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BG3/아스타리온 드림/아스타브

BG3 - 대충 엔딩 이후 시점

몽유기담 by 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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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을 추구하는 필멸자란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지만 검의 해안 해변의 모래알만큼은 아니더라도 캔들킵에서 소장하는 책 페이지 수 정도는 될지도. 방금 막 불태운, 그중 한 페이지쯤 될 리치 마법사를 보면서 바드이자 소서러인 하프엘프가 생각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다른 생각에 빠지는 건 모험가로서 실격―이겠으나, 발광 버섯조차도 없는 어두운 길에 꼭꼭 입구를 숨겨두고 있던 이 던전에 살아있는 존재라고는 그뿐이었고, 남아있는 존재는 그들 둘뿐이었다. 그와 파트너. 활과 화살을 거두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재며 뼈를 훌쩍 넘으며 다가온 그는 얼굴만큼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같은 언데드 동지인데, 친해질 수 없었다니 아쉽네. 하긴, 우리 동네는 이미 언데드 친구들이 득실득실하니 굳이 하나 더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 물론 자기는 빼고 말한 거야.”

“물론 그렇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하프엘프가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화려한 백발과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인상적인 붉은 눈을 빛내면서 아스타리온은 언제나처럼 유들유들하게 농담을 던졌지만 표정은 어쩐지 내뱉은 말만큼 명랑하지 못했다.

“불멸을 위해서 스스로의 살을 썩히고 리치가 되다니, 말로는 들어봤지만 실물로 보니 저래서야 본말전도 아닌가 싶네. 정신도 멀쩡해 보이지 않고.”

“꽤 오래되었나 봐. 리치로 오랜 시간을 보낼수록 비틀리기 쉽다고들 하니까.”

하프엘프는 보았던 책 내용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점점 기억은 희미해지고 정신은 뒤틀려, 결국 인간성은 잃고 강박적이고 왜곡된 의지로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게 된다고들 했다. 그 의견에 아스타리온은 신랄하게 사족을 달았다.

“이런 음습하고 캄캄한 미로에서 독거생활을 하니 그렇지. 밤에라도 나가서 바람도 쐬고, 사람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했으면 사교성이라도 좋지 않았겠어? 적어도 저렇게 우울한 인상은 아니었겠지.”

“확실히, 바람을 잘 쐬어서 그런가? 이쪽이 더 말도 잘하고, 귀엽고, 예뻐서 좋긴 해. 간혹 술 냄새는 좀 나지만.”

“하! 그래도 내 향수랑 섞여서 매력적이지?”

거만하게 복종을 요구하던 리치 마법사의 말들을 떠올리며 하프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토벌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수천 명의 뱀파이어스폰들과 함께 언더다크에 내려와 그나마 안전한 터를 찾아 돌아다니던 중, 인적도 없고 괜찮아 보이는 요새를 발견하여 혹시 모를 위험요인이 남아있는지 어떤지 근처를 탐색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러다 비전 마법으로 꼭꼭 숨겨진 입구의 존재를 간파하고, 우선 후열의 다른 스폰들에게 던전의 존재를 알린 후 둘이서 먼저 진입했다. 그리고 바깥세상의 소식을 전혀 모르던 리치 마법사와 마주쳐 여차저차한 끝에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여 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불멸을 꿈꾸던 이를 또 하나 죽음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피가 흐르기보단 재가 흩날리는 전투였어서 그런지 전투가 끝나고도 피의 희열, 전투로 고조된 흥분의 여운을 즐기기보다는 영 떨떠름해 보이는 아스타리온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카사도어에게서 벗어난 지 날로 세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말은 그가 “선택”을 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보물이나 감춰둔 물건이 있을 법한 곳들을 모두 둘러보고 난 하프엘프는 계속해서 내실을 둘러보는 아스타리온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고 토닥였다.

“안이 좀 갑갑하네. 다 봤으면 나가자.”

“응? 아, 그래.”

한 번 의식했기 때문인지 밖으로 나온 후에도 아스타리온은 평소만큼 명랑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눈떴을 때만 해도 좀 더 빛나고, 밝고, 가벼웠던 것 같은데. 햇빛으로 밤낮을 구분할 수는 없어도 생체시계가 속삭이는 대로 캠프를 꾸린 후에도 그런 모습이 계속되자, 결국 하프엘프는 다소 직접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 리치가 신경 쓰여?”

“응? 갑자기?”

아스타리온은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가, “아냐, 아냐.” 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 녀석을 왜 신경 쓰겠어? 그런 못생긴 걸 생각하기엔 1초도 아까운데. 난 그냥… 자기 생각을 하고 있었지. 왜?”

“네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너야말로 내 생각은 왜?”

“자기 생각을 왜 하냐니? 그런 억울한 말을 하면 나 상처받을지도 몰라, 자기. 나만큼 자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건 의심하지 않지만….” 하면서도 하프엘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을 돌리려던 아스타리온은 그 시선에 결국 조금 더 솔직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래, 아주 잠깐 정도는 생각을 하긴 했어. 한 1, 2초쯤? 그렇지만 예뻐서 따위는 아니고, 그냥… 재가 되는 모습이 좀 보기 안 좋아서 그랬지.”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가 어쩐지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네가 해야 했던 ‘선택’이 떠올랐나 하고.”

‘선택’에 대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바로 알아들었고, 웃으면서도 조금은 긴 한숨을 토했다.

“괜찮아. 선택지가 적었던 게 아쉬울 뿐이지, 지금도 후회는 안 해. 거기다 그 덕에 네가 지금도 살아서 옆에 있는 것 아니겠어?”

“난 항상 네 옆에 있었을 거야.”

“알아. 그렇지만 지금과는 조금 달랐겠지.”

아스타리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프엘프는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수 초가 지난 뒤에야 말뜻을 이해했다. 이번에는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뜰 차례였다.

“맙소사. 그런 뜻이었어?”

연인의 반응에 아스타리온 역시 자신의 말실수와 상황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타이밍은 지나간 뒤였다. 그러니까, 그는 아스타리온이 꿈꿨고 한 번씩 말했던 “둘이서 함께 영원히 안전해지는” 미래며 방법이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몰라서가 아니라, 뱀파이어나 뱀파이어 초월체, 불멸 따위의 단어가 그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꿈꾼 적도 없었기 때문에 생각도 못 해보았다는 것이 정답이었다.

난 그게 카사도어같은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미래―같은 걸 말하는 건 줄 알았는데. 연인이 기막혀하지도, 어이없어하지도, 그렇다고 화내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자 아스타리온은 헛웃음과 함께 변명을 주워 삼으며 뒤늦게나마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었지. 그때 나도 머릿속이 좀 어지러웠었잖아. 우리 주변 상황도 어지러웠고. 위기일발 상황도 많았고.”

“흐음. 그랬지.”

“그렇지? 그래도 끝이 좋으니 좋은 거 아니겠어. 지금은 나도 허파에 들었던 바람은 빠졌으니까. 아주 홀쭉하잖아, 안 그래?”

“으흠.”

“비록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지만― 햇빛이나 발더스게이트, 주점, 술 등등 사실 세보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자기랑 위험과 위기 연발인 모험 생활을 즐기는 건 만족스럽단 말이지. 스폰 친구들도 수천이나 되니 뭐, 일단 술집도 하나 만들고 나면 술친구가 없어 외로울 일은 없지 않겠어? 그러니까, 우리 술향기 가득한 빛나는 내일을 위해 우리 얼른 잘 준비하자, 자기. 나 피곤해.”

끝은 거절할 수 없는 애교였다. 하프엘프는 결국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에 따랐다. 그러나 야영 준비를 하고, 불을 피우고, 그의 침낭 옆 가까이 침낭을 붙인 채 눕고서도 그 생각이 났는지 그는 키득거리며 푸념했다.

“세상에, 난 그게 그런 의미인 줄 몰랐었어.”

“그냥 세상 끝날 때까지 몰랐어도 됐을 텐데. 다시 잊어주면 안 될까?”

“알아버린 걸 어떡해.”

물론 언데드라고 정말로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여정 중에 죽음으로 돌려보낸 수많은 언데드, 카사도어, 오늘 마주쳤던 리치 마법사까지도 모두 그랬다. 그러나 따로 수명이라는 게 없다는 것은 맞았다. 그러니 사는 동안 별 탈이 없다면 아스타리온보다 먼저 그가 떠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에 미친 하프엘프는 손톱 끝으로 침낭 천을 긁다가 그에게 물었다.

“내가 죽고 나면?”

“자기, 부정 타는 소리는 하지 말아줄래? 당장 일어나서 사방에 소금 뿌리기 전에.”

“그걸로 되겠어? 목욕재계도 해야지. 그래서, 내가 떠나고 나면?”

“그만둘 생각이 없구나? 글쎄, 지금은 그런 생각하고 싶지 않네. 어쨌든 자기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건강하게 살아있고. 뭐, 자기가 엘프였다면 환생을 기다리겠다는 로맨틱한 꿈을 꿀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니니까.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 다 험한 삶을 살고 있으니 언제 누가 먼저 훅 갈지 모르는 일이고, 뭘 생각해두든 다 꿈같은 소리 아니겠어?”

“그건 그렇겠네.”

연인의 손이 아스타리온의 창백한 뺨을 슬쩍 꼬집더니, 이내 비단 만지듯 부드럽게 쓸며 어루만졌다. 사랑해, 하고 속삭이는 숨결이 무엇보다 따사로웠다.

“매혹적이네. 키스도 해줄 거지?”

“응.”

솔직한 대답과 함께 깃털처럼 떨어지는 입술도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아스타리온은 연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가볍게 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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