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쌍둥이
SF 백합 시리즈 : 시간여행자 연합 (2,261자)
2028년 8월 12일 오후 4시 47분. 확연하게 8월 8일을 넘긴 날짜다.
뭐 어떤가, 우리는 시간여행자이다. 누군가 바닥에 그어둔 평면의 선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고차원 거주자의 특권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시간적 제한은 소용없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물리적으로 시간을 돌리거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지는 못한다. 숫자놀이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만으로 시간여행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엔 부끄럽기는 하다. 다행히 연합에는 다양한 시간여행자들이 있다. 개중에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나 물체의 시간여행을 돕는 시간여행자들도 있다.
“엔지니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엔지니어도 스스로 시간여행은 불가능하지만, 그녀의 천재적인 공학적 설계를 통해 만든 인공 웜홀이 다른 시간선을 오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웜홀식 시간여행은 다리가 처음 설치된 시점의 과거까지만 돌아갈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까운 시간대로 여행을 다닌다면 부피와 질량, 유·무기물 등의 조건 제한 없이 이보다 편히 오갈 수 있는 수단이 따로 없다. 심지어 공간이동도 덤이다! 물론 정정하자면 공간이동 기술에 시간여행이 덤으로 활용된 것이다.
다시 연구실 책상 위의 종이 더미를 뒤적거렸다. 오래 걸리지 않아 인공 웜홀을 작동하는 장치를 발견했다. 장치의 모양은 한 손에 잡히는 크기에 어쩐지 갑충같이 생긴 것 같기도 했고 작은 들짐승이 웅크린 모양새 같기도 했다. 이전에 엔지니어에게서 직접 작동 원리를 듣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실질적인 구조를 이해하기엔 내게 공학적 재능이 없었다. 장치를 가져가 연구실 구석의 창고 문에 부착하고 중앙의 버튼을 눌렀다. 여러 표현하기 힘든 기계음과 윙윙거림 소리가 나더니 완료되었다는 듯한 삐삐삐 알림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듣고 문을 열자 넓지도 좁지도 않은 하얀 통로가 나를 맞이했다. 잘 닦여진 하얀 바닥이 먼저 보였다. 건너편에는 다른 문이 하나 보였는데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있었다. 걸음을 옮겨 통로의 중간까지는 넓은 공간에 울리는 듯한 메아리 소리가 강해지더니 반대편에 문에 가까워지자 소리가 잦아들었다.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문을 열고 도착한 곳은 사방이 온통 하얀 벽과 계단, 병풍들이 서있는 공간으로 현실의 인테리어와는 다소 이질적인 분위기다. 들어온 문을 살포시 닫고 다시 내부로 시선을 돌려 쭉 훑었다. 열 명 남짓한 연합원들이 모이기엔 조금 넓은 감은 있었다. 난해한 공간이긴 하지만 기념식을 진행할 단상과 한쪽 구석에는 나름 파티용 카나페와 샴페인이 준비되어 있다. 테이블 뒤쪽으로는 하얀 백합꽃이 싱싱하다.
한참 둘러보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키가 큰 두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둘의 외모는 똑 닮았다. 검은 숏컷머리, 창백한 피부, 큰 체격, 신기하게도 왼쪽 뺨의 점마저도 같은 위치에 찍혀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명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쪽은 허름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다른 쪽은 꽤 부티 나는 명품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쌍둥이”다.
그들은 내가 첫 번째로 발견한 시간여행자이다. 현재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과 같은 캠퍼스의 학부 유학생인데, 그들은 내가 몇 차례 TA(보조강사)로 들어갔었던 교양 강의에서 만났다. 쌍둥이는 흔히 세간에서 생각되는 전형적인 시간여행자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공룡시대로도 갈 수 있고, 지금으로부터 1,000년 뒤로도 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만큼 멀리 가봤는지 물어봤었다. 하지만 쌍둥이 중 지팡이를 쥔 쪽, 아마 그쪽이 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1,000년 뒤 지구 환경이 생명체에게 적합하지 않으면 어쩔 거냐며 한숨을 푹 쉬었다.
“티파니! 잘 지냈어? 오늘도 정말 귀엽다!”
둘의 외모는 정말 닮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성격이 다른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동생 쪽이 해맑게 웃으면서 내게 와락 안겨 왔다. 6피트는 돼 보이는 덩치가 꽉 안아오자 숨이 막힌다. 언니는 언제나처럼 뚱한 표정으로 동생을 타박하고 있었다.
“조교님이 네 친구냐?”
끌어안긴 채 동생의 팔꿈치에 가볍게 탭을 치자 그녀는 쿡쿡 웃더니 금방 팔에서 나를 풀어주었다.
“후… 여기가 캠퍼스는 아니니까 괜찮아. 하지만 전에 말했듯 이름보다는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시간여행자들간의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해서 코드네임을 구상해 두었다. 아무래도 유치하다는 의견 반, 직업 호칭이 편하다는 의견이 반이라서 영화에 나올 법한 멋진 히어로 조직을 세우기는 글렀다.
“난 이름으로 불러줘도 되는데!”
동생 쪽이 약간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말한다. 이상하게도 이 쌍둥이들의 이름은 항상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원래 이름은 고사하고 알고 있는 영어 이름도 언니 것이었는지 동생 것이었는지 헷갈린다. 허탈하게 웃어 보이며 넘기려고 했지만, 동생 쪽이 끈질기게 제 이름을 불러달라며 팔짱을 끼고 들러붙기 시작했다. 큰 체격으로 붙어오자 좀처럼 밀어낼 수가 없다. 내 당황 섞인 웃음소리를 금방 알아차렸는지 언니가 동생의 어깨를 붙들고 끌어냈다.
"그냥 ‘쌍둥이’로 됐어.”
그리곤 언니가 시무룩한 표정인 동생의 귀에 광동어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물러섰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다지 좋은 뉘앙스가 아닌 것이 느껴졌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쌍둥이의 시간여행 방식은 가장 정석적이면서도 인상깊다. 아마 연합원 중 가장 먼 시간을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일 거다. 다만 아주 먼 시간대로 떠나는 특성 때문에 원래 시간대로 돌아오기 위해서 두 자매가 서로 협력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쌍둥이가 동시에 시간여행을 떠날 순 없고 반드시 한 명이 남아서 시간 좌표를 지키는 형태로 시간여행을 한다고 한다. 가장 먼 시간대로 떠날 수 있는 시간여행의 원리가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쌍둥이는 시간여행 원리를 공개하지 않은 유일한 연합원이기도 하다. 그들의 의견은 최대한 존중해주려고 한다. 물론 여전히 궁금해 미칠 것 같지만.
그러다 나는 생각이 갑자기 그쪽으로 뻗어서 쌍둥이의 시간여행 원리를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타임머신같은 기계장치를 활용하고 있을까? 혹은 일상에서의 노력을 통해서도 가능한 걸까? 패러독스는 어떻게 컨트롤하고 있을까? 내가 멈출 수 없는 생각에 빠져있자, 쌍둥이들이 익숙하다는 듯 자리를 비켜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고함에 나는 기겁하고 말았다.
“병신들-!”
아주 크고 우람한 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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