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테 드림 단편 모음집

앨범 표지의 가죽이 너덜거렸다

루크 헌트 드림

앨범 표지의 가죽이 너덜거렸다.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힘없이 팔랑거리는 검붉은 가죽은 휴짓조각이랑 그다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건지, 얼마나 많이 자주 들춰본 건지 모르는 낡은 앨범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경한 아이렌은 고개를 들어 물건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러운데, 선배는 사진을 정말 잘 찍네요.”

“그렇니? 후후. 네가 칭찬해주니 기분 좋구나.”

 

루크는 앨범을 정리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빌의 모습을 찍어 정리해놓은 그 앨범은 꽤 소중한 기록물이었기에, 대하는 손길이 퍽 정성스러웠다.

 

“빌 선배도 이 앨범을 보셨나요?”

“그렇지. 빌 뿐만이 아니라, 우리 기숙사 학생 중에선 본 이가 꽤 있을 거란다. 너처럼 다른 기숙사 학생도 간간이 있고.”

“그래요? 어쩐지…….”

 

그러니까 그렇게 너덜너덜한 거겠지. 아이렌은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 빌 셴하이트의 사진 아닌가. 폼피오레 학생뿐만이 아니라, 누구든 그에게 호감이 있다면 이 앨범을 보고 싶겠지.

물론 빌이 워낙 유명한 스타인 만큼 단순히 그의 사진이 보고 싶다면 인터넷에 검색하기만 해도 온갖 모습의 사진이 잔뜩 나오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나.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이밖에 찍을 수 없는 일상적인 모습을 담은 사진. 심지어 촬영자가 카메라를 잘 다뤄서 사진마다 애정 가득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사진. 누군가의 팬이라면, 이런 특별한 사진을 어찌 놓치겠나.

좋아하는 것이 많아 팬심만큼은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아이렌은 애정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위대한 사진작가를 바라보았다.

 

“빌 선배께서는 뭐라고 하셨나요?”

“몇 장은 소장하거나 SNS에 올리고 싶으니 달라고 하더구나. 기쁘게 전해줬지!”

“흐음.”

 

역시 기회는 놓치지 않는 점이 프로답다. 아이렌은 빌이 어떤 사진을 골라 가져갔을지 궁금해졌지만, 그걸 당사자에게 가서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루크의 방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드나들 수 있어도, 역시 빌의 방은 여러모로 발을 들이기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필름이나 데이터는 남아있으려나.’

 

역시 누군가에게 부탁한다면 빌보다는 루크지. 그리 생각한 아이렌은 책상 위에 놓인 카메라로 시선을 옮겼다.

부드럽게 돌아가는 제비꽃색 눈동자를 발견한 루크는 은근슬쩍 권유했다.

 

“아이렌 군도 이런 걸 만들어 보면 어떠니?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이 아니더라도, 네가 좋아하는 걸 찍어 모아놓으면 좋은 앨범이 만들어질 거란다.”

“포트폴리오처럼요?”

“그래. 하지만, 너무 무겁게 생각할 필요는 없단다. 결과물이 최고가 아니더라도, 아이렌 군이 좋아하는 걸 직접 모아두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치 있지 않겠니?”

 

가장 뛰어난 것만 예술이 아니며 아무리 하찮은 것에서도 제 나름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루크 다운 발언이다. 아이렌은 그 말에 동의했지만, 쉽게 그러겠다고 응하진 못했다.

자신의 신뢰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볍게 말을 뱉고 싶지 않다. 어영부영 시작해서 결과물도 내놓지 못하고 시간을 버리기엔 지금 이 시기는 너무나도 중요하지 않은가. 아직 무언가를 잘 흡수 할 수 있는 어린 나이, 경제적 책임이 상대적으로 적어 능력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다른 이들처럼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쓸 수도 없어 좌식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이미 취미도 많은 제가, 과연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흐음.”

 

매사에 진지한 아이렌이 빠르게 머리를 굴려 답을 찾아내려는 게 눈에 보였던 걸까.

대답을 유보한 채 표정이 심각해진 아이렌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린 루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아이렌 군은 뭐든 성의를 다하여 열심히 하니까, 취미라도 대충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알고 있단다. 하지만 시작도 해 보지 않으면 아깝잖니? 사진 찍히는 건 싫어해도, 사진을 찍는 건 좋아하는 너니까.”

“……그런가요?”

“그럼. 무엇보다 끈기도 눈썰미도 있는 너이지 않니. 그러니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하지 말렴.”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솔직히 말해서, 이러쿵저러쿵 고민할 시간에 일단 시작하는 게 더 나을 거다.

루크의 말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진 아이렌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상대와 눈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선배.”

“후후. 뭘. 오히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줘서 고맙구나.”

 

아마 당사자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아이렌은 보기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해도 무작정 상대 말을 믿지 않고,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었지. 게다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으려는 은근한 고집도 있었으니,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설득되어 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상대가 제게 느끼는 신뢰를 새삼 다시 느낀 루크는 입꼬리가 쑥 올라가려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하지만 역시 이왕 한다면 제대로 하고 싶으니, 관련 책이라도 찾아봐야겠네요.”

“그런 거라면 내가 가르쳐 줄까?”

“그래도 되나요?”

“그럼! 다음에 같이 소풍이라도 가서 함께 사진을 찍을까? 생각만 해도 기대되는구나! 그래, 이렇게 된 거 다른 앨범도 보겠니?”

 

표정은 잘 관리했지만 들뜬 마음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던 걸까. 루크는 기꺼이 조언가가 되어 주겠다 자처하고 나섰다. 어디 그뿐인가. 이번에는 자연물을 찍어 둔 앨범을 꺼내 아이렌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적극적인 상대의 태도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금방 손안에 들어온 앨범에 푹 빠진 아이렌은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며 사진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새, 익히 알고 있는 산짐승, 아침 해, 밤바다, 노을과 밤하늘까지.

루크가 담아낸 세계를 만끽하던 아이렌은 숲을 찍은 사진을 손끝으로 살짝 더듬어 보았다.

 

“새삼스러운데, 역시 사진은 피사체를 향한 애정이 있어야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거 같아요.”

“음.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기술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지.”

“그렇죠?”

 

이번에는 나무 위에서 쉬는 다람쥐 사진으로 시선을 옮긴 아이렌은 직사각형 안에 담긴 세계를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잘 찍은 사진을 원하는 거라면 차라리 사진을 찍는 것보단 정교한 CG 같은 걸 쓰는 게 나을 때가 있죠. 하지만 직접 애정을 가지고 찍은 사진은, 촬영자의 시선이 보여서 좋은 거 같아요. 피사체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고 할까요.”

“동의한단다. 그렇기에 기자나 전문가들이 잔뜩 사진을 찍어준다 해도, 직접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나오는 거겠지. 제가 사랑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방법의 하나니까.”

“심지어 저작권도 본인에게 있으니 말이죠.”

 

팔락. 아이렌이 양면이 사진으로 꽉 찬 묵직한 페이지를 넘기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덧붙인다.

어느새 앨범의 반 정도를 살펴본 그는 시선은 여전히 사진에 고정한 채 루크에게 질문했다.

 

“빌 선배 사진 말이예요, 혹시 당사자 외에 다른 사람에게 준 적도 있나요?”

“아니. 없단다. 빌이 여러모로 원하지 않을 거 같아서 돈을 주고 사겠다는 말도 거절했단다.”

“음. 역시 선배는 생각이 깊으시네요.”

 

다른 유명인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빌이라면 정식으로 허가받지도 않았고 사적인 모습인 담긴 제 사진이 거래되는 걸 원치 않을 거 같다. 초상권만의 문제도 있지만, 대체 어떤 사진이 어떤 용도로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건 누구든 찝찝하지 않은가. 설령 그게 외적인 이미지를 팔아먹는 연예인이라도, 사람인 이상 사적인 모습은 지켜줘야 하는 게 인간의 도리지.

그리고 제가 아는 루크 헌트라는 남자는, 그런 걸 저버릴 남자가 아니다.

아이렌은 그걸 또 한 번 느끼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팬이랍시고 직접 찍은 것도 아닌 사진으로 자기 과시하려는 인간들도 있으니까, 조금 걱정했어요. 얼마를 주고 사 간다고 해도 그 사진들은 선배의 애정이지 다른 이의 애정의 증명이 될 수 없는 거잖아요?”

“이런, 그런 걱정을 했니?”

“예. 솔직히, 그런 일 가끔 있잖아요?”

 

남의 사진을 무단으로 사용해 상품을 만들어 장사하거나, 제 팬심을 증명하기 위해 배우에게 남의 저작물을 직접 보내거나, 온라인의 안팎으로 무단전재하고 전시하는 일이 대체 얼마나 있었던가.

굳이 기억을 뒤적이지 않아도 마구 떠오르는 나쁜 사례들에 아이렌의 표정이 절로 어두워졌다.

 

“차라리 좀 엉성해도 자기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아름다운 팬심이지만, 아무리 그럴싸한 결과물을 모아놓아도 남의 결과물을 제 성과처럼 자랑하는 것들은 지긋지긋하죠. 그런 인간들 때문에, 좋은 작가들이 다 음지로 숨는 거라고요.”

 

기나긴 취미생활 중 못 볼 꼴을 너무 봐온 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선배는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다행이네요, 음지에 있어도 잡으러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으니까.”

“하하, 그러니?”

 

저 또한 그런 잡음은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루크는 그 말에 작은 웃음으로 동의한 후, 은근슬쩍 아이렌의 어깨에 기대었다.

 

“하지만 난 도망가진 않는단다. 내가 숨는다면, 그건 피사체를 더 가까이 찍기 위해서겠지.”

“그렇겠죠. 전 선배의 그런 강한 점이 좋아요.”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당신도 강하다는 의미겠지.

루크는 광물처럼 단단하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온전히 직시하다가, 제 생각과 마음을 잘 정제하여 간결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린 정말 비슷하구나, 몽 르나르.”

 

그러니 이리도 이끌리는 것이겠지.

뒤에 덧붙이고 싶었던 그 말은, 혀 뒤로 숨겨버렸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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