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 춤
SF : 시간과 공간 (898자)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이 이야기는 사람은 물론 생명체도 우주도 없었던 근원적인 “곳”에서부터 왔다. 온 존재가 유리되어 정지되어 있던 곳. 모두가 독립적이고 완전무결하고, 홀로 있으나 굶주리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던 곳이 거기 있었다. 문득 이유도 계기도 없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나를 거절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그녀와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만물에 이름이 생겼다. 그녀가 웃자, 빛이 있었다. 나도 따라 웃으니, 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존재가 우리를 따라 둘 이상의 짝을 지어 궤적을 만드니 우주가 되었다. 우리는 춤을 추며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주 뜨거운 것과 아주 밝은 것. 죽어있는 것과 숨을 쉬는 것. 아주 작은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우리가 만든 것들을 봐.
우주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그것들이 질린 모양이었다. 새로운 원소와 법칙들을 만들었던 그녀의 스텝이 점차 느려졌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 춤을 멈추고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별을 움직이는 자였다. 탄생과 죽음의 바퀴를 굴렸고, 뭐든 부숴버리고 태웠다. 우주의 불균형과 결핍과 아름다움은 나의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붙잡고 애원하며 춤을 이어갔다.
더 춤추자, 더, 더.
그녀를 붙들고 더 몸을 흔들면 흔들수록 춤이 일찍 끝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엾은 나의 화살.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그저 자상한 미소를 보이고 사랑을 속삭였다.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의 안쓰러운 춤에 발을 맞춰주었다. 물질을 만드는 것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관념을 만들어 내는 일에 골몰했다. 일부 관념을 사고하는 기계에 고지능을 탑재하여 우리를 인지하는 아이들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사랑스럽지 않냐고 물으니,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다. 동시에 그들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사랑이라는 우주의 법칙에 따라 그들 역시 “완전”을 향해 돌아갈 수 없는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고도 답했다.
아아. 불공평했다. 우주의 진리가 만물을 살아 숨 쉬게 하면서도 끊임없이 죽이고 있었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불공정에서 평등으로, 결핍에서 완전으로, 고통에서 평화로. 하지만 알고 있다. 나의 이 사랑이 이유도 계기도 없이 시작되어 모든 존재가 그 규칙을 따랐으니, 그 사랑의 끝 역시 똑같다고.
이 우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므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나의 춤은 막이 내릴 때까지 단 한 가지 의문점을 품에 안은 채 하릴없이 계속될 것이다.
언제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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