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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지타임 뱅상

박병찬은 오늘 난생처음 극장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봤다. 뭐, 뽀로로나 둘리 이런 느낌의 애니메이션 말고, 진짜 마니악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부류의 애니메이션.

처음부터 '아, 이 영화를 봐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외출을 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휴일에 할 짓이 없어서 동네를 어슬렁거렸는데 마침 영화관이 눈에 띄었고, 또 마침 어딘가에서 설문 조사에 참여하고 받은 영화 티켓 기프티콘이 만료 직전이라고 며칠 전 알림이 온 참이었을 뿐이다. '우주혁명기갑소녀 : 위반의 타격'을 본다고 선택했던 것도 단순히 우연이었다. 그냥 이맘때쯤 이 영화가 개봉하지 않을까 생각만 했었는데 진짜 상영 중이었고, 운 좋게도 곧 영화가 시작해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박병찬은 급하게 티켓을 끊고, 1인용 캐러멜 팝콘 세트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L-18. 너무 앞자리는 우리 같은 농구 선수들이 앉기엔 다른 관객들이 불편하고, 정중앙은 자막이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볼 때 자막이 가려져서 불편하니 중앙에서 4~5칸 정도 떨어진 뒷자리로 고른 자리였다. 어라, 나 이런 '자막 있는 애니메이션을 보기 좋은 극장 자리' 같은 거 왜 알고 있지. 순간 기시감이 들었지만 관심사가 곧 대형 스크린에서 나오는 곧 개봉 예정인 초대형 블록버스터 광고로 쏠리고 말았다. 소리가 너무 크게 귀를 때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앉아서 기다리는 애니메이션보다 더 병찬의 흥미를 돋기도 했고.

영화는 재밌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박병찬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명작 애니메이션'의 도식에 정말 부합했다. 일단 오프닝 곡을 부른 가수 이름을 보니, 바로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 기억을 더듬어 TV판 1기와 2기 오프닝을 부른 그 가수라는 정보를 머리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영어로 된 이름이라 바로 기억이 난거지, 일본 이름이었으면 기억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1기랑 2기 오프닝 곡이 정말 호평 일색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가수가 맡았으니까, 그 뭐냐, 그래. 시리즈 오타쿠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병찬은 나름 추측을 해 보았다. 영화는 기존 팬들이 좋아한다던 어두운 색감, 화려한 액션씬, 시리즈에 꼭 한 번씩 나온다던 합체씬 오마주까지 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시리즈가 그 동안 호평 받았던 요소는 다 있으니 괜찮은 애니메이션 아니었나 싶었다. 물론 팬들에겐 그럴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 병찬 본인에게 애니메이션은 다소 유치하게 느껴졌고 난해한 부분까지 있어서 감동 같은 걸 받진 못했다. 엔딩까지 다 감상한 병찬은 올라오는 스탭롤을 보며 여운 대신 아까의 기시감을 다시 곱씹고 있었다. 왜 내가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이렇게 세세하게 잘 알고 있는 거지? 순간적으 든 생각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병찬은 쉽게 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 맞다. 상호.'

박병찬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상호가 여기 어딘가 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상호라면. 상호 병찬에게 직접 알려준 대로, 걔도 자막 있는 애니메이션을 보기 좋은 극장 자리인 '중앙에서 4~5칸 정도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 영화를 봤을 것이기에 눈짓으로 확인해야 할 좌석들의 범위가 작았다. 하지만 몇몇 관객들이 앉아 전율을 느끼고 있었을 뿐, 어디에도 상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맞아, 상호는 이미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뒤늦게 들어 병찬은 다시 출구로 발을 향했다. 상호 걔는 아마 개봉 당일에 와서 보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보고 싶다고 작년에 눈을 빛내면서 말했고, 개봉 예정일까지 달달 외워서 병찬까지 '이 즈음 그 영화 개봉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아까 벌떡 일어났을 때 품었던 감정이 뭔가의 기대감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 개봉하면 같이 보러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영화관과 로비를 잇는 짧은 통로를 걸어 나오면서 병찬은 생각했다. 상호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때 나와의 약속을 기억이나 했을까 궁금했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병찬이 섭섭할 일은 물론 없었다. 왜냐하면, 둘은 일찌감치 헤어졌으니까. 따라서 둘의 관계는 상호의 표현을 빌려 보자면, 2기 제작한다면서 제작사가 도산해 후속작이 나올 일이 없어진 비운의 애니, 뭐 그런 거였다.

둘이 한 집에서 살 부대끼면서 살 때, 티비는 대부분 상호의 몫이었다. 병찬은 거의 쓰지 않았으니까. 소파에 걸터앉아서 뭔가를 본방 사수하면서까지 열중하는 모습에 병찬은 막연히 질투까지 나서 어느새 그 옆자리를 차지하고 같이 봤다. 사실, 애니메이션은 병찬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호 무릎을 베고 누워서,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상호의 손길을 느끼면서, 이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흥분해서 조잘조잘 설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건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스스로는 흘러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병찬은 상호가 말한 '재미있는 명작 애니메이션의 도식'이나 '우주혁명기갑소녀 시리즈의 전통'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 새삼 자기가 상호를 많이 사랑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헤어짐에 아쉬움이 남는 건 아니었고, 그냥 헛웃음이 나올 타이밍 같아 병찬은 한 번 하, 하고 웃었다. 작위적인 것이 제법 상호가 보던 애니메이션 속 남자 주인공의 독백 끝에 나오는 웃음 같기도 했다.

끝을 맺긴 쉬웠으면서 추억이 자꾸 발목을 붙잡고 놔주질 않는 애구나, 우리 상호는. 병찬은 웬일로 남긴 팝콘을 통로 끝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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