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주의: 특정 빛전 묘사가 있습니다.
에스티니앙은 비에 쫄딱 젖어서 귀가했다. 라자한에 우기가 찾아오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산을 깜빡 잊고 외출한 전직 푸른 용기사가 소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에스티니앙이 물을 뚝뚝 흘리며 숙소에 들어서면, 아실은 매번 그런 끔찍한 꼴은 처음 봤다는 듯이 질색했다. 그러고는 애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수 닦아주었다.
에스티니앙은 유난 떠는 아실에게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 누가 머리를 말려주거나 젖은 옷을 벗겨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아서 챙기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었다는, 이젠 별 의미 없는 가족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것도 할 만하니까 하는 짓이었고 말이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수건을 찾을 틈도 주지 않고 달려오기 일쑤였지만.
옷 벗는 걸 도와주다 음흉한 손길을 한 번쯤은 뻗칠 만도 한데 이럴 때의 아실은 드물게 진지했다. 그 탓에 에스티니앙은 애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는 일이 한층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실이 마른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미리 준비하게 된 뒤에도, 에스티니앙은 이런 건 알아서 한다고 툴툴대며 수건을 낚아채는 게 다였다.
오늘은 달랐다. 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아실을 물끄러미 보다가 에스티니앙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자기 이마로 애인의 이마를 가볍게 밀며 머리 말려줘, 하고 중얼거렸다. 아실은 갑작스러운 어리광에 놀랐는지 말없이 요구를 들어줬다. 여느 때처럼 옷이 젖는다는 가벼운 타박도 하지 않았다.
아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실감할 때면 에스티니앙은 종종 언짢아졌다. 애인이 자신을 기댈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라 챙겨줘야 할 어린애로만 보는 것 같아서. 하지만 오늘, 귀가 전 들른 청과상에서 양껏 골라 담은 과일을 계산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저 녀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저 녀석이 날 챙기는 건 왜 안 되는 거지? 전자는 파트너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방적인 보살핌이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고작 비를 맞기 싫다는 이유로 두문불출하는 애인을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가 과일을 사는 건, 얼핏 생각해도 보살핌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자신을 돌보려 드는 것을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단번에 적응할 수는 없었다. 아실에게 젖은 머리를 맡긴 동안 에스티니앙은 머리카락이 길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나이 먹고서 어리광이라니…. 하지만 가끔은 기대기로 했으니까. 자신도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네가 내 책임이듯이, 나는 네 책임이 되었다는 사실에.
아실은 애인을 꼼꼼하게 말렸다. 젖은 옷을 모두 벗기고 빗물에 식은 몸을 구석구석 닦아준 뒤에는 침대로 떠밀었다. 옷을 준비해뒀으니 얼른 갈아입으라는 뜻이었다. 평소에는 에스티니앙도 머쓱한 기분을 곱씹느라 별다른 생각 없이 지시를 따랐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잡혔는데도 아실이 담백하게 구는 게 좀 웃겼다. 에스티니앙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추운데.”
아실은 곧바로 ‘추워?’하고 되물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그가 복잡하지 않은 수작을 못 알아듣는 것도 나름대로 신선했다. 이마를 짚은 손을 잡아당기며 에스티니앙은 대꾸했다. ‘데워 줬으면 좋겠군.’ 아실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 등허리를 타고 야릇하게 미끄러지는 손길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웃음을 터트리며 아직 찬 기운이 도는 살갗을 어루만졌다. ‘뭐야, 너? 오늘 좀 신선하다.’ 그래도 비는 맞고 오지 말라고 끝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에스티니앙은 결국 키스로 아실의 입을 막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