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해설

신년 예배

2023 새해 기념 연성

-주의: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 할로네 정교 관련 설정 날조 있음 / 인물의 성별에 관계 없이 모두 대명사 '그'로 지칭합니다

에스티니앙은 할로네 정교의 열성 신자가 아니었지만, 특별한 날 성당에 나갈 정도로는 신을 믿었다. 이를테면 새해 첫날, 대성당에서 열리는 신년 예배라든가.

에스티니앙의 세례를 맡아준 사제가 노환으로 죽은 뒤, 펀데일의 사제관은 텅 비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새해 첫날과 정교 축일이면 새벽잠을 아껴가며 이웃 마을까지 예배를 보러 갔다. 꼭 그런 날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을 앞둔 이들은 할로네의 성실한 신도를 자처했다. 암양들의 배가 통통하게 부풀어 오를 즈음에는 새끼 양이 몸 성하게만 태어나기를, 가축 사이에 병이 돌기 쉬운 계절에는 늙은 동물에게만 병이 찾아들기를, 날이 추워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가혹한 한파만은 불어닥치지 않기를 기원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참 기회주의적으로 신을 찾았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에스티니앙이 부모님을 비롯한 어른들을 나무랄 처지는 아니었다. 그 역시 용기사 선발 시험이며, 용기사단 정기 출정 같은 일을 앞두고 성당을 방문하고는 했으니까. 에스티니앙이 물려받은 유산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신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신의 보살핌 같은 것을 감히 바라지 않았다. 그저 노여움이라도 피해 가기를 기원했다.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직후에는 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전쟁신이 양치기와 농부보다 전사를 편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신의 편애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뒤에도 에스티니앙은 변함없었다. 필요할 때만 기도를 올렸고 체면치레는 최소한으로 했다. 그러나 다른 신을 찾지는 않았다. 복수라는 목표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은 할로네뿐이었으니까. 기도가 줄 수 있는 건 마음의 안정뿐이라고 해도.

할로네시여, 제가 별로 좋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신께서는 저를 꽤 예뻐하셨을 줄로 압니다. 옛정을 봐서 여기 사는 동안만이라도 저와…. 제 애인을, 밉게 보진 말아주십사 부탁드리오며…. 앞으로 가끔 뵈러 오겠습니다.

에스티니앙은 기도를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힐끔거리던 몇몇 귀족들이 제풀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어쭈, 눈 굴릴 여유가 있으시겠다? 그는 피식 웃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년 예배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서 새해의 첫날로 넘어가는 자정에 시작되었다. 제아무리 4대 명가라도 교황청이 주관하는 행사에 딴죽을 걸 수는 없었다. 그때는 할로네 신상 앞에서 다들 공평하게 졸았더랬다. 용시 전쟁이 끝나고 성당의 권위가 축소됨에 따라 유난스러운 자정 예배도 자연스레 막을 내렸다.

정작 에스티니앙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들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예전 습관대로 예배당의 말석을 훑었다. 아이메리크는 보이지 않았다. 총사대 정복을 각 잡고 차려입은 힐다와 눈이 마주친 게 전부였다. 에스티니앙은 의아했다. 이런 자리에 발을 뺄 녀석이 아닌데? 하지만 일어나서 돌아다니지 않는 한 찾아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친구의 행방 수색을 포기했다. 어차피 예배가 끝나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상식적인 시각에 열렸다는 점을 빼면 신년 예배는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낯선 얼굴의 교황이 새해에도 이슈가르드와 할로네 정교의 번영이 있기를 기원하는 축문을 읊고, 각 기사단의 총장들과 총사대장이 제식용 무기를 축성 받았다. 예전에는 힐다의 순서에 내가 불려갔는데, 같은 생각을 하며 에스티니앙은 제례를 구경했다. 그 와중에 아이메리크가 어디에 앉았는지도 찾아냈다. 친구의 자리는 설교단과 제법 가까운 상석이었다. 그보다 더 앞에 앉은 것은 4대 명가의 일원들 정도였다. 보렐 가의 자리는 원래 뒤쪽이었는데, 아이메리크가 현재 귀족원 의장이다 보니 종교계도 눈치를 본 것 같았다.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에스티니앙은 친구가 인파에 휩쓸려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예전처럼. 새삼스레 향수를 느낀 건 아이메리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표정을 알아볼 정도로 가까워지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은퇴했으니 굳이 대성당에 올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나이가 들더니 신실해졌군, 너도.”

에스티니앙은 그제야 깨달았다. 푸른 용기사라면 모를까, 평범한 기사들은 이런 장소에서 열리는 신년 예배에 참석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리를 안내해 준 사제가 제법 긴장한 기색이었다. 큰 행사를 처음 치르는가보다 싶었는데, 사실은 전직 푸른 용기사를 거절했다가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봐 쫄았던 모양이다. 둘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전에는 신년 예배라면 질색하더니.”

“잘 시간에 불러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시간이 바뀌어서 망정이지.”

아이메리크에게 미리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낭패를 봤을 것이다. 잠긴 예배당 문 앞에서 혼자 어리둥절해했겠지. 잠은 모자라지, 날은 춥지, 그 시간엔 신년 예배에 관해 물어볼 행인도 없었을 터였다. 에스티니앙은 내친김에 자정 예배의 짜증스러운 점을 줄줄 읊었다.

“그래도 오긴 올 생각이었군그래?”

에스티니앙은 대번에 입을 딱 다물었다. 예배당 이곳저곳을 살피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웅얼거리는 대꾸가 들려온 것은 그의 시선이 할로네 신상에 멈춘 순간이었다.

“이사 온 뒤로 처음 맞는 새해잖냐. 몇 년은 여기 살 텐데, 눈도장 찍어둬서 나쁠 건 없지.”

“그런 것치고 부인께서 안 오신 것 같은데.”

명백한 놀림조였다. 에스티니앙은 인상을 쓰며 부인은 무슨, 하고 대꾸했다. 아이메리크는 웃음소리를 삼켰다. 모처럼 건수를 잡았으니 물고 늘어지는 게 예의였다. ‘아니지, 부군이라고 불러야 하나?’라는 말에 대한 에스티니앙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만 해. 언약식도 아직이라고.”

아이메리크는 그런 문제였냐며 혀를 내둘렀다. 에스티니앙은 순순히 수긍했다. 예민하게 반응할수록 놀리는 쪽만 신나기 마련이었다. 이쯤 장단을 맞춰줬으면 오랜만에 본 친구와는 놀아줄 만큼 놀아줬다 싶었다. 그리고 반지를 나눠 낀 사이였더라도 아실과 같이 올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에스티니앙 자신부터가 불성실한 신자였다. 종교조차 없는 사람에게 무슨 염치로 권유하겠는가?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 정도는 해뒀다. 이른 아침에 나가야 했으니까. 그때 아실은 행사 전후의 금기 사항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았다. 생명을 해치면 안 된다거나, 특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거나, 아예 금식해야 한다거나, 꼭 몸에 걸치고 가야 하는 게 있다거나…. 에스티니앙이 고개를 젓자 아실은 간소해서 좋다는 평을 내렸다.

‘간소하기는? 주말마다 사람을 불러대니까 더 할 게 없는 거지.’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렸다. 물론 그는 철든 뒤부터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할로네는 꽤 엄격한 신이라고 알고 있는데 마음대로 빠져도 되는 거야?’

‘빙천에 갈 생각 없으니 괜찮아.’

불성실한 신앙생활에 대해 변명할 때면 늘 하던 말이 튀어나왔다. 직후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웃긴 소리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별바다를 직접 다녀와 놓고 빙천 타령이라니…. 하긴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도 자신은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가족은 빙천에 들지 못했을 테니까.

에스티니앙이 만났던 사제는 무척 친절했다. 12살 소년의 상담을 진지하게 받아주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잔인한 말을 했다. 너희 가족들은 아무래도 할로네께서 계신 곳에는…. 지금이야 교리 해석이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빙천에 들 자격을 받는 것은 사랑을 지킨 사람들과 고결한 영웅, 용맹한 기사뿐. 용에 맞서 천 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이슈가르드에서 사랑을 지키려면 최소한 무기를 들어야 했다. 신은 자격이 되지 않는 이들을 엄격하게 가려냈다.

정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도의 영웅 역시 빙천에는 들 수 없었다. 아실은 할로네를 믿지 않았으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없는 천국에 드느니 어디로도 가지 않는 쪽이 나았다. 그건 에스티니앙의 오랜 결심이었다. 복수와 용서를 끝마친 뒤에도 변하지 않은 것.

그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 신년 예배에 가는 것도 다소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모순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저승과 이승은 별개니까. 빙천에 안 가는 건 안 가는 거고, 이슈가르드에 사는 동안 잘 부탁드린다고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평생 봐 달라고 요구한 것도 아닌데. 적반하장으로 마무리되는 훌륭한 자기합리화였다.

예배 시각을 알려주자, 아실은 배웅해주긴 힘들겠다고 했다. 돌아오면 아침을 차려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새해 아침, 최대한 조용히 외출을 준비하던 에스티니앙은 목격했다. 아실이 파묻힌 이불 더미에서 손만 천천히 빠져나오는 광경을…. 무덤에서 되살아난 사령 저리가라였다. 막상 손은 살래살래 흔들리다 금세 이불 위로 픽 무너졌다.

침실을 나서기 전 에스티니앙은 잠시 망설였다. 그 하찮은 손 인사가 눈에 밟혔던 탓이다. 정확히는 건성인 손짓에서 사정없이 묻어난 졸음이 신경 쓰였다. 그는 결국 침대 옆으로 되돌아갔다. 이불을 살짝 헤집자 아직 눈도 못 뜬 애인이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식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냥 실컷 자라고 속삭였다. 아실은 비몽사몽간에 으응, 대답했다. 정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실이 지금쯤 일어났으려나, 생각하다가 에스티니앙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이메리크는 별다른 딴지를 걸지 않았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친구를 놀려 봤자 독신인 본인만 손해겠거니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화제는 늦은 아침 식사, 혹은 이른 점심 식사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지금 연락하면 준비는 될 거야. 좀 기다려야 하겠지만, 간식이 있을 테니 그거라도 들지.”

신년 예배에서 가장 기대되는 건 끝난 뒤 먹는 주전부리 아니겠느냐고, 아이메리크는 너스레를 떨었다. 에스티니앙은 킬킬 웃었다. 그는 신년 예배에 참석하게 된 뒤부터 종종 보렐 가에 밤참을 얻어먹으러 갔었다. 용기사단 숙소에는 먹을 거라곤 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정 예배에도 좋은 점이 있긴 있었군. 이제는 그때만큼 맛있는 밤참을 먹을 수 없겠지만…. 에스티니앙은 약간 쓸쓸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제 탓인데도 그랬다.

“미안한데, 아이메리크. 식사는 같이 못 하겠다.”

에스티니앙은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애인의 귀여움을 숨기고 싶은 동시에 자랑하고 싶기도 했던 탓에 설명은 다소 두서없었다. 그러나 아이메리크는 금방 알아들었다.

“이거 자꾸 잊어버리는군. 그에게 미안한걸.”

알면 잘하라고,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슈가르드로 이사한 건 전적으로 아실 때문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은퇴 후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것에 취미를 붙였다. 그 사실을 잘 알 텐데도 애인은 성도 생활이 궁금한 눈치였다. 결국 그는 지고천 거리에 집을 보러 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취미 생활쯤이야 몇 년 포기해도 죽진 않을 테니까.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대신, 에스티니앙은 아이메리크의 마차를 얻어타고 귀가했다. 이것만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애초에 약속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아실은 자기가 한 말 정도는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잠을 깨려고 때린 여파로 아직 붉은 기가 남은 뺨이나 이따금 지나가는 요란한 하품을 보며, 에스티니앙은 신년 예배가 다 뭐라고 쟤가 잠을 줄여야 했나 싶었다. 혼자였다면 신년이고 나발이고 예배 끝날 시간에 맞춰 보렐 저택에 점심이나 얻어먹으러 갔을 것이다. 예배를 보러 간 게 누구 때문인데, 정작 그 ‘누구’가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 걸 보니 속이 끓었다.

그런 불만을 빼면 성도에서 맞는 새해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예전 일을 궁금해하는 아실에게 에스티니앙은 보렐 가에 종종 신세를 졌다든지, 재해가 닥치기 전에도 성도의 겨울밤은 귀 끝이 떨어지게 추웠다든지, 그런 얘기를 해주었다. 그가 설거지하는 동안 아실은 식탁에 코를 박고 잠들었다. 에스티니앙은 잠든 애인을 안아 들고 침실로 옮겨주었다. 아실을 이불 아래에 잘 묻어주다가 본인도 졸음이 쏟아진 탓에 같이 누워버렸지만, 뭐 어떤가? 가끔은 새해 첫날을 게으름뱅이처럼 보내기도 하는 법이다.

다음날에는 힐다가 방문했다. 에스티니앙은 새해 첫 손님의 신원에는 유감이 없었다. 전에도 힐다는 비번이라며 종종 놀러 와서는 차나, 술을 탄 차나, 술을 마시고 돌아가고는 했으니까. 다만 그가 신년 예배 얘기를 꺼낸 것은 좀 유감스러웠다.

“그만하면 깔끔한 차림이었다고.”

“누가 추레하게 입고 왔댔나? 혼자 엄청나게 튀었다고 했지!”

다들 새해라고 가장 좋은 옷을 한껏 빼입고 왔는데, 에스티니앙 혼자 말쑥한 촌부 차림으로 출석했다는 것이다. 힐다는 비웃는 게 아니라고 못 박았다. ‘내가 그럴 처지겠어?’ 자기도 어제처럼 격식 차린 자리에 입고 갈 건 총사대 제복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웃긴 건 웃긴 거였다. 전직 푸른 용기사의 무신경함에 귀족과 사제 일동이 파르르 떠는 광경이란!

“올해 예배당 경비는 총사대가 맡아서 나도 일찍 가 있었거든. 그런 핑계 없이 미리 가 있으면 피곤하니까. 귀족들이란! 거들떠보지도 않을 땐 언제고 지금 와서 친한 척이라니? 아무튼 에스티니앙이 들어올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세상에! 난 그 깐깐한 사제가 식은땀 흘리는 건 처음 봤지 뭐니!”

힐다가 깔깔 웃을 때까지만 해도 에스티니앙은 새 옷 생각이 없었다. 의복이 문제라면 하류 계층을 대상으로 여는 신년 예배에 참석하면 될 일이었다. 은퇴한 마당이니 귀족들 틈에 끼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아이메리크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지만.

“성도에서 오래 살 마음이 없는 건 알고 있어. 바로 그래서 네가 적임자인 거야.”

정교분리 이후에도 예배당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여전히 정치의 연장선에 있었다. 평민원과 귀족원이 서로 견제하는 그림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아이메리크는 썩 반길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귀족원 의장으로서 그런 자리에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그가 찾아낸 해결책은 평민원을 대성당에 부르는 거였다. 일이 잘되면 귀족원은 평민원의 눈치를 봐서라도 입을 다물 것이고, 잘되지 않아도 손해 보는 건 없었다.

“귀족원을 대성당 아닌 곳으로 보내는 것보단 이쪽이 쉽지. 정교회도 반길 거고.”

천 년 동안 신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결국 믿지 않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다시 믿음을 주는 길을 택했다. 다만 그것은 신에게만 허락된 관용이었다.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당 출석률이 바닥을 쳤다. 이제 사람들은 한데 모여 사제의 말을 듣기보다는 집에서 교리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 기도를 올렸다. 할로네 정교는 천 년 동안의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사이비가 출현할 가능성만 아니었다면 자기도 이 문제를 놔뒀을 거라고, 아이메리크는 덧붙였다.

“참 나, 선전용 허수아비는 은퇴하면서 관뒀다고.”

에스티니앙은 질색했다. 자신이 귀족이나, 일부 보수 성향 사제의 입을 막기에 가장 적절한 인사라는 건 이해했다. 명예롭게 퇴직한 전직 푸른 용기사에게 그 정도 입지는 있었다. 게다가 작위도, 이렇다 할 직책도 없으니 평민원에 가까운 입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아이메리크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주일 예배도 가끔은 보러 가야 할 거고, 축일에는 빠짐없이 출석해야 할 테니까. 에스티니앙이 굳이 신년 예배를 챙긴 건 그 자신이 믿음 깊은 신도가 아니어서였다. 원래 그런 사람일수록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는 법이다. 진심을 부딪칠 수 없다면 형식에라도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뇌물을 먹이는 중이잖나?”

아이메리크는 비어가는 접시가 즐비한 식탁을 가리켰다. 신년 예배 날 그는 에스티니앙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친구와, 친구의 동거인을 식사에 초대했다. 언제가 괜찮은지 알려주면 적당히 날을 잡아보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셋은 바로 오늘, 새해 첫 주의 주일 점심에 보렐 저택에 모였다. 손님들을 위해 요리사가 솜씨를 부린 모양인지 식탁에 올라온 음식들은 유난히 맛있었다.

에스티니앙은 돈이라도 내놓고 그런 소릴 하라고 인상을 썼다. 아이메리크는 계약서라면 준비해뒀다고 받아쳤다. 논쟁의 패자는 정해져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내친김에 재단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앞으로도 대성당에 출입할 거라면 정장 한 벌은 맞추는 게 좋을 거라고.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요령 좋게 선물을 떠넘길 줄 알았다. 에스티니앙은 깔끔하게만 입으면 되지 재단사는 무슨 재단사냐고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아실이 한발 빨랐다.

“평민원의 바람막이로 쓸 거면 귀족 손님만 상대하는 재단사는 안 되지. 힐다도 대성당에 입고 갈만한 옷은 총사대 제복뿐이라던데, 옷 없는 이유가 돈만 없어서겠어? 일을 안 받아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러고는 둘이서 에스티니앙을 빼놓고 한참을 떠들었다. 나는 외부인이고 너는 귀족이라 우리끼리 얘기해서는 쓸모있는 결과가 안 나올 거다, 결국 귀족 놈들이 자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예배 날에는 너부터 검소하게 입어 봐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토의는 아이메리크가 아는 재단사를 통해 옷을 짓되 사용하는 재료의 품질 상한을 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에스티니앙은 왜 너희 둘이서 내 옷을 결정하냐고 항의했지만,

“네가 정장 입은 거 보고 싶은데.”

아실이 이렇게 말했으므로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옷을 맞추러 간 날에는 네 명이 모였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온 힐다를 포함해서였다. 힐다는 진실을 알게 되자마자 달아나려고 했으나 아실이 그를 제압하는 게 더 빨랐다. 힐다는 이 나이에 친구에게 신세 질 이유도, 새로 옷을 맞출 이유도 없다고 거절했다. 아실은 내가 너보다 백 살은 많다며 거절을 물리쳤다. ‘이 정도면 어른으로서 사회생활용 정장을 맞춰 줘도 별문제 없지 않나?’ 힐다가 어이없어하는 사이에 재단사는 재빨리 치수를 쟀다.

아실까지 옷을 맞추는 데에는 힐다의 공이 컸다. 번거로운 일에 원흉을 끌어들인 뒤에야 힐다는 기분을 풀었다. 에스티니앙은 그를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새 옷이 애인에게 아주 잘 어울렸으므로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정작 아실은 에스티니앙보다도 정장을 입을 일이 없었다. 1년에 한 번씩 입어 보고 수선할 부분을 수선하는 게 다였다.

아실의 아침 식사 준비는 겨우 2년을 더 이어졌다. 이슈가르드에서 살게 된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그날 아실은 처음으로 신년 예배 시작 시각에 맞춰 일어났다. ‘올해도 기대해!’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가 에스티니앙이 집을 나서자마자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아침 식사는 에스티니앙이 차렸고 설거지는 아실이 했다.

그 해의 마지막 날 저녁, 아실은 미리 만들어두는 쪽이 낫겠다며 냄비 가득 스튜를 끓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기에도 이제는 입이 아팠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을 잘 재우는 것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다음날 예배당에서 목도리를 풀었을 때는 사람들이 목깃 부근을 흘끔거리는 바람에 좀 곤란했다. 마주 째려봐줬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내리깔았지만. 예배가 끝난 뒤 에스티니앙은 이렇게 불평했다. 왜들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거냐고. 이에 아이메리크는 목에 손자국이 남았어도 그만큼 시선을 모을 순 없었을 거라고 했다.

“잇자국보다는 그쪽이 더 심각하지 않나?”

“네가 싸우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

에스티니앙을 정원의 관상용 동물처럼 보던 평민원 의원들이 평범한 인사를 건네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어떤 점에서 친근함을 느꼈는지 알 만했다.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 옛날 펀데일에서도 새신랑을 놀리는 건 유구한 전통이었다. 어린 에스티니앙은 어른들의 짓궂은 농담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휙,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다 어머니께 귀를 잡혀 혼나고는 했다. 같이 산 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또 아직 언약식을 올린 적 없다는 점에서 아실과 그는 신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7번째 새해를 앞두고 아실은 신년 예배를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깰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일찍 자면 되지 않겠느냔 답이 돌아왔다. 에스티니앙은 그래도 일어나기 힘들 텐데, 생각했으나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를 보러 갈 거라는 다짐을 받아두었다. 그러지 않으면 비몽사몽인 아실을 재우쳐 끌고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아실은 7년 전에 맞춘 옷을 입고 처음으로 외출했다. 어제 지은 것인 양 몸에 잘 맞았다. 에스티니앙의 옷은 그간 뻔질나게 입고 다닌 탓에 퍽 낡아버렸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란히 서 있자니 묘하게 잘 어울렸다. 둘은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대성당까지 걸어갔다. 그러던 중 에스티니앙은 문득 옛 기억을 떠올렸다.

가장 좋은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버지와 어머니. 팔아야 하는 양이나 양털 대신 예배를 보러 가는 이들로 꽉 찬 짐마차. 얼마쯤 달리다 보면 사람들은 나직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울음을 터트린 갓난아이나 엉덩이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어린애를 달래기 위해서. 금방이라도 눈보라를 몰고 올 듯 심상찮은 바람이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듣고 조금이나마 진정하기를 바라면서. 때로는 무사히 한 해를 넘겼다는 기쁨이나, 새해가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기원을 담아.

대성당에 도착해 낯을 익힌 평민원 의원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성도의 영웅을 소개하고. 예배당 안의 귀족 중 가장 검소한 차림으로 출석한 아이메리크와 몇 마디 담소하고, 아슬아슬하게 예배 시작 직전에 도착한 힐다와도 눈인사하고. 쓰고 온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성가대의 찬송이며 교황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다가….

에스티니앙은 향수를 느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올해 이런 감상이 든 이유는 명확했다. 고작 아실 한 명으로 이렇게까지 마음이 울렁인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예배가 한 시간이 넘어가자 아실은 지루해했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이 걸어오는 손가락 장난이나 잡담을 요령껏 받아주었다. 그도 평소에는 이쯤부터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으니까. 둘이 오니까 심심할 일이 없다는 건 좋았다. 시간을 돌리더라도 아실에게 신년 예배 출석을 권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아실은 문득 이렇게 말했다.

“에스티니앙, 날 걱정해서 굳이 예배 보러 다니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정곡을 제대로 찔린 탓에 침묵이 길어졌다. 에스티니앙은 턱과 뺨을 괜스레 문질렀다. 그제야 애인이 졸음에 시달리면서도 아침을 챙기겠다 나선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모를 수가 있나? 라자한에 살 땐 기도는커녕 새해도 잘 안 챙겼잖아.’ 에스티니앙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실이 성도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그런 불안을 어쩌지 못한 나머지, 얄팍한 신앙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든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아이메리크의 부탁도 있었으니 예배를 아예 안 보러 올 순 없었다. 그러나 신년 예배는 좀 관뒀으면 좋겠다고 아실은 투덜거렸다. ‘이게 제일 오래 걸린단 말이야. 네 말이 맞았어. 간소하기는 무슨!’ 에스티니앙은 예배당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인사를 나눴던 평민원 의원들과 아직 젊은 힐다,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을 맡긴 아이메리크를 순서대로 눈에 담았다.

“다들 어른인데 7년이면 슬슬 자기 앞가림할 때가 됐지.”

아실은 대뜸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손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갑자기 뭐야?’ 묻자 그는,

“애인이 귀여워서 그런데 예배 도중에 키스해도 되는지 여쭤봤어.”

라고 소곤거렸다. 에스티니앙은 반사적으로 이런 불경한 소리가 다 있나 싶었다. 어쨌든 그도 이슈가르드에서 나고 자랐던 탓이다.

“뭐라셔?” 별개로, 아실의 할로네가 어떤 대답을 줬을지는 궁금했다.

“나가서 하래.”

아실은 속삭였다. ‘나갈까?’ 그래서 둘은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으나 커다란 남자 둘이 움직이는데 주목받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얼마나 급히 걸었는지 대성당 건물을 나설 때는 외투 앞섶도 다 잠그지 못한 채였다. 예배를 처음부터 빠지면 빠졌지, 중간에 튄 적은 없었는데.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이상한 부분에서 성실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킬킬 웃었다.

바깥은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배 일정 탓일까? 에스티니앙은 겉옷을 여미는 대신 외투를 펼쳐 아실을 폭 끌어안았다. 품에 조금 빠듯하게 들어오는 애인에게 입을 맞췄다. 입김이 뒤엉키는 틈을 타 간간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실컷 키스를 나눈 뒤,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왼손을 굳이 찾았다. 약지 뿌리 부근을 의미심장하게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에스티니앙의 머릿속에 ‘어쩌면?’이라는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실이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이슈가르드로 이사 오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왜 하필 지금인지.

아실은 청혼을 건네면서도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목소리가 이어질수록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이 야속해졌다. 성도의 높다란 박공지붕 사이를 휘돌던 바람이 점점 매서워졌다. 요란하게 울리는 심장 박동을 숨겨주려는 것처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부둥켜안은 연인을 제외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오직 신밖에 없을 터였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이고, 좋다고 대답하고, 입을 맞췄다. 그 세 가지가 동시에 들이닥치자 아실은 얼이 쏙 빠졌다.

에스티니앙은 할로네의 신자답지 않은 낙관을 떠올렸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좋은 한 해가 될 것이다. 낙관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계획을 세울 필요조차 없었다. 반지를 나눠 끼는 것으로 충분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단해서 이래도 괜찮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괜찮으니까 아실이 아직 제 품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에스티니앙은 바람에 부르튼 뺨을 덮어주는 손에 고개를 기댔다. 그는 품 안의 행복을 만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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