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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님 리퀘

세븐틴 디노 나페스/학생물

"찬이가 조퇴?"

웬일이래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담임은 고민할 때마다 안경테를 매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 고민의 심각도와 손가락의 속도는 항상 비례했고, 오늘따라 손가락이 참 바삐도 움직였다. 거짓말에 서툴렀던 찬은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대지 못해 우물쭈물한 데다, 이미 같은 반 학생 한 명이 직전에 조퇴한 뒤였다. 때문에 찬은 속으로 조금 낭패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안이 비쳐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들어서 곧바로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근데, 아까 아프다고 했는데 이렇게 활짝 웃어도 되나. 입꼬리가 고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지, 내려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 떨렸다.

담임은 찬을 제법 좋게 평가했다. 새 학기에 싹싹하게 군다는 이유만으로 반장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그때 찬은 자신이 댄스부 부장직을 맡고 있는데 반장까지 하게 되면 둘 다 소홀해질 거 같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그게 담임에겐 모범 답안이었는지 오히려 더 높은 점수를 받게 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그냥 좀 아파서요'라는 형편없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조퇴증을 받아들고 교문으로 향하고 있는 거겠지만. 찬은 바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손에 들린 조퇴증을 힐끗 보았다. 읽을 수 없는 한자가 박혀 있는 도장이 인주를 충분히 먹지 못했는지 정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건 담임의 것으로, 명백하게 찬이 조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증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이 조금 썼다.

친구들이나 동아리 부원들로부터 '정석', '군대 가서도 싹싹하게 말 잘 들으면서 살아남을 것 같은 남자', 뭐 그런 소리만 듣는 찬에게 이런 거짓말로 조퇴한 경험은 진짜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조퇴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진짜 교칙에 걸맞은 이유가 있었다. 터진 맹장, 아니면 댄스부 외부 대회 참석 등등. 그런데 이번에는 아프다는 변명만 있지, 그런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한 찬은 비가 와서 반쯤은 물이 차버린 운동장을 눈으로 훑었다. C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가서 '저 사실 조퇴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까? 아니면 그냥 아무 말 없이 다음 교시에 책상에 앉아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뒤 도는 찬에 시야에 아까는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걸렸다. 그건 되게 열심히 몸을 꾸깃꾸깃 접고 있었고, 얼굴이 빨갰다. 아, 맞아. 이래서 난 조퇴 했었지. C는 찬의 거짓말을 순식간에 정당화해 주었다.

"같이 쓸래?"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것은 C도, 찬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C는 그 벽을 그대로 두고 싶어 했고 찬은 부수고 싶어 했는데, 그 지점에서조차 둘은 참 맞지 않았다. 그렇지만 C는 같이 우산을 쓰고 가자는 찬의 제안을 거절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비록 지금 바보만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장맛비가 한 번 훑고 지나간 공기는 여름임에도 제법 쌀쌀했고, 차가운 톤의 파란 우산 너머 찬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감기에 걸려 덜덜 떨고 있는 환자에겐 그건 반칙이었다. C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찬은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주면서 함께 걷는 것엔 서툴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C는 이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같은 또래 남자애들 사이에서 찬은 비교적 키가 꽤 작았기 때문에 같이 우산을 쓸 때 들어주기보단 들림 받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의 긴장되어 경직된 팔근육, 느린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이며 최대한 C의 페이스를 맞춰주는 발걸음 등에서 찬의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에, 뜨거운 몸에 이따금씩 빗물이 와닿으며 걷는 느낌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항상 학교에서 듣던, 수업 시작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둘을 배웅하듯이 뒤에서 울렸다.

"조퇴증, 보여주고 가라."

백발의 경비원은 항상 입던 파란색 유니폼 위에 비닐로 된 우비를 입고 있었다. 그와 찬은 썩 껄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는데, 늦게까지 연습했던 댄스부와 정해진 시간에 정문을 잠가야 하는 경비원 사이의 다툼을 중재해야 했던 건 댄스부 부장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눈 결과, 찬이 내린 결론은 그는 정말 원칙주의자라는 것이었다. 학교 입장에서 그건 좋은 점이겠지만, 학생들 입장에선 불편이었다. 어쨌든 둘은 정당하게 조퇴 허락을 받은 학생들이었으니 떳떳해 하던 찬은, C의 손에 들린 조퇴증의 몰골을 보고 멈칫했다. 아까 비를 피해 쪼그려 앉던 과정에서, 빗물이나 땀이 뱄는지 조퇴증이 잔뜩 젖어 내용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이걸로 이 깐깐한 경비원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올라가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C에게 우산을 주고, 자신이 가서 C의 조퇴증을 담임에게 먼저 받아와야 하나? 그런데 아마 지금 수업이 시작했을 텐데. 먼저 내민 찬의 조퇴증을 경비원이 살펴보는 사이, C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한창 고민 중인 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뛰자."

귓가를 살짝 스치는 숨도 뜨거워서 닿는 부분이 화끈거릴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달리는 건 괜찮을까. 찬은 머뭇거리며 C의 얼굴을 살폈지만, 아픈 와중에도 C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솔직히 조퇴증을 보여주지 않고 뛰어서 도망간다는 건 찬에게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는데, 자꾸 C와 엮이면 선을 살짝 넘고 싶어지는 충동이 일었다. 왜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괜찮겠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찬에게 C는 고개를 다시 한번 끄덕여 보였다.

"꽉 잡아봐."

그렇게 말하고 C의 어깨를 감싸는 찬의 팔이 아까보다 더욱 단단했다. 뛰면서 우리가 떨어지지 않고, 둘이 쓰기엔 좁은 우산 안에 서로를 가두기 위해선 더더욱 몸을 붙여야 했다. 찬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던 것 같은 C의 손도 어느새 안정적으로 찬의 팔뚝 위에 살짝 얹어져 있었다. 상대를 안고 뛰는 건 이인삼각과는 좀 더 낯부끄럽고, 설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둘은 뛰었다. 큰 소리로 둘을 부르는 경비원의 목소리는 빗물에 묻혀 아득하게 느껴졌는데, 정작 작은 소리로 내뱉는 서로의 숨은 귓가를 때리는 것 같았다.

물웅덩이를 밟는 찰박, 하는 느낌이 평소처럼 기분 나쁜 게 아니라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찬은 웃었다. 왜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C의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리자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찬에게 하루의 일탈은 어려운 것이었지만, C와의 일탈은 즐거웠다. 이 감각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는 자조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찬은 문득 자기 심장 소리가 C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빗소리가 모든 걸 덮어주길, 찬은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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