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카페타키카페] 토끼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 아그네스 타키온 / 맨하탄 카페 글 연성 (2,202자)

800 by 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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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의 가장 끝자리 숫자가 바뀌면서 아그네스 타키온은 올해 클래식 시즌을 맞이하는 여러 우마무스메 중 한 명이 되었다. 초짜 티를 벗은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트윙클 시리즈에 실적을 남길 수 있는 중요한 시기다. 이미 주니어 시기부터 3승무패의 기록을 쓰고 있던 타키온은 그 기세에 올라 당장의 방학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며 트레이너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여름 합숙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트레이너가 인터넷 검색 결과 최상단의 산장을 급히 예약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겨울 합숙 숙소는 타키온의 지시에 따라 한적한 산장이라는 키워드로 찾아낸 곳이었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북서쪽을 보고 3시간 달려야 하는 도야마현. JR 노선에서 내려 사설 철도를 갈아타고 또 버스에도 올라야 했다. 지루한 이동시간 동안 바뀌어 가는 창밖 풍경이 그곳이 왜 “한적”한 곳인지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거 훈련 계획을 다 못 쓰게 되었구먼”

자기 등쌀에 밀려 일어난 재앙을 강 건너 구경하는 자세였다. 사설 철도 내부에서 유황 성분으로 기묘한 푸른 빛을 내는 내천과 낡은 다리의 풍경을 내다볼 때만 해도 실험할 생각으로 고양되던 타키온의 기대감이 해발고도에 반비례해 깎여 나갔다. 최종 도착지는 4월까지도 눈이 내려 20m의 설벽을 자랑하는 관광지였다. 그야말로 폭력적인 강설량에 12월에서 3월까지 하이킹이 제한되는 곳이었다. 새해 직후의 설산은 분마다 낯빛을 바꾸며 눈을 퍼부어댔다. 굽이굽이 꺾인 하얀 눈의 회랑을 따라 올라온 버스가 그들을 내려놓자 오래된 눈과 새로 내린 눈이 뒤엉켜 만들어진 탑이 산장 입구 양옆에서 반겨왔다. 아직 일몰 시간까지는 멀었으나 산의 날씨가 해를 허락할 리 없어 사방이 어둑했다. 겨울 합숙의 분위기도 쭉 그러할 것이 자명했다.

붉은 벽돌 벽 산장의 내부는 목재 내벽과 가구들로 채워져 있어 제법 아늑했지만, 입산 금지 기간의 산장에 방문객은 극히 드물어 되려 삐걱거리는 낡은 데크 소리로 음산하기도 했다. 큰 유리창이 달린 식당에서 저녁으로 스키야키를 들었다. 해는 등선 너머로 사라진 지라 창의 내용물은 시커멨다. 이동시간 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각자 제방에서 휴식하게 되었다. 트레이너는 소용없게 된 훈련 일정을 관광 일정으로 돌리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타키온은 자신의 방에서 못 쓰게 된 실험 도구들을 늘어놓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했었나요. 쫓고 있는 토끼라도 있는 건가요……?”

“아, 카페”

문소리도 없이 카페라고 불린 검은 그림자가 숙소 방 현관에 들어와 있었다. 타키온은 실험 도구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대충 손짓만 했다. 추운 고지대에서 전력으로 달릴 시 신체 변화, 자연 상태 암벽 등반이 트레이닝에 미치는 영향 등… 할 수 없게 된 실험에 대한 타키온의 푸념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애초에 당장 출발하자고 재촉했던 타키온 씨가 원흉 아닌가요… …저는 간만의 겨울 산행이라 좋지만요.”

“그럼, 아이젠이나 피켈을 챙겨왔나? 암벽 등반이 안 된다면 빙벽 등반으로 계획을 변경해야겠군!”

카페는 한심한 눈빛으로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차분하게 내일 일정을 간략히 전했다. 근처에 케이블카를 타고 온천에 갔다가 댐을 구경하는 코스. 그녀는 개인적인 일정으로 온천은 건너뛰고, 댐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일정이라 함은?”

“…산행이요. 절대 따라 올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미소를 띠며 트레이너 선생님껜 비밀이에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다시 아까와 같이 소리도 없이 방을 나섰다. 타키온은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합숙이라는 단체 활동에서 일탈을 강행할 만큼 등산을 좋아하나 싶었다. 타키온은 대충 도구들을 한쪽에 밀어놓고 이불에 누워 몇 번의 사고실험 후에 잠들었다.

낮이 되자 하얀 눈 이불을 꼭꼭 덮은 설산이 햇빛을 반사해 눈이 시릴 정도였다. 타키온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카페의 방에 들렀다. 카페는 이불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트레이너에게는 어떤 꾀병으로 둘러대었을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 궁금증은 정신없는 일정이 시작되자마자 홍차에 들어간 각설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아찔한 설산의 경사를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 설원의 오아시스같이 자리 잡은 유황온천. 어느덧 일정의 마지막인 댐에 도착했지만, 카페의 그림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에 완공된 이 댐은 공사 중에 170명이나 죽은 으스스한 곳이기도 합니다.”

댐 위를 거니는 사람들이 점으로 보일 만큼 거대한 구조물을 내려다보며 타키온은 전망대 창가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였다. 근처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댐의 검은 물 자국들이 더욱 음침해 보였다. 카페라면 이런 장소를 마다할 리 없는데 싶었다.

그 생각이 미치자마자 타키온은 댐 건너편에 눈에 띄는 검은 점을 하나 보았다. 익숙한 검은 형체였다. 기묘하게도 분명 원근감에 의해 작은 점에 불과한 그것이 이쪽을 바라보고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뒤를 돌아 능선을 오르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타키온은 그녀를 쫓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다리는 자아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트레이너의 외침을 한 귀로 흘리고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 콘크리트 댐마루를 가로질러 산을 향해 질주했다. 곧 해가 질 시간이어서 매서운 산풍이 산꼭대기에서 골짜기를 향해 눈보라를 불어댔다. 그 탓에 달려도 달려도 어쩐지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기나긴 달리기 끝에 댐의 건너편에 도착하자 눈은 더 펑펑 퍼붓기 시작했고 이미 검은 형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겨우 쫓아온 트레이너가 숨을 가쁘게 내쉬며 타키온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 카페가 있었네.”

타키온도 뜨겁고 하얀 숨 구름을 입에서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왠지 쫓아가야 할 것 같았다는 기분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어 눈썹을 찌푸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트레이너는 그럴 리 없다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3월까지 입산을 금지하고 있어서 카페일 리가 없다고, 애초에 카페는 감기 때문에 기숙사에 누워있다고, 겨울 합숙은 단둘이서 왔다고. 타키온은 그 말에 다시 산을 바라봤다.

눈에 반쯤 묻힌 토끼가 한 마리 있다. 죽은 토끼다. 왼쪽 다리가 부러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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