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6/10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용설란 (龍舌蘭)

2부: 문 너머의 이야기

w. 주인장

이상한 꿈이었다.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옛날 건물이 덩그러니 놓인 숲 속이었다.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은 그곳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던 듯, 익숙하게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문득 때가 되었음을 알았는지 수풀 쪽으로 가서는 풀을 헤치고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는 장면이 바뀌었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도 모를 울창한 숲 속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움직이는 발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꿈이니까 당연히 그랬겠지. 그리고서는 작은 체구의 남자 앞에 멈춰 선다. 남자가 누구인지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꿈에서 깼더랬다. 형원은 그냥 꿈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사극 드라마 같은 꿈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꿨던 것 같다. 꿈속에서 자신은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다. 아, 그걸 한복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한복이었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꿈에서 자신은 모르는 남자와 호수 한가운데에 놓인 정자에 앉아 있기도 했고, 넓은 바다를 보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고, 단풍 아래에서 조곤조곤히 대화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매번 그 꿈을 꿀 때면 애틋했던 것 같다. 꿈에서 함께 했던 남자는 매번 같은 사람인 것 같은데, 꿈에서 깰 때면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갑갑하기만 했던 것이다.

도대체 누군데, 누구길래 그 꿈을 꿀 때마다 나와서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어. 아는 사람인가? 에이, 그럴 리가. 말투부터가 조선 시대 말투였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꿈이 대수로운 것이 될 즈음이었다. 어제도 같은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꿨다. 그런데 어제의 것이 더 이상했던 건, 평소랑은 다르게 꿈이 드문드문 이어졌다는 것과, 꿈에서 깨고 나니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제 얼굴이 푹 젖어 있는 것도 무시하고 그 꿈 내용을 되새겨 본다.

꿈속에서 자신은 눈이 잔뜩 쌓인 곳에서 모닥불 앞에 앉아 있었다. 꼭 꿈이 아닌 것처럼 그 열기도 느껴졌었지. 그리고 장면이 바뀌고, 형원은 꿈속의 남자와 낡은 나무문 앞에 서 있었다. 그 문은 기억난다. 꿈에서 자주 봤던 문이니까. 그리고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더니, 자신의 시야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아, 드디어 얼굴을 봤네.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무어라 말을 해도 남자는 절규하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왜지? 왜 그렇게 울고 있었을까? 살면서 본 슬픔 중에 가장 슬픈 모습을 꼽으라면 꿈속에서 본 그 남자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온몸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이 서린 것처럼 장면이 흐려지더니 그렇게 꿈에서 깬 것이다.

어제의 형원은 꿈에서 깨고도 한참을 멍하게 누워 있다가, 그제야 얼굴에 느껴지는 물기에 이불을 걷고 일어나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운 건 꿈속의 그 남자인데, 왜 내가 이 모양이냐. 나 왜 울었지? 꿈이 슬펐나 보지, 뭐. 주말이라 다행이지, 얼굴 부은 거 대박이다. 살다 살다 이런 꿈은 처음이네.


기현은 제 몸에 훅 끼치는 냉기에 잠깐 몸을 움츠린다. 꾹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생시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소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잘 닦인 돌들이 바닥과 벽에 가지런히 붙어 있고, 문으로 보이는 쇠붙이들이 벽에 줄지어 서 있는 풍경. 이내 기현은 자신의 손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서둘러 손을 뗀다. 분명 나무 손잡이였던 것은 한기를 내뿜는 둥근 쇠붙이가 되어 있었다.

세상 천지에 이리 쇠붙이로만 된 곳이 있단 말인가. 내가 도술을 부린 것일까. 생소함이 주는 두려움이란 그마저도 생경하여 제 사고를 마비시킨다. 다시 문 뒤로 건너가려니 행여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 봐, 형원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기현은 그저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반질한 돌판을 조심히 짚으며 걸음을 옮긴다.

꼭 동굴에 온 듯, 조심히 내딛는 발걸음 소리도 울리는 것이 제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듯하다. 더는 걸음을 옮기는 것도 무서웠다. 몇 날 며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쏟아내기만 했던 몸인지라 기력도 제대로 내지 못하여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를 문으로 보이는 곳에 등을 기대고 쪼그려 앉는다.

문을 건너면 그곳에 있겠다고 해 놓고선.

꼭 저를 기다릴 것처럼 그리 말씀하셔 놓고선,

어찌 그대는 머리칼조차 비추지 않으시는지.

그때였다. 망연자실해 있는 자신의 뒤로 저를 미는 압력이 덜컹이며 전해졌다. 기현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그 힘이 제가 기대고 있는 문에서 전해지는 것을 깨닫고는 옆으로 몸을 비켰고 이내 벌컥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에 기현의 안에서 설명하기엔 복잡한 뜨거운 것이 제 목까지 데우는 것 같았다.

"형원…."

기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며 저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는 형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붙잡는다.

"형원… 맞소…?"

제 눈앞에 선 형원과 똑 닮은 얼굴에는 한껏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저를 뿌리치려는 이를 다시금 붙잡으며 다급함에 입을 연다.

"형원, 정녕 그대가 맞소?"

"아니… 맞긴 한데,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눈썹 언저리까지 차분하게 자란 검은 머리칼을 한 형원은 제 소매를 붙잡고 있는 손을 천천히 거둬 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기현은 저를 모르는 사람 대하는 듯한 태도에 다시금 가슴이 저려 온다. 어찌 저를 못 알아보시는지. 그래도 그대를 다시 마주한 것으로 내가 만족을 해야 하는 것인지. 허나, 오래도록 그리던 마음은 꼭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것인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기현은 허망하게 그가 떠난 자취를 좇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나는 이리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기현은 몸을 일으킨다. 그래, 그대는 나 때문에 생을 끝낸 것이니.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이만 떠나는 게 맞겠지. 그대가 강녕히 계신 것 보았으니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기현은 자신이 들어왔던 문으로 향해 차가운 손잡이를 잡아 돌린다. 문 너머에는 저가 있는 곳과 같은 한기가 느껴지며 제 시야에 펼쳐진 것이라고는, 그저 회색빛의 돌계단뿐이었다. 기현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공간으로 들어가 위아래, 좌우를 모두 살펴본다.

위아래로는 끝도 없이 이어진 돌계단. 좌우로는 그저 꽉 막힌 차가운 벽.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제가 건너온 곳은 울창한 숲 속이었거늘. 기현은 계단만이 빼곡한 공간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쳐 다시 형원과 마주했던 공간으로 돌아온다. 머리가 아찔해져, 기현은 이후로 몇 번이고 그 문을 열어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실로 그대가 마지막 도술을 걸어 두었구나. 정말 내가 그대가 있는 곳으로 건너오기를 바랐던 거구나. 그래서 이렇게 돌아갈 곳도 주시지 않으셨던 거구나. 그랬으면서, 그런데 왜 그리 모르는 사람 보듯 하시는지. 기현은 다시 제가 주저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냉기를 견디며 언제 올지 모를 형원을 기다릴 뿐이었다.

기현은 이 공간을 서성이는 낯선 이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저를 향해 무어라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웅웅거리며 울리는 통에 무어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띵-' 하는 소리가 울리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건물 안을 울린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제 앞에서 멈추었고, 기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사람을 확인한다. 형원은 아침보다 더 당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서 기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 전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기현이 몸을 일으키려다, 다리에 얼얼한 통증이 서려 엉거주춤 그의 앞에 선다.

형원은 제 앞에 앳된 남자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해 본다. 얘 누군데? 누구길래 경복궁 앞에서 대여해 줄 것 같은 한복을 입고 우리 집 앞에 죽치고 있냐고.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설마 그, 과*스캔들 같은 그런 상황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남자만 만나 왔는데 그게 더 이상하잖아. 형원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천천히 입을 연다.

"…누구세요?"

제 물음에 앞에 선 남자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운다. 내가 말실수한 거야? 진짜 누군지 몰라서 누구냐고 한 건데? 형원은 제 앞에서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서 조용히 굵은 눈물 한 방울만 뚝 하고 흘리는 남자에 잔뜩 당황하며 급하게 입을 연다.

"아니, 왜 울어요? 울지 말고 얘길 해 봐요."

진짜 울고 싶은 건 난데. 출근할 때부터 제집 문도 막고 앉아 있질 않나, 퇴근하고 와서도 무섭게 그 자리 그대로 있질 않나. 형원은 하다못해 제 눈에 귀신이라도 보이는 건가 싶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혈색 없는 얼굴에 한복을 입고 쪼그려 앉아 있기만 했으니. 형원은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기현을 토닥이며 휴대폰을 꺼낸다.

"그…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형원."

"제 이름도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긴 제집이고요. 여기도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일단 나가서,"

"제가… 제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미치겠네. 기현은 한숨을 깊게 내쉬는 형원을 바라보면서 그의 검지 끝을 조심스레 잡아 본다.

"다시, 돌아가면 될 것이라, 그리 생각했으나,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

"또다시 이리 저를 내치시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형원."

형원은 기현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주변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제 예상이 맞았다는 듯이, 제집에서 두 칸 떨어진 문이 벌컥 열리면서 머리가 빼꼼 나오려는 것에, 형원은 급하게 도어락 번호를 눌러 기현을 먼저 밀어 넣고 자신도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 사람 말투로 보나, 옷차림으로 보나, 밖에 오래 있어 봤자 저한테 좋을 게 없다.

어두운 집안에 현관 센서등만이 번쩍 켜지고, 그것마저도 형원은 괜히 무서워서 서둘러 거실에 불을 켠다. 기현은 제 머리 위로 빛이 번쩍이고 달칵 소리와 함께 온 집안이 낮인 듯 환해지는 것에 작게 뒷걸음질친다. 이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찌 날이 다 저물었는데 이리 환할 수가 있는지. 형원은 저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한 기현을 수상쩍게 바라보다가, 앞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죠."

"실례하겠습니다."

기현은 그 말에 조심히 제 신을 일렬로 가지런히 벗어 두고서 반질한 바닥에 조심히 발을 딛는다. 얼마나 갈고 닦은 것이기에 이리 고울까. 벽은 탄탄해 보이는 종이가 발려 있고, 방에 놓인 것들은 모두 기현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형원이 등을 기대고 있는 의자로 보이는 것도, 그 맞은편에 놓인 네모난 것도.

"이리 와서 앉아요. 얘기 좀 하게."

기현은 형원의 앞에 있는 하얀 탁상 맞은편에 옷을 펼치며 양반다리를 틀고 꼿꼿하게 앉는다. 형원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상한 사람이네. 컨셉에 저렇게 취해 있다고?

"…혹시 코스프레 그런 거 하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 아니에요. 그 혹시… 어디서 오셨는지…?"

"도성 뒷산 깊은 곳에서 문을 건너왔습니다."

미치겠네. 뭔 소리야, 저게. 형원은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기현과 눈을 맞춘다.

"장난치지 마시고요."

"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형원."

"…네, 뭐, 그럼 그렇다 치고. 왜 제집 앞에서… 혹시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대가 제게 건너오라 하셨기에,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찾아왔습니다. 이리 다시 뵙게 되어, 저는,"

"아니, 왜 자꾸 울어요."

형원은 기현의 눈 주변이 붉게 물드는 것에 서둘러 티슈를 뽑아 기현에게 건넨다. 기현은 제 앞에 들이밀어진 나풀거리는 흰 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기현이 답답했던 형원은 그의 말이 진짜인가 아닌가 긴가민가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그래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집에 둘 수는 없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럼 뭐 방 잡고 잘 돈은 있으세요?"

"궁에서 예기치 않게 떠나온 탓에 아무것도 챙기질 못했습니다."

경복궁에서 숙식 제공 알바도 구했나?

형원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가 고개를 든다. 그래, 땡전 한 푼 없다는 사람을 거리로 내모는 것도 도리는 아니지.

"그럼 오늘 하루만 재워 드릴 테니까, 내일은 알바비 꼭 받으시고 돌아가세요."

"왜 자꾸 저를 내치십니까, 형원. 이리 그대가 그리워 걸음 하였는데,"

"제가요?"

"전하를 제 앞에 무릎 꿇리시고 저와 함께 떠났던 그날을 어찌 잊으셨습니까."

형원은 그제서야 말도 안 되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설마 진짜 시간이라도 달려온 거야…? 그게 가능해? 형원은 고개를 돌려서 흙먼지가 묻은 비단신을 봤다가, 기현의 옆으로 넓게 퍼진 고운 비단을 보고서 다시 기현과 눈을 맞춘다.

"지금이 몇 년도일까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늘 날짜 말이에요."

"별채에 오래 머물러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금상께서 주군이 되신 지 20년이 지나신 걸로 압니다."

형원은 그제야 헛웃음을 터뜨린다. 아, 왕이 있던 시절에서 오셨구나. 무려 궁에 살고 계시던 분께서. 이 나이 먹고 이런 일을 겪어도 되나? 형원은 한참 실없이 웃다가 웃음을 싹 거두고서야 다시 입을 연다.

"그러니까, 그쪽이 궁에 살고 계셨고, 왕족이시고,"

"이제 저를 기억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뇨. 아닌데. 확인만 좀 하려고."

"…."

"그런데 지금 돈도 없고, 갈 곳은 더 없고."

"의지할 곳이 그대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어찌 그러십니까?"

"정말 나 때문에 온 거라고요?"

"그렇습니다."

형원은 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다가, 답이 정해진 고민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다 슬쩍 시선을 들었을 때, 올곧게 저를 향해 있는 시선에 결국 정해진 답을 선택하는 형원이다. 어쩌겠어. 나 때문에 왔다는데. 이 흉흉한 세상에 저 아무것도 모르는 세자인지 누군지를 어떻게 내보내겠냐.

"…이름이 어떻게 돼요?"

기현은 형원의 물음에 잠시 슬픔에 잠긴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니, 당연히 제 이름도 잊으셨겠지. 기현은 애써 밝은 얼굴을 해 보이며 형원을 바라본다.

"금상의 둘째, 유 가 기현입니다."

"그래요, 유기현 씨. 나이는 어떻게 돼요?"

"성년이 되기까지 한 해가 남은 열아홉입니다."

"열아홉???"

"어찌 그러십니까?"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얘가."

형원은 눈을 맑게 빛내며 저를 바라보는 기현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어린 나이에 오라고 한다고 쪼르르 오냐. 오라고 한 그놈도 미친놈이지. 애한테 무슨.

"세상이 흉흉하다 하나, 그대가 계셔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이 어린 애한테 사람 조심부터 알려 줘야겠다 생각하는 형원이다. 기현에게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서는 제 옷방으로 가서 그나마 자신에게 짧거나 작았던 옷들을 골라 꺼내 기현에게 건넨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갈아입어요. 그거 불편할 거 아냐."

"…이것이 의복이란 말입니까?"

"예, 요즘 세상에는 이런 걸 입어요. 저기, 안방에 가서 갈아입고 나와. 아직 얘기할 거 더 있으니까."

형원은 기현이 옷을 받아 들고서도 미동 없이 앉아 있는 것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기현을 내려다본다. 에이, 설마… 진짜로?

"…혹시 혼자 옷 갈아입어 본 적 없는 거야?"

끄덕. 그 움직임에 형원은 허리에 손을 짚고 섰다가 기현에게 옷 입는 법까지 차근히 알려 주며, 이 동거가 맞는 선택인가 형원은 다시 생각해 본다.

하얀 반팔 티셔츠에 무릎 위에 떨어지는 반바지를 입은 기현은 이 옷차림을 하기까지 안방에서 한참을 망설였더랬다. 아니, 어찌 이리 맨살을 훤히 내보일 수 있단 말인가. 형원을 깊게 연모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기가 굉장히 민망스러운데. 기현은 우물쭈물 소매를 내리며 쭈뼛거리며 다시 거실로 나선다. 형원은 무엇을 그리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지 얼굴을 괸 채로 창밖을 내다보다가 기현의 기척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고서는 다시 앉으라며 손짓한다. 기현은 쑥스러움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최대한 제 살이 보이지 않도록 어색하게 몸을 가린다.

"옷 너무 잡아당기지 마요. 늘어나."

"허나… 이리도 짧은 것은 처음인지라."

"아… 그치, 그쪽은 옛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실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채형원. 뭐, 네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해도 통성명은 해야 하니까."

"…."

"자, 나는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야. 그러니까 해 떠 있을 때는 너 혼자 여기 있어야 한다는 거거든?"

"그것은 염려 마십시오. 그대의 별채에서도 홀로 있는 시간을 잘 견뎌 내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인데, 우선 나 없을 때는 안방에 들어가지 말고."

"…."

"잠은 일단 옷방에서 좀 자자. 그렇게 엉망은 아니라서 잘 만할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배고프면 라면… 아, 가스레인지 못 쓰겠구나."

가스레인지는 무슨. 옛날 남자 사람이면 주방 구경도 못 해 봤겠구만. 형원은 머리를 싸매다가 휴대폰을 들어 다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일단 비요뜨 시켜 놓을 테니까 그거 뜯어서 먹어."

"비요… 그것이,"

"있어, 맛있는 거. 칫솔도 줄 테니까 그거 쓰고."

기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형원은 체념한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저 녀석이 도어락 열고 어디 나갈 일도 없을 테고. 형원은 기현이 혹시나 심심할까 봐 티비 리모컨 조작법을 알려 주고서 그가 덮을 이불을 옷방에 가져다준 뒤에 제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엎어진다. 낯선 동거인한테 이것저것 알려 주고 나니 벌써 10 시 반. 분명히 6시에 퇴근해서 7시에 집에 왔는데. 형원은 휴대폰을 든 손을 툭 떨구고서는 뒤척이다가 그제야 옷을 갈아입는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쟤도 적응하고 나면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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