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GL] 시간여행자 연합

001. 관찰자

SF 백합 시리즈 : 시간여행자 연합 (2,846자)

800 by 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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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정확히는 2028년 8월 8일, 오전 8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내가 ‘그들’을 알아챈 날부터 쭉 바랐던 일이 오늘 일어나려 한다. 이걸 위해 안 그래도 바쁜 박사과정 중에 시간을 쪼개가면서 준비를 했다.

나에 대해 우선 ‘관찰자’라고 정의해두겠다.

어릴 때부터 나는 생각을 즐겼다. 특히나 숫자에 대한 순수한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도 끊임없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혹시 나와 같이 매일 우주의 끝과 시작을 오갈 만큼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계속 생각을 멈추지 않길 추천한다. 나라마다 각기 다른 언어가 있다면 수학은 진리의 영역에서 통용되는 언어다. 그 언어 실력이 늘수록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의 규칙이 늘어난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시간과 거릿값만으로 속력이라는 새로운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나아가 포탄의 속도와 질량, 중력, 공기밀도 등등의 수치를 안다면 발사체가 어디에 착탄하는지도 알 수 있다. 굳이 포탄을 쏘아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생각을 통해 가볍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물론 나도 아직 진정한 세계의 진리를 알진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순수한 수학 계산만으로도, 세계의 사건들을 공식에 대입해 어느 정도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작년쯤 나는 자체 개발한 공식으로 "얼티밋볼" 복권에서 모든 번호를 맞췄고, 팔자 좋게 동부의 사립대학원에서 숫자놀음만으로 박사과정을 보내고 있다. 특별한 초능력이 있거나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대가를 치른 건 아니다. 순수한 생각과 노력만으로 이룬 미래를 보는 능력. 현 학계에 없는 직접 만든 기호와 정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쌓여 이루어진 ‘미래 예측의 공식’은 나만의 비범한 수학적 능력으로, 자신도 신기하고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걸 그대로 강단에서 발표하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받아들여질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물론 진실로 받아들여지더라도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모두가 미래를 보게 될 때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는 안 봐도 뻔하다. 갑자기 원시인에게 스마트 폰을 쥐여줘도 소용없듯이 그러한 혁명적인 일상은 인류에게 단계적으로 다가와야 하겠지. 그 때문에 지금부터 내가 진행하려는 일은 어쩌면 앞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혁명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계속해서 활동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촌락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우주로. 그런데 그건 단순히 공간에서 공간으로 뻗어 나가는 일아닌가? 인간에겐 더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바로 시간 말이다. 지금껏 인류가 공간을 개척해 나가면서 얻은 자원과 지식을 생각해 보면, 시간이라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 얼마나 더 큰 변화를 불러올지… 그야말로 새로운 차원을 하나 더 개발하는 셈이니, 발전 정도와 가용 자원이 얼마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녀석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라는 소리를 해댄다는 반론이 들어올까 싶어 설명해 두자면. 어디까지나 나의 예측 능력은 수학적 계산에 한계 되어있어서 그렇다. 좌표, 수량, 확률처럼 수치로 이루어진 것만을 예측할 수 있다. 인류들이 어떤 문화를 즐기고, 어떤 새로운 지식과 자원을 얻을 수 있는지는 예측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물론 수치를 토대로 나름 예상을 해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전자기기 생산 증가량을 바탕으로 미래의 인류는 앞으로도 거북목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가능성 정도는 유추해 볼 순 있다. 참고로 “얼티밋볼”의 숫자를 맞출 땐 추첨이 진행되는 곳의 경도와 위도, 거기에 적용되는 중력과 기압, 각 공의 나노그램 단위의 질량과 기계가 작동하면서 가해지는 힘의 수치, 그 외의 다른 환경적인 수치와 오차범위를 줄이기 위한 확률 공식들이 사용되었다. 이런 수치 정보를 얻은 경로는 우선 ‘비밀’이다.

반대로 수치화 가능한 것들이라면 예측은 ‘대부분’ 빗나가지 않는다. 대표적인 빗나가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 애초에 계산 수치를 잘못 측정하거나, 적정 역치 구간을 잘못 설정하였을 때, 수치를 잘못 보고 계산했을 때다. 뭐 가끔 있지 않나? 숫자 3과 8을 착각하거나, 아예 비슷하게 생긴 알파벳으로 착각하거나… 어떤 서로 다른 정의를 구분하는 분기점의 설정 오류 역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크다, 작다 따위를 정의하는 기준은 오로지 인간의 주관에서 처음 시작된다. 내가 1㎡의 부피를 가진 물체를 보며 크다고 생각해도 다른 사람에겐 작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관을 가진 생명으로서 생기는 필연적인 오류이다.

둘, 내가 미래를 관측한 후 미래에 영향을 끼칠 상황과 선택을 조정하여, 다른 결과의 미래로 수정할 때. 당연하게도 이런 경우는 관측과 실제 일어나는 미래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해 줘야만 한다. 오히려 차이점이 생기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 받는 나날이다. 내가 파악한 조정치가 수정할 미래와 전혀 상관없는 헛다리일 땐 한숨만 나온다!

그리고 셋, 나 이외의 다른 존재가 인위적으로 미래를 수정할 때. 이전부터 미래를 예측하는 계산 도중, 나의 예측의 영향을 벗어난 여러 변칙점을 발견했다. 앞서 말했듯,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은 예측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수치를 미처 측정 못하거나 잘못 파악하지도 않았고 나의 의지가 배제된 상황에서 빗나간 미래. 그렇다면 또 다른 수치화할 수 없는 변칙점, 즉 나 말고 다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 변칙점들의 경로를 살펴보니 그들이 명백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간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인 것을 알았다.

아무튼, 시간이라는 미지 영역은 인류에게 새로운 산업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미 그곳을 누구보다 먼저 탐험 중인 선구자들이 있다. 나는 그들을 ‘시간여행자’라고 명명하였고, 실제로 몇몇 여행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들의 생각은 잘 모른다. 나처럼 인류에게 다가올 새로운 발전과 혁명에 들뜬 성격일지, 아니면 그저 축복받은 능력이라 여기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이용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복권을 사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빌어먹을 미국 땅의 학비가 너무나 비쌌기 때문이다. 예지능력이 생겼음에도 복권을 사지 않을 사람만 내게 돌을 던지든가 해라! 이전까지 자신을 제지할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시간여행을 한 사람들도, 이제부터라도 자신 외에도 시간여행자가 여럿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여행에 대해 교류도 하면서 위험한 자들도 미리 견제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다. 현재까지 12명의 시간여행자를 발견했다. 그들과 함께라면 분명 아주 흥미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문과 학회 일도 잘 마무리했으니, 이젠 정말 가봐야 한다. 2028년 8월 8일, 오전 8시. 이날은 바로 12명의 시간여행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바로 선구자인 우리 여행자들이 ‘시간여행자 연합’의 설립을 기념하는 것이다!

너저분한 연구실 책상의 종이 뭉치 속을 익숙하게 더듬어 설립 기념 연설 종이를 꺼내 들었다. 꾸깃꾸깃한 종이 위로 교정이나 추가 내용들이 펜으로 잔뜩 휘갈겨져 있다. 발표하기까진 아직 멀었음에도 벌써 심장이 쾅쾅 뛴다. 긴장해서 그렇기보다는 너무나 흥분돼서 요동치는 느낌이다.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연구실 벽면 구석진 자리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그런 거 치곤 하는 행동은 산발인 단풍색 머리를 대충 손으로 이리저리 넘기고 눈에 붙은 눈곱을 떼는 것 외에는 없다.

동시에 머릿속이 예측 계산으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명 전원이 참석할 확률은 60%로 생각보다 높지 않다. 당연하다. 시간여행자라는 작자들이 딱히 사교적인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스스로의 성격을 생각해도 흥미 없는 것엔 바로 신경을 꺼버리기 때문에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그저 다시 계산을 거듭하며 연설이 성공할 확률의 기준을 청중들의 박수 데시벨 수치로 정할지 고민 했다. 거울 옆에 있는 파릇한 식물을 보면서 인사도 건네고, 교수 취향의 오묘한 나비 그림 액자도 오늘따라 정답게 보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디지털 벽시계를 들여다보니, 2028년 8월 12일 오후 4시 47분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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