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미르솔] 나를 무엇이라고 부를래?

darling by 달링

* 애콜라이트 카이미르×솔

* 카이미르 나이가 아주 아주 많다는 설정

* 개인적으로 상상해서 덧붙인 설정들이 나옵니다.

그는 스스로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의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까마득한 과거에서부터 존재해왔다. 세월은 무의미했고 해가 뜨면 낮, 달이 뜨면 밤 그에게 시간은 그뿐이었다. 병에 걸린 적도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자라지도 더 늙지도 않는다. 이름도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골짜기, 누군가는 흑요석, 누군가는 그림자, 또 다른 누군가는 미로…사람들은 그를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를 뜻으로 가진 이름으로 불렀다는 뜻이다. 이름에 대한 절실함은 딱히 없었으나 시비를 거는 상대든 뜬금없는 호감을 표현하는 상대든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라고 둘러댈 말이 필요했다.

마지막 이름을 붙여준 이가 흙과 먼지가 되고 기억 속에서도 사라졌다. 늘 그랬듯이 그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시비를 걸면 기꺼이 숨을 끊어주고, 사적인 눈웃음이라도 치면 아무렇지 않게 풀밭 위로 넘어뜨려준다. 종종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냐고 하면, 그동안 자신을 따라다닌 이름을 몇 개 대충 말해준다. 의아해하는 사람도 비웃는 사람도 가볍게 흘려듣는 사람도 낭만적인 시처럼 감상하는 사람도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들을 흘려보내고 그도 흘러갔고, 우주는 무한히 펼쳐진다.

충동적으로 밝은 벼색으로 물들인 머리가 온통 새까만 색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 행성의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많은 이름으로 불린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도, 전혀 다르게 생긴 종족들도 골고루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시끌시끌하게 소리 지르고 웃으며 뛰어다니는 것은 어느 시간 어느 곳에나 마찬가지였다. 질리지도 않는다.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곳에 주저앉아 두리번거리거나 멍 때리거나 어디선가 가져온 과일을 먹고 있으면, 아이들은 흘깃흘깃 쳐다보면서 기묘한 분위기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몇몇 어른들은 다가가서 말을 걸기도 했지만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무 말로 둘러대서 흥미를 끊었다. 그때까지는 딱히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별일이 없었다. 이따금씩 골치 아픈 사고를 쳐서 다들 혀를 차게 만드는 멍청한 난봉꾼이 실종되었다가 잿더미로 발견된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한가했다.

이곳은 평범한 듯 따분한 장소다. 많은 이름을 가진 남자는 며칠째 어떤 아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생긴 종족이었고(그는 자신의 종족이 무엇인지 100% 확신하지 못한다), 두상은 동글동글했고, 대체적으로 풀이 죽어 있었으나 다른 아이들이 노는 걸 볼 때면 관심은 있지만 꾹 눌러 삼키는 답답한 면도 있었다. 그 아이가 주변에 있으면 아이들은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거리를 더 벌리거나, 다른 곳으로 피했다. 어느 날은 초록색 피부를 가진 애를 붙잡고 쟨 뭐냐고 물었다. 쪼그린 채 햇살을 쬐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솔’이라고 했다. 입이 근질거린 듯 입술을 꿈틀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른들이 가까이 가면 다칠 수 있다고 했어요. 이상한 힘으로 밀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람도 있댔어요.

“안녕, 꼬마야.”

“제 이름은 꼬마 아닌데요.”

서로 존재를 인식한 지는 오래다. 이 마을에서 다른 것은 둘뿐이다. 초록색 피부를 가진 아이가 알려준 이상한 힘은 많은 이름을 가진 남자 역시 갖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능한지 아니면 어느 순간 피어난 것인지 모른다. 너무 올래 전부터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몇 년을 최근으로 잡아야 할까?)엔 이 능력을 쓰면 귀찮게 쫓아오거나 호들갑 떠는 경우가 많아져서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별 이유 없이 해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허공에 띄우자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진다. 꼿꼿이 서 있는 남자는 키가 컸고 아직 어린아이는 얼른 일어서도 고개를 위로 많이 올려야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아이는 비슷한 크기의 다른 색깔 돌멩이를 들어 올렸다. 공중에 고정된 듯 가만히 있는 남자의 돌과는 달리, 솔이 고른 돌은 균형감각 떨어지는 사람이 다리 하나로 서서 버티는 것처럼 비틀거렸다. 어찌어찌 조절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지 아이는 점점 당황하다가,

따악

그대로 남자의 턱 선을 가격해버렸다. 살면서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건 아니지만 턱을 울리는 통증이 묵직하고 찌릿찌릿했다. 피가 나려나? 그는 욱신거리는 턱을 대충 매만졌다. 살짝 까진 정도라면 금방 낫는다. 고개를 내리자 잔뜩 겁먹고 눈물 맺힌 눈과 마주친다. 약간 부어올랐지만 가격한 소리에 비해 멀쩡한 턱을 보자, 안도한 듯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한다. 이게 뭐라고. 그는 피식 웃었다. 고개를 좀 더 숙여주지만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춰주지는 않는다.

“…많이 아파요?”

“내가 너보다 몇 배는 오래 살았다. 이거로 너처럼 울까 봐?”

“안 울어요.”

“허세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놀리는 것에 은근 약하다. 정말로 울어버리기 전에 호기심을 살짝 자극해 보기로 했다.

“너, 이거 아직 서투르지.”

“…네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다. 한참 말이 없이 조용하다. 통나무보다 눈치가 없는 사람도 어린아이의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이러다가 목뼈가 어릴 때부터 휘겠다 싶어서 검지로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도 너만 할 때부터 이 힘을 쓸 수 있었어. 지금은 너보다 훨씬 잘 쓰지.”

“…….”

“알려줘? 잘 쓰는 방법.”

“네.”

알고 싶다며 어린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름을 많이 가진 남자는 방법 따위 모른다. 누군가에게 숨 쉬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하면 보통 사람은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수십 장의 종이에 빽빽하게 설명한 내용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의 존재와 함께 해 온 것이라 더더욱 그랬다. 아이의 관점에 맞춰서 같이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놀리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슬슬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기도 했고.

“그럼 조건이 있어.”

“뭔데요?”

“나에게 이름을 붙여줘. 내일 여기서. 그럼 방법을 알려줄게.”

“이름이 없어요?”

“그럼 넌 나를 뭐라고 부를 건데?”

“…어떤 이름이 좋은데요?”

“그건 네가 정해줘야지. 새 이름이 필요해서 네가 붙여줬으면 좋겠어.”

그럼 내일 만나자. 키 큰 남자는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떴다. 하늘이 어둑해졌고 마을은 지루하고 졸음도 왔다.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솔은 생각했다. 여기서 노숙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작은 마을이기도 했지만 주로 여기서 마주칠 때가 많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한동안 맑은 날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이날은 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흐렸다. 어제저녁은 얼굴을 들이밀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얻어먹었다. 어디 가서 얼굴로도 밀리지 않는 사람인데 기다리는 건 언제든 따분하다. 비가 내리면 비에 쫄딱 젖었다는 핑계로 도움이든 사심이든 받아내기 좋다. 그러기 전에 애 좀 만나고 가려는데,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하품을 세 번 연달아 했을 때 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 평소 입던 옷에 외투 하나를 걸치고, 제 몸뚱이만 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시선이 가방으로 간 것을 안 솔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 이곳을 떠나요. 그래서 좀 늦었어요.”

“마침 잘 됐네. 어디로 가는데?”

“코러산트. 가서 내 힘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대요. 나 같은 애들도 있댔구요.”

“잘 됐네.”

“그래서 당신이 알려준다는 설명은 듣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그렇구만.”

남자는 작은 재미를 웬 놈들한테 빼앗긴 것 같아서 약간 떨떠름하다. 아이는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많은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내민다.

“그래도 이건 약속이니까…당신의 이름을 뭐로 해야 할지 너무 고민되어서 몇 개 적었어요. 사전 찾아서 뜻도 적어놨으니까 참고해요.”

“몇 개씩이나?”

“그렇지만 누구 이름을 지어주는 건 처음이란 말이에요.”

“솔!”

저 멀리서 누군가가 불렀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복장은 몇 번 보던 것이다. 예전에 이름 많은 남자의 능력을 알아채고 몇 년간 쫓아다녔던 자들이다. 가까이 다가와서 알아보면 모르는 척하고 잽싸게 튀어야겠다. 머리를 다 굴리기도 전에 아이는 가방을 고쳐 메고 자신을 부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다 중간에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

“잘 지내요.”

“그러던가.”

그날 저녁은 비는 내리지 않았고 식욕도 돌지 않아서 적당히 어딘가에서 주운 과일을 두 덩어리 씹어 먹었다. 과즙이 몇 방울 떨어진 종이(다 펼치니 꽤 넓었다)에는 또박또박 어린애다운 글씨체로 쓰인 이름 몇 개가 있었다. 아무거나 적당히 쓸까, 했던 남자의 시선이 중간에 적힌 이름에 꽂혔다. 달이라는 뜻이래요. 당신하고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내 이름은 태양이라는 뜻이랬는데 나하고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쓸데없는 부가 설명이라고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것을 당분간 자신의 이름을 쓰기로 한다. 그에게 ‘당분간’은 이름을 지어준 아이에게는 까마득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 일도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일부러 기억을 삭제하지 않으면 시간에 쓸려내려간다. 혹시라도 수 년이 지난 뒤에 지금과 똑같은 자신을 만나서 이름을 불러준다면 칭찬해 줘야지.

……

………

제다이들은 나를 시스라고 부르겠지.

솔, 너는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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