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은영해준 / 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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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몸살은 밀물처럼 손끝 하나하나까지 스며들었다. 처음엔 괜찮은 듯하다가, 먹잇감인지 아닌지 찔러보고는 삽시간에 잠식하는 무력감. 강하게 죄어드는 이 의지가, 이끄는 몸뚱이가 자꾸 발목을 잡는다. 쓰러져라, 쓰러져. 뒤늦게 감각하는 열기가 몽롱한 정신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고해준이 딱 싫어하는 기분이었다. 부유하는 의식, 헛것, 불분명한 사고. 고온에 눈앞 흐렸다. 몸도 쿡쿡 쑤셨다. 평범한 몸살이겠지.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해준이 발을 흙바닥에 질질 끌었다. 풀뿌리나 작은 돌부리에도 몸의 근간이 흔들렸다. 쨍한 햇살이 우거진 나무를 헤집고 별뉘로 얼굴에 얼룩졌다. 그래도 이 녀석은 간단한 것이, 급습하는 대개의 환각들은 몇 시간 눈을 감고 있으면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덮어두고 잠으로 해결되길 바랄 뿐이었다. 우직하고도 값싼 해결이었다.

녹슬었는지 어쨌는지, 오래된 집의 나무 문은 오늘따라 삐걱대기만 했다. 열쇠가 돌아간 것을 보면 열리긴 열린 것인데. 망할 거, 왜 이리 안 돼. 힘 들어가지 않는 손에서 문고리는 매번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자꾸 쥐는 땀이 마찰열이라도 있는 양 달아올랐다. 해준은 문고리를 단단히 잡고 몸을 문에 기울여 무게중심을 옮겼다. 볼을 갖다 댄 문에 열기가 퍼지고, 두 번째로 힘을 주자 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단숨에 벌컥 열렸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해준의 몸이 나자빠지듯 안으로 넘어진다. 둔해진 머리 탓인지 세상 천천히 떨어지고, 부엌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기울어졌다. 그러다 툭, 늘어지는 해준의 몸이 안정적으로 안착했다. 인지하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와, 무슨 일인가 와봤더니. 문 부숴?"

해준의 시야에 은영이 내려다보는 모습 들어왔다. 애초에 학교에 안 가기라도 한 건지 평일 열두 시에 사복 차림인 은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해준을 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정확히 하자면 해준의 쓰러지는 몸이 자신을 강타하지 않도록 팔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 파악한 해준이 은영 뿌리치고 정자세로 선다. 수초 전만 해도 잃었던 중심은 탄력 잃은 해준에 곧바로 돌아올 리 없고, 발 꼬여 비틀거리는 꼴에도 둘 다 태연한 척을 한다. 말없이 계단에 발 올리는 해준 뒤를 은영이 뒤따르며 한마디 덧붙인다.

"몸도 뜨끈뜨끈하네."

"아프니까."

"아하."

뭘 기대해 봤자였지. 일말의 예의랄 것도 없는 건조한 감탄사에까지 쏟아줄 관심은 없었다. 한 계단 오르면 균형을 잡으려 발에 힘을 주어야 했으니. 그 대신 바삭바삭, 해준의 신경을 긁는 소리가 뒤따라왔다. 미간이 맥없이 찌푸려졌다가 풀어졌다. 무시한 채 걸음 질질 끌어 제 방으로 향하는 해준이다. 끼익끼익, 바삭바삭. 이 좆같은 집에는 무슨 소리가 이리 많은지. 해준의 앞을 가로막은 건 또 다른 문이다. 그가 본인 문과 사투하는 걸 은영은 벽에 기대어 똑같은 얼굴로 구경한다. 관성적으로 과자봉지에 손을 넣고, 입으로 가져가면 또 그 개같은 소리로 경쾌하게 바사삭. 은영의 눈이 동그랗다. 머리를 거진 박은 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문을 연 해준이 그대로 고개 돌려 그 얼굴을 경멸한다. 왜 따라와, 내지는 무슨 볼일이라도 있느냐는 물음이 은영의 악의적이기까지 할 지경의 표정에 이리저리 부딪혀 까끄랍게 튈 듯하다. 열 탓에 붉게 이그러지는 해준의 시선, 의도 없이 찡그린 눈가 위 땀이 흘러내린다.

"그만 처먹어, 씹..."

부르튼 입술이 쏘아붙이고 해준의 양발은 알 것 없다는 듯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마지막 정신을 패대기친다.

눈을 뜬 것은 해준의 염원에도 불행히 햇빛이 내리쬐는 오후경이다. 몸은, 흠뻑 젖은 몸은 매트리스에 처박혀 이불 하나 젖히는데도 곱절의 노력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러고나면 막아둔 한기가 그를 덮쳐서, 햇빛이 서늘해지고 순식간에 해가 졌다. 해준의 정신이 오싹해졌다. 아프고 나면 또 그는 졌다. 걸어온 적 없는 승부에서 온전한 해준을 갉아먹는 귀신은 차라리 머릿속의 환시라 믿는 편이 좋았지만, 그렇게 그는 차차 병이 들었다. 이 몸살은 그것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열을 내뿜는 목덜미가 축축하고 가려웠다. 벅벅, 긁고 긁다 보면 손톱이 닳고 피가 날 것만 같았다. 벅벅벅, 생각이 아파 신체를 아프게 하는 소리에서 기원한 아프게 하는 생각... 소용돌이치고 또 소용돌이쳤다. 귓가가 지나치게 소란하다. 그만하고 싶은데. 그만. 내뻗는 팔. 휘젓는 손끝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 대신 바닥을 훑는다. 번뜩하고 미지근한 물병이 감각된다. 부여잡고 들어 올리니 비로소 현실이 느껴졌다. 해준은 진정되진 않았지만 숨을 골랐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반절쯤 남은 생수병이다.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물 뚜껑을 따 입에 가져다 대 마시는 행위에 집중을 해본다.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위안이 되었다. 바닥을 비울 때까지 정신을 잡아두는 연습을 한다. 주황빛 햇살이 침대가에 다시금 슬그머니 파고든다. 숨이 트인다. 그래도 몸살은 전혀 낫지를 않았다.

들입다 문이 열린 것이 그때다. 겨우 정신을 차린 해준이 들이닥친 은영에 시선을 맞췄다. 반면 은영은 해준을 한 번 쓱 봤다가, 해준의 손으로 눈길 옮겨갔다.

"어," 은영의 표정은 기이하게도 득의양양에 가깝다. "그거 내 물인데."

"그거밖에 안 보이냐?"

해준의 목소리 기다렸다는 듯 날선 채 튀어나간다. 은영이 잠시 뜸을 둔다.

"그러면?"

장시간의 침묵. 해준 힘겹게 눈 감고 마지못해 응수한다. 지갑에서 물값 팔백 원 꺼내가라. 가방에 있으니까. 대치해봤자 좋을 거 없고 얼른 가라는 식이다. 그러나 해준의 예상과 달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눈을 뜨니 그대로 그를 쳐다보고 있는 은영.

"아, 그래?"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야 은영 해준의 가방을 집어 든다. 지갑을 꺼내 보여주듯 하나씩 동전을 세서 가져가는 모습이 작위적이기 이를 데 없다.

"근데 겁도 없다? 나 같은 새끼한테 가방 손대라 하고."

툭, 은영이 바닥에 가방과 지갑 떨어뜨린다. 그대로 문을 쾅 닫고 사라지는 은영의 뒷모습 해준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불현듯 쓰러질 것처럼 침대서 내려와 가방에 손을 뻗는다. 지갑. 지갑에는 동전 몇 개 빈 것 빼곤 달라진 것 없다. 그다음은 가방. 해준이 분주히 가방을 뒤졌다. 참고서, 이어폰, 필통... ...아. 손가락들이 앞주머니를 휘젓는다. 분명 여기다 뒀는데.

은영은 여유롭게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뒤에서 해준이 무거운 발 옮기는 소리 쾅쾅 울리는데도 태연자약한 모습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해준의 화를 더 돋웠다. 그럼에도 해준이 은영 어깨 잡아 돌려세우자 아는 바 없다는 눈치다.

"내놔."

"뭐를요?"

"...알면서 가식적으로 굴지 마라."

"설마 이거? 이게 뭐가 소중하시다고요, 선배님?"

은영이 얄밉게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색종이를 잘라 만든 그것은 어설프게 끄트머리가 접혀있는데, 가운데에는 '부적 - 귀신백퍼퇴치!! -주완'이라고 연필로 적혀있었다. 차라리 이어폰 따위를 훔쳐가는 게 더 나았을까. 도둑맞은 물품은 해준의 심기를 건드리기만을 위한 것 같았다. 해준이 뺏으려 손 가져가는데, 은영은 뺏길 리 없고 되레 바닥에 떨구곤 발로 질근 밟아버린다. 그러고 해준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똑바로.

뒤집혔다. 뒤집혔다 거꾸로 돌아왔다. 열기 섞인 숨이 막 새어나오고 머리가 핑핑 도는데 쥔 손이 덜덜 떨리고 땀 때문에 자꾸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데 쥐어잡으려고 손가락들이 얽히고 얽히면 힘이 들어가도 이내 흩어지는 해준의 주먹에 은영의 찬 손이 감겨든다. 우습게도 지금은 해준이 아래인 위치였다. 매달리다시피 한 꼬라지였고 머리가 흐트러진 은영이 피식 웃었다. 아프니까 그래도 약해지긴 하네요?

해준이 은영을 밀쳐내면 그대로 해준이 넘어졌다. 얼굴에 주먹을 맞은 백은영은, 존나 아프긴 하지만, 사족 붙이며 제 볼을 잡고 두 발짝 뒤로 물러선다. 이해 못 할 작태다. 해준은 도로 일어나 은영에게 달려들었다. 숨 막히는 고열이 고해준을 그렇게 하게 시킨다. 예상치 못했는지 한 대를 더 맞은 은영이 가까스로 다음 주먹을 막아냈다. 둔해진 몸에 날렵하질 못하고 힘싸움이 된다. 밀고 밀어내는 몸과 몸, 해준은 정신이 나가 제 표정 살필 새도 없는데 은영 표정은 차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쪽은 한쪽뿐. 내려다보는 입장에 조소가 스미는지 연민이 스미는지 알 길 없다. 해준의 팔 하나가 밀려나기 시작한다. 

"이겨보고 싶었는데."

"... ..."

"밀리네?"

빙긋 웃어대는 백은영. 우세하던 쪽에서 힘을 빼자 해준이 제 힘 못 이겨 자빠진다, 백은영 앞에. 정신 차릴 새 없이 해준은 은영의 손에 이끌려 일으켜졌다. 부닥치고 넘어지느라 어질어질한 시야에 그 미친 미소 머금은 얼굴 일렁인다. 재밌냐, 개새끼가··· 흐물한 음성이 분노를 짓눌러 발음 씹힌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해준은 사지를 더 버텨낼 수 없다. 이 씨발 내가 너한테 무슨 죄를 지었는데. 주저앉아지지는 않고 스러지듯 해준의 몸이 은영에게 기댄다. 더 좆같게 하지 말라고···

"무겁다···~"

해준의 귓가에 울리는 예의 해사한 말투와 산뜻한 머리칼. 기운도 없어 해준 말라붙은 입술 달싹거린다.

"놔··· 아파."

꿈결에 스르르 놓아지는 백은영. 해준은 그 길로 뵈는 것 없이 제 방으로 비틀거리며 돌아가 쓰러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열이 좀 식어 있었다. 한 것 없이 어둑해진 방은 적막했고, 한밤처럼 고요했다. 지금이 몇 시지. 손 뻗어 폰을 찾고, 켜진 화면에 눈 찡그리며 숫자 찾는다. 일곱 시 반. 석식 놓쳤네. 현실 감각 챙기고 나서야 아래의 메시지가 눈에 띈다.

[주완: 너 많이 아프다며?? 괜찮아?ㅠㅠ]

학교에서 집으로 바로 귀가한 주완이 이십 분 전 보낸 메시지다. 오늘 학교에선 마주치지 않았으니 아픈 걸 알 방도가 없을텐데. 해준이 느리게 타자를 친다. 

[이제 괜찮아]

[근데 어떻게 알았어?]

답장을 기다렸다는 듯 다다다 날아오는 메시지.

[은영이가 전화했는데...]

[이제 괜찮다니 다행이다ㅠㅠ 돌봐줄 사람도 없는데.. 혹시 뭔일 생기면 나한테 말하고!!]

[내일도 아프면 꼭 병원 가!!]

은영이가 전화했는데. 한 손으로 스크롤을 내리다 해준 그 구절에서 멈춘다. 전화. 전화라고. 무슨··· 해준은 머리맡에 놓치듯 폰을 놓고 바로 누웠다. 살짝 젖고 푹 꺼진 침대가 해준을 감싼다. 염병하네. 그런 생각이 정제 없이 튀어나왔다. 오늘 은영의 행동거지가 무의미하게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지친 해준은 거기에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가져지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는 무의미한 태도가 말 그대로 무의미해. 몇 분이나 누워있었을까. 해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녁인데 뭐라도 먹어야···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 힘으로 해준은 아래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둑한 2층 복도와 달리 1층은 불이 켜져 있었다.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해준 자신과 은영밖에 없으니 당연한 얘기였지만 ー 어쩐지 활기가 남아있었다. 따스함에 해준의 몸이 약하게 떨렸다. 혼자 어둑한 방에 있지 않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물이 차올랐다. 목구멍으로 눈물 삼켜도 눈가로 스며 해준은 거친 소매로 쓸어 내려보낸다. 식탁에 짚은 손 꼼지락대 감정 분산시키는데, 손끝에 무언가 닿는다. 보아하니 작은 접시에 담긴 볶음밥이다. 갑자기··· 조금 식었지만 아직 차게 굳진 않은 볶음밥. 옆엔 숟가락도 놓여 있었다. 주위를 살펴봐도 깨끗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해준은 망설이다 의자 끌어 앉았다. 속이 갑자기 무척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적막이 채운 집 안에 숟가락이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 서서히 퍼져나갔다.

속이 차니 더 이상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아직 머리가 조금 멍했지만 해준은 내일 병원 안 가도 되겠다는, 그래서 약값이 굳겠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이 정도면 숙제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오늘 밤에 수학을 하고 잤다가 내일 점심 시간에 과학을 하자. 집에 오면 이틀치 복습하고. 이정도면 혼자서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해준이 입술을 꽉 짓씹었다.

숙제를 하던 해준을 방해한 건 또 백은영이었다. 예의 건들거리는 자세로 팔짱을 끼고 문설주에 기댄 은영은 해준이 자기를 거슬려할 때까지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다. 할일 없이 돌아다니는 한량은 처음엔 가만히 문 밀어젖히곤 조용히 쳐다보더니, 해준이 금세 알아차리지 못하자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쳤다. 내내 교과서만 들여다보던 해준 그 소리에 그제야 은영에게 관심을 준다.

"또 공부해?"

"빼먹으면 안 돼."

"아픈 거 아니었어?"

천연스럽게 묻는 낯에 해준은 기가 막혔다. 습관처럼 노트 위에 연필 끝 톡톡 치는 해준의 손짓에 저도 모르게 힘이 슬 들어갔다. 신경을 긁어 놓는 것이 은영의 의도인지 아닌지, 그의 눈빛이 모호했다. 해준의 기억 속 다소 흐릿한 먼젓번의 기싸움이 떠올랐다. 그래, 기싸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거였다. 제 눈앞의 녀석에게 어울리는 꼴사나운 경고행위. 대답이 늦어지자 은영은 아는 바 없다는 듯 맑게 의아한 표정 한다. 이제 안 아픈가? 고개 갸웃 기울이고.

"뭐하러 온 건데, 그래서. 걱정돼서 찾아온 건 아닐 거 아냐."

"굳이 볼일이 있어야 오나? 뭐하고 있나 해서."

그 말에 틀림 없어 보이는 순수한 얼굴이, 그러니까 여태까지 해준을 몇 번이나 속여넘기려했던 그 백은영의 얼굴이 올곧게 해준을 향했다. 되레 가셨던 분노가 끓어오른다. 해준은 책을 덮어놓고 의자를 뒤로 밀었다.

"또 그 서열정리라도 하고 싶은 줄 알았지."

"서열정리?"

연기톤인지 뭔지. 지나치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목소리도, 바로 맞받아쳐오는 대꾸도 아닌 그 답도 참으로 은영다워 해준의 심기를 건드렸다.

"왜 했는데, 그런 거."

"아, 아까 그거? 그냥 궁금했는데?"

해준의 말문이 막혔다. 말은 그렇게 하겠지, 따위의 정당한 답 대신 꾸역꾸역 밀려드는 비속어로 욕지기가 치밀 지경이었다. 그와 동시에 텅빈 감정. 해준은 고개를 도로 책상께로 돌렸다.

"야." 은영이 내뱉었다. "이쪽 봐."

이미 닫힌 해준에게 닿을 리 없고, 은영이 해준에게 한 발짝 다가간다. 역시 둘의 거리가 가까워질리 없다.

"나 보라고."

"왜?"

"... ..."

제대로 답도 안할 거면서 무작정. 주먹다짐하듯 우악스레 어깨를 잡아 돌리지도 못하고. 해준을 내려다보는 은영의 눈빛에는 아직도 뚜렷한 길이 없고, 그 대신 어떤 감정은 있다. 다른 그 누구가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애처로움, 미숙함, 순진함. 확신에 차 있으면서 모르는. 차갑게 노려보는 시선에 해준이 목 가다듬는다.

"네가 사과해야지."

"왜?"

"모르겠으면 됐고."

은영에 익숙해진, 열감기가 완화된 현재의 그라야 할 수 있는 대처다. 더 이상 일 키우지 말아야지. 해준은 그다지 내키지 않아도 은영을 향해 미적지근한 미소 지어보인다. 이제는 거꾸로 은영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고, 해준 혼자 일을 끝냈다. 은영은 가만히 서 있다가 해준이 그 다음 말 잇지 않자 천천히 뒤를 돌아 걸어나간다. 뒤통수가 문간을 넘어 사라지기 전에야, 잊은 게 떠오른 해준 목소리 냈다.

"...맞다. 볶음밥 고마워."

들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할 틈도 없이 은영이 우뚝 멈춰섰다. 대신 뒤를 돌지는 않고 요동 없다. 거기에 용기를 좀 받은 해준이 슬쩍 농담 끼워넣어본다.

"근데 주완이가 내 보호자냐. 전화까지 하게."

"...그러게요. 박주완은 선배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들릴듯 말듯 이어져오는 음성. 좀 더 걸러진 아까의 감정이 은은히 공명한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해준이 입을 뗐다.

"... ...질투하냐?"

발에 밟히는 주완의 천진한 색종이 부적이 눈앞에 아른댄다. 그걸 짓밟고 선 - 해준이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점을 차치하고도 - 장난인지 아닌지 분간되지 않던 형용할 수 없는 움직임이,...

"네."

예상치 못한 가벼운 응답이 돌아온다. 보지 않고도 그 백은영의 웃는 얼굴이 훤히 비치는 듯했다. 해준이 말을 고르지 못하는 사이, 그 뒤통수는 홀연히 해준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

"옆으로 좀 가."

"더 가면 떨어지는데?"

"끼어들어온 게 누군데..."

해준이 누운 옆에 은영이 자꾸 자리를 밀고 들어왔다. 둘이 한 침대에 누우니 공간이 꽤 찼다. 둘만 남으니 스산해서 무섭다는 이유를 대며 해준의 방에 들어온 은영은, 해준이야 아프니 잘 준비가 귀찮아 누워있다지만 왠지 본인도 그 옆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하야 그날 하루에만 수 번 관계가 널뛴 둘이 나란히 누워있게 된 것이다. 가만히 위를 보던 해준이 옆을 보면 아랑곳 않고 폰을 만지작거리는 은영이 있다. 

"폰만 볼 거면 왜 왔어."

"그럼 얼굴이라도 보고 있게?"

신소리에 해준이 됐다는 듯 고개 돌리며 한숨 내쉰다. 잠시 후 게임 소리 멈추더니 차분해진 은영의 목소리 들려왔다. 나보고 한숨 쉬지 말랬잖아. 딱히 화나지 않은 투다. 그보다는 진실된 소리여서, 해준은 도로 시선 은영에게 돌린다. 은영은 살짝은 묘하도록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눈을 맞춰오고 있었다.

"...한숨 쉰 거 아니다."

"웃기시네."

가볍게 웃음기 담아 툭 던지며 은영이 똑바로 몸을 뉘였다. 해준도 그런 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아버렸다. 감싸오는 고요를 진심 반, 농담 반의 조그만 웅얼거림으로 헤쳐본다. 아파서 오늘따라 네 행동이 더 좆같은가 보다. 이전에 은영이 띄운 답만치는 아니어도 무겁지 않은 톤이 요행히도 장난스럽다. 은영도 그게 해준의 최선이라는 걸 알고, 그렇기에 또 한 번 옅은 웃음소리가 허락의 뜻을 가져다줬다. 자못 고해성사스러웠던 첫마디 탓에 해준은 자연스레 옛날 얘기를 꺼내게 된다. 아팠을 때 얘기. 아팠을 때 누군가가 돌봐줬던 얘기. 흰 죽 한 그릇이나 잡아줬던 손의 감촉, 그런 류까지 사소해진다. 막상 은영을 핑계로 털어내버리니 울음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공기가 천천히 뺨을 스쳤다.

잠시 숨을 쉬더니 은영이 따라 얘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애들이랑 살 때는 아프면 그냥 잤는데. 자고 나면 거의 나았어. 이틀 자고 안 나으면 약국에서 약 사다먹고. 부러워하거나 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다른 세계였다.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래서 어떠한 반응이랄 것도 없이 주제가 같아 생각나니까 하는 얘기. 그 무미에 해준은 조금 감상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렇게 참지 말고 아프면 얘기해. 참고 넘기면 더 병 된다... 여기 돌봐줄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자기가 아픈 꼴이면서 조언을 주는 것이 새삼 우습기도 하다. 그것도 백은영한테. 그래도 해준은 충분히 아팠으며, 아파봤으며 그런 것들이 쌓이기에 앞으로는 덜 아플 거였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은영에게 이 정도는 해주는 게 맞다고, 아직은 어질한 머리로도 해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은영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중얼거리는 말은 해준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말하던 해준의 손에 온기가 와닿았다. 기척에 놀라 옆을 보니 은영의 손가락 몇 개가 닿아 있었다. 사선으로 해준을 향하는 은영의 얼굴이 그림자 져있다. 등지고 있는 환한 방 불빛과 위층 침대에 그늘진 윤곽의 얼굴선이 의도를 이지럽혔다. 그 손가락들은 거리낌 없이 손갈퀴로 수욱 들어와 손을 맞잡았다. 해준의 손이 잠시 움츠러들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바로 하고 내버려둔다. 이상하면서도 조금 기쁘다고 할지, 형용하고픈 기분에도 은영이 해온 것에 맞춰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백은영도 손이 따뜻하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몇 초간 은영은 해준의 손을 감싸고 있다가 일순 윗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엮인 손이 강하게 쓸리고 눌리면서, 짚으며 힘이 들어가는 팔 눈앞에 펼쳐지고, 금시에 은영의 머리칼이 해준 위로 늘어졌다. 깍지를 붙잡아 끼지 않은 은영의 반대쪽 손이 숨이 턱 막히는 적막을 헤집는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시선을 해준에게 고정하고 해준의 바지 앞섶을 풀고 끄르는데 여념이 없다. 당황해 벌떡 일어난 해준이 손을 뿌리치고 나서야 은영이 고개를 든다. 

"이러면... 좋다고 하던데... 나 좋다던 애들... 이러면 다 좋아하던데."

그의 눈에 비친 백은영은, 도리어 자신이 너무도 난처하고 황망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해준을 보다가 이내 눈을 내리까는 등 예상치 못한 듯 굴었다. 해준이 도무지 받아내지 못하도록 형형한 그 눈빛은 어떻게 보면 광기고 사람과 애정을 나눠보지 못한 티가 어린애의 그것처럼 서려있었다. 그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확신이 단번에 녹아내려서, 오히려 해준 자신이 평생을 잘못 알아왔던 듯싶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당혹스러웠다. 해준의 입이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무슨 소리야?"

한참 달싹이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해준에게도 본인 것 같지 않게 들렸다. 언제 자기가 좋아한다고 했었는지, 그런 전후사정이나 인과관계를 따져볼 것이 아니다. 그저 눈앞의 어리고 맹목적인 영혼이 우스우며 두려웠다.

"그게 무슨 사랑이야,... 사랑 모르는 티 내지 마."

애매하게 잡고 잡힌 은영과 해준 사이에 말이 없었다, 또. 둘 다 상대가 아무 말이라도 하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어떤 말도 하지 않기를 소원했다. 둘이 공유한 첫 생각이었지만 역시나 둘 다 그걸 영영 모를 거였다. 은영의 손이 스르륵 풀리다가 은영이 돌연 해준의 방을 성큼 걸어나갔다. 손이 떨어져나간 해준의 왼손에 잔열이 빠르게 식었다. 왜인지 그대로 한동안 일어날 수 없었다.

물이 시끄럽도록 쏟아졌다. 차가운 물방울이 날카롭게 튀어 욕실 바닥에 처박히고 멀디 먼 벽까지 달라붙는다. 숙인 은영의 고개를 타고 쉼없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뭉쳐 시야로 서서히 떨어졌다. 차디찬 물이 몸까지 가득 스미도록 은영은 가만히 서 있었다. 왜? 그런 물음이 찬 물에 마비돼 은영의 머릿속을 되풀이해 떠돌았다. 어둑하게 가려진 제 얼굴을 마주한 형광등 빛을 받은 해준의 얼굴이 선했다. 순수하기 그지없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그 낯빛이. 은영은 잠시 해준이 자신과 닮았다 착각했었다. 간호받아본 경험이니 뭐니 해도 같은 처지라고, 결국 본질이 닿아있다고. 이것은 특별해서, 당연히 은영은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을 썼다. 그러면 어떻게든 됐었다. 납작하게 짓무른 애정은 잘도 통용되는 방법이고, 은영이 손을 뻗으면 너는 잡혀줬고 은영이 입을 맞추면 너는 은영의 목을 감쌌었다. 그랬는데 고해준 너는. 한참 물을 맞은 시린 손 위로 미지근한 물이 떨어졌다. 실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쪽팔리나? 자존심이 상하나? 하등 와닿지 않는 질문이 수챗구멍으로 흘러갔다. 뭐가 어긋난 건지도 모르니 공허했다. 뜨거운 얼굴에 차디찬 두 손바닥을 누른다. 물은 물에 섞이고 소리는 소리에 눌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왜 울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해준이 아니라 자신이 병든 주제에.

수건을 얹고 숙인 채 나오느라 은영은 제 앞의 발을 보고서야 멈춰섰다. 가려질락 말락 보이는 손은 손가락을 안절부절 못하며 움직이더니, 주먹을 쥐었다 펴고 있었다. 고개를 들지도 입을 열지도 않고, 은영은 해준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바닥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응시했다.

"그... 아까 말은. 미안해."

묵묵부답인 은영. 대신 한두 발짝 앞으로 걸어나가 해준을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성싶었지만 해준의 어깨에 그대로 젖은 머리를 꿍 박은 채로 우뚝 서 있다. 잠시 이해를 하기 위해선지 해준이 말을 멈췄지만 그다음 반응이 없으니 이어 하기로 한 것 같았다. 해준의 톤이 조금 단호해졌다.

"너 이거 사랑이야, 욕정이야. 제대로 해."

"뭐가 다른데?"

무감정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불퉁하고 여태껏과 같은 투다. 부러 얄궃게 답한 것도 있지만 뭐가 다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거짓은 아니었다. 해준 역시 그걸 느꼈는지 얕게 한숨 내쉬었다.

"좋아하는 거 아니구나?"

그 말투는 마치 한 시름 덜었다는 것처럼, 다행이다라는 핑계로 은영을 납작히 짓누른다. 해준은 고작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 감추려 해도 밝아진 기색에 은영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수건으로 눈가를 벅벅 훔쳐냈다.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래. 내가 좀 쓰레기잖아. 사랑하지도 않고 해버리고 싶었어."

해준은 고개 여전히 그에게 처박은 채로 웅웅대는 은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축축하면서도 무거운 온기가 천천히 퍼져나왔다. 아, 아픈 거구나. 무의식에 해준은 그리 결론을 내려버렸다. 평소에도 그랬다지만은 유독 오늘따라 이해되지 않게 구는 걸 보면 나처럼 아픈 거야. 해준이 은영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덜 말라 덩이진 머리칼 너머로 붉어진 은영의 눈가가 보였다. 남의 간호를 받아본 적 없다던 말이 떠올랐다.

"아픈 거지? 오늘 옆에서 자. 열 나거나 해서 깨면 내가 봐줄게."

해준의 모습은 퍽이나 다정하고 잔인해서, 은영은 비로소 그가 바지 앞섶을 헤집었을 때 해준의 반응을 이해해버리게 된다.

은영의 시선이 미동도 없이 멍하게 허공에 박혀있었다. 어두운 방 풀벌레 소리만 이따금씩 들리고, 옆의 해준은 일찍이 잠들어 있다. 챙겨준다느니 얘기해놓고선. 은영이 고개 돌려 한참 해준을 응시한다. 아예 편하게 등을 돌려 잠들어있는 해준은 먼젓번의 일이 있었는데도 좀처럼 개의치 않아하는 것 같다. 은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진짜 조금도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 안 하는구나. 공허인지 무엇인지도 가늠되지 않는 빈 감정이 은영에게 차올랐다가 쓸려 내려간다. 은영은 손을 내어 해준의 이마에 얹어본다. 미열이다. 아니, 미열이던가. 남의 체온을 재어본 적 없는 은영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만진다. 서늘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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