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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6

2차 BL

1.

M은 오늘 경찰서까지 가 놓고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사실 ‘도망쳐 나왔다‘가 더 알맞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자신과 S, 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 불러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서를 빠져나온 뒤 결국 발이 향한 곳은, 둘만의 공간인 반지하 방이었다. 문을 열자 방 안에 갇혀 있던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뛰어나와 M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마치 S가 매번 M에게 해주던 것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아무래도 이 습함은 요 며칠 사이 장마가 내려 방을 환기하지 못한 탓인 듯했다.

 

2.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허탕을 쳤지만 남은 시간 동안 둘의 관계를 잘 정리해서, 내일은 꼭 실종 신고를 마쳐야겠다고. 빈속에 유통기한을 넘기기 직전의 주먹밥을 때려 넣으며 M은 다짐했다. 귀찮다는 이유로 전자레인지를 돌리지 않아 차가웠다. 형이 있었다면 돌려서 먹으라고 잔소리해 줬을까. 잠깐 멍하니 생각하던 M은 꿀꺽, 하고 밥을 넘기고 다시 관계를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따지고 보면 S 형과의 첫 만남은 M이 고등학교 1학년일 때 이루어졌다. 그때 형은 갓 학교로 실습 나온 교생 선생님이었는데, 학교 여자애들이 잘생긴 교생이 왔다고 소문을 퍼뜨리느라 소소한 난리가 일어났던 것이 똑똑히 기억난다. 키도 나름 커 보이고, 과목은 국어. 그 나이대 애들이 가질법한 환상 속 ’병약한 문학소년‘의 이미지와 맞물려 인기가 없을 수가 없었다.

사실 둘이 알고 지내온 세월에 비하면 M과 S가 ’학생과 교생’이라는 관계였던 기간은 겨우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마땅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우리는 사제 관계. M은 내일은 꼭 경찰서에 가서 그렇게 둘의 관계를 정의하고 실종 신고를 끝마치기로 다짐했다.

허겁지겁 음식을 넘긴 탓인지 목이 탔다.

 

3.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면 아마 게자리가 12위…, 까진 아니더라도 하위권일 것이 틀림없을 거라고 M은 확신했다. 오늘따라 하는 일마다 허탕을 쳤기 때문이었다. 어제 늦게 잔 것도 아닌데 알람은 못 들었지, 교통카드 충전을 미리 해두질 않아서 다시 내려야 했고, 겨우 버스에 올라타니 신분증을 집에 놓고 온 것이 그제야 생각나서 또 내려야만 했다. 무엇보다 경찰이 실종 신고를 받아 들여주지 않고 그를 돌려보냈다. ’실종‘이라는 단어를 듣고 제법 진지해졌던 경찰관의 얼굴은 ’88년생‘, ’남자‘라는 인적 사항을 듣더니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화룡정점으로, 실종자와의 관계를 ’사제 관계‘라고 대답하자 옆자리 경찰관까지 웃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우스운 말인가? 바보가 된 느낌에 M은 그냥 같이 따라 웃었다. 자기 입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지금 상황보단 훨씬 더 웃기게 느껴졌다.

그냥 잠깐 어디 간 거겠죠. 실종이 확실한 증거, 그러니까 유서 같은 게 발견되면 다시 오세요. 경찰서를 빠져나오며 M은 그 말을 곱씹었다. 아무래도 키도 큰 남자인데, 납치 같은 범죄로는 연관 짓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건 M의 생각도 일치해서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서라니. 부정 타게시리. 이럴 때 S 형이 있었으면 공권력의 무능함에 대해 비판해주고, 나는 거기에 ’옳소‘만 하면 됐는데. M은 한층 더 뼈저리게 S가 보고 싶어졌다.

평소에 형이 우울했던가. 기분 전환 삼아 민트초코맛(옆에서 비난해주는 S 형이 없어서인지 평소보단 맛이 없었다.)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비를 피해 집 앞 정자에 앉은 채로 M은 S를 떠올렸다.

분명 자기 또래 남자들에 비하면 감수성이 풍부하긴 했던 것 같다. 스승의 날 때 제자들이 편지를 써 줬다며 울고, 같이 단편영화를 보다가 울고…. 밖에서도 이렇게 우나 했는데, 밖에선 잘 참고 집에 와선 참지 않는 것뿐이라고 했다. 왜 내 앞에선 울었지, 생각해보니까 조금 이상했다.

어쨌든 형은 우울까진 모르겠지만, 가끔 자기 생각에 자기가 짓눌려 숨쉬기가 힘들어 보일 때가 있었다는 게 M이 떠올린 S였다. 요즘은 비만 하염없이 내리는 날씨 탓인지 더더욱 그래 보였고. 그렇다면 장마가 들이닥친 반지하 방의 창문을 올려다보는 형의 머리엔 어떤 생각이 가득 들어찼을까? 무슨 생각이길래 이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거기까진 M이 생각하기 힘들었다. S가 말하길 M은 자기가 본 사람 중에 가장 밝은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고, M이 생각하길 S는 자기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이스크림 막대를 다 먹고 난 뒤에도 계속 입에 물고 있어서인지, 입에 나무 맛이 퍼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싫어졌나?‘라는, 남들이라면 동거하는 애인이 집을 나갔으면 처음부터 했을 생각이지만 M이라 늦게 도달한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막대가 경쾌하게 ’뽀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정확히 반절이었다.

 

“또 민초 먹었어? 알못이네.”

 

빗소리에 섞여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M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S가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며칠 사이에 초췌해지진 않았지만, 꽤 헬쓱해진 채로. 그렇지만 S는 M을 보자 씨익, 하고 웃었다.

어젯밤 M은 형을 찾으면 가볍게 화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하고 어디 갔냐고. 경찰서까지 갔다 왔으니까 다음부턴 말 좀 해달라고. 근데 막상 S를 며칠 만에 마주하니까, 며칠 만에 목소리를 들으니까, 안도감이 먼저 들어서 화는 빠져나올 틈도 없었다.

M은 홀린 듯이 S의 손을 잡았다. 하얗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 위에, 대비적으로 까맣고 곧게 뻗은 손가락들이 얽혔다. 또 어딘가로 갈까 봐, 가지 말라고 붙잡기 위함이었다. 화답하듯이 S의 손에서 힘이 빠져 순순히 잡혀 주었다.

 

4.

내가 싫어졌나? 라는, M의 고민(잠깐이었지만)과 다르게, S는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M을 지독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집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S가 M을 사랑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M의 노래를 듣다 보면 음악이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처음 S가 노래하는 M을 봤을 때부터 느낀 감정이었고, 몇 년 후 우연히 길거리 버스킹을 하는 M을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곧 다시 헤어질 아이들이니까 교생실습을 하면서 만난 학생들에게 친절은 주더라도 정은 주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었는데, 이상하게 M은 후회할 걸 알면서도 대화가 즐거웠다. 지난번에 지나가다 네가 노래를 부르는 걸 우연히 들었다, 선생님은 M이 노래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쪽에 생각이 있니? 그렇게 물었더니 M은 바로 ’네!’라고 답했다. 이 질문을 기다려온 것처럼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외적으로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얼굴을 보면서, S는 M이 학생 시절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의 S.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집안이 기울기 전의 S.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선생님으로 진로를 틀고 교대를 입학하기 전의 S. 현실과 타협하기 전의 S.

너는 그런 일이 없이 계속 음악을 하길 바란다고 S는 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정말로, 다시 만난 M은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M을 사랑하는 건, 즐겁지만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미 어른답게 다 묻어뒀다고 생각한 음악이란 진로에 대한 열망이, M과 같은 집에서 함께 지낼 때마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꽤 어른스럽지 못한 생각이었다. 교생으로 가르치던 학생과 같은 집에서 살을 부대끼며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서 좋은 어른은 이미 틀린 것 같지만, 어쨌든.

그래서 S는 잠시나마 이 감정을 회피하고 싶어서 도망쳤다. 단순하게, M을 보면 음악이 자꾸 하고 싶어지고 우울하니까, M을 보지 않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이유도 단순했다. 단순한 M과 지내다 보니 옮은 걸까? S는 생각보다 M을 더 필요로 했다. 며칠 동안 다른 지인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M이 보고 싶다고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진짜 보러 온 것뿐이었다.

사실 S의 고민은 해결된 것이 없었다.

여전히 S는 선생님이었다.

여전히 S는 음악의 길을 걷지 못했다.

여전히 S는 M을 보면 음악이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M을 보니까, 그리고 걔랑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있으니까, 잠깐이나마 이대로라도 괜찮다는 착각이 들어서 S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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