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달

[채햄] 손톱달 - 1

썰 수정본 백업

손톱달

w. 주인장

아침이 왔음을 인지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흙벽 너머로 풍기는 서늘하고 산뜻한 공기와, 옆집에서 키우는 닭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옆에서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면 충분했다. 기현은 바닥을 짚으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의 아비가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 아침 인사를 올린다. 자상한 목소리에는 적당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고, 그 목소리는 다정히 제 이름을 불러 주며 자신의 어깨를 토닥인다. 아, 아버지께서 일을 하러 나가시려나 보다.

제 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기에, 아비의 얼굴을 더듬어 자신의 머리에 아비의 얼굴을 새겼다. 분명 제 어깨를 토닥이는 남자는 얄쌍한 얼굴에 눈꼬리가 처진 찢어진 눈을 하고서 입꼬리를 말아 올려 저를 보며 웃어 주었을 것이다. 그에 화답하듯 기현은 아비를 향해 똑같이 웃어 보인다.

아버지께서 문을 나서시면서 작게 한숨을 내뱉으신 듯도 한데, 나이가 들어 노쇠한 몸을 이끄느라 힘이 드시는가 보다 생각한다. 기현의 아비는 창호지로 덧댄 문 옆에 있는 지게를 등에 짊어지고, 한 손에는 도끼를 든 채 걸음을 옮긴다. 다 해진 짚신이 흙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낸다. 꼭 허공에 푸념이라도 하듯이.

조세가 늘어가는 것도, 자신이 나무를 하는 양도, 자신이 캔 나무를 받아 줄 양반집이 줄어드는 것도, 장터의 물가가 치솟는 것도, 늙은 남자에게는 버거울 뿐이다. 제 부인이 사내를 출산했을 때야 온 집안에 경사였다. 허나 안타까운 것은 제 하나뿐인 아들이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것이고, 이마저도 탓할 수 없는 까닭은 제 아들이 이미 태어나면서 그 죗값을 치렀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가진 게 없는 탓이지. 애를 밴 마누라에게 제대로 된 고깃국 하나 해 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제 아내가 출산할 적에도 집안에 입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에 혼이 팔려, 나무를 하러 옆집 이 씨에게 출산을 도와달라 부탁해서 그런 것이다. 끊임없는 자괴감 속에서 남자는 19년을 살았다. 제 아들은 혼기가 찼음에도, 장님이라는 이유로 어느 집에서도 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아직도 머리를 길게 땋고 있는 아들을 보면 남자는 그저 속이 갑갑해질 뿐이었다. 남자는 밭은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고른다. 까끌까끌한 마른기침이 터져 나온다. 지긋지긋하다. 머리가 하얗게 새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더더욱 그랬다. 내가 없으면 저 불쌍한 아들놈은 어쩌나. 남자가 깊게 한숨을 내쉴수록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이 더욱 짙어지는 듯하다.




기현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문을 열어, 제 얼굴로 쏟아지는 따스함을 만끽한다. 오늘은 비가 오진 않겠구나. 하늘을 보지 않고도 어찌 아냐고 혹자가 묻는다면, 그야 코끝으로 스치는 공기가 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자연스레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남들보다는 발달하였다. 기현은 늘 같은 자리에 있는 신에 발을 끼워 넣고 문 옆에 세워진 나무작대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세 걸음을 걸어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쉰 걸음 정도 걸으면 장터가 나올 것이다. 스무 걸음 정도 걸으면 주막에서 오늘은 무슨 국밥을 끓이는지 알 수 있다. 구수한 된장 내음이 나는 걸 보니 오늘은 시래기국밥인가 보다. 기현은 주린 배를 문지르며, 오늘 일당은 벌고 나면 아버지와 함께 국밥이나 먹어야겠다 생각한다.

기현의 일은 간단했다. 늘 같은 자리에서, 매일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몇 시진을 가만히 서서 노래하다 보면, 제 아비가 저를 데리러 오곤 했다. 기현은 마을에서도 목소리가 곱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 소문은 마을을 넘어 인근의 고을에까지 퍼져서, 구경꾼들이 많을 적에는 장터를 가득 채운 적도 있었다. 물론 기현이 그 광경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친에게 전해 듣기만 하였을 뿐이었지만. 기현은 제 아비가 서툴게 다듬어 선물해 줬던 그 지팡이를 벽에 잘 세워 두고, 그 옆에 기대어 서서 노래를 부른다. 장터 한가운데는 기현이 유독 좋아하는 장소였다. 이곳에 있으면 모든 소리들과 냄새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저 멀리서 어미의 손을 잡고 장에 나와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외상값은 언제 갚을 거냐며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녀의 목소리도, 건너편에서 풍기는 상에 올라갈 풀떼기들의 내음도. 이렇게 자신의 다른 감각들을 세우면, 덩달아 제 귀에 들려오는 자신의 목소리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그것이 기현의 목소리가 곱다고 소문난 연유이기도 했다. 제 주변으로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분주하게 스친다. 운이 좋은 날이면 엽전으로 꾸러미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두둑이 챙길 수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날이면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참 노래 부르던 중에, 매일 가까이에서 풍기던 날고기 냄새가 오늘도 어김없이 제 후각을 자극한다. 기현이 저잣거리에 나와 곡조를 뽑기 시작한 뒤로 언젠가부터 늘 풍기던 날것의 냄새였다. 백정인가. 그 날고기 냄새에서는 비릿한 짐승의 피 냄새도 섞여 있는 듯했고, 습한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그 향을 마주했을 때는 행여나 그의 날이 선 칼이 제게 향할까 온몸이 경직되어 겨우 목소리를 내어 노래를 이었으나, 그저 같은 자리에서 고여 있는 향에 익숙해져 이제는 그가 반가울 정도였다. 신기한 건, 분명 인기척이었음에도 사람마다 가지고 있을 체향 같은 것이 뚜렷하지 않았다. 백정 일을 오래 해 온 걸까. 가축의 피를 뒤집어쓴 이라서 그의 체향이 피 냄새에 묻혀 버린 걸까.

그 정체 모를 이는 기현의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의 가까이에 머물렀다. 이따금씩 기현이 한 곡조를 끝낼 때마다 기현의 앞으로 '툭'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곧 자신의 일당이었다. 오늘은 '툭' 소리에서 '짤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오늘의 제 곡조가 좋았구나 하며 내심 흐뭇해하는 기현이다. 제 얼굴로 뜨거운 햇살이 비치다 어느덧 사그라들고, 코끝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아, 이제 일몰이구나. 곧 있으면 아버지께서 버거운 숨을 내쉬며 저를 부르실 것이었다. 기현은 조심스레 몸을 접어 앉아 흙바닥을 더듬는다. 손끝에 걸리는 금속의 동그란 것을 주워 반대 손 위에 올려 놓는다. 반대 손에 엽전들이 무겁게 쌓이고, 더 이상 바닥에 엽전들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현은 몸을 일으킨다. 서늘한 공기가 이내 싸늘해지고, 주변 발걸음 소리도 사그라든다. 빨리 이 돈을 아버지께 드려야 할 텐데. 기현이 보이지도 않는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은 지 얼마가 지났을까.


"기현아."


익숙한 목소리에 기현이 고개를 든다. 제 아비의 목소리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을 찾자면 그의 목소리가 가볍다는 것이었다. 진짜 아버지가 맞을까 하는 의심에 손을 들면, 기현의 부친은 아들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게 한다. 쳐진 눈꼬리와 얄쌍한 얼굴형, 그리고 곧게 잘 뻗은 콧대를 확인하고서야 기현은 안도한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인다.


"오늘따라 목소리가 좋으셔서 몰라뵈었어요, 아버지. 죄송해요."

"예끼, 이놈아. 이 아비가 기분이 좋으니 목소리가 좋은 것인데, 그렇다 하여 이 아비를 못 알아보냐!"


오늘따라 장난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에 기현은 밝게 웃는다. 오늘 아침에는 습기도 없이 쾌청했고, 오늘 유독 벌이도 좋았고, 아버지의 기분도 좋아 보이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 이것 봐요."

"어이구, 오늘 노래를 잘 뽑았나 보구나!"

"아버지, 오늘 국밥 먹고 가요. 아침에 시래기국밥 냄새가 좋았어."

"아니다, 시래기는 무슨. 선짓국밥으로 먹자."

"예? 그래도 그건 비싸잖아요."

"오늘 이 아비도 두둑이 벌었으니 걱정 말아."


기현은 저를 재촉하는 부친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먹먹하다고 생각하는 기현이다. 분명 평소보다는 밝은 목소리인데도, 꼭 물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고인 물을 들여다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기현은 본 적 없던 그것을 떠올리다, 자신을 감싸 오는 진한 고기 육수 냄새에 정신이 팔린다. 자신의 부친이 기현을 먼저 앉히고서, 남자는 기현의 맞은 편에 앉아 큰 소리로 국밥 두 그릇을 주문한다.


"어, 맨날 저잣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그 총각 아냐?"

"아, 예~ 맞소. 그 고운 목소리를 내는 놈이 내 아들놈이외다."


아버지가 자랑스레 자신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음에도 마냥 즐겁지가 않았다. 그저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팔렸을 뿐이었으나,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아비의 표정을 살필 수가 없으니, 만에 하나 정말 오늘이 기쁜 날이라 하면 내가 초를 치는 게 아닐지. 기현은 들리는 것에만 의존하기로 한다. 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 아버지의 밝은 목소리에 따라 말갛게 웃어 보인다. 간만에 목으로 넘겨 보는 기름기 섞인 국물이었다. 시원함이라는 느낌과는 다르게, 묵직하게 목을 훑고 넘어간 그것은 진하게 여운을 남기며 제 위장에 스며든다. 기현이 맛있다며 수저를 쥐고 국물을 홀짝이며 떠먹자 앞에 앉은 남자가 기현을 채근한다.


"이놈아, 왜 고기는 안 먹고서는."

"고기는 아버지 드셔요. 나는 이것만 먹어도 돼요."

"젊은 놈이 더 많이 먹어야지. 늙은이가 많이 먹어 무엇해."


기현은 제 앞으로 찰랑이는 소리를 듣고서 수저를 세워 그릇을 툭툭 쳐 본다. 아까보다 두툼하게 걸리는 것이 많음에 기현은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가 앉아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든다.


"아, 아버지 드시라니까."

"많이 먹어라."


제 아비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의 숨소리마저도 고요했고, 그저 기현의 앞에서는 국밥을 먹는 소리만이 들렸을 뿐이다.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야 저잣거리에 제 지팡이를 두고 온 것이 생각나 부친에게 다급하게 말했으나, 그는 그저 기현의 손을 꼭 붙잡고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현은 그저 제 아비가 향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까 그 장터에서는 집으로 서른네걸음만 더 걸으면 된다. 속으로 걸음 수를 세고 있는데, 자신이 예상했던 수보다 많아지자 기현이 입을 연다.


"아버지, 어디로 가요?"


그는 평소와 달리 곧장 대답을 하지 않고 마른침을 겨우 삼킬 뿐이었다.


"간만에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이랑 산책하고 싶어 그러지."


야밤의 공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흙바닥이 굳어가 슬슬 발이 아프던 참이었다. 제 앞에서 '사부작'거리는 풀 밟는 소리가 들리고, 기현은 그 앞에서 멈춰 선다.


"아버지, 여기 어디야?"

"아, 이 아비가 산에 두고 온 게 생각이 났지 무어냐."


기현은 평소와 늘 같은 목소리에 주저하며 걸음을 옮긴다. 마른 짚신 밑으로 젖은 풀이 밟힌다. 적당히 경사진 산길을 제 아비의 손에 의지한 채로 말없이 걸어 올라간다. 산을 오를수록 자신을 둘러싸는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계속되는 오르막에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끌던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기현의 손을 천천히 놓는다.


"아버지."


기현은 떨어지는 손이 내심 두려워 다급하게 남자를 부른다.


"금방 오마. 금방 올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기현은 불현듯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둘러싼 산의 음습한 공기도, 자신에게서 멀어지다 어느 순간 멈춰 버리는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도, 자신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풀벌레 소리도. 그 모든 것들이 기현이 경직되게 만들기 충분했다. 기현은 보이지도 않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지금 만큼은 날 때부터 멀어 버린 자신의 두 눈이 원망스러웠다. 기현은 팔을 뻗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기현은 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홀로 버려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있어? 들려요?"


미세하게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야산에 음습하게 맴돌다가 제 귀에 박힌다. 경계심을 잔뜩 품은 채로 얼마나 있었을까. 저 멀리서 구슬픈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범의 울음소리라기보다, 개의 울음소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들개인가. 들개는 가축으로 키우는 것보다 훨씬 사납고, 사람을 쉽게 문다고 들었는데. 소리의 울림을 보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 하는데. 기현이 주변을 더듬거리며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묵직하게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 온다. 기현은 움직이던 것을 멈춘다. 턱이 덜덜 떨리고, 온몸에 털이 곤두선다.

아버지, 어디 있어. 빨리 와 줘요, 나 무서워.

기현의 다리에 힘이 풀려, 겨우 일어선 몸이 땅바닥으로 푹 꺼진다. 억센 풀을 헤치는 소리가 제 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점점 느려지면서 커지는 그 소리에 기현은 머릿속이 아찔해진다. 저와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진 것인지, 그것의 냄새가 진하기 풍기기 시작한다. 비릿한 짐승의 피 냄새, 습한 나무 내음과 풀 내음. 이성을 차리고 있었더라면 낯설지만은 그 냄새의 정체를 궁리해 볼 수도 있었겠으나, 공포에 질려 버린 기현은 '피 냄새'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리고 풀 바닥 위로 쓰러진다.



형원에게 있어서 삶의 낙이라고 한다면,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 저잣거리로 나와 그 고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 다였다. 볕도 잘 들지 않는 깊은 산속에 겨우 거처를 마련하여 산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까마득할 정도였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짐승을 잡는 일뿐이었다.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늘 그랬듯이, 가축의 피를 뒤집어써 가며 고깃덩이를 도륙 내는, 다른 인간들과 어울릴 수 없던 저를 더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백정 일을 하던 중,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고운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꽂혔다. 단단하면서도 어딘가 처량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 들고 있던 서슬 퍼런 칼을 내려놓고, 무작정 목소리의 시발점으로 향했다. 북적이며 모인 인파가 허름한 옷에 시뻘건 피를 뒤집어쓴 저를 알아서 피해 주는 덕분에 쉽게도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작은 체구의 남자는 긴 머리를 고이 땋은 채였고, 낡은 옷에 짚신을 신고서 눈에는 댕기로나 쓰일 법한 하얀 천을 두르고 있었다. 왜 그는 눈을 가리고 있을까. 소년 같은 사내에 대한 형원의 첫인상은 그랬다. 그렇게 하늘이 자색으로 물들 때까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남자의 노랫소리를 감상했다. 남자는 매일 같은 장소에서 매번 다른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해가 아스라이 질 시간이 되면, 한 늙은 남자가 와서는 눈을 가린 남자를 데리고서 떠나곤 했다. 늙은 남자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상당히 지쳐 보였다. 남자가 등에 짊어진 지게는 그의 허리를 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남자는 구부정한 등을 하고서도 눈을 가린 남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붙잡고 걸음을 나섰다.

참 애틋한 부자지간이네. 형원은 그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루는 그런 날이 있었다. 평소보다 늦게 시작되는 노랫소리에 형원은 들고 있던 살벌한 칼을 놓을 생각도 못 하고 자리를 벗어나 남자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어김없이 그는 눈을 가린 채로, 같은 옷과 같은 신을 신고서 어제와는 다른 노래를 불렀다. 오늘따라 그 곡조가 더 구슬프게 느껴졌던 까닭을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음을 뱉어내는 입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의 앞으로 엽전들이 수북이 쌓인다. 다들 저와 같은 마음이었던 건지, 그날따라 유독 남자가 뱉는 소리 하나하나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한참을 그 앞에서 남자의 노래를 듣고 있던 중, 저잣거리에 질 나쁜 무리들이 껄렁이며 이쪽으로 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형원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들을 지켜봤다. 사내 무리는 눈을 가린 남자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저들끼리 킥킥대며 남자의 앞에 쌓인 엽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돈이 어떤 돈인데. 너희 같은 하찮은 무리들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돈인 것을. 형원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 앞으로 향해, 녀석 중 한 놈의 손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칼을 내리 꽂았다. 엽전들 사이로 박힌 칼에 사내 무리가 흠칫거리고서 저를 쏘아봤다. 내가 네놈들을 썰 수 있었으나 그리 하지 않은 까닭은, 네놈들의 비명이 이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의 노래를 망칠 것이기 때문인 것을 알까. 형원은 언젠가 산에서 이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도륙을 내어 다른 산짐승들의 먹이로 주리라 다짐한다.

형원이 칼을 뽑아 들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서 고갯짓만 하니, 자신의 바로 앞에 있던 남자가 바닥에 침을 뱉고서 제 무리 놈들과 자리를 뜬다. 형원은 남자의 소중한 돈이 더러워지지 않게끔 바닥을 손으로 쓸어 흙으로 침 자국을 묻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엽전들을 하나씩 닦아 내고는 한데 모아 그의 앞으로 밀어 둔다. 남자는 매번 그날 노래를 끝마치고 나면 쪼그려 앉아 땅을 더듬어 엽전을 줍곤 했다. 반경이 짧은 까닭에 멀리 떨어진 엽전을 주워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형원이다.

형원은 그날도 노쇠한 남자가 눈을 가린 남자를 데리고 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일이 있고부터 형원은 매일 그것이 자기 일인 것처럼 노래하는 남자의 곁을 지켰다. 이 연약한 남자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고, 무엇보다도 그저 남자의 노래를 계속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뿐이었다. 이 지겨운 삶에 유일한 낙을 찾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산내음까지 시원한 쾌청한 날이었다. 집을 나선 형원은 오늘따라 날이 좋은 것에 묘한 불쾌함을 느낀다. 습해야 마땅한 이 깊은 산속까지 습기가 말라버렸다는 것은 이제 곧 저 달이 새로이 형태를 갖출 것이라는 징조였다. 형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산을 내려가, 피에 절은 도마 앞에 서서 칼을 든다. 오늘따라 일거리가 많은 것 또한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저 멀리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여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으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고을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라는 최 대감댁 몸종들이 와서 고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원은 평소보다 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도축을 한다. 사방으로 짐승의 피가 튀겨 붉게 물들고, 자신의 얼굴에도 핏방울이 튀었으나 개의치 않는다. 소고기 세 근 정도를 최 대감댁 몸종들에게 쥐여주고 나서야 형원은 황급히 걸음을 나선다.

직접 현장에서 들은 남자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맑고 경쾌했다. 오늘의 선곡은 유독 지금의 날씨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얀 햇살이 선명하게 남자를 비추고, 그의 주변에 피어난 동백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닥으로 흐드러진다. 형원은 그 모양새를 가만히 눈에 담고 있다가, 문득 자신이 여태 살아오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각도, 청각도,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황홀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형원은 이제 그 늙은 남자가 오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형원의 예상대로 늙은 남자가 도착했으나, 평소와는 달리 남자가 등에 진 지게는 텅 비어 있었다. 늘상 넘칠 정도는 아니더라도 저 지게를 가득 채울 정도로 나무를 해 오던 이였건만.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눈을 가린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그 아름다운 이가 손에 쥔 엽전을 남자가 있는 방향으로 뻗어 보이자, 늙은 남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주름진 뺨 위로 길을 낸다.

형원은 그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늙은 남자는 제 얼굴에 새겨진 눈물길을 손등으로 슥슥 닦고서 눈을 가린 남자의 손을 평소보다 더욱 소중히 잡은 채 걸음을 옮긴다. 등에 진 텅 빈 지게는 남자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조용히 흔들렸다. 형원은 두 사람의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그 둘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산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남자의 노래에 홀렸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산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한다. 형원은 손톱을 세워 팔을 벅벅 긁으면서 더 깊은 산속으로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갑작스레 시작되는 극심한 근육통에, 형원은 순간 무릎을 꿇고 풀 위로 엎어진다. 겨우 밭은 숨을 골라내며 고개를 들어 이제는 해가 완전히 져 버린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 손톱달.

또 그 지긋지긋한 날이 온 것이다. 온몸이 아우성치는 탓에 다리가 무거워져 걸음이 느려진다. 아, 빨리 거처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무도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아선 안 된다. 그 누구도, 하물며 이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된다. 형원이 이제는 거의 기다시피 산을 오를 때였다. 이제 막 자신의 거처 앞에 다다랐을 때, 하늘에 달을 반쯤 가리고 있던 구름이 걷힌다. 형원이 아차 했을 때,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다.

고요한 산속에 제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도 가득 울려 퍼진다. 흡사 개의 그것과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면, 온몸에 관절이 뒤틀리고, 골격이 기이하리만치 커지고, 온몸에서 회색빛이 섞인 검은색 털이 돋아난다. 제 입에서 나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는, 실은 자신의 변태로 인한 고통의 신음이었다. 길고 긴 외침이 끝나고서, 형원은 짐승의 것으로 변한 자신의 흉한 손과 발을 내려다 본다. 이리 모습이 변하고 나면, 보름 동안은 집 밖으로 나가기가 힘드니 어서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냥해서 가야만 했다.

형원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언제라도 어색한 이 걸음은 평소의 자신의 것보다 느리기 짝이 없었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풀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린다. 길게 뻗친 주둥이에 잔가지가 걸리기에, 형원은 신경질적으로 그것들을 쳐내고 걸음을 마저 옮긴다.


"아버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짐승의 몰골로 변모한 덕에 모든 감각들이 인간의 형상일 때보다 더욱 곤두선다. 형원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재촉한다 해 봤자, 겨우 평소의 사람일 적 걸음 속도와 비슷할 뿐이었다. 정말 짐승처럼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변태 후에 이틀 내지 사흘이 필요했기에 형원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아버지? 아버지, 어디 있어? 들려요?"


남자의 겁에 질린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형원은 오늘 낮에 보았던 그의 황홀한 모습을 떠올린다. 말간 남자의 주변으로 흐트러지던 붉은 동백잎. 형원은 제 시야를 가로막는 가지들을 걷어내고, 크고 두툼해진 발에 밟히는 잡초들을 무시하면서 남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허공에 시선을 두는 듯하다가, 이내 풀 바닥 위로 쓰러진다. 산에서 저를 보고 괴물이라며 달아나거나 비명을 지르는 인간들이야 비일비재했다. 다만, 지금처럼 저를 보지도 않고서, 그저 다가간 것만으로도 혼절하는 것은 형원 자신에게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쓰러진 저 이를 내가 외면하고서 떠나 버린다면, 행여나 이 이가 산짐승들에게 공격을 당하지는 않을까. 산속은 해가 들지 않아 추울 텐데 행여나 목에 무리가 가서 그 고운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쩌나. 형원은 그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맹렬한 발톱을 한껏 웅크린 채, 한 팔로 그의 등을 받치고 한 팔은 그의 오금 밑에 넣어서 남자를 안아 든다. 작은 몸뚱이가 힘이 빠진 채로 자신의 팔 위에서 축 처진다. 혹여나 죽은 것은 아닐까, 형원이 그의 얼굴 앞으로 기다란 주둥이를 가져다 댄다. 다행히도 자신의 털 위로 미약하고도 따뜻한 남자의 숨이 흩어진다. 다급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이틀 내지 사흘 정도는 걸려야 낼 수 있는 속도로 형원은 자신의 집까지 내달렸다. 숲속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는 두 곳이었다. 하나는 나무로 엉성하게 지은 오두막 같은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오두막 위의 언덕에 난 작은 동굴이었다. 아무래도 이 가련한 이에게는 동굴보다야 오두막이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달려가다 저가 놓친 한 가지가 생각이 난다.

이 꼴로는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오두막 문은 제 덩치보다도 작았으니, 들어갈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형원은 아직 제 품에서 깊은 잠을 자듯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 보다, 하는 수 없이 동굴로 향한다. 빛이라고는 입구를 통해서 짧게 들어오는 게 다인, 습하고 어둡고 서늘한 공간이었다. 형원은 남자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히고서, 그의 몸을 데워 줄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으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온몸이 털로 뒤덮이고 피가 들끓는 짐승의 꼴이 되어야만 찾아오는 이곳에 인간의 몸을 데워 줄 만한 건 그 무엇도 없었다. 결국 형원은 남자의 옆에 자리하고서, 남자를 제 품에 가둔 채로 몸을 웅크린다. 짐승의 꼴이라도, 당신의 추운 몸을 데워 주기에는 이 만한 게 없을 것이다. 형원은 남자를 제 품 안으로 깊숙이 당기고서, 자신의 꼬리를 이불 삼아 그에게 덮어 주고서야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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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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