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채햄] 광채의 커튼콜

열받는 듀오 녀석과 눈이 맞아 버렸다?!

광채의 커튼콜

w. 주인장

형원은 싸늘한 초겨울 바람에 패딩 안으로 손을 집어 넣고 캡 모자를 눌러 쓴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오늘 있었던 경기를 다시금 머릿속으로 되새겨 보려다가, 이내 몰려오는 짜증에 방향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 한 대를 빼 문다. 안타로 날아온 공을 재빨리 집어서 1루 쪽으로 던졌는데, 못 받은 1루수가 병신인 거지. 3 번 타자가 1루로 들어오려면 한참이나 남았었는데. 멀리서 받기 힘들게 던진 것도 아니었고. 형원은 아주 보기 좋게 8:3으로 패한 오늘의 경기를 곱씹으며 입 밖으로 연기를 길게 내뱉는다. 멘솔의 시원한 공기가 제 목을 타고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역시나 허황된 기대였던 것이다. 거의 끝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손가락을 튕기며 남은 불씨를 날리고 꽁초를 바닥에 던져 버린 뒤 다시 원래의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한 PC방이 오늘 자신만의 경기 뒤풀이 장소였다. 형원은 빈 자리를 찾아 앉아 컴퓨터를 켜고, 미리 요금이 충전된 자신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빠른 속도로 입력한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만 해 왔기에 마땅히 스트레스 풀 곳을 찾지 못한 자신이 겨우 찾아낸 일종의 돌파구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서 익숙하게 'L'자 모양이 그려진 아이콘을 더블 클릭한다. 헤드셋을 통해서 익숙한 배경음악이 흘러 나오고, 이내 게임 메인 화면이 나타난다. 친구 목록을 주욱 훑어본 형원은 입맛을 다시며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르고, '게임/2인 랭크 게임'을 할까 망설이다가 이내 '비공개 선택'을 클릭하고서는 '확인' 버튼을 누른다.

매번 함께 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접속해 있었다면 랭크 게임으로 자신의 랭킹을 올려 볼 생각이었으나, 새벽 3 시에 가까워진 시간에 자신과 게임을 해 줄 친구들은 오프라인 상태였다. 늦은 새벽이라 게임이 잘 잡히지 않아 하염없이 자신의 랭크 인장을 바라본다. 초라하게 갈색빛을 내는 훈장.

그래, 겨우 브론즈다. 겨우 브론즈2다.

뭐, 딱히 자신의 랭크에 개의치 않아… 하려고 노력한다. 뭐, 게임을 할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매일 아침 같이 워밍업 훈련에 나가야 하고, 그 훈련이 저녁까지 이어지고, 훈련이 끝나고 나면 산송장과 비슷한 상태로 집에 와서 소파에 엎어져 쉬기 바빴으니까. 오늘처럼 게임을 하러 직접 PC방까지 오는 경우는, 내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뿐이니까. 그렇게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게임을 한 지도 어언 1 년 정도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형원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게임을 찾았다는 메시지에 '수락' 버튼을 누른다. 늦은 시간에 게임을 하길 바랐던 사람들이 모두 모인 건지 단번에 게임 준비 화면으로 넘어갔고, 형원은 빠르게 'ㅇㄷ'을 채팅창에 쳐 넣는다.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고수해 온 자신의 포지션이었다. 원거리 딜러를 선택한 이유는 첫 번째로는 멀리서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킬을 따 냈을 때의 쾌감을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이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안정적으로 자신의 포지션을 지켜낸 형원은 늘 자신이 플레이 하는 캐릭터를 선택한다. 연쇄살인마인 예술가라는 서사를 가진 캐릭터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인게임에서 나오는 더빙 목소리가 마음에 들기도 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룬이 제대로 찍혔는지, 스펠이 제대로 설정됐는지를 확인하고서 캐릭터 선정을 끝내는데 채팅창으로 서포터를 선택한 유저의 채팅이 올라온다.

'원딜님 진 말고 다른 챔 안 됨?'

형원은 간단하게 'ㅇ'라고만 채팅을 보내고서 자신이 주문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킨다. 헤드셋으로 들려 오는 배경음악을 감상하면서 손깍지를 껴 손가락을 꺾으며 나름대로 손가락을 풀어 본다. 오랜만에 들어온 게임에 괜한 긴장감을 느끼기도 한다. 야구 경기와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차라리 야구보다야 낫지. 그 수많은 관중 앞에서 실수하는 것보다, 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 삐끗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내 게임 로딩 화면으로 넘어가고, 유저들과 유저들이 픽한 챔피언의 일러스트가 나타난다. 자신의 팀 조합을 살펴보다가, 자신의 바텀 듀오가 될 서포터를 확인하고서 형원은 작게 한숨을 쉰다. 저 챔피언 잡은 애들 중에서 잘하는 애를 본 적이 없는데.


막 인게임에 들어와서 필요한 아이템을 구입하고, 당연한 수순으로 리시(게임 초반에 정글러가 정글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을 도와주는 행위)를 가려던 참이었다. 늘 대기하고 있는 부시로 마우스 클릭을 하고 자신이 선택한 챔피언이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 지켜보다가 자신의 뒤에서 저를 톡톡 치는 손길이 느껴져 뒤를 돌아본다.

"야구선수 채형원 씨 맞으시죠? 저 너무 팬이라 그런데 사인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 자신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아르바이트생이 저를 향해 수줍게 노트와 펜을 내민다. 아, 게임 시작했는데. 형원은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이며 노트를 받아 들고 빠르게 자신의 사인을 휘갈긴다. 알바생의 이름과 함께 '감사합니다'라는 메모도 빼먹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의 팬들은 자신의 외모 때문에 저를 좋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캡 모자를 살짝 들어 알바생과 눈을 맞춰 인사를 해 준다. 그때였다.

'퍼스트 블러드'

형원은 헤드셋으로 들리는 내레이션에 모니터에 집중한다. 흑백으로 바뀐 자신의 화면에 약간 당황했다가, 이내 올라오는 채팅을 확인한다. 아까 자신과 바텀 듀오를 하게 된 그 서포터였다.

'핑 찍었는데 왜 안 빼'

이 상황에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면 자신이 더 구차해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구구절절 설명을 해 봤자 내 자랑밖에 안 되니까 그냥 관두자 싶어 그 채팅을 무시하고 다시 챔피언을 이동시킨다. 느릿느릿 뛰어가는 자신의 챔피언이 답답해서 도착 지점에 여러 번 오른쪽 클릭을 해 본다. 아까의 실수를 만회해야만 했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작한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얻을 수는 없지. 그리고 오늘 여기서 더 스트레스를 얻었다가는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형원은 엄하게 굳은 얼굴로 모니터에 비치는 화면에 집중한다. 자신의 챔피언 옆에서 상대방을 견제하고 있는 챔피언은 아주 반짝이는 옷을 차려입고 마법 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래도 스킬은 잘 날리네, 하고 생각하며 열심히 CS('미니언'의 동의어)를 챙긴다. 자신의 파트너는 서포터답게 미니언에 집중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상대 챔피언들을 견제하며 자신을 돕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자신이었다. 오늘 내가 많이 피곤했나, 왜 이러지. 그래도 나름 CS는 잘 챙긴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 놓친 것만 7 개가 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파트너는 답답했던 건지 핑을 찍으면서 자신에게 이놈 먹어라, 저놈 먹어라 지시한다. 괜한 짜증이 밀려온다. 아, 알아서 할 건데 견제가 똑바로 하지. 자신이 선택한 챔피언은 사거리가 꽤 긴 챔피언이었으나, 조금만 다가가면 상대방이 공격을 해 오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래서 탱킹이 되는 서포터가 좋은데, 왜 하필 저런 걸 해서는. 앞에서 맞아 주는 이가 없으니 모든 공격이 저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라인전이 끝나고 나서 우물로 귀환한 뒤 아이템을 사는데 파트너에게서 채팅이 또 올라온다.

'미니언만 잘 먹어 줘 제발'

참 부지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답 채팅을 치려고 자판을 두드리는데, 먼저 우물을 벗어나 출발한 파트너가 빨리 움직이라는 의미로 저에게 물음표핑을 찍는다. 조금 피어올랐던 짜증이, 슬슬 제 속을 갑갑하게 만드는 것 같다. 게임을 할 때 제일 짜증 나는 부류가 훈수 두는 부류라고 했던가. 자신의 파트너가 딱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냥 저 사람의 채팅과 핑을 꺼 버릴까 생각을 했다가, 당장 게임 안에서 움직이기도 바빴기에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말자며 정신을 다잡는다.

형원은 그 나름대로 게임에 집중해서 열심히 플레이를 할 뿐이었다. 대신 그것이 파트너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게임이 시작된 지 20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자신의 파트너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서포터는 미니언에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이 국룰인데, 서포터가 자신의 미니언을 뺏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형원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자신의 파트너에게 물음표핑을 찍는다. 지금 뭐 하냐는 의미였다.

'차라리 내가 빨리 커서 딜 넣는 게 이득일 듯'

원거리 딜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형원은 이에 질세라, 아예 자신의 라인인 바텀 라인에서 벗어나서 정글 라인으로 향한다. 어차피 우리 팀 정글러는 위쪽으로 가 있으니까, 레드 몬스터 정도는 먹어도 되겠지. 자신에게 무수히 쏟아지는 물음표핑도 무시하고서 자신의 챔피언에게 버프를 주려고 열심히 몬스터를 향해 공격한다. 몬스터의 체력이 3분의 1 정도 남았을까. 자신에게 빨간색의 경고핑이 쏟아지더니, 자신이 공격하고 있던 레드 몬스터가 픽 하고 죽어버리고, 이내 상대 팀 정글러가 자신을 공격해 왔다. 순식간이었다. 체력이 적은 원거리 딜러인 자신이 감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다시 흑백으로 변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형원이 제 앞에 놓은 커피를 주욱 들이킨다.

'[전체] 바텀 오픈'

'[전체] 뭐 하냐 진짜 ㅋㅋㅋㅋ'

'[전체] 핑도 안 보고'


자신의 파트너가 채팅으로 저를 쏘아붙이는 것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형원은 부활한 자신의 챔피언을 이동시키는 것도 잊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니가 처음부터 거슬리게 하지 말든가'

'내가 뭘 했단 말임 ㅋㅋ 미니언 챙기라고 핑도 찍었는데'

'근데 니가 왜 미니언을 처먹음?'

'그럼 니가 먹지 그랬냐'

유치한 말싸움인데도 지기 싫어하는 자신에 더 짜증이 났다. 프로게이머팀에 입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속 선수들 사이에서 개무시를 당한 것도 모자라, 편하게 게임을 하려고 간만에 PC방에 왔는데 하필 만난 원거리 딜러가 브론즈이질 않나, 잘 북돋아 주려고 핑도 찍어 주고 여러모로 채팅도 많이 치면서 소통하려고 했는데 돌아오는 거라고는 냉대뿐이니. 기현은 당장에라도 마우스를 집어 던지고 싶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 시간에 혼자 처량하게 PC방에 와서는. 기현은 씩씩거리면서도 다른 팀원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드 라인으로 내달린다. 제 파트너가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미드 라인으로 함께 달려 나가는데, 자신의 파트너가 미드 라인 한가운데서 궁극기를 날리는 순간 기현은 그만 마우스를 탁 하고 던지듯이 손에서 놓고서 키보드를 두들긴다.

'진아 너 미필이냐? 뻘궁 레전드'

형원은 방금 자신이 큰맘 먹고 시전한 궁극기의 총알 네 발이 단 한 번도 적을 맞추지 않은 것에 수치감을 느꼈으나, 그래도 제 팀이고 제 파트너라 생각했던 이의 한 마디에 마우스를 탁 하고 던지듯이 놓는다. 형원은 결국 먼저 항복을 눌렀고, 이내 같은 팀원들도 이 판은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항복에 찬성을 한다. 채팅창으로 상대 팀의 조롱과 같은 팀원들의 격한 불평이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었으나, 형원은 자신의 파트너와 입씨름을 하기에 급급했다.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네가 못했니, 내가 못했니, 서로 시시비비를 가르다가 결국에는 서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화면에 '패배'라는 붉은색 글씨가 나타나자마자 두 사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아, 씨발, 진."

"아, 씨발, 럭스."

형원과 기현은 동시에 이상함을 감지한다. 형원은 씩씩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올리고, 기현은 울분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든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형원은 생각보다 순해 보이는 인상을 한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기현은 생각보다 곱상한 얼굴을 한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기현은 형원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입을 크게 벌리면서 형원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킨다.

"야… 야구선수…!"

형원은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재빨리 건너편 자리로 옮겨가 남자에게 어깨동무를 하고서 PC방을 빠져나간다. 여전히 놀란 눈을 한 기현은 형원을 따라 상가 건물 계단을 내려가 그 밖으로 벗어날 때까지 형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쳐 지나가듯이 이 사람의 얼굴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찰나의 순간 동안 카메라에 잡힌 얼굴이 잘생겼다고 생각을 했었던 게 기억이 난다. 건물을 빠져나오고 나서야 기현을 놓아준 형원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 안에 있는 담배를 꺼내서 한 대 물면서 기현을 본다.

"뭐? 미필?"

"채형원 선수 맞죠?"

"그게 중요하냐? 왜 아까처럼 반말 찍찍 해 보지."

"제가 진짜 채형원 선수 팬이거든요."

"이것 봐라. 불리하니까 대답 피하네."

"제 이상형이세요."

형원은 자신의 앞에 선 남자의 말을 곱씹다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뭐라는 거야, 새끼가. 형원은 손에 들려 있던 담배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남아 있었으나, 손가락으로 튕겨내 불씨를 날려 버리고 꽁초를 떨어뜨리고서 깊게 한숨을 내쉰다. 그래, 내 팬이라는데 여기서 쟤한테 쌍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피곤하기도 피곤한데 괜히 화를 내고 싶지도 않고. 형원은 고개를 숙이고서 화를 삭히다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후에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제법 기대에 찬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그쪽이요. 뭐 하는 분인지는 모르겠는데, 피차 잘하지도 못하면서 훈수질 하지 맙시다."

형원은 나름대로 차분하고 상처 되지 않게 잘 말했다고 생각했으나, 형원의 말에 기현의 얼굴에 기대감이 싹 사라지고 이내 침울하게 바뀐다. 형원은 의아해한다. 아니, 게임 못한다고 한 게 저렇게까지 슬퍼할 일인가. 형원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푹 숙여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려 그의 얼굴 앞으로 제 고개를 들이민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작게 훌쩍이는 것 같았다. 아니, 게임 못한다고 말한 게 울 일이라고? 형원은 당황한 얼굴로 그의 어깨를 쥐고 작게 흔든다.

"아니, 저기요. 울어요?"

"…아니요."

"아니, 우는 거 맞잖아. 내가 혹시 말이 심했어요?"

"…그럼 프로게이머한테 못한다고 하는데 안 심하겠어요?"

형원은 그제야 '아…' 하며 머쓱하다는 듯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거리다가, 남자의 어깨를 작게 툭툭 치면서 시답잖은 위로의 말들을 골라내 본다. 본인이 울려 놓자마자 본인이 달래 줘야 한다는 게 좀 웃기긴 했으나,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진심으로 서운해 보였기에 형원은 목을 가다듬는다.

"아니, 뭐. 그럴 수 있지. 뭐, 프로라고 다 잘해야 해요?"

"…다른 선수들한테, 개무시, 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브론즈인 채형원 선수한테까지, 제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해요?"

말할수록 울분이 차오른다. 내가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내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노력해서 실버부터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서 그랜드마스터에서 챌린저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도 했는데. 내가 잘해도 주변 선수들이 더 잘하니까 여기서 개무시당하고, 이제 하다 하다 취미로 하는 일반인한테까지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고. 기현은 그간 서러웠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굵은 눈물방울을 툭 흘려 보인다. 형원은 애써 울음을 참아 내며 끊어내듯 말하는 기현이 귀엽다 생각을 하던 찰나에 기현의 눈물을 보고서야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인지한다. 야, 이거 어떻게 달래야 하냐. 형원은 안절부절못하며 기현의 어깨를 토닥거리다가, 이대로는 그칠 생각도 안 하겠다 싶어서 그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다독여 준다.

"아이고, 내가 미안해요. 아니, 그쪽도 자꾸 나한테 못한다고 하니까 나도 화가 나서."

"…그쪽 아니고, 유기현이요."

"그래요, 기현 씨. 내가 말이 심했네, 미안해요. 어? 그러니까 그만 울고."


그날 형원은 눈뜬 채로 꼬박 밤을 새우고서 아침 훈련을 나갔더랬다. 새벽 내내 훌쩍거리는 기현을 달래 주려 편의점에 들러서 맥주를 사 먹이기도 하고, 기현이 진정될 때까지 주변을 거닐면서 그간 서러웠던 얘기를 들어 주기도 하고, 자신의 팬이라길래 서로 번호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한 달 정도가 지난 것 같다. 형원은 제 옆자리에서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팔을 기대고, 자신이 보고 있는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자신에게 미니맵을 중계해 주는 제 연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형, 미니맵 봐야지. 내가 말해 준다고 안 보면 안 되고.

형, 방금 딜 교환 좋았어.

형, 지금 적 정글 용 쪽으로 갔거든? 좀 빼는 게 좋을 것 같아.

처음보다야 훨씬 부드러워진 말투였다. PC방 데이트는 두 사람이 가장 자주 즐기는 데이트 중 하나였다. 어차피 둘 다 특정 채널에서만 볼 수 있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모자만 잘 눌러 쓰고 있어도 알아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그나마 야외에서 편하게 데이트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가 PC방이었던 것이다. 2 시간에서 3 시간 정도 함께 게임을 하고 나오면 형원이 기현을 집까지 바래다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형원은 기현을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주고서, 헤어짐의 아쉬움에 짧게 입맞춤을 나눈다. 몇 번 쪽쪽 거리다가 형원이 기현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면 곧장 형원의 휴대폰으로 기현의 전화가 울린다.

'햄포터♥'

그렇게 좋을까. 형원은 미소를 띈 얼굴을 하고서 기분 좋은 목소리로 '어, 자기야' 하며 기현의 전화를 받는다. 제 귓가에서 자신의 내일 경기에 대해서 조잘거리는 기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일 경기는 잘 풀릴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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