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엣 가문에 생긴 놀라운 이야기

마르엣 가문에 생긴 놀라운 이야기 7

몇 년 전.

마르엣 가문의 수장 카이사르 마르엣은 고민이 컸다.

지난 몇 년 간, 사업을 확장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았던 걸까? 너무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가문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늦게 애를 써 봤지만, 첫째는 아들이었다.

이후 둘째도 셋째도 줄줄이 아들이었다.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딸이 생기질 않는다.

카이사르는 셋째를 낳을 때 쯤엔 난산이었으므로 넷째까지 낳는 것은 몸이 버티질 못할 것이다.

코볼트의 신생아는 인간에 비해 매우 작은 크기다. 그러나 카이사르와 카이사르 안주인은 나이가 나이다 보니 더더욱 딸을 향한 기대를 접어야만 했다.

“제가 미안해요.”

카이사르의 남편, 클라이셰 마르엣이 입을 열었다.

“... 됐습니다.”

“여보..”

"... 후계자는 제가 어찌해보겠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요.”

“예...”

클라이셰낭군은 못내 아쉬운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혹은 둘째 남편이라도 들여 어떻게든 해 볼 터이니, 당신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 예.. 그럼..요..”

이렇게 될 줄 알고도 들어온 마르엣이라는 거대한 귀족가문이었다.

클라이셰 마르엣은 마음속이 쓰라리게 아파왔지만 짐짓 걱정이라고 내뱉은 카이사르의 말을, 제 나름대로 안쓰러움을 담은 눈빛을, 그리고는 휙 돌아버리는 매정함을 천천히 눈 안으로 쓸어 담으며 미소 지었다. 그것이 마르엣 남편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이었다.

딱 한 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이가 자신에게 눈을 뗄 수 없도록..

단 한 번 만이라도..

“...한번만 이라도.. 당신이 사랑에 목매고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싶었어요.”

문 앞에 선 카이사르는 한번 고개를 돌리는 듯싶었으나, 이내 조용히 방을 나섰다.


클라이셰 마르엣의 시신은 그의 담당 주치의가 발견했다.

카이사르와 처음 만난 무도회에서 입었던 파티복을 입고 욕조를 붉게 적시며 누워있었다.

카이사르는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고,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피차 서로의 가문을 위해 결혼 할 예정이었다.

클라이셰 장남은 제 가문의 빚 청산을 위해, 카이사르 독녀는 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그리고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무미건조하게 인사를 나눴고, 평탄하게 약혼에서 혼인까지 이어졌다.

남을 삶을 내내.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무미건조하게.

“그날 당신,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남은 삶이 내내. 처음 만난 그 날 처럼 아름다웠다.

그 무도회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은 미모가 식을줄을 몰랐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않고 바라보고 싶었다.

클라이셰 장남은 외로움과 불안 속에, 카이사르 독녀는 바쁜 회장자리와 가주회의 속에.

피차 서로가 잘 살고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카이사르는 클라이셰 마르엣의 시신을 바라봤다.

처음 만난 그날, 눈을 떼지 못할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킬수는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시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불쾌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걸어 나왔다. 기분 나쁜 기억들이 꿈에서 되살아나 제 목을 조여왔다.

‘오늘로 삼 일 째..’

슬슬 의회마법사가 다 끝났다고 보고 할 때가 안된건가? 심술 맞은 생각에 괜히 세수만 거칠게 어푸거렸다.

아침단장을 끝내고 자연스레 식당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세 아들들이 먼저 앉아 자리를 지켰고, 아침인사를 건넨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안녕히 주무셨나요?”

“좋은아침입니다, 어머니!”

평소라면 무시하듯 지나쳐서 아침식사를 시작했을 카이사르지만...

“... 그래, 좋은 아침 보내라.”

그런 몇마디를 던지고 식사를 시작했다.이니, 미니, 마이니는 신기한 기분으로 식사시간을 보냈고, 사용인들은 저마다 작게 수군거리며 마르엣 가족들에게 물이나 주스 따위를 날랐다.

카이사르의 친절한 한마디는 사용인들을 통해 이 저택의 손님인 맥스와 잉게르에게도 전해졌다.

“계약서님, 아침식사 가져왔습니다~”

“아, 잠깐만...”

이제 막 아침샤워를 끝내고 수건만 대충 걸친 맥스가 가운을 챙기기도 전에 나이 지긋한 인간종 집사가 들어왔다. 저사람, 첫 날 만났던 또다른 계약서다..!

“오늘 아침은~ 맛있는 감자스튜랍니다~ 제가 제일 자신있는 거예요~”

“어, 으, 아, 알겠는..데..”

“아, 혹시 감자나 우유나... 마늘, 샬롯을 못 드시나요?”

“어.. 그게 다야?”

“그거랑 또.. 닭고기 뼈 육수가 들어가죠~ 이것도 못드시나요?”

“아, 아니야.. 다 먹을 수 있어...”

“다행이시네요~ 젊은 코볼트아가씨가 못드시는것도 없고! 참 기특해요~ 우리 도련님들도 잘 드셨으면 좋겠는데..”

“아. 응. 어.. 그래... 애들이 잘 안먹어?”

“안 드신다기보단.. 주인님이 못 먹게 명령 내리셨죠~”

“... 못 먹게 한다고?”

“네에~ 양파는 아주 조금씩만 쓰고.. 고기는 자주 드시게 하면 안 되고요, 대부분 야채만 먹게 하고.. 어린 도련님 들인데 관리를 직접 하셔서 가끔은 답답하다니까요~ 어린애들은 잘 먹어야 한다고 말씀드리지만...”

“너무... 너무한거 아냐?”

“그런데 있죠~? 이젠 도련님들이 그런 식사에 익숙해져서, 가끔씩 주인님 안 계실 때 고기요리를 해 드려도, 안 드시더라고요~”

“오~.. 그거 문제있는데?”

“아가씨는 어릴때 잘 드셨나요?”

“난 그만 먹으라고 할 때까지 먹었지. 물론.”

어쩐지 당당한 얼굴로 대답한다.

“아유, 그래야지.. 그래야 아가씨처럼 튼튼하게 잘 자랄 텐데... 아휴... 물론.. 아들들뿐이니까 장가라도 잘 가라고 어릴 때부터 참 예쁘게 키우는 건 알겠지만요... 첫째이신 이니도련님은 몇 년 전부터 피앙세와 만나서, 올해 안으로 결혼할 거라고 얘기가 나오고 있다니까요?”

“아.. 올해로 성인이랬지?”

“아휴~ 언제 그렇게 자라신걸까... 이렇게 조그마할 때부터 제가 키웠는데... 참 아름답게 자라셨어요..”

“어..... 그.. 네, 네가 여기 애들.. 유모야?”

“그럼요~! 현 마르엣가의 2세들을 키우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 인지~”

‘이 사람이 아마 잉게르가 말하는 그 유모겠구나...’

“그... 그렇구나.. 대단한 일이야..”

“어이구야 내정신좀 봐~ 아침식사 가져다 드리기만 할 걸 이런저런 얘길 다 해버렸네~”

“괜찮아, 재미있었어.”

“어휴~ 오늘은 주인님도 기분이 좋아보이시고 저도 괜히 기분이 좋네요~”

“카이사르... 씨.. 가 기분이 좋아?”

“신기하죠? 평소엔 필요한 말만 하시고, 일 얘기만 하시는 분이 도련님들 인사를 받아주시는 거 있죠~? 가끔 보이는 그런 따뜻한 모습이 본심인 거겠죠?”

“아.. 음... 글쎄... 난 만나본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너가 알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게 아마... 맞.. 지않을까...?”

“우후후 그럴까요..? 괜한 늙은이 감상에 주절주절 말이 길었네요~”

“괜찮아”

이후로도 꽤나 한참을 주절거린 마르엣가의 유모는 식어버린 감자스튜를 가져가 따뜻한 것으로 바꿔준 후에야 맥스의 방에서 나갔다. 계약서끼리 피차 힘내자는 장난스러운 인사까지 더해서...

‘말 진짜 많고... 제법 재밌는 얘기도 많이 해줬다..’

맥스는 옷을 챙겨입고 따뜻한 감자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이 삼일 째 삼시세끼 똑같은 메뉴라니, 미움받고 있나? 아닌 거 같은데... 뭐지?

의미 없는 고민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벅벅 긁어 맛있게 먹은 맥스는 잊고 있던 통신을 열었다.

‘잉게르, 아침 먹었어?’

‘왜 이제야 말을 걸어요..’

‘샤워하고 나오자마자 아침먹으라고 들어와서..’

‘아, 그거 혹시 유모였어요?’

‘어라, 이미 아네?’’

‘ㅎㅎ... 그냥 유모답달까... 손님맞이를 좋아했거든요... 오늘도 감자스튜라서 그냥 생각나서 찍어본 거예요~’

‘너도 스튜받았어?’

‘네, 어제도 스튜였는데 이상하죠?’

‘응... 근데 뭐.. 주는 대로 먹어~ 생각하지 말고..’

‘흐.. 음... 이상한데...’

‘그만 생각하고! 오늘 하루종일 집안 돌아다닐 거라며~ 아무한테나 말해서 나 방에 있으라고 명령해야지.’

‘알겠어요~’

잉게르는 반도 다 먹지못한 스튜그릇을 내려놓고 사람들 앞으로 나설 준비를 했다.

양치를 마저 끝내고, 외투와 가면을 모두 챙겨서 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엔 아무도 없고 조용했다. 잉게르는 복도를 천천히 둘러보며 마력이 새어나가진 않나 확인해 봤다. 구석구석 꼼꼼히 확인하며 걷던 도중, 세 동생들을 만났다. 바로 아래층은 동생들 방이구나.

“아, 저.. 마법사님...”

“아..”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어린 두명이 가면에 놀라 머뭇거리는 사이, 첫째 이니가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 그래.”

“저희 저택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집안에 일어나던 이상한 현상들이 줄어들었어요.”

“별말을.. 너네들... 별일 없지?”

“네. 덕분에요.”

“...그럼 됐어.”

어색한 인사를 끝으로 잉게르는 복도를 마저 둘러보기 시작했다. 동생들 이래 봤자 별 감흥도 없는 어린 코볼트다. 잉게르는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 마법사님...! 저...”

잉게르는 뒤를 돌아봤다. 갔을거라 생각했던 동생.. 첫째 이니가 말을 걸었다.

“... 뭐야. 방에 이상한 거 라도 있어?”

“그.. 그게...”

“...”

잉게르는 불안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일단은 모른 척 지켜봤다.

상기된 얼굴에, 답지않게 말을 더듬고,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여기저기 쳐다보고...

“그...... 다, 다음.. 에, 도... 또.. 만날 일이... 있을까요...?”

“.... 하아...”

잉게르는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했지만 역시 이것 만 한 게 없다는 결론만 번복할 뿐이었다.

마법지팡이를 들고, 첫째의 머리에 대서, 항상 하는 그 짓을..

“...또, 지우실 생각인가요?”

“... 귀찮은 건 달고 다니지 않는 주의라서.”

“기억을 지우더라도, 제 영혼은 그대로 일테니.. 또 귀찮은 일이 생길 거예요.”

“내가 여길 또 올 것 같아?”

“...어떻게든, 누님의 소식은 제게 흘러 들어올 거예요.”

“언젠가 오늘이 기억난다면, 네게 임무를 하나 주지...”

“...”

잉게르는 작게 속삭이고 기억삭제마법을 걸었다.

잠시 꿈을 꾼 듯 멍한 얼굴의 첫째는 기운 없이 계단을 마저 내려가서는 제 형제들과 합류했다.

귀찮은 것을 떼어낸 듯 개운하게 한숨을 쉭 내보낸 잉게르는 그제야 사용인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후임과 대화중인 유모를 찾았다.

잉게르는 계약서와 마주쳐선 안되므로 엣헴. 하고 큰소리를 냈다.

유모는 그제서야 잉게르를 발견하고 깜짝놀라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

후임이 당황해서 잉게르에게 다가왔다.

“아이구, 저기.. 마법사님...! 무슨 일 이신가요...?”

“.........”

“저, 집사장님과 마주치면 안된다는건, 사용인들 모두 알고있습니다. 뭔가 필요하신 거라도...”

“..... 부탁, 할 게 있다.”

“무슨 일 인가요?”

“... 마법이.. 잘.. 작동 하나... 돌아다니면서... 확인을.. 해야 해...... 계약서... 랑.. 마주치면 안 되니까... 나랑 같이 온 조수랑... 그, 집사장이... 방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말해줘..”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바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또 필요하신 건 없는 거죠?”

“응...”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돌아다니세요~”

“응...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덕분에 고장 났던 마법들이 잘 돌아가고 있는걸요~ 감사합니다~!”

그 사용인은 작게 목례하고, 계약서가 있을 손님방으로 서둘러 떠났다.

잉게르는 떠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급히 자리를 떠난 유모는 그동안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음을 다잡고 집안의 마법들을 마저 살펴보기 시작한다.

물방울이 떨어지던 천장은 습기를 닦아내고 방습마법이 새던곳을 고쳤다. 나이 많은 트롤 고용인이 고맙다고 서툰 코볼트-트롤어로 인사를 했다.

식기가 어질러지던 찬장은 그릇들의 정렬기준을 초기화 시켜서 바르게 정리했고, 난쟁이족에게 감사의 의미가 담긴 쿠키를 대접받았다.

방습마법의 습기배출구를 튼튼하게 지지해서 널어놓은 빨래쪽이 아닌 하늘을 향하게 한다. 빨래를 널던 오크와 인간의 혼혈종 신입이 고맙다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온 집안을 전부 뒤집어 엎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간 마법은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면서도 깔끔했고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 두고 왔던 길고 긴 역사를 가진 낡은 마법책도 챙겨놨다.

잉게르는 자기가 해낸 일 들이 자랑스러웠다.

슬슬 이 자랑스러운 실적을 누군가에게 구구절절 늘어놓고 뽐내야 하는데...

-맥스! 있어요?

-어? 어 으응 아까 여기 너네 유모랑 다른 사용인 왔다 갔어.

-방 안에만 있기 지루하지 않아요?

-그럴까봐 너네 유모가 책도 잔뜩 갖다 줬어.

-읽을만한 게 있어요?

-응. 공용어 잘 못한다고 하니까 청소년소설 여러 개 갖다 줬어.

-우리 집에 그런 게 있다고요? 신기하네~

-남자애들은 이런책 좋아하잖아. 막 연애하고.. 학교 다니고, 그런 거.

-웃겨 하여튼.. 아~! 맞다! 저 마법정리 다했어요!

-응? 정리?

-네! 온 집안 마법 설계, 설치, 작동확인, 부작용 확인까지 다 끝났어요!

-그, 그러면.. 이제 갈 수 있는거야?

-으.. 음... 네! 좀만 기다려주실래요? 정리만 하면 되니까... 이제 진짜 금방 끝난다는 것만 알아두세요!

-알았어. 기다릴게.

잉게르는 기쁜 발걸음으로 마법진과 조수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마법의회로 보낼 보고서만 작성하면 정말로 끝이다! 그리 생각하고 조수에게 기밀엄수 서약을 받아냈다.

“이, 이렇게 빨리 끝내실줄 몰랐습니다.. 이제 진짜로 한 시름 놨어요! 감사합니다!”

“... 너도 나쁘지 않았어.”

둘은 어색한 칭찬을 나누며 지하마법진을 잠가놓고 막 계단을 올라온 순간이었다.

“... 무사히 잘 끝난 모양이지.”

카이사르 마르엣이 계약서 맥스를 곁에 두고 말을 걸어왔다.

“......... 내가 온 집안을 돌아다닐 테니, 계약서는 방 안에 있게 하라고 사용인등 전부한테 말 했을 텐데?”

“지금은 나와 같이 있지 않나?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따라오게.”

무슨 연유에서인지, 카이사르는 맥스를 제 아랫사람을 대하듯 편안하게 어깨에 팔을 걸치며 서재로 향했다.

-맥스? 무슨일이에요?

“아, 맥스라고 했나? 계약서의 이름이.”

“!!”

카이사르는 한 건 잡았다는 얼굴로 손에 든 작은 금속덩어리를 보여줬다. 저건...

‘통신 귀걸이가..!’

“이런 잔꾀를 부린건가? 하여간 마법사란 놈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집사장이 오늘따라 멍청하게 군다 싶었어.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물어볼 필요도 없지.”

잘 닫혀있는 서재 문을 확인하며 카이사르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맥스의 뒤에 섰다.

그리고는 제왕이라도 된 듯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마법의회에서 시킨건가? 마르엣 가문과 이 마을에, 마법사 놈들의 하찮은 돈벌이 수단을 팔고 싶어서?”

“... 뭐?”

“아닌척 해도 소용없어. 이 계약서, 단순히 마법사의 조수라고 하기엔 할 줄 아는 게 꽤 많아. 조금만 배운다면 누구나 탐낼 인재가 될 거야. 마르엣 가문이 후계자를 찾아 온 나라를 뒤집고 있는 이 시점에 말이야..”

“...”

잉게르는 기가 찼지만, 카이사르는 여전히 할 말이 많았다.

“너희가 만났을 유모라는 자는, 전에는 저택의 최고 집사장이었고, 가문의 단 한명 뿐인 중요 참고인이다. 아무리 늙었다고 해도, 기억력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퇴화하진 않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너희들이 오고 계약마법인지 뭔지를 걸고 나서 갑자기 제 일조차 까먹었는데, 이것 또한 너희들의 계획 안에 있는 것 아니겠어?”

잉게르는 확실히 그 지점이 수상했다. 제 기억속의 유모는 다정했지만, 기억력과 약속 지키기 만은 칼 같았으므로, 외부 손님에게 똑같은 식사를 연속으로 대접한다는 것은 이상했다. 카이사르도 이 점을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지금은 유모로 헌신중인 중요 참고인에게 마법을 걸어서 기억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이에, 마르엣 가문에 계약서 자네가 발을 들여서는, 마법의회에서 공급하는 저질스러운 물건들을 이 마을에 팔아제끼려는 의도 아니었나?”

카이사르는 너무도 확신에 찬 말투로 잉게르를 다그쳤다. 잉게르 보다도 덩치가 큰 카이사르가 그렇게나 당당한 투로 말을 하니, 없는 일도 생길것만 같았다.

그런 카이사르의 앞에 있던 맥스는 점점 더 작아지는것만 같았다.

“이래서, 마법나무인지 뭔지 수상쩍은걸 본부로 삼겠다고 할 때부터 그 괴짜 놈들의 심보를 알았어야 했는데... 제기랄. 그런다고 이 내가 넘어가 줄 것 같았나?”

“...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진정해.”

“하! 이놈이나 너나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가증스러운 마법사 놈들. 내 도움으로 자리 잡은 주제에... 내 돈도, 지위도, 자식새끼들까지 챙겨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나...?! 그래서 내게 마법생물의 행정권을 받아갔나...! 하! 그래도 절대...! 절대 내게서 더 이상 어떤 것도 더 받아가지 못해...! 너희 둘 다, 아주 큰 일 난 줄 알거라....!”

카이사르는 급기야 스스로를 다그치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잉게르는 맥스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광적으로 중얼거리는 그 어른을 바라봤다.

고작 이런 사람 이었구나.

잉게르는 맥스에게 쉿 하는 손짓을 하며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내가 그렇게 무서워했는데..”

“...!”

맥스와 카이사르는 각각 다른 이유로 크게 놀랐다.

우리가 분명 이사람에게 깰 수 없는 마법을 걸기로 한 건 맞긴 하지만, 이건 나랑 말한 게 아니잖니~라는 생각으로 놀란 것이 맥스였고

제 얼굴과 똑닮은 밝은 크림색 털에 짙고 확연한 갈색무늬, 동그랗고 별처럼 빛나는 저 눈매는 분명, 그 사람의...

“잉게르!”

“맥스! 조용히 해 봐요! 제가.. 제가 해결할게요!”

잉게르. 그건 분명히 이 마법사의 이름.

그리고 맥스..?

“맥시무스... 너 설마...! 맥시무스냐?”

“... 그 이름 진짜 오랜만에 듣네..”

“...... 그래... 그래, 말도 안 돼..! 너..! 너 대체 무슨...! 여긴 대체..?”

“마법을... 깬 거야? 잉게르..”

“... 저 사람이랑... 유모만요.”

“유모?”

“...매, 맥스.. 맥시무스.... 언제부터...!”

카이사르는 지금 제 머릿속에 흘러들어오는(혹은 억압되었다가 방류되는)기억에 심히 혼란스러웠다. 마법사?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내서... 온 마을에....! 그리고 유모도...!

“.. 아가씨!”

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마르엣 가문의 유모이자, 전 집사장이 뛰어들어왔다. 기억의 퇴행은 싹 나은 것 같아 보였다.

“아아... 아가씨...! ...주인님..!”

“유모..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언제.. 언제 이렇게...! 우리가.. 우리가 왜...?”

“유모...... 카이사르. 맥스도. 제가 말하는 거.. 잘 들어주세요.”

“너, 대체 무슨짓을...!”

“들으라고!”

잉게르는 제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카이사르는 놀라서 주춤거렸다.

잉게르는 아직도 제게 명령하던 과거의 카이사르가 망령처럼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오늘 본 어머니의 밑바닥은 무섭지 않았다. 카이사르도 실수라는 것을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유 없이 두려워 할 존재가 아니었다.

“... 유모, 유모가 우리 집에 평생 헌신하면서... 제 유모로도 있어주시고, 동생들도 키워주신 거... 기억 나시죠?”

“네.. 네 물론이죠 아가씨.. 우리 맥스아가씨..”

“후흣... 좋아요...”

잉게르는 키가 한참이나 작은 유모에게 맞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잉게르의 얼굴에서 용서를 구하는 슬픔이 묻어 나왔다.

“... 유모, 미안해요. 제가 가출하면서 유모한테 걸어둔 마법이... 유모의 가문 대대로 걸려왔던 마법을 예상 못했어요... 제가 와서 집안 마법들을 고치면서, 유모의 기억마법도 손 봤는데... 안 좋은 것 끼리 충돌하면서.. 유모의 기억이 조금씩 날아간 거예요.”

“... 자, 잠깐만요. 가문 대대로 걸려왔던 마법이라니...?”

“그건... 카이사르가 더 잘 알 거예요.”

“너, 말버릇이 그새...!”

“그래! 나 말뽄새 구리다! 느그 느, 느이 이 이 귀족이랍시고 불쌍한 우리 유모 같은 사람들 뒤에서 단물만 쪽쪽 빨다가 쭉정이마냥 내치는 꼬락서니 보기 싫었다! 왜!”

맥스는 잉게르가 말 한 대부분의 공용어를 못 알아 들었지만,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잉게르는 벌떡 일어나 카이사르에게 언성을 높였다.

“유모가 가족 대대로 우리집안에 헌신해 왔다고?! 웃기지 마! 이 가문이 처음 시작한 설탕이랑 후추사업은 유모네 선조랑 마르엣 선조가 같이 시작했다가 우리 쪽이 배신 때린 거잖아! 이딴 집안에서 누가 있고 싶겠어!”

“이... 네가 그걸 어떻게...! 너한테 아직 가르쳐주지 않았던걸...!”

“유모, 들었지? 저사람도 그걸 알고 당신을 집사장으로 부려먹은 거야.”

“아, 아가씨.. 이런건...!”

“유모 걱정마.. 내가 지켜줄게..!”

“누구 맘대로 그게 가능할 것 같으냐...!”

카이사르는 봉인되었던 기억마법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녀석을 붙잡아두면 후계자 문제도, 마법의회 문제도, 집안의 마법보수 문제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

카이사르는 마법을 설계 해보려 애썼지만, 마법을 썼다는 감각만 희미하게 기억날 뿐, 실질적인 지식과 모든 실력이 윤곽을 드러낼 듯 말 듯하며 간단한 공식 하나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내가 바보냐? 전부 다 기억나게 하게?”

“!!!”

맥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잉게르가 확실하게 벗어나는구나..!

카이사르는 믿을 수 없었다. 맥시무스가 어릴적, 이토록 엇나갈 만큼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이런 타락한 생각을 가진 걸까. 타락했다고? 아니지, 마법은 타락한 게 아니다. 더러운 게 아니야. 하지만 왜일까, 제법 긴 시간 마법을 금기시하며 살아온 탓일까? 마법이란 제 손발과 마찬가지의 당연한 도구였는데, 이젠 그와 동시에 마법은 끔찍하고 역겨운, 가져선 안될 금기라는 생각에 휩싸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불쌍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마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둔 “마법은 금기”라는 규칙에 스스로 얽혀매였다.

“... 어째서.... 왜, 왜! 그런 거냐! 맥시무스 마르엣!”

“나는! 엄마가 만들어둔 이 망할 마르엣가문을 물려받지 않을 거예요!”

“뭐...?!”

-아니! 뭘 잘했다고 당신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해!

맥스가 끼어들어 카이사르를 쳐다보며 코볼트어로 쏘아댔다.

-어린애를 쥐 잡듯이 몰아세워놓고는! 잉게르가 제 때 도망쳤으니 다행이지, 이 애는 지금 당신한테 혼난 기억 때문에 밥 하나도 다 못 먹는 거 알아? 모르겠지! 관심도 없었으니까! 지금 당신이 저 어린 남자애들한테 하는 꼴 좀 보라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게 하고, 바깥세상을 보여주지도 않는 게 얼마나 애를 망치는 건지 알아?!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여기 유모도 다 아는데, 당신 혼자만 모르면 당신한테 문제가 있는 거지!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냐! 귀족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몸에 익혀야 하는 품격이 있는 거다! 아무 때나 짐승소리로 짖어대는 너 같은 녀석이랑 다르게 말이다!”

-거 봐! 불리하니까 남 깎아내리는거! 나한테 후계자로 들어오니 마니 하던 놈이!! 그리고 따지자면 공용어 쓰는 놈들이 코볼트어를 배워야 하지 않겠냐! 왜 우리가 그놈들 언어에 맞춰줘야 하는데!

“맥스, 진정해요. 제가 마무리 할게요.”

맥스는 영 속이 덜 풀렸는지 씩씩거렸지만, 카이사르의 앞에서 시원하게 한 소리 내뱉었으니, 일단은 물러서기로 했다.

“... 유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유모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고, 마음을 정했다.

“... 예!.... 잉게르.. 아가씨!”

잉게르는 미소지었고, 아직도 화가 난 듯, 억울한 듯 한 표정의 카이사르에게 다가갔다.

“... 잉게르..라고? 네가 진정 마르엣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거냐?”

“.........”

잉게르는 맥스를 한번 쳐다보고 유모를 한번 바라봤다.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카이사르와 시선을 나란히 세웠다.

“맥스!”

잉게르는 신호를 보냈고, 맥스는 재빨리 카이사르와 유모의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마법 의회에서 온 정 5급 마법사 '잉게르'가

마르엣가문의 '카이사르 C. 마르엣'의 의뢰, ‘저택 마법 전체 재시공’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였으며,

의뢰주 ‘카이사르 마르엣’을 대신해, 가문의 주요 참고인 ‘집사장’의 확인을 받아, 모든 보호마법의 시점 종료를 선언한다.

의뢰 주 마르엣가문의 '카이사르 C. 마르엣'과 ‘집사장’ 두 사람은 이 마법사와 있었던 어떠한 일도 일절 발설 할 수 없으며,

집안에 설치된 모든 마법과 사건은 정 1급 마법 생물체 아브락사스의 나무에 의해 보호된다.

카이사르는 잉게르가 마법을 시전하는 내내 힘을 줘 봤지만, 도저히 이 조수를 이길 수 없었다.

“이.. 인정 못해..! 이딴..! 이따위 술수로 뭘 원하는 거지?! 난 네놈의 마법 따위 믿을 수 없다..!”

“유모가 인정했고, 아브락사스의 나무가 인정했어. 유모를 당신의 대리를 인정 한 거라고. 마르엣 가문은 유모의 가문이 함께 세운 거나 마찬가지니까!”

“마, 말도안돼...! 그자가... 왜... 왜..!”

카이사르는 버틸 수 없다는 듯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잉게르는 그 모습을 한번 흘기고, 유모에게 다시금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 유모, 제가 힘든 기억을 되살려서 미안해요. 하지만...”

“아가씨.. 정말 잘하셨어요.”

“유모..”

“...정말... 정말로요. 잘 자라셨군요.”

“........ 고마워...”

“... 유모 내가.. 어떻게든 다른 일자리, 찾아줄게. 여기서 나가자. 응?”

“...”

유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아가씨.. 전 여기 유모로, 집사장으로 남아있을 거예요.”

“... 왜..!”

유모는 시선을 돌려 카이사르를 바라봤다. 고개를 푹 숙인 카이사르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카이사르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 그냥...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아가씨처럼 이렇게 용기를 내는건...”

“... 내, 내가 도와줄게...! 카이사르가 못 쫓아오게...!!”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럼..?”

“... 후후... 조금만 커서 돌아와 주실래요?”

“.. 왜...”

“아가씨, 이제 돌아가실 때입니다.. 아가씨가 제 기억과 주인님의 기억은 되돌려놨지만... 저택 내의 다른 녀석들은 고쳐진 마법에 신이 나 있고, 가문의 바깥에선 여전히 우리와 거래하고픈 사업체들이 많답니다.”

“... 그래서.. 야..?”

“... 아가씨, 돌아와 주셔서 너무나 기뻐요... 하지만, 아가씨는 지금 아가씨의 자리가 있잖아요? ... 언제든지... 제게 편지라도 남겨주세요.”

“.. 유모...”

“잉게르, 이제 가야 해.”

“아니, 맥스..”

“유모는 유모의 일이 있으니까 여기 있겠다는 거지.. 우릴 배신할 사람도 아니고, 할 수도 없잖아?”

“....”

“조수님 말씀이 맞아요. 아가씨, 카이사르 주인님과 마르엣 가에는 제가 여전히 필요해요.”

“......”

잉게르는 침울한 얼굴로 무언가 생각했다.

“... 언젠간... 돌아올 거야... 카이사르가 더 늙으면... 저 사람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만큼 늙으면.. 그때 돌아올 거니까... 걱정 마... 내가.. 모두를 책임질게.”

“아가씨..”

“..그러니까 유모는.. 그때까지.. 건강해야 해?”

“네 물론이죠.”

잉게르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맥스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커다란 저택을 지나 정원을 지나면서 뒤를 돌아봤다.

붉게 지는 노을 사이로 카이사르의 뒷모습과 인사하는 유모가 보였다.

둘은 손인사를 남기고, 교차통로로 사라졌다.

마르엣 가문에 생겼던 놀라운 사건이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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