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사탄루시 / 구속

2021 센티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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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는 참는 것에 이골이 나 있었다. 자신을 억누르고 본능을 외면하는 일. 억울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그가 선택한 길이니까. 그의 선택은 디아볼로의 선택이자 데빌덤의 선택이었고 따라서 옳은 일이었다. 이번 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견이 개입할 수 있는 건도 아닌 게 문제였을까. 그쯤까지 가면 루시퍼는 의식적으로 사고를 멈춘다. 쓸모도 이익도 없는 잡생각이 방해하도록 둘 만한 이유가 없다. 자신의 서재 구석의 불편하리만큼 투박한 의자에 앉은 그는 대신 문가에 눈길을 두었다. 사탄은 그런 루시퍼에 스쳐가는 눈빛도 맞추지 않고 들어와 문을 잠갔다. 늦었군. 사탄은 언제나처럼 아무 대꾸도 없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열쇠를 집어 책상의 가장 아래 서랍을 여는 사탄의 행동은 아무도 근처에 없는 듯하고, 루시퍼도 차라리 그 편이 편했다. 사탄이 이내 거칠게 꼰 밧줄더미며 수갑이 엉킨 덩어리를 책상 위 정돈된 서류더미 너머로 던져 올렸다. 연필꽂이가 쓰러지며 펜들이 쏟아지는 소음, 둔탁한 음과 종이 나풀대는 소리가 울리고 사탄은 루시퍼의 책상 의자에 다리를 꼬고 걸터 앉는다. 매번 저러는 것도 제법 신경을 써야할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루시퍼는 눈을 감았다. 사탄이 책장 넘기는 소리가 점차 아득해졌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건지 궁금한데."

기척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뜨는 루시퍼 앞에 사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다른 데선 철저히 무관심하던 사탄이 루시퍼가 끝마치는 순간만큼은 기다렸다는 듯 잘 잡아내는 것이 기묘하다.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루시퍼를 묵묵히 묶던 그가 이 서재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가이드한테 본능같은 게 어딨다고."

은근하게 속을 긁는 그 언행에 익숙한 사탄은 말을 더 잇지 않고 루시퍼의 손목에 수갑을 채워 마무리한다. 사탄의 손이 어쩔 도리 없이 슬쩍슬쩍 닿는데도 인내심을 가진 태연자약한 모습인 루시퍼는 찰각, 하고 경쾌한 금속음이 들리자 앞의 사탄을 꼿꼿이 바라봤다. 보란 듯한 눈빛은 사탄에게도 아직은 불쾌해서 표정을 조금 찌푸리게 되고, 그 얼굴을 시야에서 치우기 위해 바로 그 루시퍼를 품에 안는다. 기분 나쁘게도 사탄의 목가에 와닿는 루시퍼의 숨이 뜨겁다. 숨 쉬지 마. 일부러 고개 처들어 벽을 보는 사탄이 한 마디 툭 던지면 루시퍼는 얼굴을 사탄의 맨 어깨에 파묻는다. 쯧, 사탄의 입술이 가늘게 비틀어졌다. 그럼 죽으란 말인가? 어절마다 또 더운 숨이 나오고 숨기지 못한 한숨이 딸려나와 피부를 덥힌다. 사탄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무감각할 동안 자신의 살갗에 접촉하며 열을 식힐 루시퍼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한다. 죽으면 좋고. 그런 말을 웅얼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팔이 단단히 루시퍼에게 감겨 있었다.

사탄은 루시퍼가 신호를 줬을 때에야 몸을 떼어낼 수 있었다. 영 불만족스러운 조건이었지만 이미 루시퍼가 불리한 점을 너무 많이 가져갔으니 항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 몸을 깎아가며 능력을 쓰고, 그러고는 겨우 의자에 묶여서 평소처럼 싸맨 옷 너머 드러난 만큼만의 접촉을 받고. 그런 거 그냥 그만두지 그래. 사탄이 별것 아니라는 투로 던졌을 때 루시퍼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그 열기가 사탄에게까지 전해져와 속이 타들어가서 두어 걸음을 비틀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디아볼로를 위해서라는 이어진 말은 뻔하디 뻔한 답이라 진절머리가 나. 자신 생각은 조금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루시퍼의 눈을 뒤로 하고 사탄은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몸을 다 바쳐 충성하는 것도 끝까지 가네, 그 따위의 조소 섞인 혼잣말이나 내뱉어대며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밀어냈었다. 이제 와서 필요한 척은.

사탄이 거절하고 떠난 날 이후에도 루시퍼는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씩 피로한 모습으로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나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를 떴고, 매번 루시퍼 스스로 방문을 걸어잠근 후의 문 너머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사탄을 설득하러 나선 바르바토스의 말로는 자기 힘을 써가면서 적정선의 폭주를 유지해가고 있더랬다. 참을 수 있다니 내버려둬도 되잖아. 바라보는 바르바토스의 눈 안에 무신경한 사탄의 표정이 담겼다. 왜인지 몰라도 한 점 일그러지지 않는 그의 낯빛이 마음에 들었다. 별다른 말 없이 사탄을 물끄러미 보던 바르바토스는 나지막히 발음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의외군요. 그 말이 그에게는 루시퍼의 진노와 같다는 걸 아니까 자못 즐거웠다. 자신의 데빌덤보다 루시퍼의 데빌덤을 부수는 일이 사탄에게 기쁜 일이었다. 그리 넘겼던 며칠 후였다, 루시퍼를 발견한 건.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겁없이 비탄의 집House of Lamentation을 누비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에 시선을 고정하고, 혹여 누가 해를 가할까 쫓다 보니 평소에 사탄이 가지 않는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공용화장실 안의 불빛이 열린 문 너머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둑한 복도를 파열하는 주광색 빛이 비춘다. 이지러지는 소음은 흐느끼는 소리같기도 하고, 신음하는 소리같기도 하고. 사탄의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아스모였다. 무슨 볼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없는 그 화장실 안에서 난처히 서 있는 아스모의 시선이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바닥에 내려앉아 있다. 사탄은 몇 걸음 앞으로 옮긴다. 아스모 앞에 너절하게 널브러진 검은 더미가 있다. 집어삼켜질 것처럼 크고 더 깊은 지하로 꺼져버릴 것처럼 보잘것 없는 더미다. 사탄의 발이 문가를 밟는다. 아스모가 고개를 들어 사탄을 보고,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울음을 참는다. 사탄. 무언가 무너져 정처를 잃은 아스모는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하다. 사탄. 루시퍼가...

사탄은 아스모 발가에 쓰러져있다시피한 루시퍼에게 시선을 준다. 아스모가 주춤거리며 발을 빼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것이 바닥에 얼굴을 처박는다. 그것의 몸을 감싼 망토의 옷감과 삐져나온 모피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위엄있게 넓은 어깨에 걸려있던 그 천이 구겨져서는 화장실 바닥에 웅크려 벌벌 떠는 주인을 형편없이 덮고 있다. 사정을 모르는 아스모는 당황했겠지. 엄격하고 믿음직한 장남이 제 발 앞에서 쓰러져선 벌벌 기다니.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루시퍼가 몸을 뒤척인다. 죽어가면서도 꼴사납게 참고 있네. 사탄의 발 위로 망토 끄트머리가 덮였다. 조금 발을 옆으로 치우자니 그 때 루시퍼가 제 앞에 선 것이 사탄이라 인식한 것 같다. 옷 속에 숨겨 드러나지 않던 손이 느리게 뻗어나오더니 사탄의 발목을 잡는다. 혼자 발버둥친 흔적인지 붉게 긁힌 상처가 어지러운 손은 몇 번이고 놓쳐가며 사탄의 바지 끝을 말아올리더니, 기어이 맨 발목에 제 손가락을 감았다. 평소같았다면 저속한 농담을 했을 아스모가 뒤로 물러난 채 작게 윽, 하는 소리를 냈다. 사탄은 그 꼴을 보고 기이하도록 기분이 좋아졌어야 할 터인데. 벗겨진 발목에 뜨거운 땀이 찬다. 사탄의 입꼬리가 알 듯 모를 듯하게 일그러지지만 그의 표정은 무無에 가깝다. 이런 감정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지. 분노도 기쁨도 아닌. 이상하게 꺼려지는 기분에 사탄은 텅 빈 채로 루시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루시퍼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욕설을 짓씹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사탄이 그날 이후 처음 루시퍼의 서재에 갔을 때에는 루시퍼는 그 때의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탄도 굳이 그 모습을 머릿속에 끄집어내지 않았다. 디아볼로가 사탄에게 지시한 내용은 간단했다. 루시퍼가 호출하면 그의 서재에 가서 문을 반드시 잠글 것. 사탄이 잠시 헤매자 지켜보던 루시퍼가 서재를 잠그는 법을 일러준다. 달칵. 이로써 루시퍼가 날뛰더라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겠지. 능력을 다 쓸 때까지 대기하고, 의자에 구속한 후 접촉해 가라앉힐 것. 접촉해 가라앉힌다니 무슨 뜻이야, 루시퍼? 다소 회의적으로 묻는 사탄을 무시하고 루시퍼가 책상 서랍의 열쇠를 건네준다. 제일 아래칸. 답을 기대하지 않은 사탄이 연 그 서랍에는 밧줄과 수갑이 가지런히 들어있다. 꼭 인간을 벌하는 도구라도 되는 것 같다. 폭력적으로 단순하고 튼튼한 의자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는 모양새도 고문의 그것처럼 보이고. 피식 웃음이 샌 사탄은 가만히 서서 루시퍼를 응시한다. 이미 눈을 감은 채 별로 궁금하지 않은 능력을 쓰고 있다는 모습은 예상 외로 평온했다. 눈을 붙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잠든 거라면 깨워버리고 싶지만 부쩍 파리해진 안색에는 질 나쁜 장난을 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미동 없는 루시퍼를 뚫어져라 본다. 새하얗게 질린 손가락들이 일순 선하고 아리게 사탄에게 떠올라 시선을 돌려 떨쳐내야 한다. 나답지 않네, 그리 생각하며 자리서 일어나는 사탄의 움직임 가볍지만도 않다. 루시퍼의 서재에 책이 가득 차있다는 것이, 루시퍼에게 등을 돌려 멀어질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게 새삼 고마워졌다. 그 덕분일까. 멋대로 책을 찾아 훑어보기도 하며 시간을 때우던 와중 예상보다 빨리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약간 열이 오른 듯하지만 멀쩡한 루시퍼가 짜증이 담긴 눈으로 사탄을 향하고 있었다.

"귀찮은데 구속이 꼭 필요한 건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가, 다른 점 없는 루시퍼의 모습에 사탄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밧줄을 집어들었다. 어깨 너머로 조금 화난 듯한 음성이 돌아온다.

"네 능력치를 고려해 디아볼로와 의논해서 정한 방식이다. 불평하지 마."

허. 짧은 한숨을 뱉지만 따지기에도 진저리가 난 사탄이 아무렇지 않은 척 뒤를 돌았다. 꽉 묶어버릴테니까 각오하고. 진심 담뿍 담은 말 무색하지 않게 사탄이 첫 매듭을 강하게 묶었다. 루시퍼의 몸 너머 묶는 손을 더 잘 보려 고개를 뻗는 순간 루시퍼가 짤막하게 목을 가다듬는다. 너무 강했나, 풀어줄까 따위의 말을 던지려 돌린 시선 끝에는 사탄의 맨살과 살짝 맞닿은 루시퍼의 얼굴이 있다.

"와. 구역질 나."

"알고 있어."

냉소적으로 답하는 루시퍼 역시 굳건히 아무것도 없는 정면으로 얼굴을 고정한 채다. 앞으로 내밀지도 뒤로 기울지도 않고 굳은 그의 얼굴은 사탄이 살짝 몸을 뺄 때까지 굳어있다. 그렇겠지, 그야 그렇겠지. 사탄은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구속을 끝마쳤다.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서 감상한 루시퍼는 영락없이 의자에 갇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다수의 구속 경험이 있는 루시퍼에게는 불만족스러운지, 무언가 할말이 있는 표정이었다가 곧 입을 다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지만 둘 다 이제 무엇이 남아있는지 잘 알고있는 바다. 지체하기가 더 싫은 사탄이 대뜸 다가선다. 손은 등받침대 뒤로 묶어둔 탓에 만지기가 쉽지 않고, 뜸을 들이던 사탄의 손이 별 수 없이 루시퍼의 목을 감았다. 선 채로 목만 잡아서야 목 조르는 것과 진배없으니 몸이 가까워진다. 손길이 천천히 턱을 쓸자 루시퍼가 참아온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사탄이 서적을 찾아 읽어본 대로라면 이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그 말마따나 루시퍼가 묶인 몸을 짧게 떨었다. 그러나 이 이상이라니. 관성으로 루시퍼를 쓰다듬는 손바닥에 서서히 끈적한 땀이 묻는다.

"계속 이러고 있기도 곤란한데."

루시퍼가 고집스럽게 사탄과 시선을 맞춘다.

"키스해, 지금."

즉각 불만스럽게 사탄의 눈매가 더러워지고 역겨워하는 티가 스친다. 하지만 사탄도 어리석지 않으니 주저는 짧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다 다잡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그대로 입을 맞춘다. 열을 품은 얇은 피부의 살이 생생히 느껴지고, 둘의 시선이 마주쳐 엮였다가 서둘러 풀기를 반복한다. 땀인지 무엇인지 불분명한 액체에 연신 미끄러져 파고드는 입술, 살짝 입새 벌어지면 달라붙는 더운 숨마다 사탄이 마뜩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이깟 걸로 루시퍼는 만족하는 거겠지. 스믈스믈 기어들어오는 그 생각이 시끄럽게 울리는 난잡한 음보다 거슬린다. 기분 나쁘다. 루시퍼가 속도를 맞춰오는 게 더 기분 나빠. 어째서 조급해하지 않는 거야. 흘러내린 머리칼을 사탄이 짜증스럽게 넘겼다. 그 탓에 잠시 떼어지니 루시퍼도 보채지 않고 멈췄다. 의연한 안면이다. 키스하라느니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찡그리며 사탄이 서서히 얼굴을 뗀다. 노려봐도 루시퍼의 표정은 바뀌지 않는다. 아예 사탄은 자리에서 일어나버린다. 그제사 루시퍼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확실히 이게 빠르군."

"나라면 입을 열자마자 토했을 것 같은데, 잘도 말하네."

"그럼 토하러 가게 풀어주지 그래."

열기 가신 얼굴의 루시퍼가 초연히 되받아치는 꼴을 보자니 그대로 자리를 떠버릴까 고민했지만 사탄은 또 한 번 꾹 참은 후 의자 뒤로 돌아갔다. 몸이 맞닿는 짓거리는 우연이라도 당장은 피하고 싶었다. 루시퍼는 줄을 모두 풀어낼 때까지 묶인 대로의 자세를 유지하더니 제딴의 기품을 지켜 일어나 책상 위의 컵을 집는다. 거기에 부러 관심 기울이지 않는 채로 사탄은 열린 서랍에 구속구를 던져넣었다.

"거칠게 굴지 마." 역시나 눈길 하나 안 주고 물을 마시는 루시퍼가 툭 던진다.

"그럼 아까처럼 부드럽게 해줄까?"

기묘히 비틀린 미소는 가히 악마 중의 악마라 할 수 있으리라.

그날 문을 나선 이후 사탄에게는 몇 가지의 고역이 찾아들었다. 하나를 꼽자면 당연하게도 루시퍼를 대면하는 일이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식사 시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면면을 마주하고 앉은 채 게워내지 않도록 신경 쓰며 입으로 무언가를 넣어야 할 터였다. 더군다나 최근 사탄은 우연히 루시퍼를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복도에서는 물론 방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 루시퍼를 발견하거나 가는 방향이 겹치는 불상사가 사탄의 마음을 불편하게 콕콕 찔러댔다. 루시퍼가 의도하지 않은 거라면 하늘은 어찌 자신에게 이리 매정하단 말인가. 자신은 몰라도 루시퍼 정도는 미카엘이 좀 도와줘야 되는 게 아닌가. 루시퍼도 이런 연속된 만남을 마다하고 싶을 것이 분명했지만, 마주칠 때마다 그의 표정은 아리송했다. 사탄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나만 이러나.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하루를 꼬박 새보기도 했지만 원체 인사이드 파인 사탄 역시 타의로 못 나가는 상황은 내키지 않았다. 줄글을 읽어내려가다 책 너머 방문을 흘끔거리는 것이, 더 명확히 하자면 왜 방에서 나오지 않는지 수군거리는 누군가나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은 루시퍼 생각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증났다. 죄를 지었는가, 그깟 얄팍한 동정심과 책임감으로 요구에 응했기서로니 이후의 찝찝한 마음까지 담아두고 있어야 할 의무 있을리 없다. 사탄이 책을 확 덮었다. 형제들에 얼굴 못 드는 것은 내가 아니라 루시퍼여야지. 그런 결론으로 사탄은 제 머릿속 잡생각을 죄다 욱여넣고 맺어버렸다. 그 생각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들여다보기도 전에였다.

사탄이 다음 날 아침식사 자리에 나타났을 때, 우연인지 불행인지 식탁에 앉은 것은 루시퍼와 아스모 뿐이었다. 역시 신의 가호 따위는 없네. 지옥이니 당연하군.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아스모의 눈이 재빨리 흔적 좇아 사탄을 바라봤다. 꼭 당장 죽고 싶기라도 한 표정이었다. 사탄이 적당히 떨어져있으면서도 둘을 일부러 피하는 것 같지는 않은 위치에 착석하기가 무섭게, 아스모는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썰렁한 식당에 식기 잘그락대는 소리만 미약했다. 버티자. 왜 아직 없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형제들이 올 때까지만 버티자. 그 외에는 무념무상인 사탄의 시선이 떠돌다 루시퍼 언저리에 닿았다. 사탄에 전혀 관심 두지 않고 접시만 묵묵히 바라보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랜 시간 쌓고 다져온 프라이드는 겨우 이런 일에 금 가지 않는다는 걸까. 의미 없는 숟가락질이 이어질 때쯤 루시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제는 왜 방에서 나오지 않은 거지."

"... ...주말이잖아."

"그렇군. 아픈 줄 알았다만. 혹시 오늘이라도 아프다면 바로 일정 중단하고 방에서 쉬도록 해."

"루시퍼야말로 아파서 어디가 이상해진 거 아냐? 걱정같은 걸 다 하고."

"이제 네가 필요하니까."

조소 섞인 물음을 귓등으로 흘린 루시퍼가 말 마치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옷자락이 굳은 사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시야에서 루시퍼가 사라지고, 뒤늦게 사탄 짜증스레 내뱉는다. 그거 잘됐네.

견뎌내야 할 성가신 과제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이어졌다. 주로 주말 저녁, 산책을 하거나 창문을 열어두고 책을 읽던 자유시간을 들어내고는 루시퍼의 서재로 향하는 사탄의 기분은 말할 것도 없이 끔찍했다. 언제까지 해야하는 건데. 아무 감흥 없이 어루만져지는 루시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간략한 답만 내놓았다. 내 손길에 정신 팔려서는.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어도 그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혹은 더 이상 거기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루시퍼는 더 자주 키스를 갈구했다. 입술을 문대는 일이 매번에서 항상 두 번으로 늘어갔다. 몇 초에서 먼저 떼었던 그의 시선이 떨어져나가는 사탄의 구순에 머무르다 툭 떨궈졌다. 끝나고 나면 눈을 꾸욱 감았다가 뜨는 것이 어느 새 비집고 들어온 습관이었다. 그럼에도 사탄은 부족하느냔 질문을 미룬다. 사실 사탄에게는 무미건조한 키스를, 열기 오른 루시퍼의 몸을 견뎌내는 것만으로 힘이 부친다.

꼭 두 달이 지난 후, 그 날엔 여느 때처럼 열쇠를 집는 사탄을 루시퍼가 저지했다.

"그것 말고. 책상에 올려둔 걸 써. 오늘은 하기에 앞서 묶어두는 게 좋겠군."

서랍에 가던 시선 거둬 책상 위를 본다. 정갈히 정리된 어두운 색의 책상 위 굵고 투박한 철제 구속구가 늘어져 있다. 두꺼운 쇠사슬에 한없이 새겨진 긁힌 자욱마다 굴절하는 빛이 찰그락댈 때마다 번쩍인다. 사탄이 집어들자 그의 손목을 타고 차가움이 묵직하게 흘러내린다. 루시퍼는 일언반구 없이 정면만을 응시하며 기다리고 있는 듯싶다. 사탄 역시 토를 달지 않고 그 구속구를 들어 천천히 루시퍼의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정말 고문이라도 할 것같은 모양새다. 손목에 쇳덩이를 달아도 루시퍼의 기다란 손에는 미동이 없고, 꽉 묶인 가슴팍도 답답한 기색 보이지 않는다. 사탄이 구속을 끝내고 그는 사지를 두어 번 흔들어 혼자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신뢰받지 않는다는 거야 알고 있었지만. 사탄은 다소 비딱한 자세로 완전히 결박당한 루시퍼를 아니꼽게 감상하고는 푹신한 책상 의자에 털썩 앉는다.

그새 편안해졌는지 깜박 졸았던가. 사탄이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루시퍼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때였다. 아직 돌아오고 있는 몽롱한 머릿속을 루시퍼가 다급히 부르는 제 이름이 짓쑤셔 깨운다. 맞다, 다급했다. 숨기려는 태가 역력했지만 떨리는 호흡과 낮아진 참을성으로 연이어 발음하는 것만으로 사탄은 알 수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사탄이 루시퍼 곁으로 다가가 타이르려는데 그제서야 적확히 목격한 루시퍼의 상태가 예상을 빗겨가고 있다. 내가 정확히 몇 분동안 루시퍼를 방치한 거지? 젖어 갈라진 머리칼 아래로 땀방울이 주륵 흘러내리고, 힘줄이 낱낱이 도드라진 손등에 세운 손가락은 길쭉해 거미의 손 같다. 사탄이 가까워지자 구속을 까먹은 듯 그답지 않게 몸을 뒤틀어대기도 한다. 사탄은 손을 내어 루시퍼의 이마 위 옅게 드러나다 만 무늬를 문질렀다. 이것도 도중에 참아낸 모양이다, 루시퍼는. 불만스러운 숨소리가 즉각 섞여온다. 무엇을 누르려 하는 건지 한동안 사탄의 손짓이 불만족스러운 대로 가만히 있다가도 그 작태에 인상 쓴 루시퍼가 결국 다시 목소리를 냈다.

"헐거워진 것 같은데 더 꽉 묶어. 서랍에서 수갑을... 아예 의자를 벽에 박아버리는 것이 나은가. 더 묶어. 어서..."

분명히 단단히 묶여있는데 조바심을 내고 있다. 의자가 바닥에 쓸리고 덜컹일 때마다 쇠사슬이 차라락 소음을 자아내지만 루시퍼는 여전히 사탄의 아래서 꼼짝을 못하고 있단 말이다. 그리 걱정된다면 몸을 움찔이지 않으면 될 것을. 사탄이 루시퍼의 양허벅지를 무릎으로 꽈악 짓눌러 섰다. 동시에 그의 가슴을 밀어 등받이에 밀착시키니 움직임이 준다. 그러나 살갗이 닿지 않는 이상 임시방편인지라 루시퍼는 나아질 기미가 없고 자꾸만 불안한 눈빛이다. 그의 턱이 바르르 떨어 어금니를 악물고 사탄이 누른 허벅지 아래 근육이 바르작거린다.

"옷을... 옷을 벗어라, 사탄. 내 옷은 찢을 수 있겠지... ...아니,"

루시퍼가 욕설로 들리는 말로 앞의 발언을 취소하지만 애초에 횡설수설하며 입을 열었기에 사탄 개의치 않는다. 대신 평소와 같이 스킨쉽을 해보지만 그것마저 루시퍼의 관심을 돌릴 순 없어 보였다. 가쁜 숨이 잔잔해지기 무섭게 차오르는 것이 반복될수록 미약한 공포의 감정이 사탄에게 엄습했다. 왜 이러지. 가라앉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루시퍼와 사탄의 시선이 일순 맞닿는다. 루시퍼의 입술이 달싹이고, 그것을 읽자마자 초점을 잃는 루시퍼의 눈. 미안하다.

이성을 잃은 타천사의 눈자위는 짐승과 같다. 들숨과 날숨을 할 뿐인데 거친 목청이 이전의 그것이 아니다. 막아줄 것 없이 바람을 가르고 펴지는, 감히 천사의 것을 모방한 날개가 사탄 위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새까만 깃털이 나부껴 추락한다. 샛별과 같은 권능의 악마 루시퍼는 주체치 못하는 형형한 동공에도 아득하도록 암흑이고, 그의 자식 사탄 앞에서 추악하고 무력하도록 강력하다. 그의 젖은 머리카락을 헤치고 돋아난 길게 말린 뿔이야말로 뽑아낼 수 없는 짐승의 표식이겠지. 제가 지니게 된 그까짓 능력을 참고 참다 제어하지 못해서 현신하는 금수.

몇 번 목도한 적 있는 익숙한 광경에도 사탄은 말을 잃는다. 당황해 멍하니 있는 것에 가깝다. 제정신이 아닌 루시퍼는 이런 모습이군. 함부로 누르고 있었던 무릎이 기운에 밀려 사탄은 삽시간에 바닥에 주저앉게 된다. 역시 여태껏 봐주고 있었던 거다. 사탄이 아픈 줄 모르고 서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시선은 루시퍼의 얼굴에 고정한 채다. 기립한 사탄의 눈높이는 루시퍼보다 높지만 올려다보는 루시퍼를 내려다볼 수 없고. 사탄은 한 발짝 다가선다. 침을 삼킨다.

"씨발... 이거지."

사탄은 루시퍼의 턱을 쥐어잡아 마침내 그를 내려다본다. 뜨겁고 끈적이는 얼굴이 손 안에 담기게 고쳐 잡고는 지체 없이 입맞춤을 한다. 사탄이 입술을 맞물리면 피할 것 없이 루시퍼가 연한 살을 엉겨오고 데일 것 같은 숨이 그대로 입 속 가득 불어져 왔다. 사탄의 입가에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키스였다. 그 너머는 비어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사탄만을 봐오는 눈으로 혀를 얽으면 얽히고 입술을 머금으면 머금어지는 루시퍼는 제 손 안에 있다. 

"감히 네가,"

고개 쳐들어오는 루시퍼를 두고 사탄이 닿을락 말락 입술을 뗐다,

"멋대로,"

질척한 키스 소리가 사탄의 거친 숨과 섞이지만 사탄의 목소리 떨리더라도 분명하다,

"나를 위해 참아준다느니 억제해준다느니..."

다시 입을 짧게 맞췄다 뒤로 빼는 사탄이야말로 키스하고 싶은 마음이나 소리내어 웃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으로 보이지만,

"좆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말이지."

아무리 봐도 비웃음으로 들리는 짤막한 웃음 흐른다. 오로지 사탄을 위해 열린 문에서 더운 기운이 쏟아져 그를 감싸고 호흡이 가쁘도록 육신을 옥죄는 사랑스러운 루시퍼는 껍데기뿐만으로 연이은 다음 단계만을 갈구해. 이토록 원초적인 기쁨이라니. 사탄은 실로 오랜만에 자신이 된다. 달아오른 공기 중 어지러운 머리에서 살아나는 본능은 조금 따가운 것 같기도 하고. 루시퍼의 얼굴을 감싼 사탄의 손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이 질질 흘러선 루시퍼의 것과 합해져 작은 웅덩이를 이룬다. 하, 하하. 실없는 웃음마저 둔탁한 숨에 막혀 나아가지 않는다. 축축한 손바닥 루시퍼의 목에 감고, 이내 손이 떨어져나갈 것 같아 루시퍼를 양팔 가득 안아본다.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피부에 입술을 깨물며 접촉하고 지분댄다. 살가죽 아래 으르렁대는 소리 울리는 루시퍼를 품에 가두고 있자니 심장이 멎어도 이상치 않다. 드문드문 아득해졌다 끌려오는 정신 탓에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놔. 사탄. 당장 놔. 떨어져. 끓어오르는 한숨 토해내며 사탄이 몸을 루시퍼에게 완전히 기댔다. 그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일직선으로 났다. 놓을 수 없었다. 감싸쥐고 어루만져도 자꾸만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는 사탄의 손을, 몸을 지칠 줄 모르고 열기를 뿜는 루시퍼로 계속 덥혀야만 했다. 루시퍼는 열을 식히고 사탄은 달아오르도록. 땀이 흘러들어가 사탄이 눈을 연거푸 감았다 떴다. 조절할 줄 모르는 루시퍼의 모습은 너무도 정직해서 어린 아이처럼 달래야할 것 같다. 

"그렇지... 진작에 이렇게 해줬어야지."

착하지, 루시퍼.

"머리 좀 식혀, 화내지 말고. 여기 네 쓰레기통이 왔잖아. 네 분노나 받아내는."

사탄이 루시퍼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다. 젖은 손으로 쥔 무겁고 반지르르한 구속구가 몇 번이고 미끄러진다. 차갑고 냉정한 수갑은 이제 필요하지 않아. 어서 끊어내고 따스한 루시퍼를 만지고 싶은 조바심이 나서 사탄의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분명 제가 만든 매듭인데도 기억이 나지 않고 왜 이리 강하게 묶여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팔을 더 뻗으려 루시퍼의 가슴을 압박하면 제 가슴이 먼저 눌려서 기침을 하게 되는데도 구태여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며 하나하나 풀어간다. 죄어드는 것이 제거될수록 루시퍼의 움직임이 격해져갔다. 오랫동안 목줄이 매여 있던 짐승이 본능적으로 제가 자유가 될 것을 아는 것처럼, 철그렁 하고 사슬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음마다 격하게 반응한다. 그렇게 마지막 쇳덩이가 루시퍼의 몸을 떠나고, 마지막 힘을 모아 사탄이 뒤로 물러선다.

서 있다고 확신했는데. 일이 초의 상황 파악도 없이 루시퍼가 달려들었다. 몸 구석구석 루시퍼의 존재가 무겁게 스며들어댄다. 쾅, 사탄이 바닥에 넘어지는 소리를 뒤따라 엎어지는 루시퍼의 망토가 덮어버렸다. 시야가 까맣고 힘이 빠졌다. 피로 물든 손가락들이 사탄의 몸을 더듬는 것만이 흐릿하게 감각되는 도중, 갑자기 손길이 뚝 그친다. 사탄이 감겨가던 눈 떴다.

"...망쳐."

망쳐지고 있던 건 이쪽인데. 사탄이 없는 집중력 끌어모아 희미한 루시퍼의 음성에 주목한다. 핏방울이 맺히고 음절이 간신히 발음되는데도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도망쳐."

"뭐?"

겨우 정신 다잡아 듣게 된 것이 기대치 않은 말이라니. 기운이 빠져 사탄이 옅게 웃었다. 루시퍼는 그런 사탄의 모습에 매우 언짢아진 모양이었다.

"사리분별이 안 될 정도로 멍청하지 않잖아. 실망이다, 사탄."

달리는 힘으로 꾸역꾸역 사탄의 이름까지 부른 루시퍼는, 무언가에 거스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찡그린 얼굴로 사탄을 밀쳐냈다. 힘을 잃은 몸들이 나뒹굴고 볼품없는 철퍼덕 소리가 울린다. 밀쳐진 것은 사탄인데도 루시퍼가 도리어 앓는 신음을 한다. 대자로 누워 시선 천장을 향하게 된 사탄은 이제서야 폐부에 깊숙하고 시원하게 들어오는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며 윗몸을 일으킨다. 짚은 팔이 후들거리지만 아랑곳 않고 도로 루시퍼의 곁으로 돌아가는 사탄.

"네 실망이 나한테 뭐라도 되는 것 같아? 네가 더 멍청한걸, 루시퍼."

그러고 마지막으로 사탄은 두 손 내어 누워있는 루시퍼의 목을 감싸고 쓰러지듯 입술을 맞댄다. 막 맛봤던 살 것같은 일탈을 뒤로하고 길게 늘어지는 타액을 혈액처럼 흘려보내며 피맛이 나는 키스를 한 번, 두 번. 항상 굳게 다물려 비틀어져 있던 악랄한 입술을 열어, 다 죽어가는 주제에 질척한 심연에서 건져낸 끈적이는 주권을 좋다고 쥐고 마음가는 대로 희롱한다. 연속하는 키스의 소음이 헐떡이는 숨을 잇달아 조각내도록 놓지를 않아. 날카롭게 속을 쑤시는 혀가 남아있는 숨을 박박 긁어내게 내버려두는 사탄은 그 짧고 황홀한 시간에 어찌할 바 모르고 키스를 받아내고만 있는 루시퍼보다 배로 자애롭다. 루시퍼의 머리가 맑아질수록 그는 오가는 숨 중에 자신에게 오는 숨이 엷어짐을 퍼뜩 알아차리고, 누군가를 해치지 않을 만큼 가라앉은 힘으로 손을 움직여 사탄의 등에 얹었다. 열기와 차가움이 산란하는 몸이 호흡하지 않아 고저의 차이가 없다. 사탄. 열감기를 앓고 난 목소리가 갈라지지만 루시퍼 스스로 회복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루시퍼는 제 몸을 덮고있다시피한 사탄을 뒤집는다. 고개가 힘없이 젖혀진다. 사탄. 목소리에 실린 힘만큼 사탄의 어깨를 잡고 깨우고 싶지만 한 번이라도 더 만졌다가 실낱같은 기회를 놓쳐버릴까 주먹만 쥔다. 참으면, 참으면 되겠지. 어질한 머리로도 루시퍼는 아직 분출되지 않은 것을 꽉 붙들어 맸다. 시야가 일렁였다. 제가 탄생시킨 것을 끝내 죽여놓은 광경을 마주하는 시야가 낭자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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