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사탄루시 / 非

2022 유사근친

219 by 219
12
0
0

비가 오는 날이었다. 오전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는데 정오를 넘길 시점부터 스믈스믈 기어오는 구름에서 심상찮은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해가 반쯤 걸치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데워진 아스팔트에 내려꽂는 음 도시를 감싼다. 사탄은 시간을 확인하고 커튼을 조금 젖혔다. 아파트 창문 너머 조그만 세상 온통 적셔지는 와중에 느지막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드리웠다. 해는 떠있는데.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 보아하면 금세 걷힐 것 같지는 않다. 커튼 도로 닫으니 조용한 집은 다시금 어둠에 휩싸인다. 사탄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차키를 찾았다. 이참에 차 트렁크에 우산을 가져다 두어야겠다.

지하주차장은 울퉁한 바닥에 이미 물이 얕게 찰박인다. 끌고 나온 운동화 밑창은 아직 차 발매트에 올려두면 마르는 정도지만, 아무래도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가야할 성싶다. 오래된 차에 시동이 걸리고 4:43 밝은 초록색 숫자가 반짝 켜진다. 보조석에 접이식 우산을 던진 사탄은 익숙하게 비탈길을 오르고 단지를 빠져나갔다. 

원래는 막히는 시간대가 아닌데. 날씨가 날씨인지라 쉼없이 움직이는 와이퍼 뒤로 물방울에 일그러진 빨간 불빛들 가득하다. 위잉, 감당하지 못할 양의 비를 닦아내는 소음을 비웃듯 유리에 부닥치는 비 요란하길래 사탄의 마음도 괜시리 조급하다. 늦어도 학원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테지만. 우산도 없는데 나와 있진 않나. 사탄이 몸을 뒤로 젖혀 기대며 바뀌지 않는 신호를 바라봤다. 굳고 오래된 상처가 군데군데인 손 핸들에 올린 채 두어 번 쓸어넘긴다. 별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걱정이 많다.

요행히 다섯 시를 넘기기 전에 사탄의 차가 학원 부근에 들어선다. 비교적 한산한 주차장에는 남은 주차 자리가 있었고, 이내 사탄이 우산을 펼치며 차에서 내린다. 곧바로 내딛은 발목께에 물방울이 튀어 적시는 걸 보면 여전히 그칠 기미 없으니 우산을 가져오길 잘했다. 외진 곳에 자리한 학원은 내부까지 차로 진입할 수 없는 구조로, 루시퍼가 기다리고 있을 현관까지는 조금 걸어야 했다. 평소라면 루시퍼가 혼자 귀가하든 여기까지 나오든 했을텐데. 사소한 감상에 사로잡힌 채 사탄이 기억나는 대로 발걸음 옮겼다.

사탄이 보이자 사탄이 쓰고 있는 우산 아래로 성큼 들어온 루시퍼는 왜 우산이 하나냐며 시답잖은 잡담부터 시작했다. 붙지 마, 두 명에 맞게 우산 위치 조정하며 사탄은 다른 하나는 우산살이 부러졌더라며 받아친다. 빗물 찰박이며 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 이를테면 저녁 메뉴나 우산을 사러 가자는 얘기가 이어지고. 나란히 걷다가 루시퍼 문득 멈춰선다. 사탄 고개 자연히 그에게 돌아갔다.

"헤어지자."

루시퍼가 담담히 말을 꺼냈다.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둘의 첫 만남은 사탄이 아직 애티를 벗지 못한 때였다. 사탄을 알던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수근거리던 때, 유독 어른스럽게 말수가 적었지만 그래봤자 그 나이에 비해서였다. 성숙하다기보단 어그러진 모양새의 사탄은 바쁘게 이삿짐이 옮겨지는 동안 자기 방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아버지와 그 여자가 즐거운 투로 뭐라 떠드는 소리가 닫힌 문 너머로 전해져왔다. 상자를 내려놓는 소리, 바닥에 끄는 소리. 이따금씩 남자애의 음성도 섞여있었다. 교복은 어떻게 할까요. 방에 옷장 들여놨으니 거기다 둬라. 귓가에 들리는 아버지의 대답이 이상해 사탄은 두어 번 귀를 거칠게 만졌다. 루시퍼, 네 형이 될 아이겠구나. 사탄과 루시퍼를 마주하게 시키는 손들은 죄다 루시퍼 어깨에 얹혀있었다. 루시퍼의 뒤에 선 아버지와 그 여자. 얼굴이 보이지 않는 키의 어른들과 마치 자애롭기라도 하듯 의연히 사탄을 바라보던 루시퍼. 무거운 루시퍼의 어깨와 텅 빈 사탄의 어깨. 몇 주전의 기억이 여태 생생하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 사탄이 침대에 모로 누웠다. 문 밖 소음이 반만 들려왔다.

형 노릇이란 건 아버지에게 당부받았기 때문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사탄은 곧 나가떨어질 거라고, 관심을 거둘 거라고 여기고 루시퍼를 참아냈다. 비집고 들어온 것도 탐탁치 않은데 숙제를 돕겠다며, 간식을 사오겠다며 자꾸 무언가를 책임지려고 했다. 루시퍼를 보면 어머니와 어머니의 생각이 났다. 어머니, 그러니까 사탄의 엄마는 행복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사탄이 더 어릴 때 엄마의 행방을 묻거든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모른다. 서로 사랑한 주제에 군더더기 아들을 낳아둔 주제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매번 모질었다. 죄는 집안이 좋지 않아서. 사랑한 주제에. 사탄이 감흥 없이 되뇌었다. 아들이 글을 떼었을 즈음에 엄마는 둘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행방불명이었다. 아버지는 종종 그 여자는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탄 역시 고개를 주억일 때도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납득해서는 아니었지만. 사실 사탄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도 죽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살아있는데. 가끔 손을 꿈지럭거렸다. 실감은 나지 않았더랬다. 몇 년 후 아버지는 또 다른 어머니와 남자애를 데려왔다. 죽지 않았던 적이 없는 아버지의 눈에서 무언가 움트고 있었다. 머지 않아 사탄은 이 어머니의 사정도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는 걸 짐작했다. 사랑한다고. 집안이 좋지 않은 주제에. 그렇게 내뱉고 나면 사탄은 나쁜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곧바르게 자란 아이 루시퍼는 사탄같은 아이도 품에 안았다. 가끔 스치는 살결이 역겨워 사탄은 숨을 참았지만 달라붙지 않는 성정 덕에 간신히 견뎌낼 수 있었다. 찬 몸에 감도는 온기는 피차 편하지 못한 정도에서 끝내고 싶어. 루시퍼가 유독 사탄의 방에 자주 들리던 때가 그 때였다. 어서 나가길 바라는 사탄에는 큰 관심 없고 루시퍼의 눈길을 끈 건 다른 거다. 어리석게도 당시에는 사탄은 그걸 위안으로 삼았었다.

루시퍼, 너는 커서 뭘 하고 싶니. 언젠가 들어온 질문에 루시퍼는 쉽게 대답했다. 저도 조소가 해보고 싶어요. 어른들 앞이 아니었으면 사탄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을 거다. 사탄의 눈길에도 아무 감정 없기에 떳떳한 루시퍼는 바로 긍정의 답을 받아냈다. 그래, 마침 사탄도 하고 있으니 열심히 해서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 사탄이 몰래 주먹을 움켜쥔다. 손끝까지 루시퍼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집부터, 꿈부터, ... 같은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너와 내가 같은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몇 번째 헛손질이다. 사탄이 부러질 듯 쥐고 있던 조각도를 놓았다. 투박하게 뭉그러진 나무 조각이 그의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손바닥에 맺힌 땀이 금세 식어 서늘했다. 사탄이 조소를 시작한 이유는 하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한창 독서에 매진하면 책의 내용을 따라가느라 잡생각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탄은 그 감각이 좋았다. 책을 읽고, 나머지 시간은 조각을 하고. 그러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곤 했다. 먼지를 털고 일어나 한두 발짝 멀리서 그가 대여섯 시간을 쏟아부은 결과를 응시한다. 초라하고 보잘것 없다... 사탄이 힘겹게 뒷말을 덧붙인다. ... ...루시퍼 것보다. 

느지막히 조소를 시작한 루시퍼는 일취월장이었다. 칼을 쥐기가 무섭게 사탄을 따라잡은 실력이 칭찬받을 때마다 훌쩍 늘었다. 잘난 존재로구나. 사탄 스스로 중얼이는 음절 하나하나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왜 스스로 그 문장을 발음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먼 발치서, 방문 너머로 훔쳐본 루시퍼의 조각은 아름다웠다. 그의 다부진 손끝이 빚어내는 형상은 깎는 게 아니라 부산물을 녹여내 갇힌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사각사각, 그 소리에 심취하노라면 사탄은 문 뒤에 숨은 삐걱거리는 제 발걸음 소리도 잊었다. 그러고보니 저 소리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같기도 하다. 한 장씩 넘기며 줄글 읽어내리다 보면 밀려들어 사탄을 압도하는 세계, 순수한 탐구심으로 고요한 사탄의 눈길이 오로지 루시퍼의 손에 가닿는다. 우습게도 그 곳에서는 그것만 가능했다, 그가 그것만 가능케 했다. 그런 식으로 사탄의 세상이 마구잡이로 구겨넣어져 갔다.

루시퍼가 홀로 귀가했을 때는 불 꺼진 집만이 그를 반겼다. 분명 사탄, 그 애가 있을텐데. 방문은 모두 굳게 닫힌 채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그의 집은 오늘따라 유난히 불편하다. 초저녁의 새파란 어둠이 안개같기도 해. 크게 신경 쏟지 않는 루시퍼 겉옷 벗으며 그의 방 문고리를 돌렸다. 누가 틀어막는 것도 아닌데 새어나오지 않던 차음差音, 거칠게 벗겨내는 소리... 루시퍼가 제 방에 발 한 쪽 들여놓고나서야 그런 잡음을 눈치챈다. 뭐지? 루시퍼는 방문 활짝 열어제치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퍼의 방에 이방인처럼 - 틀리지도 않았지만 - 사탄이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어지러운 바닥에 한 켠에는 루시퍼 자신이 깎은 조각, 사탄 쪽에는 무언가 조각하고 있는지 써걱써걱, ... 루시퍼의 기척에도 미동 없이 등진 채로 계속, 계속 사탄이 손을 움직였다. 콰광, 천둥이 내리치고. 사탄의 손놀림 엇나갈 때마다 격해진다. 망설임이 없다기보단 좀 더 화풀이에 가까운. 루시퍼가 놀라 사탄의 어깨를 쥐었다. 돌려세우니 그제야 사탄이 매달리고 있던 조각 형태 드러난다. 루시퍼가 만들었던 것의 흉한 모작품이었다. 투박한 모양새를 거듭해서 깎아내리던 부근엔 박아넣은 듯 이가 나간 조각도가 꽂혀있다. 아무렇게나 주먹 쥐어 칼 쥔 손에서 피가 주륵 흘러 조각상을 타고 내려갔다. 루시퍼가 사탄 양 손목을 낚아챈다. 베이고 찍힌 상처가 손가락이며 손바닥까지 낭자했다. 피가 갓 마른 자국 위로 새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그 문대진 혈흔이 조각도 손잡이에도 선명했다. 그런데도 아픈 기색은 없고 되레 루시퍼의 손만 파르르 떨렸다. 루시퍼는 시선 잠시 떨궜다 사탄의 얼굴로 옮겨갔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사탄의 표정은 어딘가 낯선 기분이 들어서, 또 소름이 돋게 해. 유한 무표정으로 사탄이 작게 중얼였다. 말하지 마. 나지막히 뱉는 루시퍼는 선택지가 없다. 말 안 할게. 붕대만 좀 감자.

계속 칼을 쥐어야했던 탓에 사탄이 붕대를 풀 수 있는 건 아직 먼 날이었다. 그새 대학 진학을 준비해야할 때가 왔다. 둘은 무심히 같은 학원에 등록됐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루 대부분을 가까이서 보내는 꼴이 되었다. 루시퍼는 그날 이후로 설명하지 못할 죄책감 따위를 느꼈다. 그 역시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괜찮은 건 아니었다. 어떠한 책임감이 있기에, 어쨌든 가족이어야 하기에 제 또래의 아이를 받아들인 것뿐이다. 루시퍼는 처음에 사탄이 그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사탄이 어떻게 생각하건 루시퍼에게는 딱 보였다. 다만 쥐면 엇나가고 따라가면 꺾이는 게 문제다. 루시퍼가 슬쩍 사탄을 곁눈질한다. 느린 손짓으로 깎아내는 모습은 이제 사뭇 달라 보였다.

부모님의 부고가 들려왔던 것도 그 때즈음으로 기억한다. 학원에 있던 루시퍼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더랬다. 수화기 너머 인물이 진부한 멘트로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네 부모님이 사고가 나셨어. 동생 데리고 OO병원으로 오렴. 동생... 루시퍼는 조금 미적거리다 자리서 일어나 사탄의 손을 쥐었다. 살짝 일그러진 표정에 담담히 전달한다. 부모님 사고 나셨대. 감흥 없는 얼굴의 아이가 손을 잡은 채 일어난다. 슬퍼하지도 않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 둘만 남겨졌구나.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돌아가셨다는 소식 앞에서 루시퍼는 그런 생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분명 말하지 않았는데 사탄 물끄러미 루시퍼를 바라본다. 나는 부모라고 생각한 적 없어. 경황 없던 루시퍼가 놓는 것을 깜박하고 붙들고 있던 사탄의 손은 이제 루시퍼와 새끼손가락 끄트머리 정도 이어져있다. 먼저 놓을 줄 알았는데. 루시퍼의 시선 그리로 향하자 사탄이 반 박자 느리게 슥 손을 뺀다.

루시퍼가 하향 지원을 결심한 것은 돈 때문이 컸다. 원래 목표하던 곳은 둘의 사정으로 학비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큰 뜻을 품은 건 아니었기에 루시퍼는 금방 수긍했다. 사실 어디를 가더라도 별 상관이 없었다. 이에 버럭 화를 낸 건 오히려 사탄이었다.

"네가 뭔데?"

사탄 소리 높여 한다는 말이 우스워 루시퍼가 희미히 미소짓는다.

"잘하는 주제에, 우리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닌데 존나 하향지원한다 이러고..."

"잘하는 주제라니. 그런 말 네게서 듣는 건 처음인데."

"시끄러워. 그리고 네가 거기 지원할 거면 나도 거기로 갈 거야."

사탄이 뒤이어 이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거였다.

"왜?"

"시끄럽다고."

"나랑 지내는 게 불편할 줄 알았다만."

"그럼 따로 살기라도 할 거야? 아니면 다른 대학 간다고 통학시간 늘릴 거냐고."

사탄은 강경했다. 루시퍼가 이전엔 사탄이 이런 적 있었나 돌아볼 정도로 그의 뜻을 굽힐 순 없었다. 둘이 함께 살며 같은 대학을 다니면 편한 부분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고. 결국 둘은 작은 집을 하나 마련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위치의 아파트였다. 두 사람이 쓰는 용도의 작은 크기라서 그런 걸까, 루시퍼가 생각했다. 사탄은 둘이서 살게 되면서 부쩍 루시퍼에게 간섭을 시작했다. 한 명이 안 들어오면 허전하니까 그런 걸 거라고... 루시퍼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간 날 사탄은 집안 불을 죄다 꺼놓은 채 거실에 앉아 현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탄이 모르는 동기 이야기라도 꺼내면 흰눈으로 보며 건성으로 넘기는 일도 잦았다. 루시퍼는 확실히 이것이 집착이라고 알았다. 순수하지도 않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기원한 집착.

스쳐지나갈 연이라면 애초에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유형은. 누구나 알 법한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뒤틀린 어린 마음을 받아줄 여유도 이유도 없다. 어쩔 때는, 그저 놓아버리는 게 맞는 해결책인 인연도 있는 법이다. 루시퍼는 조용히 사탄을 관찰했다. 사실 몇 년째 그래오고 있었다. 사탄이 품은 질 나쁜 감정이 그를 쿡쿡 찔러댔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 없었느냐고 물으면 그 말도 맞다. 루시퍼는 사탄에게 가족이었다. 어떤 수식어가 붙든 단 하나뿐인. 루시퍼가 일말의 애정을 꺼내 어루만졌다. 어쨌든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루시퍼가 말을 꺼낸 것은 수업을 마치고 둘이서 집에 돌아가던 때였다. 어떻게 시작해야 미숙해보일까. 감정적이고 진심같게. 목을 가다듬은 루시퍼는 사탄을 헤아려 최대한 덤덤하게 던졌다.

"할 말이 있는데."

고개 끄덕. 사탄 반응 엿본 루시퍼가 말을 이었다.

"오래 전부터 좋아해왔다. 너를."

사탄의 고개가 그제서 루시퍼를 향했다. 정답인 건가.

"너만 괜찮다면..."

"...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탄이 묵묵히 한 마디로 답한다. 동요하지 않은 척. 루시퍼의 시선이 아레께로 떨어졌다. 사탄은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거, 연애 감정으로 싸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아이디어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사랑이란 비루한 컨텐츠에 집착하는 인간들은 여러 뭉치의 감정들을 간단히 한 단어에 욱여넣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조금 비극적이고 많이 구질한 연애면 되는 거야. 어린 애니까. 루시퍼가 내린 결론은 그랬다. 딱 일 년만. 그 후에 깨고 나면 영영 그 파편을 사랑의 후회라 뭉뚱그리게 하는 거다. 그 때는 그게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계획인 것처럼 들렸다.


"헤어지자."

루시퍼가 발음한 문장은 시작할 때나 끝낼 때나 다름이 없다. 빗소리를 헤쳐 맴돌던 사탄의 음성이 뚝 끊긴다. 이렇게 시끄러웠나 싶을 정도로 비가 고막을 마구 타격한다.

"뭐?"

"빗소리 때문에 안 들렸나?"

부러 온도가 찬 말투를 머금어본다. 답신처럼 서늘한 사탄의 눈빛으로 돌아온다.

"그냥 관계는 유지하자."

"아니, 나 마음 식었다고. 너는 날 아직 사랑할지 몰라도 난 식었어."

사탄이 입술 잘근 씹는다. 이대로 밀고 나가면 완전히 착각하게 할 수 있을 듯한, 이별 통지를 받은 남자의 표정.

"관계...는 유지하자."

"...우리 가족이야. 섹파 아니고."

답이 없다. 루시퍼는 의미 없이 서너 번 거쳤던 잠자리를 회상한다. 루시퍼가 허락하면 사탄이 덮쳐와서, 무언가에 고픈지도 모르고 헛헛하게 탐하며 밀어넣고 밀려나던 것. 숨을 거칠게 고르던 사탄은 루시퍼가 계속 붙들어줘야 했다. 주체 못할 감각에 지배되어 손 뻗대며 루시퍼를 길 잃은 것처럼 더듬고 안던 우스운 꼴.

"좋았어?"

이어지는 침묵에 좀 더 가볍게 주제를 돌려본다. 섹스를 떠올리자면 루시퍼의 눈에 사탄은 한없이 어리숙했다.

"할 때는 네가 내 아래라 좋았어."

바닥에 고정된 사탄의 눈길. 루시퍼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납작하게 사랑으로 정의되지 않고 꿈틀이는, 누가 봐도 조악한 욕망 날것으로 비 맞으며 루시퍼를 응망한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려고 데리러 오라고 했어?"

나직한 톤으로 사탄이 말을 잇는다. 화났구나. 루시퍼는 한 박 쉬었다가 별 뜻없이 대답한다.

"넌 언제나 나를 데리러 오잖아."

정말 사실이었을 뿐인데. 루시퍼가 시간 강사를 하는 학원과 집은 거리가 있어서, 그래서 시간이 비는 사탄이 데리러 온다고. 무엇이 불편했는지 사탄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러더니 둘이 쓰고 있던 우산을 땅바닥에 집어던진다. 우산이 두어 번 튀더니 뒤집어지고, 빗줄기가 곧바로 둘을 적시기 시작한다.

"뭐해."

루시퍼 역시 참고 넘어갈 인물도 아니다. 냉해진 눈빛 사탄에게 내리꽃혔다. 퍼붓는 비에 사탄 머리칼은 물론 옷도 엉망으로 젖어간다. 그래도 사탄은 꿋꿋이 루시퍼를 바라보고 섰다.

"너야말로 뭐하는데." 

차갑게 바라보는 것 보아하니 감정이 쉬이 정리될 것 같지 않기도 하다. 치기 어린 사랑이니 빨리 식었으면 좋겠는데. 사탄이 눈앞을 가리는 푹 젖은 머리카락 훑어낸다. 거센 비에 뺨 위로 물줄기가 쉼없이 흐른다. 안쓰럽기 그지없는 모양새다. 먼저 발걸음 옮겨 우산을 주운 건 루시퍼였다. 안쪽에 고인 물을 흘려보내고 사탄에게 씌워주지만 사탄은 거친 손짓으로 우산을 접더니 도로 내던졌다. 이번엔 꽤 정확하게 루시퍼를 겨냥한 채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저 혼자 저벅저벅 걸어나가며 차키를 꺼냈다. 뒤에 남겨진 루시퍼는 우산을 주워 들고 천천히 따라간다. 

루시퍼가 보조석을 열고 탈 때까지도 사탄은 시동만 걸어놓은 채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젖은 옷에 시트 너머 큰 얼룩이 졌고 비틀어진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안전벨트를 매기 무섭게 차는 다소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유리창에 비오는 소리 가로막히니 묵묵부답 더 무겁게 다가오지만 둘 중 아무도 말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막히는 길 위 이지러지는 차 불빛과 반복적인 와이퍼 소음, 물기 어린 둘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거진 앞만 바라봤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앞을.

사탄이 떠났을 적보다 더 어두워진 집에 불이 켜졌다. 루시퍼는 젖은 겉옷 벗으며 턱짓으로 먼저 욕실에 들어가라는 사인 준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인 사탄은 아무 말 없이 들어가 문을 닫고, 이내 샤워 소리가 이어진다. 심하게 젖은 옷가지 몇 개를 벗는 루시퍼에게 미뤄뒀던 생각들이 밀려온다. 잘한 건가. 예상한 반응보다는 더 격하게 나왔었나. 이별은 독한 거려니 여겨보기도 한다. 거기다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아야하는 상대한테. 빗속에서 저를 쳐다보던 사탄이 어른거린다. 마냥 상처받은 눈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회, 갈구, 지독한 혐오와 ... ...

오래 기다릴 것 없이 사탄은 금방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대충 털어내며 루시퍼 옆을 지나칠까 싶던 순간인데 사탄이 잠시 걸음 멈춘다. 의아한 루시퍼와 시선 맞닿고, 좀전의 뒤섞인 감정은 간데 없는 가라앉은 눈빛이다.

"...그거 알아. 우리 키스한 적이 없어."

그러고 사탄은 고개 꺾어 루시퍼에게 가만히 입술 맞댄다. 슬 떼어낼 때까지 감정의 찌꺼기 하나 없이 병적으로 담담하다. 마지막이라고 고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저녁은 내가 할게."

사탄 지나쳐가며 내딛는 발걸음도 건조하지만 남기는 발자국에 미련 가득하다. 루시퍼의 눈에 그렇게 읽혔다. 혼자 우뚝 선, 정말 혼자서 덩그라니 서 있는 루시퍼의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이 토독 떨어진다. 애초에 외면해왔던 가능성에, 오만히 없는 것 치부해왔던 감정이 그를 휩쌌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 ...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