 자신의 팔에 난 구멍에서 울컥 피가 새어 나왔으나, 그 혈흔마저도 훈장이라 생각한다. 기현은 팔을 뻗어 짐승의 허릿께를 더듬다가 이내 그곳이 녀석의 등임을 확인하고서 그 위에 올라탄다.
"영특하구나. 인간의 말도 다 알아듣고."
형원은 그 말에 웃음 대신 뜨거운 숨을 내뱉는다. 어서 빨리 보름이 지나야 할 텐데. 당신이 나를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런 흉측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있기는 싫은데.
형원은 기현이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속도를 내어 그를 처음 발견했던 장소로 내달린다. 그리고 이내 느려지는 속도에 기현은 이곳인가 하는 마음으로 산 내음을 맡아 본다. 아무렴 어때. 아비를 잃은 곳이 이 산임에는 틀림없는데. 기현은 형원의 등에서 내려, 세 걸음 정도 걸음을 디딘 다음에, 허공을 향해 절을 올린다. 처음 내려갈 때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두 번째 내려가고서는 엎드린 채로 한참 몸을 들썩였다.
탓하지 않으려 했건만, 정작 어두운 세상에 혼자 남았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마를 받치고 있던 손에 눈을 묻는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축축이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형원은 기현의 옆에서 그를 눈에 담다가, 주변을 둘러본다. 기현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쪽에서 북동쪽으로 나무에 매달린 인간의 형체가 보인다. 차라리 그가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형원은 몸을 일으켜 노인이 매달려 있는 나무 쪽으로 가 땅을 파고, 그 안에 혀를 밖으로 늘어뜨린 채 싸늘하게 식어 버린 시체를 고이 묻는다. 그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으나, 여전히 근심이 가득한 채였다. 어려운 선택이었겠지. 당신의 아들은 내가 잘 보필할 테니 편히 쉬시길.
형원이 다시 기현이 있는 쪽으로 왔을 때, 기현은 무릎을 꿇고 앉아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채였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도 처량해 보이는 그 모습에, 형원은 기현의 옆에 다가가 그에게 품을 내어 준다. 기현은 익숙한 털 냄새가 가까워지자, 자신을 지켜 준 녀석임을 확인하고서야 그에게 고개를 기댄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형원은 저를 향한 따스한 말들에 가슴 한 켠이 묵직해짐을 느낀다.
"너한테 고마운 것이 이리도 많은데, 어찌 나는 네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참 죄스러운 삶이다. 받은 것만큼 베풀지 못한다는 것은 늘 스스로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위축된 마음은 이내 죄책감을 만들어 내고, 그 마음이 자라서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어차피 너는 들어도 내뱉지 못할 테고, 어쩌면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 내 하소연 좀 들어 주련.
"하루는, 잠들지 못한 날이 있었어."
형원은 몸을 웅크려 기현이 편히 기댈 자리를 만들어 주고, 제 꼬리로 그의 몸을 덮어 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처음엔 옆집 백 씨 아저씨가 오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왜냐면 그 아저씨는 말씀이 험하시거든."
포근함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 같다. 기현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저항 없이 눈을 감는다.
"아버지 목소리였어. 내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셨나 봐."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해진다. 기현은 자신에게 품을 내어 준 녀석의 가슴팍을 찬찬히 쓰다듬어 준다.
"그냥 같이 콱 죽어 버리자 하셨는데. 이리 될 줄 알았으면 그 말을 들었어야 했나 싶어."
아니야, 당신은 살아. 당신은 목소리도, 심성도 고운 사람이니까 꼭 행복하게 살아. 내가 지켜줄 테니.
기현이 동굴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갈 즈음이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차디찬 암석뿐이며 함께 있는 것이라고는 말 못하는 짐승뿐이었으나, 되려 그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듯이 기현은 그에게 말을 붙이기도 했고, 그에게 제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형원은 해가 떠 있을 때는 기현의 곁에서 온기를 내어 주고 그의 노랫소리에 취해 있다가, 매일 태양의 기색이 죽으며 하늘이 청색에서 자색으로 물들어 가고 이내 흑빛이 되어갈 때까지는 그 동굴 앞에서 하늘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늘은 달이 어떤 모양인가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오늘도 하루가 다 가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천천히 달이 떠오른다.
손톱달이었다. 다만, 자신이 짐승의 꼴로 변할 때와는 대칭인 모양의 그것이었다. 형원은 다시 제 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낀다. 괴랄하게 꺾여 있던 관절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고, 한껏 부풀어 있던 온몸의 근육이 원래의 형태를 되찾아 간다. 변태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형원은 동굴에서 멀리 도망친다. 행여나 당신이 내 울음소리라도 듣는다면 지레 겁을 집어 먹을 것이 분명하기에. 형원은 한참 동안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동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다다랐음에도, 혹여나 포효하는 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갈까 싶어 이를 악물고서 그저 온몸으로 고통을 감내한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가쁜 숨을 내쉬면서 웅크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을 때, 짐승의 털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인간의 피부를 되찾은 제 팔이 보인다.
아,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드디어 당신에게 내 온전한 목소리를 들려 줄 수 있어. 이제서야 그대의 말에 답해 줄 수가 있어. 거친 짐승의 몸이 아닌, 당신과 같은 인간의 몸으로 당신 앞에 설 수 있다. 이제 그대는 이 음침한 동굴 속에서 있지 않아도 돼.
형원은 부푼 기대를 안고 서둘러 동굴로 걸음을 옮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 가고 싶었으나, 이제 막 제 자리를 잡은 것들은 또 부자연스레 움직였다. 형원은 제법 먼 거리를 절뚝이며 달려가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동굴 앞에 서서 그 안에 앉아 있는 인영을 바라본다. 아까와 같이 가만히 돌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사람. 형원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자, 기현은 처음 동굴에 왔을 때처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뉘시오?"
저를 지켜 주던 짐승의 발소리도, 그것의 숨소리도 아니었다. 낯선 인간의 발걸음 소리에 기현은 잔뜩 긴장한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깊은 산속일 텐데 이곳을 어찌 알고 인간이 왔을까. 저를 지켜 주던 것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의지할 데 없이 칠흑 속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기현은 간만에 제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낀다. 며칠 내내 먹은 거라곤 그 짐승이 가져다준 육포 같은 것들이 다였기에, 몸에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저 인간이 저를 구하러 온 이인지, 저를 해치러 온 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기현에게 있어서 낯선 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그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형원은 맨발을 질질 끌듯이 힘겹게 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간다. 남자는 땅을 더듬거리다 손에 쥔 것을 자신이 있는 쪽으로 세차게 던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저를 맞출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그를 처음 구해냈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지금에 서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그렇지. 역시, 당신도 별수 없겠지. 사지육신 멀쩡한 인간들마저 나를 피하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당신이라고 별 수 있을까. 그래도… 그래도 내가 그대에게 조금만 더 다가가면 나를 알아채지 않을까. 알아채 줬으면 하는데.
기현은 점점 제게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팔을 뒤로 짚으며 동굴 깊숙한 곳으로 몸을 집어 넣는다.
"뉘시냐 물었소!"
형원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천천히 입을 연다. 부디, 제 목소리가 온전하길 바라며.
"이제, 다 괜찮습니다."
"…."
"나갑시다, 나랑."
기현은 동굴 안에 울리는 낮고 먹먹한 목소리에 되려 몸을 웅크린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나, 이미 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다정한 말투가 더욱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든다.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내가,"
"그대가 묵을 거처는 이미 마련해 두었소. 그러니,"
"썩 물러가시오. 물러나지 않으면…."
않으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마른 몸을 하고서 눈까지 멀어 있는 내가, 무기도 없이 무얼 할 수 있을까. 기현은 자신의 무력감에 이내 절망한다. 차라리 저를 지켜 주던 그것이라도 있었다면 그를 방패 삼아 자신을 보호하기라도 했을 텐데. 아, 짐승에게까지 의지하는 삶이라니. 보잘것없구나.
"그대가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기현은 자신의 근처에 있을 남자의 목소리에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대가 풀숲에서 산짐승의 습격을 피했을 때도,"
저와 그 짐승밖에 없던 그때를 말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항상 내가 그대와 함께 있었소."
"…그럴 리 없어."
그곳엔 분명 그것과 나를 제하고선 아무것도 없음이 틀림없었다. 시각이 사라진 대신 다른 감각이 예민한 자신이 인기척을 놓쳤을 리가 없다.
"그대가 오한에 떨고 있을 때 온기를 나눠 준 것이, 나요."
기현은 할 말을 잃은 채 입까지 작게 벌리고서 남자의 말을 되새긴다. 필시 제 몸을 덮고 저를 데워 주었던 것은 짐승의 털이었다. 그 짐승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허면, 그 짐승이 인간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이 상황에 기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연다.
"그대의 말은 터무니없소."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내 말에 한 치의 거짓 또한 없소."
"어찌 믿으란 말이오."
형원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 본다. 이제 거의 다 아물었으나, 크고 붉게 흉이 남은 두 개의 원형의 상처를 엄지로 한번 쓸었다가 조심스레 기현의 앞으로 다가가 제 팔을 내민다. 이런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만일 자신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가는 필시 놀라서 제 손을 뿌리칠 것이 분명했다.
"그대가 그리 말했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코앞에서 울린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대를 해치려 한 줄 알았다며 내게 미안하다 했었지요."
기현은 선뜻 그에게 팔을 뻗을 수도, 몸을 뒤로 더 뺄 수도 없었다. 행여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그가 나를 해치기라도 한다면.
"팔을 뻗어 보시오."
형원은 그저 기현을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그대에게 무얼 할 수 있겠어. 나는 그저 그대가 허할 때만 그대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대가 허하기 전까지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으니.
기현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주저하며 손을 뻗는다. 자신의 손끝에 익숙한 인간의 살결이 닿고, 조금씩 더듬어 가다 보면 얼기설기 돋친 거친 피부 조직들이 제 손끝에 닿는다. 그 주변을 더듬거리다 기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때, 짐승이 달려들었을 때 생긴 상처지요."
"그렇소."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무얼 청하였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대가 처음 버려졌던 산속에 데려다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는요?"
"그대가 허공에 절을 크게 두 번 올렸지요."
제 속에 한껏 뭉쳐 있던 짧은 숨이 터지면서 기현의 온몸에 긴장이 풀리고, 그제서야 형원의 팔을 잡고 그의 팔에 난 흉터를 찬찬히 매만진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 투박한 짐승이 다정한 목소리를 한 인간의 형체로 다시 나타나 제 앞에 와 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현은 간만에 느끼는 인간의 촉감을 제 손바닥에 새긴다.
"나와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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